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일상생활41

그 남자는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는 외로운 사람 같았다. 근심에 잠겨 옆을 지키는 이들이 없었다.
그래도 돈은 많은게 확실했다. 의료보험도 없으면서 1인용 특실에 입원을 했으니 갑부가 맞다.
보험이 없는 사람들은 충수염에 걸려도, 썩은 이가 아파 죽을 지경이 되어도, 사고로 손등이 찢어져도 그냥 참는다. 덕분에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걸 가래로도 막지 못하게 악화가 되는 경우도 많다. 사흘 전 그녀는 12세의 어린 소년이 저승으로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원인은 패혈증이었다. 남루한 옷차림을 한 가난한 부모는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고 울기만 했다. 소리를 내어 통곡을 하면 경비원에게 잡혀 밖으로 내쫓길 거라 생각했는지 고개를 숙인 채 굵은 눈물만 쏟았다. 그 어미 된 여인은 넋이 절반은 나가 반복해서 에스파냐 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열이 나고 귀가 아프다고 했을 적에 병원에 왔어야 했는데. 하느님이 너무 사랑하셔서 내 불쌍한 아기를 천국으로 데려가 버렸어.
슬픔이 솟구쳐 물기가 차오른 눈가를 더듬더듬 손가락으로 만지자 동료 간호사가 왜 그러느냐며 물어왔다.
데이나는 렌즈 때문이라고 거짓말하고 컴퓨터 모니터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가엾다 생각해서 죽은 이가 건강한 몸으로 돌아오는 것도 아니니 업무에 집중해야 한다. 20분 뒤에는 환자들에게 지정된 경구약을 실수 없이 정확하게 배포해야 한다. 장기 입원중인 조지아 영감의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는게 짜증스럽지만 투약 후 속이 울렁거리는 불쾌감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90kg의 거구를 움직여 출력된 인쇄물을 각각의 클립에 끼웠다. 5초도 지나지 않아 목을 까딱여 인사를 건넨 수간호사가 독수리가 토끼 잡아채듯 자기 이름을 스티커로 붙여놓은 클립보드를 집어갔다. 방송에서는 졸린 목소리로 닥터 로스코를 호출하고 있었다. 채혈된 피가 담긴 유리관을 검사실로 옮기던 직원이 호출당한 의사도 아니면서 스피커 쪽을 흘끔거렸다.

『실례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해롤드 버틀렛 씨의 병실을 찾고 있는데요.』
데이나의 송충이 눈썹이 꿈틀거렸다.
넥타이 없는 수트 차림새의 사내는 어제도 찾아왔었다. 키가 크고 잘 생긴 사내는 아무래도 기억에 남았다. 그래서 괘씸하다. 그녀는 서비스 정신을 접어두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몇 호실에 환자가 입원해 있는지 이미 꿰고 있잖수.』
남자가 간호사 앞에서 실실 웃음을 쪼개고 있는 이유는 따로 있다. 가족은 없으나 부자인 버틀렛 씨가 일반 면회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누가 찾아오든 전부 내쫒아 버려라 - 의료진들은 환자의 부탁에 꿈뻑 죽는 시늉까지 해보였다. 병원 이사 중 한 명이자 변호사이기도 한 알버트는 비굴할 정도로 손바닥을 비비기까지 했다. 그리고 데이나에게 거만한 태도로 명령했다. 절대로 면회 금지. 문제의 사내가 소아암환자 병동을 천장부터 바닥까지 리모델링할 수준의 거액을 기부한 사람이었다는 건 덕분에 알게 되었다.

거구의 간호사는 골치가 아프다는 걸 숨기지도 않았다.
『죄송하지만 미스터.』
『그게 말입니다.』
면회 사절 어쩌고 설명이 나오기 전, 남자가 재빨리 반지가 끼어진 왼손 약지를 들어보였다.
데이나의 송충이 눈썹이 재차 요동쳤다. 잘못 본게 아니라면 저건 웨딩 링이다. 간호사는 놀란 눈으로 1인용 병실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목을 길게 뺀다고 환자가 보이는 것도 아니지만 - 나아가 해롤드 버틀렛의 손가락에 반지가 끼어져 있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 그녀는 눈에 띄게 동요했다. 환자의 손에 결혼반지가 있었던가? 모르겠다. 기억이 안 난다. 안경은 쓰고 있었다. 그건 확실하다.

말을 더듬지 않으려고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그분에게 가족이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숨겨야 할 이유가 있어서요.』
물론 그러시겠지. 간호사는 음, 음, 이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해도 명령은 명령.
『하지만 일부러 버틀렛 씨가 면회를 거부할 정도라면. 아무래도 이건...』
『우린 이 사실을 외부에 공표하지 않았어요. 주변에선 우리 관계를 아무도 몰라요.』
『어. 그건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
『그리고 우리 자기는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고요.』
『자기?!』
현기증이 엄습했다. 머릿속에서 땡그렁 종소리가 들려온다. 천장이 빙빙 돈다. 텔레비전 화면 속의 오바마 대통령이 연설을 한다. 동성애자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 소수자를 박해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남편인가, 아님 부인인가. 믿어지지 않는다며 남자의 약지를 쳐다보았다. 반짝이는 반지. 새 것처럼 빛났다.
남자의 목소리가 크림 도넛처럼 달콤해졌다.
『입맛도 까다롭고 고집도 강해서 여러분들을 마구 괴롭히고 있겠군요.』
『뭐, 그쯤이야 애교에 불과하고...』
『그이를 대신해서 사과할게요.』
『그럴 필요까지는.』
『해롤드는 오늘도 기분이 많이 안 좋은가요?』
『아무래도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투약 중인 진통제가 효과가 없는 눈치...』
『그렇다면 제가 진통제 역할을 해야겠네요.』
남자는 조용히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 그리고 쉿, 이러고 공모자의 눈빛을 띄웠다.

핀치는 무슨 수를 쓰든 쳐들어올지 알았다는 눈치다.
실실 웃으며 방안으로 들어오는 리스를 보고도 화를 내기는커녕 간식으로 나온 젤리 타르트를 먹어보라 권했다. 핀치의 기준으로는 형편없는 음식이었나 보다. 스푼이 찔러 박힌 채 방치되어 있었다. 리스는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간식에서는 비타민 음료수를 50배 농축시킨 톡 쏘는 향이 났다. 천연과즙이 아닌 화공약품을 연상시키는 그런 냄새였다. 두고 볼 것 없다며 리스는 젤리 타르트를 쓰레기통으로 던져 넣었다.
『것보다 조이 모건 양과 나눠 끼었던 반지를 왜 아직도 가지고 있는 거지요, 미스터 리스.』
『전당포에 싼 가격으로 팔아치우기엔 어쩐지 아까운 것 같아서요. 왜요?』
『당신이 반지나 목걸이 같은 장신구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 못 했는데요.』
『정확히 봤어요, 안 좋아합니다.』
『에?』
물리치료를 받으러 갈 채비를 하고 있던 핀치는 동작 그만 상태에서 목을 옆으로 돌렸다. 위축된 근육이 당겨져 덕분에 불붙는 통증이 엄습했다. 겨우 목만 움직였을 뿐인데 - 좌절한 남자는 두 손으로 벽을 짚고 서서 신음했다.

기꺼이 부축을 해주겠다며 리스가 가깝게 다가왔다.
핀치는 체면도 잊고 욕을 퍼부어댔다.
『망할 카프카!』
『진정해요, 해롤드. 카프카는 1924년도에 이미 죽어 당신이 아무리 욕을 해도 듣지 못해요.』
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는 남자는 반박도 못하고 끙끙거렸다.
겨드랑이에 팔을 넣어 상대의 체중을 어느 정도 가져간 리스는 슬슬 걸어보겠느냐며 제안했다.
『괜찮겠어요?』
『제기랄. 하나도 괜찮지 않아요! 속상해 미치겠다고요!』
『핀치... 그만 자책해요. 책은 얼마든지 또 살 수 있어요.』
『카프카 때문에 물을 왕창 쏟았단 말예요.』
『오호라, 몸을 던져 구하려던게 카프카가 아니었군.』
『안톤 체호프의 단편집이었어요.』
안톤 체호프가 누구인지 리스는 모른다. 다만 핀치가 속상해 한다는 것만 안다. 그리고 환자의 허리를 무진장 괴롭게 만들었다는 것도 안다. 하여 노트르담 성당 담벼락에 낙서된《숙명》이란 단어에 반응, 더할나위 없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Posted by 미야

2012/12/13 14:00 2012/12/1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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