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 : 1 : ... 84 : 85 : 86 : 87 : 88 : 89 : 90 : 91 : 92 : ... 658 : Next »

※ 짬나는 대로 끄적이는 자급자족 습작입니다. 연재주기는 불규칙합니다. ※

미인은 그 발을 소제한 물도 달다더니... 순 공갈.

충격을 받은 나머지 사고가 정지했다. 몸 역시 움직임을 멈췄다.
미나가스트의 산적떼로부터 도끼로 머리를 찍어 죽이겠다 살해 위협을 받았을 적에도 손가락 하나 떨지 않던 그였지만 토사물 공격만큼은 얘기가 달랐다. 뭐, 지금도 눈썹 하나 깜빡이지 않은 건 마찬가지긴 하다만...

미인의 입에서 쏟아졌다고는 상상하기 힘든, 악취가 진동하는 토사물을 머리위로 잔뜩 뒤집어쓴 탓일까.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등을 떠밀리기 시작했다. 쓰레기를 치우듯 광장 바깥쪽을 향해서 말이다.
완전히 귀신 장난이었다. 방금 전과는 달리 거짓말처럼 행렬 뒤편으로 너무나 쉽게 밀려났다. 어, 어, 소리를 질렀을 뿐인데 누가 안아들었다가 내려놓기라도 한 것처럼 광장에서 밀려나 한적한 골목 어귀 부근으로 안착했다.

『오남!』
태영은 오남을 발견하기가 무섭게 손을 흔들며 그에게로 뛰어 왔 - 다가, 코를 움켜쥐고 두 발자국 물러섰다.
여전히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꼬인 그가 막 입을 떼려던 찰나, 괘씸하게도 태영은 저 남자는 자기 일행이 아니라며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고양이에게 줄 쏘시지를 사러 가야지.』
『야!』
비타아른 공왕국에서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하나 생겼다.

『동티가 났구먼.』
더러워진 머리를 닦으라며 수건을 건네던 마을 노인이 쯧쯧 혀를 찼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동티가 났다고 할 수 있을까.
동티란 원래 예부터 건드려선 안 되는 걸 잘못 건드려 스스로 재앙을 사는 걸 일컫는다. 쉽게 예를 들자면 마을 어귀의 수호 목을 잘못 베고 나무꾼이 열을 내며 앓아누우면 그걸 가리켜 동티가 났다고 한다. 여신에게 바쳐진 공물을 탐을 내던 사제가 은전에 손을 대자마자 신전 대들보가 빠지면 그게 바로 동티다.
『미인대회에 출전한 가마 가까이 서있었던게 전부인데 제가 재앙을 샀단 말인가요.』
『그러니까 동티지.』
일흔 살은 족히 넘겼을 것처럼 보이던 노인이 별안간 심각한 표정으로 이 빠진 입을 안으로 오므렸다.
오목하게 홀쪽 들어간 노인의 뺨을 보자 오남은 지레 겁을 먹었다. 재앙에 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튀어나오는 건 아닐지 염려스러웠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번갯불에 튀겨지기라도 하나.
그런 속도 모르고 노인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응? 손을 마주 잡자고? 그건 아닐텐데.
무슨 의미로 내민 손인가 싶어 오남은 잠시 눈을 꿈뻑거렸다. 그러다 퍼득 깨달았다.
『심하네!! 새 수건도 아니잖아요. 헤어져 구멍도 뚫렸는데 물건 값을 달라고요?! 그냥 재수 옴 붙은 나그네에게 공짜로 친절을 베풀면 안 됩니까. 영감님... 진짜지 그렇게 각박하게 살면 안 돼요.』
『야 이놈아. 요즘 세상에 공짜가 어딨누. 늙은이 저승길 노잣돈에 보탠다고 생각하고 수건 값을 내.』
요즘 세상엔 친절에도 값을 매긴다.
입을 앙 다물고 동전을 건네주자 인상을 구기고 있던 노인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돈으로 손주에게 과자라도 사줄 생각인가 보다. 싱글벙글 웃으며 노인이 안주머니 깊숙이 돈을 찔러 감췄다.
그 망할 호주머니에 구멍이라도 뻥 뚫려라, 속으로 악다구니를 퍼부으며 눈을 흘 -
겼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럴 짬도 없었다. 그 동티라는 거, 아무래도 제대로다. 이번에는 삿대질을 하는 여자가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그를 향해 돌진해왔다. 저놈 잡아라, 쩌렁쩌렁 울리는 대사가 판에 박힌 듯 전형적이었다.

『멧돼지?』
불경하게도 오남은 일직선으로 공격해오는 빠르고 강한 날짐승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떠올렸다. 부릅뜬 눈에 눈물로 번진 화장, 땀으로 젖은 의상, 산발한 머리카락에 신경질적인 걸음걸이... 그런데 얼굴 생김새가 어디서 봤던 것처럼 익숙하다. 가만 헤아려보니 가마 위에서 그의 정수리 위로 토사물을 쏟아낸 바로 그 여자다.
이름 같은 건 모른다. 다만 어째서인지 저 여자가 판매사원으로 일한다는 사소한 것들이 떠올랐다.
지금의 모습만 봐서는 고객들에게 새로 입고된 물건을 보여주며 상냥한 목소리로 상품을 선전하는 아가씨를 상상하긴 힘들었다. 아무리 봐도 저건 일직선으로 돌격하는 멧돼지다. 게다가 맛도 약간 갔다. 뒤집힌 눈이며 하얗게 거품이 올라온 입가가 아무래도 싱싱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멧돼지에 싱싱하다는 표현을 써? 보통은 생선 아니야?』
태영의 질문은 과감히 씹었다.
아무튼 잡히기만 하면 오도독 소리를 내며 한 입에 씹어 먹겠다며 그 기세가 매우 흉흉하다.

『뭐 하나 젊은이. 안 도망쳐?』
헌 수건을 새 수건 값으로 팔아치운 노인이 손바닥을 비비며 싱글벙글 웃었다. 오남에겐 재앙이었어도 그에겐 놓치기 힘든 여흥거리다.
『제가 왜 도망을 쳐야 합니까?』
『그럼 여기서 저 여자에게 멱살을 잡힌 채 먼지 휘날리도록 얻어터지던가.』
『그러니까 어째서 제가 얻어맞는다는 겁니까.』
『참말로 답답한 사람일세. 동티라고 했잖는가. 동티가 났다고. 그러니 달려. 어서 달리게!』
정말 모르겠다. 모르는 것 투성이다. 일단은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치고 보았지만 영문을 몰라 답답했고,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하다는 기분만 들었다. 축제라고 했는데. 미인대회라고 하던데. 무슨 까닭에서인지 흥분한 멧돼지에게 쫓기며 미로형의 골목길에서 행인들을 밀치며 전속력으로 달리기라는 걸 하고 있다.
『너! 거기 안 서!』
이제 멧돼지 여자는 신고 있던 구두를 벗어 양손에 쥐었다.
『너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어떤 각오로 왔는데!』
뾰족한 여성 구두가 돌멩이처럼 날아들었다.

『화가 났을 법도 하죠. 일생일대의 기회가 한 순간에 물거품으로 날아갔으니.』
나름 증거물이랍시고 구두를 들어 구분된 봉지에 담던 경비원이 쓴 웃음을 지었다.
구두는 노리던 오남의 머리통을 박살내지는 못했다. 멀리 던지기에는 여자의 팔뚝 근육의 힘이 한참 모자랐다.  
목표물을 빗나간 흉기는 대신 엉뚱한 행인을 맞췄는데 하필이면 사탕을 먹는데 열중해있던 여섯 살짜리 어린애였다. 정확하게는 아이가 먹던 큼직한 막대사탕을 명중시켰다. 애는 통곡했지만 하늘이 도왔다.
『다친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에요.』
그래도 아이 엄마가 화가 단단히 났기에 구두의 주인은 소환당해 조사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또 당신입니까.』
경비원 루안은 시커멓게 빛깔이 죽은 눈자위를 문질렀다.
좁은 침상에 누워 쪽잠을 즐기던 중 어린아이가 공격당했다는 소식에 놀라 눈곱도 떼지 않고 허겁지겁 현장으로 달려왔더니 피해자는 막대사탕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울컥하는 기분이 드는데 목격자는 아는 얼굴이다. 게다가 식초를 쏟기라도 한 것처럼 시큼한 냄새도 풍기고 있다. 악취는 루안의 참을성을 바닥으로 만들었다.
『듣자하니 가마를 마구 흔들어 우승 후보였던 여자를 떨어뜨려 탈락시켰다면서요.』
『그 무슨 무서운 말씀을! 전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제가 말입니다.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악당을 잡아들였는데 말이죠. 그때마다 빼먹지 않고 듣는 말이 있어요.』
『정말입니다! 저는 억울합니다!』
『바로 그 말이었어요. 오늘도 변함없이 듣게 되네요. 거 참.』
치솟는 짜증을 감추지 않은 채 루안이 쏘아붙였다.

Posted by 미야

2015/10/12 15:31 2015/10/12 15:31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1999

Leave a comment

솔직히 흥이 깨졌다.
오남은「귀양」운운하는 태영에게 구경거리를 적극 권하기가 난감해졌다.
예쁜 여자도, 맛난 풍토 음식도 그다지, 소년은 주체못할 지경으로 넘쳐나는 시간을 따분해할 뿐이다.
「난감하네. 아직은 이곳을 떠날 수가 없는데. 《미스트》로부터 연락도 없는 상태고.」
오히려 태영이 관심을 보인 건 미인대회가 아닌, 지나가는 삼색 뚱땡이 암컷 고양이였다.
『여기 고양이가 있어, 오남!』
그러더니 쭈쭈 소리를 내며 낯선 고양이의 턱을 만지려 들었다.
『쏘시지를 주고 싶다.』
태영에게 번쩍 들어 올려진 길고양이가 니아옹 소리를 내며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정해진 시간이 임박하자 어느새 광장은 모여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환호성이 터지고 공중에서 준비된 꽃가루가 뿌려졌다. 코앞으로 적이 쳐들어온 것도 아닌데 종루에서 종까지 치고 있다. 덕분에 귀를 막아도 시끄럽고, 막지 않아도 귓청이 떨어질 것처럼 얼얼하다.
마침내 미인이 탄 가마가 멀리서 그 화려한 모습을 드러내자 박수소리가 한층 요란해졌다.
발 디딜 틈도 없는 가운데 군중들이 가마를 더 가까이에서 보겠다며 앞에 선 사람을 밀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접근하지 말라며 행사 진행자들이 안간힘을 썼지만 현장 통솔은 엉망이다. 개 껌을 씹겠다며 달려드는 강아지의 꼬리를 어린애가 힘겹게 잡아당기는 꼬락서니다. 덕분에 맨 앞줄의 가마가 너울을 만난 것처럼 좌우로 요동쳤다.
가마 위에 올라탄 미녀가 굴러 떨어지지 않으려고 손가락이 하얗게 되도록 손잡이를 움켜잡는게 멀리서도 보였다. 당혹감을 감춘 채 애서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지만 여자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 마당에 환호성인지 비명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소리가 사방으로 반사되어 더욱 웅장해졌다.

이런 식의 모습을 기대한 건 아니다. 내심 당황한 오남은 한 발 뒤로 빼려 했다.
『생각보다 엄청난 걸? 이래선 축제 어쩌고가 아닌데. 까딱하다간 깔려 죽겠군.』
『남의 일처럼 얘기할 때가 아니야, 오남. 우웃, 방금 발을 밟혔어!』
처음 이 두 사람은 골목 뒤쪽으로 자리를 잡고 남의 집에 불났다며 멀찍이 서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분명 그랬는데.
갑자기 누군가 등을 확 떠밀었다.
불쾌감에 뒤를 돌아보고 따지려 했다. 하지만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또다시 밀쳐졌다. 어, 어 하는 순간 어느새 100보 거리를 떠밀렸다. 휩쓸린다는 건 이런 걸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 틈새로 몸이 꼈다. 끼기만 했던가. 납작하게 눌려 숨 쉬기가 힘들어졌다. 그 상태에서 제자리에 있지 못하고 어딘가로 계속해서 흘러간다. 버티고 서서 두 다리에 힘을 꽉 줬지만 격류에 떠내려가는 낙엽처럼 신발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사람의 얼굴이 휙휙 바뀌고 주변 건물의 모습이 휙휙 변해간다. 이대로는 멀미가 날 것 같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텐! 텐! 여기서 빠, 빠져 나가야 해.』
오남은 힘을 힘껏 팔을 뻗어 태영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태영의 손이 이렇게 굵고 포동포동했던가.
얼굴이 시뻘개지도록 힘을 주어 끌어당기고 보니 가슴 풍만한 아줌마가 잔뜩 삐져서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 마당에 또 성추행이냐! 이 빌어먹을 옷 장사꾼아!』
고함소리는 뒤쪽에서 들렸다. 아니, 앞쪽이다. 아니면 그 옆이던가... 아무튼.
얼른 잡았던 손을 내려놓고 욕설이 들린 방향으로 헤엄쳤다. 하지만 태영이라 생각되는 머리통은 빠른 속도로 미끄러져 시야에서 계속 멀어져갔다. 잡힐 듯 말 듯, 이런 수준이 아니다. 거대한 힘이 그냥 확 채갔다.
『헐.』
의외로 포기는 빨랐다. 보호자가 필요한 코찔찔이 어린애가 아니니 어떻게든 자기 몸 하나는 건사할 것이다.
지금은 그를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오남은 자신에 대해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있으면 분명 시체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것도 앞뒤로 납작하게 눌린 시체. 그 전에 무리에서 빠져나갈 궁리부터 해야 한다.

체면불구하고 옆에 있는 사람의 옆구리를 세게 밀었다.
산소부족으로 안색이 파랗게 변한 다부진 몸집의 사내가 통증을 느끼고 오남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남자는 넋이 절반은 나가 왜 남의 옆구리를 찌르느냐 항의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다만 무생물이 운동 에너지에 반응하는 것처럼 - 무거운 돌을 밀면 약간은 움직인다 - 땀을 비오듯 흘리며 옆으로 한 발자국 자리를 옮겼을 뿐이다.
그것으로 오남 주변으로 여유가 생겼느냐, 결코 그렇지 않다. 남자가 옆으로 한 걸음 이동하자 자신은 두 걸음 그에게로 다가섰다. 자의는 아니다. 자꾸 뒤에서 밀어대는데 견딜 재주가 있나. 어느새 포옹하듯 밀착하여 뜨겁게 숨을 몰아쉬고 있다. 사내가 뿜는 콧김이 불쾌하게 얼굴에 닿았다. 마찬가지로 오남 또한 뜨뜻한 입김을 사내의 목덜미에 내뿜었다. 하여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며 몸을 비틀어댔다. 그럴수록 부딪치는 팔뚝과 비벼지는 허벅지의 느낌이 상상을 초월하도록 끔찍했다. 시큰거리는 땀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가마의 행진이 인파에 밀려 광장 안쪽으로 쉽게 진입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군중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하나의 거대한 파도가 되어 가마를 노리듯 돌진한다.
『제발 그만해! 이러다 죽겠어~!』
오남의 비명은 환호성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다.
결국 산소부족으로 인사불성 상태가 되어버린 그의 고개가 뒤로 확 젖혀졌다.

이런 오남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있었다.
건물 옥상으로 자리를 잡고 느긋하게 시원한 바람을 즐기며 소동의 한 가운데를 내려다본 것이 아니다.
가마 위에 선 곱슬머리의 아가씨가 밀려오는 토기를 참으며 그를 보고 있었다.
속으로 외치는 말은 사.람. 살.려. 느끼는 것은 동질감.
견디지 못하고 손바닥으로 입가를 막는다. 동시에 뺨이 볼록해졌다.
아가씨의 위급함을 눈으로 본 것도 아니면서 가마를 메고 있는 가마꾼의 얼굴 또한 홀쪽하게 변했다. 이 마당에 그녀가 구토를 하면 뜨뜻미지근한 국물이 떨어질 장소야 불을 보듯 뻔하다. 그래서 가마꾼은 꾀를 낸답시고 어깨에 들쳐 멘 무거운 가마를 슬그머니 옆으로 기울였다.

몸무게가 옆으로 쏠리자 비틀거리는 여자의 동작이 더욱 커졌다.
이제 그녀는 필사적이다. 머릿속으로 경전을 암송하며 울렁거림을 진정시켜보고자 기를 쓰지만 파도치는 손바닥들이 가마를 쿵쿵 찍어대자 빠른 속도로 한계점에 이르렀다.
《안 됩니다, 안 되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아함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멀미라도 해봐요, 당장 탈락입니다.》
확성기 소리에 반응하여 이제 여자는 자신의 손등을 피가 나도록 꼬집었다. 경전 대신 원주율을 외운다.

이것이 미인대회.
8년마다 도래한다는 비타아른의 명물 축제다.

『오남, 오남!』
절반은 정신을 잃어 고개를 뒤로 젖혔던 오남이 목소리에 반응, 가까스로 의식을 되찾고 몸을 추슬렀다.
그래봤자 의식이 가물가물한게 그다지 좋지 않았다.
『정신 똑바로 차려! 그렇게 기절한 채 있을 때가 아니라고.』
『기절하지 않았어.』
『흰 눈깔 뒤집고 있었으면서 어디서 거짓말이야. 당장 거기서 나와. 아니면 너, 분명 후회한다.』
말이 쉽지. 나도 이런 곳엔 있기 싫다고.
몸부림을 치는 와중에 태영이 숨을 들이켰다.
『아... 저 여자, 토한다.』
탄식과 같이하여 얼굴로 뜨뜻한 것이 쏟아져 내렸다.

Posted by 미야

2015/10/04 19:15 2015/10/04 19:15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1998

Leave a comment

『왜 그런 시선으로 날 보는데.』
『눼, 눼. 어련하시겠수.』
그렇게 비꼬는 까닭이 뭔데. 오남은 기분 나쁘다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세상의 모든 여인은 잠재적 고객이야, 텐. 아무렴, 내가 이상한 마음먹고 수작질이라도 할 거 같냐.』
기가 막힌 나머지 태영은 발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야, 이 좇밥아. 그게 수작질이 아니면 뭐냐. 3년 내내 기름에 닭을 튀겨 토기가 올라오도록 느끼한 아저씨가 어디서 상큼한 오이피클 흉내를 내고 앉았어!』
『내가 언제 그랬다고. 너, 안경 필요한 거 아니야?』
『아이 넷을 낳은 아줌마를 상대로 귀엽고 사랑스럽다며 하트를 마구 날린 사람은 너라고, 너!』
『하트를 날리는게 어때서. 미래의 고객을 허투루 대할 수는 없지.』
『닥쳐. 그 아줌마가 한 푼도 안 쓰고 200년간 저축해야 살 수 있는 엄청난 옷을 파는 주제에.』
『너야말로 공짜로 얻은 스콘이 맛있다며 와구와구 먹어치운 주제에.』
『빵은 맛있었어.』
『그런데 뭐가 불만이야.』
『뭐가 불만이긴. 오남, 네놈의 존재 자체가 불만이다.』
오고가는 대화 자체는 살벌했지만 표정은 평상시와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그렇게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다. 나이 차이가 제법 벌어지는 외관 차이에도 불구하고 반말로 투닥거리며 싸우는 건 그만큼 서로가 익숙해서다. 우유를 마신 뒤에 내 입 냄새를 맡아봐라, 하아~ 이러고 애들처럼 싸우는 관계다.

팔을 깍지 껴서 머리 위로 올린 태영은 느릿한 걸음걸이로 언덕을 내려갔다.
배부른 상태에서 휴식도 취하고 나니 오히려 머리가 노곤했다. 과잉 영양은 필연적으로 졸음을 불러 일으켰고, 그늘에 앉아 또 쉬고 싶어졌다. 축제? 미인대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데. 그대로 팔을 올려 기지개를 켰다. 팔을 높게 들었을 뿐인데 어째서인지 어깨에서 따악 소리가 났다.
오십견이 생길 나이는 아직 멀었는데. 시험 삼아 좌우로 팔을 빙빙 돌렸다. 그래봤자 무거운 짐을 옮기거나 상자를 나른 것도 아니니 근육을 풀어준다고 해봐야 쓸데없다.

『어이, 오남. 것보다 미인대회가 다 끝날 때까지 이곳에 머무를 생각이야?』
『얘는 갑자기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8년 축제를 즐기러 왔는데 맛도 보기 전에 마을을 떠나자고 하는 법이 어디에 있나.
앞으로 5일 남았다. 그동안 볼거리에 산해진미 먹거리가 넘쳐날 텐데 벌써부터 지루해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을 지으면 반칙 아닌가.
『예이, 예이. 즐겨야겠지요.』
『진짜지 뭐냐고, 야단맞은 강아지 귀처럼 축 늘어진 표정은.』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야. 사람이 많은 곳은 아무래도 질색이라.』
태영은 캐묻는 오남의 시선을 피해 일부러 광장 부근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이 모여 함성을 지르는 건 더 질색이고.』
게다가 애초부터 축제 어쩌고를 즐기려고 이곳에 온 것도 아니고 -
뒷말을 삼킨 태영은 이번에는 걷는 속도를 빠르게 하여 언덕을 내려갔다.

애초부터 축제를 즐기려 이곳에 온 것도 아니고.

사건의 발단은 중신관 이돌란이 나이 어린 소녀를 심하게 매질을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열다섯 살 소녀에게는 도벽이 있다고 했다. 신전에서 향초를 훔쳐 시장에 몰래 내다 팔았다니 벌을 받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그렇게 챙긴 돈으로 어려운 부모나 동생을 몰래 돕고자 한 것도 아니다. 소녀는 그저 자신의 이득을 챙겨 화장품이나 고가의 장신구를 구했다.
하지만 그것이 여자애의 옷을 찢고 채찍으로 후려치는데 합당한 이유가 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젖가슴이 드러나는 수치를 입고, 등가죽에 흉터가 남도록 매를 맞는다.
그리고 그 벌을 내리는 신관은 혀로 입술을 축이며 쾌락에 들떠 묘한 표정으로 흥분하고 있다.
그것이 성행위를 할 적에나 보이는 흥분이어서 태영은 가만히 지켜봐야 한다는 다짐을 잊고 그만 체벌을 내리던 중신관을 옆으로 세게 밀치고 말았다.

「이 사디스트 변태 영감탱이. 어린애를 벗긴 것으로도 모자라 때리면서 흥분하고 있어.」
「지금 뭐라고?!」
「이따위로 하려면 신관 당장 때려 쳐. 어디서 좇을 세우고 어린애를 때리고 지랄이야. 네가 모시는 신의 정체가 사드의 신이라도 되냐, 이 변태야. 그게 아니라면 더러운 채찍을 가지고 여기서 썩 꺼져!」

죄인을 체벌 중인 중신관을 책망한 것도 문제였지만 그의 발언 자체도 큰 문제를 야기했다.
일을 수습하고자 불려나온 무늬만 공작 발리반이테 대공은 쓰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사디스트라는 말의 뜻은 이돌란도 잘 몰랐을 거야. 저쪽에서 - 그러니까 환생대륙에서 쓰는 말이니까 말일세. 그 뜻을 알았으면 문제가 더 커졌지. 위대한 용신을 이상성욕자의 신으로 몰아세웠다고 신전 전부가 뒤집어졌을 걸. 그러니 사디스트에 대한 건 여기에 있는 사람 모두가 절대로 함구하도록 합세.」
그래봤자 은퇴한 노인네의 얼굴색은 그다지 좋아지지 않았다.
테이블을 주먹으로 콩콩 찍으며 공작은 난처하다는 식의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영감탱이라고 한 것도 문제지. 이돌란 중신관 나이가 올해 겨우 서른둘이거든. 자존심이 무척 상했을 걸세... 게다가 그의 집안 내력엔 일찍부터 머리숱이 빠지는 문제가 있으니까... 뭐랄까, 자격지심에 울컥한달까.」
「대머리라고 한 적은 없어요.」
「그래서 다행이지. 거기까지 말했음 이미 전쟁이야. 자네는 어찌된게 입이 그렇게 험한가. 응?!」

모두로부터 쏘이는 듯한 시선을 받은 태영은 짐짓 뒷통수를 문질렀다.
「알았어요. 내키진 않지만 사과하면 되잖아요.」
「당연히 사과해야지. 하지만 이돌란 중신관은 프라이드가 높은 자라서 쉽게 사과를 받아주진 않을 거야.」
「그럼 아예 하지 말죠. 어차피 그딴 변태 자식에게 사과를 할 생각따윈 요만큼도 없었는데 뭐.」
「사과해야 한다니까! 심지어 신관을 때려치우라고 했다며. 그거 위험 발언이야.」
「아, 씨이! 그럼 어쩌라고. 중신관 그 자식에게 새로 가죽 채찍이라도 선물할까요?!」
「이보게, 그렇게 소리를 지를 때가 아닐세. 자네 덕분에 황실과 신전 사이가 틀어지게 생겼는데!」

그래서 나온 결론은,
중신관의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먼 곳까지 가서 바람이나 실컷 쐬고 돌아오라는. 이른바 추방령이었다.

『할아버지 공작 각하께선 분명 바람이나 쐬고 오라고 했지만, 그 의중에 다른 뜻이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아. 이른바 귀양이라고 하는 거겠지.』
『귀양?』
『옛날에 우리나라에선 높은 관직이나 신분을 가진 자가 죄를 지으면 먼 섬이나 지방으로 보내서 제한된 곳에서만 살게 하는 형벌을 내리곤 했어. 그걸 귀양이라고 해.』
듣고 있던 오남이 한쪽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하지만 그 제스츄어는 긍정도, 부정의 의미도 아니었다.
『귀양이 그런 의미라는 걸 이해했어, 텐. 하지만 자네는 이곳으로 귀양 보내진 건 아니야. 왜냐하면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란데가스로 돌아갈 수 있...』
도중에 말을 끊었다.
『이 멍청아. 돌아갈 수 없어. 할아버지 공작 말대로 내가 제국으로 돌아가면 신전과 황제가 대립하게 되니까. 신전에서 얼씨구나 기회로다 이러며 황제의 체신을 깎아내리려 할텐데 나더러 그걸 지켜보라고?』
태영이 답답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돌아갈 수 없어. 지금은 아니야.』
『태영.』
『그렇다고 여기서 마냥 축제를 즐기고 싶은 기분인 것도 아니야. 이해하겠어?』
바지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그는 등을 구부정히 한 채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Posted by 미야

2015/09/29 21:26 2015/09/29 21:26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1997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 84 : 85 : 86 : 87 : 88 : 89 : 90 : 91 : 92 : ... 658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1023075
Today:
2
Yesterday:
83

Calendar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