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왕국에서 8년이라는 긴 주기를 가진 축제를 언제부터 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하진 않다. 말단 경비원 루안의 나이는 올해 스물 아홉이다. 다섯 살 시절에 사람이 꽉 들어찬 광장에서 만세를 부르며 신나게 뛰어놀던 추억이 있으니 최소 3회는 넘었다. 다섯 살 무렵, 열세 살 무렵, 스물한 살 무렵. 그리고 올해.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내가 젊었을 시절엔 이런 지랄 맞은 행사는 없었어.」라고 했다. 아버지보다 다섯 살 연하인 잡화상 주인 토마스도 이와 비슷한 얘기를 했으니 100년 전통을 가진 축제는 분명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언젠가 루안은 없던 축제를 새로 만든 계기가 있지 않았느냐 어른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무릇 축제라는 건 무언가를 기념하기 위함이니 하다못해 왕비님의 입덧도 좋은 핑계가 된다. 아니면 단순히 연못에서 독특한 무지개 빛깔의 잉어를 잡아 올렸던 것을 기념하고자 한 것일 수도 있다. 「잉어? 무지개 빛깔의?」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겁니다.」 「어쨌든 왕비님 입덧은 분명 아니야. 그분의 머리카락이 이미 오래 전에 하얗게 새셨으니까.」 그의 아버지는 머리를 긁었을 뿐, 이렇다 할 것을 떠올리지 못했다.
상관없었을 수도 있다. 그냥 그럴듯하게 풍년 기원이라던가, 왕족의 만수무강 기원이라던가, 지역 경제 활성화 같은 내용을 이유로 내세웠을 뿐, 그저 날씨 좋은 계절에 흥청망청 놀자 판을 벌리는게 진솔한 목적이었을 수도 있다. 코가 비틀어지게 마시는 주당들이 비가 와서 한 잔, 울적해서 한 잔, 여종업원 얼굴이 이상하게 예뻐 보여서 한 잔, 이러며 각각의 술잔에 쓸데없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비슷하달까. 그러니 오늘에 이르러 8년 축제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건 쓸데없다.
『왕국 제일 미인을 뽑는 대회라고 들었습니다만.』 『뭐...... 그렇죠.』 분명 미인대회이긴 하다. 그래도 루안은 즉답을 하지 못하고 시선을 슬쩍 옆으로 비킨 채 머뭇거렸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미인대회에선 아름다운 아가씨를 뽑는 법인데 비타아른 공왕국에선 이게 약간 달랐다. 그들은 미녀(女)가 아닌 미인(人)을 뽑는다. 즉, 아름다움에는 여자와 남자의 구분이 없다. 하여 우승자는 남자일 수도 있다.
오남은 정색했다. 『여성이 아닌 남자가 미인대회 우승자로 뽑힌 적도 있습니까?』 『있는 걸로 압니다.』 『출전자들이 우승자를 죽이겠다며 이를 갈았겠군.』 것보다 다른 문제가 있다. 『오남. 너네 가게에서 남성복도 취급해?』 『그게... 커프스 단추 정도는 팔긴 하는데. 음.』 『안 판다는 거구나. 그럼 이참에 남성복 영역까지의 확장을 고려하는 건 어때.』 『싫어! 죽었다 깨어나도 그건 싫어! 그랬다간 하루가 멀다하고 맨날 --- 에게 불려다니게 될 테니까.』 삐--- 로 처리된 자의 이름은 루안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일부러 남이 알아듣지 못하게끔 입술을 벌리지 않은 채 웅얼거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검은 머리카락의 청년은 오남이 우물거린 이름을 잘 알아들었던 것 같다. 『그 남자 성격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허나 매출이 껑충 뛸 걸? 돈이 궤짝으로 쌓일 걸 상상하면 기쁘지 않아?』 『매출 이전에 신경성 위염으로 죽을 거다.』 『엄살은. 고깔광대 독버섯을 삼켜도 멀쩡하게 소화 다 시키고 트림만 잘하는 주제에.』 『내가 언제! 이 몸은 섬세하고 예민해! 독버섯을 와구와구 씹어 먹는 무식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그리고 자칭 델리케이트한 남자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뺨을 리듬에 맞춰 톡톡 건드렸다.
『저어... 나리. 올해는 분위기가 어떻던가요.』 어떻긴. 초조함을 한껏 담아 묻는 질문에 루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매회 그래왔듯 이번 축제에도 내놔라 하는 미소년들이 여성들과 어깨를 겨루며 출전했다. 루안의 판단으로는 참자가 중 여성이 60%면 남성은 40% 가량 된다. 하지만 군중은 목젖 튀어나오고 수염달린 족속에 그다지 너그럽지 않은 편이라 우승후보를 추리고 추려 인원수를 10명 내외로 좁히고 나면 여성의 비율은 90%로 껑충 뛰어오르게 된다. 그 중에서 누가 최종 우승을 거머쥐느냐고? 그거야 아무도 모르는 거고.
포만감으로 노곤해지자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에이딜렌 케이틀린이라는 이름의 소녀가 유력한 우승 후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벌꿀처럼 부드러운 금발에 보석과도 같은 푸른 눈, 잘록한 개미허리, 직업은 보모. 외국어 실력도 출중한 재주꾼이라고 하더군요.』 『호오~』 『안나 레머튼도 꼽을 수 있다죠. 쭉 뻗은 미끈한 다리, 사슴처럼 커다란 눈망울, 노래실력이 뛰어남. 사머튼 지방에서 보험사 직원으로 근무 중이라고 합니다. 하여간 힐머른 중앙 광장으로 나가시면 우승 후보들에 대한 보다 많은 정보를 들을 수 있을 거에요. 아직은 한가할텐데 오전 10시 넘으면 사람으로 꽉 차요. 이따 가보시구려.』
언제 초조해했느냐며 오남이 살살 눈웃음을 쳤다. 왜냐하면 그 말인 즉, 유치장 철컹철컹은 지금부터 안녕이란 소리였으니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손을 모아가며 확인을 해본다. 『엄훠, 그러면 계속 이곳에 남아 즉석재판을 안 기다려도 되는 겁니까? 나리.』 『그럼 지금 당장 유치장 안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얌전히 돌아갈 생각이오?』 『아니오.』 『즉답이구먼. 그러면서 뭘 되물어요.』 뭐, 괜찮지 않을까. 이들은 축제를 즐기러 온 여행객들일 뿐이다. 소매치기도 아니고, 강도짓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거리 한 복판에서 검을 빼어들고 - 되짚어 보니 검집에서 칼을 빼지도 않았다. 그저 혼을 내주겠다 말로 위협한게 전부다. 이전에 장부를 조작하고 투숙객을 내쫓은 여관집 주인의 잘못이 있으니 전후사정을 들은 판사는 똥 씹은 표정을 지은 뒤, 이런 건 재판할 꺼리가 되지 않는다며 기각 조처를 할 것이다.
『재판을 안 받아도 된다고 하시니 감사한 노릇입니다만, 저어. 그래도 짐은 여기다 놓고 가면 안 될까요.』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다 놓았더니 보따리를 내놔라 한다던가. 오래된 속담을 떠올리며 경비원 루안은 뺨을 문지르며 마른세수를 했다. 『다른 방을 구할 때까지만. 네?』 『이보시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한다며 루안이 화를 내는 와중에 오남은 포기하지 않고 제안을 더했다. 『물품 보관료를 따로 낼게요.』 『어차피 시장 조사차 나온 거라 가지고 있는 짐이 많지도 않아요.』 『유류품이라고 딱지를 붙여 그냥 물품 보관소에 며칠만 넣어주시면.』 『폭탄이나 음란물 같은 거 안 들었어요. 네?』 쿵쿵 울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여관 앞에서 사기를 당했다 소리소리 지를 적에 못 본 척하고 그대로 지나칠 걸.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있는데 쐐기를 박겠다며 오남이 자기 가방을 챙겨 루안의 품에 넘겨주었다.
『귀중품이 없어져도 나는 모르오.』 『그 안엔 양말과 속옷밖에 없어요. 그럼 허락하신 것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하루 보관료는 3세겔로 치지요.』 『3세겔?! 애들 과자 값도 그보단 비싸!』 『쳇. 그럼 5세겔. 그럼 오늘의 보관료를 받으시지요, 나리.』 무르기는 없다며 그가 루안의 손바닥 위로 짙은 갈색이 도는 작은 동전 하나를 올려놓았다. 포효하는 드래곤이 양각된 진짜 작은 동전이었다.
Posted by 미야
2015/09/17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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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제멋대로냐 하면 유치장을 공짜 여관방 취급하더니 이제는 또 식당 취급을 했다. 『사람 사는게 전부 밥 먹자고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자, 자... 그러지 마시고.』 그리고는 간도 쓸개도 전부 내던지고 손바닥을 비벼가며 경비대소 내 간이주방을 빌려 달라 간청했다. 터무니없는, 말도 안 되는 요청이었다. 변호사를 불러달라면 또 모를까. 심각한 절차 위반이기에 루안은 굳은 표정으로 거절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에이, 괜찮다니까요. 그러지 마시고 여기 앉으세요. 어이, 텐. 물부터 끓여야지?』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불을 피운 화덕에 냄비를 올리고 있었다. 어째서?
『나보고 지금 물 끓이라고 했냐. 날 아주 허드레 일꾼으로 취급해라, 이 아저씨야.』 『그걸로 내 머리를 치려고? 들고 있는 프라이팬은 내려놔, 텐. 대신 칼을 들고 이거나 썰도록. 양파다.』 『감자가 먼저잖아. 분명 그렇게 배웠어.』 『채소를 다듬는 일에 순서가 어딨누. 그냥 한꺼번에 썰어도 되지. 그건 그렇고... 반죽을 해야 할텐데. 여기에 주둥이가 넓은 적당한 그릇은 있고. 죄송합니다, 나리. 밀가루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마 그 아래 칸에 있을 거요.』 『여기요? 아! 찾았다.』
밥을 해서 먹자는 제안에 왜 훌렁 넘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루안은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기엔 자신의 몸뚱이가 너무나 피곤하다고 여겼다. 동료인 이슨은 나흘 전에 체력고갈로 쓰러졌고, 그 역시 번 아웃의 신체 신호가 잡히고 있었다. 복통이 심했고 건조증으로 눈이 쏘는 것처럼 아팠다. 두통도 심했다. 서서 소변을 누면서 졸거나, 상관에게 경례를 붙인다면서 멍하니 쳐다보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제대로 잠을 청한 건 보름 전이니 무리도 아니다. 사람은 정기적으로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데 3교대 근무가 꼬이면서 낮에 퇴근했다가 - 오전에 퇴근했다가 - 새벽에 퇴근하는 등 엉망진창이다. 거기다 일은 미쳤다는 표현이 딱 맞게끔 폭주하고 있다. 사방에서 주정뱅이가 날뛰었고, 소매치기가 창궐했으며, 골목에서 코를 찌르는 악취가 난다는 식의 민원이 300% 폭증했다. 5일만 더 참으면 축제가 끝나 기다리던 천국이 다가온다며 주문을 외워보지만. 알게 뭐냐, 지금 당장 죽을 맛이다. 그러니 유치장에서 꺼내주면 칼국수를 끓여주겠다는 꼬임에 이다지도 쉽게 넘어가는 것이다.
냄새를 맡고 나서야 루안은 배가 무진장 고팠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야근을 하는 내내 공복이었다. 루안은 군침을 삼키며 밀가루 반죽을 손바닥으로 탁탁 치대고 있는 사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칼국수라는 건 뭡니까.』 『아, 칼국수요. 먹어보면 조개로 국물을 낸 에조몰라와 비슷하다 생각하실 겁니다, 나리. 사실 그보다는 좀 담백합니다. 아무래도 포도주 없이 물만 넣고 끓인 거라서요. 그래도 뒷맛이 개운하죠.』 『방금 주머니에서 꺼낸 그 가루는 또 뭐죠?』 『이쪽에 있는 텐이 개인적으로 만든 건조시킨 양념입니다. 멸치와 다시마, 오징어, 쇠고기, 고추, 홍당무 외 기타 여러 가지를 섞어 만든 거지요. 넣고 물을 끓이기만 하면 되서 빠른 시간에 조리를 가능하게 해줍니다. 대신 짭니다. 그러니 조금만 넣어야 합니... 앗, 너무 넣었다! 물, 물.』 『의외로 냄새가 진하네요. 조개 냄새도 나고.』 여행자라 그런지 생소한 것들을 가지고 있었다. 익히 알고 있던 건조 육포와는 달랐다. 루안은 원래의 모양을 고스란히 간직한 건조채소라는 걸 신기하게 여기며 손으로도 직접 만져보았다. 시험 삼아 입에 넣고 씹어봤더니 이가 부러질 지경으로 딱딱했다. 하는 수 없어 손바닥을 대어 입안에 든 내용물을 도로 뱉었는데 이걸 보고 국자로 냄비를 휘휘 젓던 사내가 숨죽여 웃었다. 『아무래도 수분이 많은 신선한 채소를 먹는게 가장 좋죠. 저희도 여행 중이 아니면 이런 건 먹지 않습니다.』 간을 보기 위함인지 한 국자 떠서 국물을 입에 담았다. 『하윽. 하응.』 좋다는 건가, 끔찍하다는 건가. 진저리치는 것도 그렇고 음식의 맛을 보는 것치곤 신음소리가 어째 요상했다. 『어디서 성희롱이야. 반죽이나 썰어, 이 새끼야.』 얼굴 위로 핏기가 오른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이 보다 못해 타박했다.
『면도 다 익었으니 슬슬 먹어볼까요.』 『아아, 깍두기가 먹고 싶다...』 『이상한 헛소리 하지 말고 너도 자리에 앉아라, 텐.』 『헛소리라니. 자고로 칼국수엔 깍두기가 진리란 말이다.』 『그런 진리, 소인은 모른다오. 자, 여기... 한 그릇 받으세요, 나리. 혀를 데울 수 있으니 조심하시고요.』 『확실히 뜨겁군요.』 『이건 후후 불면서 먹어야 제 맛입니다.』 뜨끈하니 국물이 죽여줬다. 피곤에 찌든 루안의 표정이 후루룩 소리와 같이하여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맛을 보자 입안에서 바다 향이 맴돌았다. 하여 이 순간만큼은 즉석 재판을 기다리는 피의자를 멋대로 꺼내왔다는 근심 걱정은 죄다 날아간 상태였다.
『어, 좋다... 그런데 두 분은 어느 지방에서 오셨습니까?』 한 그릇 덜어 염치없이 얻어먹으면서 루안이 지나가는 말투로 질문을 툭 던졌다. 옷차림으로 보자면 두 사람 다 언뜻 제국인처럼 보이기는 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 루안은 우물 안의 개구리여서 실제로 제국에서 온 여행자를 두 눈으로 본 적은 없다. 다만「이럴 것이다」라는 추측만이 있어 거기에 대입하여 동대륙 최강 제국 란데가스의 인상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그 인상에 부합했다. 뭐, 두꺼운 철면피와 뻔뻔함이 부합했다는 건 아니고. 그릇을 양손으로 쥐고 내용물을 호록 들이마시며 눈을 감았다. 이런 상황에선 누구나 비굴할 정도로 저자세로 나가기 쉬운데 그러지 않았다는 점이 호기로웠다고 할까.
『제국에서 오셨나요.』 『제국이라... 분명 란데가스를 거쳐서 오긴 했지요.』 의외로 사내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래봤자 신분증을 꺼내 확인하면 금방 알 수 있는데 어디서 왔다는 걸 굳이 숨기려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느새 눈빛을 날카롭게 만든 루안은 불심검문에 임하듯 오남이라 불리우는 사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오남이라는 이름도 영 이상하다. 다섯 번째 아들이라. 그렇다면 형님들의 이름은 각각 장남과 차남, 삼남에 사남이라는 건가. 부모의 작명 센스가 어쩐지 직무 유기를 연상시킨다. 게다가 아들만 다섯!
오남이 먹던 그릇을 조신하게 무릎 아래로 내려놓고 쓰게 웃었다. 『아, 그게 말입니다. 저는 장사치라서요.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거든요.』 『장사?』 『주요 품목은 고급 여성복이고 최고급 사라사 비단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게걸스럽게 칼국수를 흡입하고 있던 소년이 씹던 걸 채 삼키지도 않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드레스 말고도 새카맣게 썩은 양심도 팔고 있지.』 이런 모습을 접하니 왕자라는 첫인상은 확실히 실수다. 쭈그리고 앉아 오른손을 써서 복스럽게 먹는 모습은 이른 오후 새참을 먹는 농부의 자식 같았다.
『인석아. 그렇게 말하면 내가 천하에 둘도 없는 악덕 상인 같잖아.』 『어쭈구리? 당신, 천하에 둘도 없는 악덕 상인 맞거든?』 『아하하하, 나리. 이 녀석이 지금 뭘 잘못 먹었나 봅니다. 이 녀석이 하는 말은 듣지 마세요.』 오남은 태영의 옆구리를 찌르며 눈을 흘겼다. 『그렇게 말하면 오해를 받잖니. 쉭쉭!』 그리고 자세를 바로잡고 서둘러 자신을 해명했다. 『여성복 전문의 오남상회 상주 오남이라 합니다. 비타아른 공왕국에서 8년만에 성대한 축제가 열린다고 소문이 자자한지라 모처럼 꽃구경도 하고 시장 조사도 할 겸 와봤습니다.』
Posted by 미야
2015/09/16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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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편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환생물에 괴기물, BL 요소까지 양념으로 팍팍 뿌려댄 자급자족용 습작입니다. 미려의 색의 배경이 서대륙이라면, 이쪽의 배경은 동대륙입니다. 뒤집혀진 세계라서 이 세계에선 남극대륙이 북쪽에 위치합니다. 설정은 구멍 투성이니 간혹 내용이 어긋나도 무어라 하지 말 것. ※
『진정하시죠. 마을 안에서 검을 뽑는 건 경범죄가 아니라 중죄에 해당합니다. 그러니 검집에서 지금 당장 손을 떼었으면 합니다. 듣고 있습니까, 외지인 분?』 교대 시간까지 이제 2시간밖에 남지 않았는데 여전히 사건 사고의 연속이다. 이러면 근무지로 돌아가 업무보고서를 작성할 시간적 여유가 없게 된다. 비타아른 공왕국의 푸른색 제복을 입은 사내가 그새 소동을 인지했는지 피곤함을 감추지도 않은 채 골목에서 달려 나왔다. 쪽으로 물을 들인 제복만큼이나 안색이 퍼렇다. 그 또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것 같았다. 피부가 거칠었고 입술 부위엔 마른버짐이 피었다. 그리고 지급된 제복이 체격에 맞지 않아 헐렁했다. 왕성에서 물품 지급을 대충 했을 리는 없으니 다시 말해 최근 들어 급속히 살이 빠졌음을 의미한다.
『여어, 고생이 많으십니다.』 남의 일처럼 얘기하며 오남은 고개를 끄덕였다. 꿈나라에서 티켓을 끊어 귀환하기엔 제법 이른 시각인데다 어딘가에 있을 푹신한 침대를 꿈꾸고 있어 아무래도 판단력이 엉망이었다. 『넋 놓고 있지 말고 당신도 어서 뭔가를 입으십시오.』 제복을 입은 자가 훤히 드러난 남정네의 굵은 허벅지를 보더니 고슴도치처럼 짜증을 냈다. 『어, 그게.』 『시종이면 시종답게 굴어요. 가방보다는 당신이 모시는 도련님이 우선 아닙니까. 제대로 옷을 갖춰 입고 모시는 도련님을 진정시키도록 해요.』 그러면서 길바닥에 떨어진 검정색의 바지를 주워 오남에게로 아무렇게나 던졌다.
아무래도 김가의 태영이 검을 가졌으니 그쪽이 윗사람이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아니, 것보다는 텐의 외모 탓일지도 모른다. 좇밥에 씨발 타령이 입버릇이라는 단점이 있지만 입을 얌전히 다물고 있는 소년은 대단히 곱상한 외모의 소유자다. 게다가 동대륙에서는 흔치 않은 검정색의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는 매우 신비스럽게 보인다. 여기다 목 바로 아래까지 단추를 전부 채우는 강박증까지 더해져 그 첫인상은 상류층 교육을 받은 먼 이국의 왕자처럼 보인다. 더 자세하게 얘기하자면 불손한 자의 목을 당장 베겠다 고함을 지르며 검집으로 손을 내린 화난 왕자님처럼 보인다. 이와 비교하여 잔뜩 삐친 더벅머리인데다, 하의실종인 아저씨인 오남은 영 궁색하기 그지없다.
『텐.』 『태영이다. 남의 이름을 멋대로 뜯어 고치지 말라고.』 『발음하기 힘들어서.』 『혓바닥에 기름 발라. 그럼 나불거리기 한층 쉬워질 거다.』 『어쨌거나, 텐.』 『아아, 씨발! 정신 사납게 왜 자꾸 그래! 그것도 틀린 이름으로 부르고!』 『시내 한 복판에서 무기를 꺼내면 경범죄가 아니라 중죄래. 경비원 아저씨가 지금 널 사납게 노려보고 있다.』 벌게진 태영의 눈이 옆으로 휙 돌아갔다. 『중죄는 내가 아니라 저놈들이 저질렀지. 사흘 치 요금을 선불로 냈는데 다음날 아침에 얼굴색 싹 바꾸고 내쫓는다는게 말이 돼?! 완전히 사기꾼들이야. 저질이야! 미사일로 날려버려야 할 악의 축이야!』 『미사일?』 『넌 몰라도 돼. 넘어가.』
항의하며 목청을 돋구어봤자 이미 아무도 듣고 있지 않다. 8년마다 돌아오는 성대한 축제를 앞두고 바가지 상술은 이미 만성화가 되어버렸다. 이 정도쯤은 애교 아닐까 - 늘어져라 하품을 하며 오남은 손등으로 눈가를 비볐다. 짐을 빼앗긴 것도 아니고, 주먹으로 얻어맞지도 않았다. 약속 받은 아침 식사 풀 서비스가 공수표로 끝난 부분이 마음에 걸렸으나 아침 식사 요금은 후불이니 따지고 보면 손해를 본 것도 아니다. 그래서 입맛을 쩝쩝 다신 그는 사기꾼을 너그럽게 용서하기로 결정했다.
죄를 사한다는 의미로 허공에 손가락으로 무한의 여덟 팔 자를 그리자 태영이 발끈했다. 『네가 인산토리아의 사제라도 되냐?! 뭘 네 맘대로 용서를 하고 자시고 지랄이야.』 『그럼 어쩔건데. 문을 부수고 한바탕 난동을 피우겠다고?』 『환불은 제대로 받아야 할 거 아냐.』 따지고 묻겠다며 팔뚝을 걷어붙인다. 『대화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기꺼이 폭력으로 설득하겠어.』 그래서 오남은 경비원에게 느릿느릿 눈을 돌렸다. 그게 도움을 구하는 시선이 아니라서 경비원 루안은 그 점이 이상하다 여겼다. 『들으셨죠? 폭력으로 설득한다는데요.』 『음...』 『그러니 체포하시죠.』 『지금 뭐라고?』 『텐을 체포하시라고요. 체구가 작다고 안심하면 안 됩니다. 보기에는 저래도 제법 위험한 녀석입니다. 한다고 하면 반드시 해요. 포기라는 걸 모르고 적당히 라는 것 역시 모르는 사내입니다. 그러니 여관집 주인의 멱살이 쥐어뜯기기 전에 녀석을 체포하도록 해요. 지금 안 말리면 칼부림이 날 수도 있어요.』 졸음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사내가 주장했다. 『칼부림은 안 좋잖아요, 그렇죠? 그러니 잡아가요.』 경비원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너, 너, 너... 는 나를 그딴 식으로... 팔아 먹냐~!! 이 망할 장사꾼아!』 대신 이국의 왕자처럼 생긴 자가 망연자실하여 울부짖었다.
루안은 이제 위장병을 확신했다. 전날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속이 쓰리고 아팠다. 찌릿거리는 부위를 손으로 압박하여 누르자 신물이 올라왔다. 망할 놈의 8년 축제 같으니. 속으로 있는 말, 없는 말 저주를 퍼부으며 자청하여 체포당한 두 사람을 시린 눈으로 관찰했다. 첫 인상은 축제를 즐기러 온 부잣집 도련님과 거기에 따라붙은 얼뜨기 시종처럼 보였다. 허나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 듣고 있자니 이미지가 뒤틀렸다. 처음에 그가 시종이라 생각한 서른 초반의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게 반말을 썼다. 아직 십대인 것이 분명한 소년 역시 반말을 썼다. 도련님과 시종이 서로 반말을 주고받을 리 없으니 처음 세웠던 가설은 포기다. 하지만 둘이 친구인 것도 아니다. 단순히 동료라고 하기엔 분위기가 묘하다. 책상 위로 일지를 탁 소리 나게끔 내려놓으며 루안은 골똘히 생각했다. 제법 벌어지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동등하게 대화 - 욕설 포함 - 를 할 수 있는 관계라는 건 뭘까. 『......』 하긴, 유치장 철창 안에 들어가 있으면 모두가 평등하다. 거지와 대지주 나리도 모두 사이좋게 철컹철컹.
『이 씨발 놈아. 너 때문에 갇혔잖아.』 검은머리의 총각이 분노했다. 『진정해, 텐. 지금도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고. 혈압 오르면 위험하지 않아?』 『여기서 진정을 어떻게 할 수가 있어! 응?!』 그리고 철장을 움켜쥐고 오로지 힘으로만 좌우로 벌리려 했다. 보고서를 쓰는 척하며 실상은 유치장 속의 그들을 관찰하고 있었던 루안은 속으로 실소를 금치 못했다. 구리처럼 무른 금속도 아닌 굵은 쇠붙이를 손으로 어째보겠다고 덤비다니. 보다 못한 술주정뱅이 하나가 끼어들어 죄가 없는(?) 쇠창살은 가만히 내버려두라고 야단했다.
휘어지지 않는 철장 사이로 얼굴을 억지로 들이밀며 소년이 야단했다. 『죄도 없는데 갇혔어! 우리를 등쳐먹은 여관 주인은 살판이 났고. 이 세상의 정의 구현은 어떻게 된 거야.』 『정의 구현은 너 님이 신경을 쓸 부분이 아니야. 네 의무는 그런게 아니라고. 어쨌든 공짜로 방이 하나 생겼으니 좋군. 분위기는 딱딱해도 생각보다 청결해.』 『너는 여기 유치장이 무슨 특급 여관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나 보지? 오남.』 『비교할 대상은 아니지만 이곳도 그리 나쁘진 않아. 보라고, 침대도 있다. 게다가 사용료는 공짜!』 『그렇게 마음에 들면 100만년동안 여기서 살앗!』 『내 수명이 100만년이나 되는 것이 아니라서 그건 무리일세. 것보다 슬슬 배가 고픈데.』 『야!』 『뭐 먹을 거 없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제멋대로인 남자다.
Posted by 미야
2015/09/15 13:15
2015/09/15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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