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일상생활82

※ 미드 Person Of Interest 팬픽입니다. ※

『아마도 괜찮을 거라 생각합니다.』
어딘지 자신 없어하는 목소리로 핀치가 말했다. 그러면서 시선은 리스를 아슬아슬하게 비켜 메모판으로 향했는데 그곳에 붙은 인물 사진을 재차 확인하려는 의미라기보다는 어디로 눈을 두면 좋을지 몰라 그렇게 하는 것 같았다. 더하여 땀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을 허벅지에 대고 문질렀다.


당신, 지금 거짓말 하는 거 딱 걸렸어.

리스의 눈매가 바늘처럼 가늘어지는 것과 동시에 핀치는 다시 한 번 더 뻥을 쳤다.
『제가 가장 잘 하는 일은 분명 아닙니다. 허나 미행하는 일도 점차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저에게 원래부터 천부적인 스파이 재능이 있었던 거 아닌가 싶어요. 그러니까...』
『괜찮을 거다?』
이 대사는「우리 일곱 살짜리 아들이 알파벳을 A부터 Z까지 쓸 줄 알아요, 에헴!」으로 들렸다. 알파벳 정도로 아들이 천재인 것 같다 자랑하면 곤란 - 중국어로 시앙지아오(바나나) 핑구어(사과) 챠뭬이(딸기) 이러고 카나리아처럼 노래를 부른다면 약간은 납득하겠지만 - 놀이터의 주부들은 전부 인상을 찌푸릴 것이다. 고작 A, B, C, D 가지고 으쓱거리지 말란 말이다 - 마찬가지로 리스 또한 이마에 주름살을 더했다. 천부적인 스파이 재능? 반나절도 되지 않아 거꾸로 미행을 당하고도 남을 남자가 어디서 그런 헛된 소리를. 반격당해 한바탕 멍석말이를 당하지 않음 다행이다.
두 사람이 거의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표정이 동시에 어두워졌다.

고개를 뒤편으로 돌려 유리판에 붙은 번호의 사진을 응시했다.
슬슬 아가씨 호칭을 떼고 나이를 야금야금 먹고 있는 여성이 오늘의 번호다. 올해 나이 서른일곱. 변호사인 남자친구가 있었지만 끝내 결혼은 하지 않았다. 남들에게 코를 으쓱이며 자랑해도 되는 고등교육을 받았고, 전문직에 종사를 하고 있고, 가족끼리 우애가 깊고, 저축한 돈도 제법 있고, 신용도 평가도 좋다. 다시 말해 갑자기 녹색의 트롤로 돌변하여 핀치의 이마 한 가운데를 돌 몽둥이로 때릴 인상은 아니다. 그녀의 이름으로 등록된 총기류는 없으며, 전과기록이나 정신병 이력도 없다. 사실 겉으로 드러난 이력만 보자면 미국이 자랑삼을 선량한 시민으로 보였다. 공동체에 도움을 주는 그런 시민 말이다. 꿈에서라도 나쁜 짓을 저지를 사람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녀가 저지른 최악의 나쁜 짓은 아마도 무단횡단일 거다.

핀치는 재차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별 문제 없을 거예요, 리스 씨.』
하지만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게 전부가 아니다.
루트를 그 예로 들어보자. 사진으로 본 그녀의 인상은「사람의 생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뜯어 먹는 악녀」와는 거리가 멀었다. 고위층 인사를 전문으로 하는 심리 상담사답게 지적으로 보였고, 가늘고 여린 팔과 다리는 보호본능을 자극했다. 그녀는 예뻤고, 눈빛은 차분했다. 근육 불딱불딱의 험상궂은 그런 인상이 결코 아니었다는 말씀, 그리하여 리스는 뺨에 바람을 집어넣으며 겉옷을 챙기고 있는 주인을 바라보았다.
『제발 부탁이니 멸치 빼앗긴 고양이 흉내는 그만두세요, 미스터 리스.』
다녀 오겠습니다 인사를 이상하게 하고 보는 핀치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약을 위해 방탄 브래지어
- 조끼가 아니다 - 를 늘 착용하고 있지만 총알의 속도라는 건 대략 시속 3,000/km가 넘는다. 속도가 너무 빠르기에 비유하자면 축구공 사이즈의 작은 운석이 지표면과 충돌하면 엄청난 깊이의 구덩이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두꺼운 철과 납을 재료로 로마식 철갑을 두른다한들 정면에서 근접 발사한 총알에 맞으면「살짝 긁혔어요」수준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운이 나쁘면 죽을 수도 있다. 각도가 나빴다던가, 맞은 총알의 숫자가 많았다던가, 아니면 범인이 쏜 총알이 철갑탄이었다던가... 악몽의 갯수는 무궁무진하다.
그나마 리스는 운이 좋았다. 다행이었던 건 한 번 튕겼다 날아온 총알이었다는 것. 그래서 갈비뼈에 살짝 금만 갔다. 일주일에서 15일 정도 시일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회복될 거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핀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허나 무식한 이 남자는 러닝셔츠 위로 녹색의 수도관 테이프를 칭칭 둘러 감고는「아무런 지장이 없으니 당장 복귀하겠습니다」우겼다.「집에서 쉬면 오히려 잘 낫지 않는 법입니다」이러며 주장을 굽히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핀치는...
100마디 말로 설득할 수 없다고 판단, 두 팔을 벌리고 리스와 기꺼이 포옹했다.

사색이 되어「잠깐만요」이러고 타임아웃을 요청한 고용인은 한참동안 호흡을 하지 못했는데 기습적인 끌어안김에 당황해서 그랬다기 보다는 불붙는 통증이 너무 심해서였다. 그까짓 테이프로 고정해봤자 부러진 갈비뼈에 직접적으로 자극을 주면 뇌에서 통증을 담당하는 부위로 형광 빛의 불꽃들이 펑펑 터지게 되어 있다. 고난도 훈련을 받은 사람답게 나 죽어요 고함을 지르지만 않았을 뿐이지 리스가 느꼈을 아픔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미칠 지경의 수준이었으리라.
「이거 정말이지... 끝내주는 애정 표현이군요.」
진땀을 흘리며 억지로 웃는 소리를 해봤자 이미 늦었다.
「인정하셔야 할 겁니다, 미스터 리스. 당신은 지금 달리기조차 할 수 없다고요.」
싫든 좋든, 그게 핀치가 현장으로 나와야 했던 까닭이다.

《실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초소형 이어폰으로 리스가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아직 제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다고요, 미스터 리스.』
실수 = 미행 실패로 인식한 핀치가 귀를 만지다말고 발끈하여 대꾸했다. 세탁소에서 볼일을 마친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였다.
여자가 가방을 고쳐 메었다. 핀치는 긴장하여 건물 벽쪽으로 더욱 몸을 붙었다.
제3자의 눈으로 보기엔 수상한 동작이었다. 스쳐 지나가던 덩치 큰 흑인이 돌연 얼굴색을 달리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설명하려는 리스의 목소리는 냉정하고 차분했다. 동시에 약간의 긴장감이 묻어 나왔다.
《그녀는 더 이상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지 않아요, 핀치. 컴퓨터 자료로는 휴가 상태로 나오지만 사실은 사직서를 제출하고 그만두었습니다. 유족과 병원간의 쌍방 합의로 일을 덮었지만 중대한 의료 과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가 저지른 개인적인 실수가 직접적인 환자의 사망 이유인지까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한 명의 의사와 세 명의 간호사가 일을 관뒀거나 직장을 옮겼습니다. 조안은 일을 그만뒀는데 병원 기록이 수정되지 않았어요.》
『뭐라고요?』
《병원 기록이 수정되지 않았다고요.》
주변 시선을 인식한 핀치는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미행 중인 여자는 담배를 사려고 한 건지 세탁소에 인접한 작은 가게로 들어갔다.
입구로 들어가기 전 조안이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이 어딘지 자연스럽지 않아 핀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더 가까이 가봐야 할 듯했다.
『그럼 현재 그녀는 무직인 건가요? 리스.』
《그렇다고 봐야죠.》
리스는 문제의 의료 과실에 대해 조사 중이라고 알려왔다.
《핀치? 그럼 조안의 집에 가볼 건가요.》
『오, 당장은 아니고요. 저는 지금 조안과 같은 가게로 들...』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가게 문을 열었다.
순간 번쩍거리며 눈부신 별똥이.

『이 남자예요! 이 남자 맞아요! 이 남자가 저기서 여자를 몰래 쳐다보고 있었다니까요. 내가 다 봤어요. 핸드폰으로 사진도 여러 장 찍더라니까요!』
『마이클, 마이클. 그렇다고 무작정 주먹부터 날리면 곤란...』
흑인 남자가 가게 주인의 지적에 다욱 흥분하여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억울하다는 거였다.
『뭣?! 누가 때렸다는 거예요?! 살짝 옷만 잡았잖아요! 왜 과장하고 그래요?!』
『누가 과장했다고 그래. 어쨌든 소동은 사절하고 싶...』
『살짝 옷만 잡았다니까요! 봐요, 이렇게 옷만 잡았다고요! 날 못 믿어요?!』
『알았다고, 알았어. 넌 변태의 옷만 잡았어. 내가 봤어. 넌 옷만 잡았어.』
못 이기는 척하며 가게 주인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요는 일이 커지는게 싫은 거였다. 멱살을 놓지 않으려 드는 흑인 젊은이를 다독거려 손을 떼게 만들고 핀치에게는 어서 달아나라 눈짓하는 걸 봐선 경찰이 출동하게 만들기가 싫은 눈치다.

조안은? 그 와중에도 핀치는 가게 내부를 살폈다.
틀렸다. 여자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뒷문은 활짝 열려 있다.
《핀치, 뭐 하고 있어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을 리스가 입이 바짝 마른 목소리를 내었다.
《도망쳐요!》
순간 그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Posted by 미야

2013/04/01 14:40 2013/04/01 14:40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1888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 Previous : 1 : ... 360 : 361 : 362 : 363 : 364 : 365 : 366 : 367 : 368 : ... 1974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1018369
Today:
75
Yesterday:
133

Calendar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