린청에게 뭐라도 귀띔을 해주는 편이 좋았으려나.
이 몸에 양심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여전히 남아있었던지 마음이 심란했다. 충동적으로 문손잡이를 쥐고 밖으로 뛰어나가려 했다. 그러다 납덩이처럼 무거운 무기력증이 뒤통수를 잡아당겨 힘없이 돌아섰다.
괜찮을 것이다. 별 일이야 있겠는가. 어린아이를 공격하는 수호령따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런 건 악령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사악한 건 이곳에선 발을 붙이지 못한다. 거기다 린청에게 뭐라고 경고를 하면 좋단 말이냐. 어젯밤 꿈자리에서 네가 다치는 꿈을 꿔서 걱정스러우니 몸조심하라고? 설득력 꽝이다. 
흠칫 놀라 깨닫고 보니 엄지손톱을 맹렬하게 씹어대고 있었다.

수중에 읽을 책이 없었기에 버들고리짝을 뒤져 정리하다 만 옛날 물품 구매서와 기안서 같은 서류들을 꺼내다가 글자를 읽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스러웠지만 마음이 심란할 적엔 닥치는 대로 글자를 읽으면 약간씩 진정이 되곤 했다.
침상에 등을 대고 편안하게 누운 채 냄새나는 것들의 낱장을 넘겼다.
15년 전 늦가을, 낙엽을 청소할 빗자루를 다량으로 주문했다. 일주일 뒤 대청소 계획에 따라 먼지를 털었는데 리장면이라는 이름의 쉰 두 살 하수가 3층 높이의 사다리에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덕분에 골반 뼈에 금이 가는 중상을 입어 이 자에게 최대 넉 달의 생계비를 지급해야 한다는 첨부 문서가 붙었다. 금이 간 거나 부러진 거나 사실상 마찬가지일테니 거동을 전혀 못할텐데 넉 달의 급여는 많이 부족한 금액 아닐까 걱정하며 뒷장을 넘겼다. 하지만 이후의 이야기는 알 수가 없고 엉뚱하게 밀가루와 식용유, 각종 채소의 구입 목록이 나왔다. 서류들을 이곳저곳 옮기면서 서로 섞인 모양으로 식품 구입에 대한 기안은 앞서 읽은 보고서보다 날짜가 2년 뒤였다.
『에잇, 재미없어!』
한심한 소리였다. 아마유 다섯 근, 근대 여섯 자루, 홰설초 열 일곱 뿌리, 이런게 재미가 있을 리가 없잖는가.
눈을 감고는 읽던 서류를 머리맡으로 치웠다.
공짜로 얻은 등잔기름을 아끼도록 하자. 아직 일렀지만 서둘러 잠자리에 들기로 결심하고 누워 있던 자세에서 몸을 반쯤 일으켜 곁상에 올려든 등불을 끄려...
『어이쿠.』
제발 이러지 말자! 일곱 줄 현금을 품에 안고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자와 시선이 정면에서 마주쳤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나리.》
중력의 법칙따윈 무시하고 박쥐처럼 매달린 채 그가 넙죽 무릎 절을 올렸다.
『허어억! 이게 누구야. 누... 누박기?! 자네, 성불했다고 들었는데?!』
《번민이 많다보니 아직... 부끄럽사옵니다. 그나저나 기쁘네요, 제가 누구인지 기억해주신 겁니까?》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나는 필사적으로 도리질했다. 나는 저런 자를 모른다. 내 눈엔 유령이 안 보인다. 폐병에 걸려 죽은 탓에 비쩍 여위어 안색 창백한 저 사내가 누구인지 안즈는 알지 못한다.
서둘러 돌아눕고 풀썩거리며 이불을 머리 꼭대기까지 뒤집어썼다. 하나, 둘, 셋, 넷. 나는 잠에 빠졌다. 쿨쿨, 냠냠.

《잠시 일어나 보시지요. 궁전 악사 누박기, 급히 나리께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시간이 얼마 없사옵니다. 제가 여기까지 몰래 들어온 걸 들키면 산 채로 다리가 뜯겨요.》
저 자는 자신이 이미 죽었다는 걸 잊었나 보다. 산 채로 다리가 뜯기다니. 나는 이불 안에서 몸을 둥글게 말았다.
『싫어.』
《진짜 중요한 이야깁니다, 나리.》
『여기엔 나리라고 부를 만한 자가 없소이다. 누굴 찾는 거요, 누굴!』
《시오재 나리가 아니옵니까. 그렇다고 들었는데요.》
『착각하시었소. 내 이름은 안즈라고 하고, 시오재라는 자는 이미 오래 전에 명부에 들었다고 알고 있소. 꺼지쇼.』
웅크리고 누워 퉁명스레 대꾸했음에도 누박기는 완강했다.
《에이, 자꾸 왜 아니라고 그러세요. 그만 우기고 일단 일어나 보시라니까요. 진짜로 시간이 없어요.》
『누가 우긴다는 거냐. 찐빵과 만두는 결코 같지 않다고!』
《짠빵이나 만두나 그 피는 밀가루로 만들어지잖아요. 도대체 뭐가 다르담.》
『이놈이! 맛이 다르잖아, 맛이! 사람이 하는 말이 말 같지 않게 들리더냐!』
화를 내며 벌떡 일어나 앉자 코앞으로 시퍼렇게 색이 죽은 망자의 얼굴이 다가왔다. 그것도 거꾸로 뒤집힌 채다. 이런 거 안 좋다, 염통이 쫄깃거리다 못해 오그라들려 했다. 냉기에 굳은 것처럼 뺨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한참만에야 마른침을 겨우 삼킨 뒤, 조금 거리를 두고 떨어지라는 의미로 손부채질을 해보였다.
다행히 누박기는 말을 잘 들었다. 만족스러울 정도는 아니었어도 코 닿을 거리로 붙어있지 않으니 살 것 같았다.
《어쨌거나 소인의 인사 받으소서. 무사 전생을 축하드리옵니다.》
『그딴 축하를 내가 왜 받아! 안 받아!』
《여하간 오랜만에 뵙습니다. 마지막으로 뵈었던 날부터 서른 해가 족히 흐른 것 같은데 돌이켜보면 시오재 님께 음월애사를 연주해드린 날이 어제처럼 느껴지는군요. 감개가 무량하여... 흑. 이렇게 어린 몸으로 다시 돌아오실 줄이야. 금강벽 곡조가 틀렸다며 책으로 머리를 얻어맞은 적도 있었죠. 고백하자면 그때 사적인 원한을 품고 저주했었습니다. 그런데... 저어, 그때 돌아가신 건 제 저주 탓은 아니겠죠?》
『유령인 주제에 말이 많군. 것보다 너.., 시간 없다 말하지 않았느냐?』
어안이 벙벙하여 가만 쳐다만 보고 있자 누박기는 또 자신의 퍼런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나는 질색했다.
《그렇지! 시간이 없지. 그러니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사옵니다. 진짜로 이사실을 멸망시킬 작정이옵니까.》

높은 산이 반나절만에 무너져 평평한 들판이 되었다는 식의 황당한 얘기였다. 순간적으로 사래가 들려 기침이 터져나왔다.
『차라리 옛날처럼 잠 못자게 실컷 연주나 해라. 뜬금없이 귀신 낯짝을 들이밀면서 뭔 소리야, 그게.』
《실은 오래전부터 저희들 사이로 그런 얘기가 은밀하게 돌았습니다. 나리는 원래 죽지 않는 몸이다. 육신은 죽어도 계속하여 강생하신다. 언젠가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신다. 돌아오셔서 제국 이사실을 멸망으로 이끌 것이다...》
『에엑?!』
나는 이불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흥분한 나머지 목소리도 절로 커졌다.
『누가 그런 말을 퍼뜨리고 다니든. 구안와사에 걸려 입 돌아간 놈이 도대체 누구냐고!』
제대로 죽지 못한 나머지 전생하고 있다는 건 비밀이다. 그 사실을 누군가 알아차렸다는 건가. 도대체 누가?!
아니, 그 이전에.
나는 정색하고 목을 똑바로 세웠다.
『내가 미쳤냐! 내게 무슨 이득이 있다고 뭐 하러 제국을 멸망시켜!』
《소인이 지금 그걸 묻고 있지 않사옵니까. 진짜로 그러실 건가요?》
『어허허... 이보게, 누박기. 그대는 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으로 보이는가? 제국을 멸망시킬 정도로?!』
《음... 그건. 솔직히... 저어.》
누박기는 난처해하며 말 꼬리를 흐렸다. 그리고는 썩어가는 우유처럼 탁해진 눈알을 빙글 돌렸다.
거 봐. 나는 무릎을 소리 나게 때렸다.
『난 그렇게 능력 좋은 녀석이 아니야. 그건 완전 헛소리일세.』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자면 시오재 님 탓에 벽은국이 멸망한 건 사실이잖아요.》
『미친! 내 취미가 나라 말아먹기라도 된다는 거니?! 벽은국이 왜 나 때문에 망해!』
《벽은국에서 이사실 제국으로 망명한 문장학사가 그리 한탄하던데요. 전부 시오재 님 탓이라고...》
『그려, 다 내 잘못이라고 해라. 반찬으로 올라온 두부조림의 맛이 이상한 것도 전부 내 탓이지.』
격분하며 베개를 집어던지려 하자 유령인 주제에 누박기는 눈에 띄게 안도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아니라는 거죠? 그죠? 날조된 헛소문이라는 거죠? 아, 다행이다. 이제야 마음이 놓... 이런.》
도중에 말을 끊더니 허겁지겁 자신의 악기부터 챙겼다. 무엇인가를 두려워하며 북동 방향을 응시하는데 그가 느끼는 초조감이 시큼한 냄새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안 되겠다. 생각보다 훨씬 빨리 갔다 돌아오는군. 그럼 나리, 소인이 오늘 이곳에 왔었던 건 비밀이옵니다. 조만간 허락해주신다면 나리가 좋아하는 음월애사를 또 들려드리겠사옵... 이크!》
얼마나 급한지 누박기는 말도 채 마치지 못하고 하얀 연기 비슷한 형체로 변하여 부리나케 도망쳤다.
그렇게 유령의 머리가 천장으로 쑥 빠져나감과 거의 비슷하게 하여 쿵, 하고 큰 울림이 있었다.
아무래도 린청을 몰래 따라갔던 그것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듯하다.

『헐... 이게 뭐야.』
눕지도 못하고, 일어서지도 못한 채 눈만 꿈뻑거렸다.
결국 밤새도록 뜬눈이었다.
혹시라도 눈을 감으면 천장을 뚫고 이상한 것이 내려와 잠에 빠진 나를 공격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해하며 이불을 입안에 가만 물고 있었다. 이번에는 막대기를 들어 천장을 쿵쿵 찧을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했다.

Posted by 미야

2015/07/04 22:52 2015/07/04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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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5/07/05 01:06 # M/D Reply Perma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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