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일상생활81

※ 정말 오랜만에 작업하네요. 일단은 워밍업. 미드 Person Of Interest 팬픽입니다. ※

눈가가 벌개진 핀치가 모니터를 손바닥으로 세게 후려쳤다.
항상 예의바르고, 이성적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사내가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바퀴벌레를 때려잡는 시늉을 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리스는 분명 심각한 일이 생긴 거라며 거의 뛰다시피 하여 컴퓨터 쪽으로 향했다. 도서관 시스템으로 피어스가 장난삼아 만든 스파이웨어가 침투했다던가, 루트가 불쑥 안부 메시지를 보내왔다던가... 가정할 수 있는 일들의 가지 수는 많았다. 단순하게는 실수로 게이 포르노 사진을 클릭했다는 것부터 쿨러 부품이 고장났다는 것까지 다양했다. 어쩌면 하드 드라이브에 배드 섹터가 발생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님 민감한 기계 위로 물을 쏟은 건지도 모른다.

『무슨 일입니까, 핀치.』
모니터에 화풀이를 하던 중이던 고용주는 죄 짓는 현장을 들켰다며 어깨를 움츠렸다.
『별 거 아닙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안경을 벗고 눈두덩이를 어루만지는 동작으로 보아 제법 심각한 수준의 스트레스 요인이 발생했다는 건 미루어 짐작이 가능했다. 그래서 리스는 다시 한 번 더 반복하여 질문했다.
『무슨 일입니까, 핀치.』
입을 앙 다문 고용주는 대답 대신 여러 가지 의미를 담아 리스를 쏘아보았다.
여러 번 얻어맞아 지문으로 흐려진 모니터 화면에는 숫자가 카운트되고 있었다. 국방부의 레벨5 수준의 연구소에서 가져온 하드 드라이브로부터 띄운 화면이다. 3,000 단위가 훌쩍 넘는 시간이 1초씩 야금야금 줄어드는 중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착, 착 소리를 내며 시간이 깎여나갔다. 그리하여 마지막 0초가 되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지금으로서는 추측이 불가능 - 암호화된 코드는 상당히 복잡해서 핀치 혼자서는 힘에 부치는 눈치다. 며칠을 매달려 봐도 높은 벽만 보인다고 했으니 말 다했다.
『흡사 만리장성을 구경하고 있는 기분이에요. 그게 아니라면 복원된 공룡의 DNA를 보고 있다던가...』
의자 등받이에 체중을 걸고 길게 늘어진 핀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암호를 쉽게 깰 수 없다는게 분하기도 하거니와 앞으로의 일이 걱정스러운 것이리라.

『좋아요. 너무 심각해지지 말자고요. 지금은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설 때라고 생각되는군요.』
리스는 체중이 실린 의자를 붙잡고 책상에서 떼어냈다.
『모니터를 홧김에 때린다고 답이 나오는 건 아니니까요. 내 말이 맞죠?』
그리고는 입구 쪽을 향하여 의자를 돌려세웠다. 바퀴가 달린 의자는 하자는 대로 움직였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 한 가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도대체 무얼 하면 좋단 말인가.
일 중독자인 두 남자는 금붕어처럼 눈꺼풀을 꿈뻑거렸다.

『저는 라디오로 스포츠 중계를 듣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라디오는 좀...』
핀치는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게다가 뉴욕으로 폭풍이 상륙하려는 중이다. 일기예보는 빨간 글씨로 폭우를 강조했고 일부 지역 주민들에겐 안전한 장소로의 대피를 권고하고 있다. 이를 다시 말하자면 거의 모든 채널이 정규 방송을 중단한 채 재난 대비 속보만 내보내고 있다. 스포츠 야구 어쩌고는 사치다.
리스는 예를 들면 그렇다는 겁니다, 라고 말하고 코트를 챙겼다.

여기서 다시 문제.
스트레스를 풀려면 도대체 어디로 가면 좋단 말인가.
집, 직장, 집, 직장을 고수하던 두 남자는 서로를 쳐다보며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가볍게 맥주 한 잔 어때요.』
『전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미스터 리스.』
『그럼 당신이 좋아하는 걸 제안해 봐요. 영화라던가, 뮤지컬이라던가... 아무거나.』
탁구공이 넘어왔지만 핀치는 아무렇지도 않게 반대편으로 넘겼다.
『글쎄요. 리스 씨는 어디 가고 싶은 곳이 있습니까?』
『음... 가만 있자. 마거렛 맨스필드라는 이름의 사회복지사가 소개해준 곳이 한 군데 있지요.』
『어디에 있는 극장입니까?』
『극장이라뇨. 아닙니다.』
『에?』
『매주 화요일 모임인데요, 금주를 독려하는 자리이지요. 그런데 도박이나 마약중독과 같은 다른 문제를 가진 친구들까지 다 함께 모여 자기 얘기를 해요. 대다수는 신세 한탄이지만 가끔 감정이 격앙되어 눈물바다가 되기도 하죠. 어렸을 적에 돌아가신 어머니, 살인죄를 저질러 감옥에 간 형, 결혼에 다섯 번 실패한 누나... 다 끝나면 손수건에 코를 풀고, 준비한 샌드위치를 먹고, 뱃지도 나눠 갖지요.』
이게 무슨 냉장고에 넣어둔 콩 스프에 푸른 곰팡이 창궐하는 소리랴. 그러니까 지금 같이 중독자 모임에 나가자는 건가. 그것도 알콜 문제로?! 기가 막히다는 걸 감추지도 못하고 핀치가 콧잔등을 찌푸렸다.
『방금 그 이야기, 그거 진심입니까, 미스터 리스?』
고용인은 뻔뻔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농담입니다. 중독자 모임에 우리가 왜 나갑니까. 당신은 술도 못 마시잖아요.』
폭풍우가 심하니 커다란 우산이 필요할 거라면서 주섬주섬 준비물을 챙겼다.

결국 그들은 영화를 보기로 했다.
오래된 클래식 무비를 전문적으로 상영하는 극장은 핀치가 곧잘 찾아가는 장소다. 히치콕 영화를 밤낮으로 틀어주는 기간엔 따로 할인 티켓을 구입하기도 한다. 세 편을 연속해서 보면 다음 한 편은 무료로 보게 해준다. 그 할인권을 매점에 제시하면 팝콘을 50% 가격으로 살 수 있다. 과도한 염분 탓에 구입이 꺼려지기는 해도 영화를 보면서 야금야금 집어먹는 팝콘은「이런 것이야말로 문화」라는 생각을 하게 해준다. 그래서 핀치는 특대형의 팝콘을 늘 사곤 했다.
『팝콘이 먹고 싶어요?』
판매대에 쏠린 눈길을 알아차리고 리스가 한 봉지 살까요, 하고 물어왔다.
핀치는 군침을 삼키는 대신 도리질을 했다.
『팝콘은 불량식품이에요, 미스터 리스. 열량이 무진장 높다구요.』
일부러 거짓말을 했음에도 리스는 평범한 버터 맛으로 두 봉지나 사왔다. 그리고 짐짓 근엄한 눈빛을 하고 있는 사람을 향해 포장을 들어보였다. 핀치는 그 포장지에「거짓말은 100년 뒤에나 해라」는 문구가 인쇄되어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걱정 마요. 콜라도 같이 샀어요.』리스는 의기양양했다.

이번 주는「활극」특선으로 한쪽에선 라쇼몽을, 다른 한쪽에서는 서부의 탈주자를 상영했다. 동양이냐 서양이냐 취향대로 알아서 고르라는게 극장주의 배려인 듯하다.
칼이냐 총이냐의 선택의 기로에서 리스는 당연히 총을 골랐다.
『윈체스터 1866 모델은 최고죠.』
『그러지 말고 마차나 기차 종류로 관심을 돌려봐요.』
좌석에 나란히 앉는 일은 하지 않는다.
핀치를 앞쪽으로 앉히고 리스는 대각선 방향으로 떨어져 자리를 잡았다. 수상한 사람이 핀치에게 접근하면 재빨리 알아차릴 수 있는 각도다.
핀치는 불만을 표현했다.
『이럴 필요가 있는 건가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제 뒤통수가 따끔따끔 아프겠군요.』
『그 정도 갖고 아프긴 뭐가 아파요. 엄살이 심하군요, 핀치. 자! 당신이 앉을 자리는 저쪽입니다.』
『정말 못 말릴 고집이군요.』
혀를 내두르는 고용주를 향해 리스는 빙긋 웃어주었다.

하지만 고집이 만만하지 않은 건 핀치도 마찬가지였다. 인디언들이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 그들은 기습이라는 단어의 뜻을 과연 알고는 있는 걸까 - 영국인들이 세운 마을로 막 침략하였을 즈음 가만히 의자에서 일어나 리스 옆으로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
『매너가 나빠요, 핀치. 불이 꺼졌는데 극장 안을 막 돌아다니고.』
능청스러운 전직 CIA 요원이 잔소리를 해대자 핀치는 헛기침했다.
『일단 영화에 집중합시다, 미스터 리스.』
『그러시든지.』
그러면서 두 사람은 어둠을 틈타 손을 꼭 잡았다.

Posted by 미야

2013/03/15 18:06 2013/03/15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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