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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절 연휴가 코앞인데 심란하네요. 이모가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검사 결과 폐암 말기라서 아무래도 퇴원이 어려우실 듯하다고... 원래 몸이 안 좋으셨는데 위암이나 유방암도 아니고 폐암이라 해서 다들 놀랐어요. ※


이후 자리를 옮긴 두 사람은 몫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 가게에 앉아 과일이 들어간 음료수를 주문했다.
비탈진 언덕 중간에 위치한데다 테이블에 앉아서 밖을 보면 높게 쌓은 축대밖에 보이지 않는 갑갑한 전경 탓인지 손님으로 미어터지는 다른 가게와 달리 앉을 자리가 넉넉했다.
다만 메뉴판에 적혀져 있는 가격은 예상보다 비쌌다. 짐작한 거에 두 배 가격이라 이 또한 바가지 상술이구나 의심을 품었는데 의외로 입안에 든 음료수 맛이 제법 괜찮았기에 태영은 불평하던 걸 금방 관뒀다.
사과 맛이 진하게 나면서도 달지 않았다. 감미료를 넣지 않은 100% 진짜다. 한 입 두 입 마시다보니 어느새 금방 절반 이상을 다 먹어버렸다.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는 건 그다지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니다. 에티켓을 가르치던 선생이 지금의 그를 보았다면 철부지 어린애처럼 그게 뭐냐 한바탕 잔소리를 퍼부었을 것이다. 그러나 태영은 애초부터 형식에 그다지 구애를 받지 않는 타입이었고, 지금처럼 마음에 드는 맛있는 걸 손에 쥐었을 적엔 심리적으로 조급해져서 그런지 손으로 음식을 직접 잡아 뜯거나 밖으로 흐른 내용물을 스스럼없이 핥기도 했다.
지금도 물방울을 혀로 핥았다.

『맜있어?』
『끝내줘.』
『그거 다행이군.』
그 반대편에 의자 등받이 깊숙이 몸을 파묻은 오남은 다리를 꼰 채 유료 판매되는 6장짜리 인쇄물을 펼쳤다.
이것은 파보(波報)라고 하는 것이다. 태영은 그걸 신문이라고 부른다. 허나 일간지라고 하기엔 그 성격이나 인쇄 상태가 매우 조잡하다. 화요일과 금요일, 일주일에 두 번 발행되고 있고 유익한 정보를 얻기엔 기대치가 낮은 편이다. 차라리 술집에 가서 마을 주민들의 술주정을 귀담아 듣는 편이 낫다 - 말버릇처럼 그리 말했지만 그래도 오남은 기꺼이 지갑을 열고 파보를 구입해서 읽곤 했다. 불쏘시개로밖에는 쓸모가 없다 치를 떨며 욕하는 주제에 실제로는 열렬한 구독자다.

눈을 가늘게 뜨고 태영이 질문했다.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15년 전통의 르랑르 양품점이 내부 공사를 마치고 다시 개업했다는 군. 열 다섯 명 한정으로 기념품을 제공, 최신 유행의 드레스를 입고 당신의 우아함을 뽐내세요... 라고.』
『경쟁자의 등장인가. 큰일 났네.』
호들갑스런 말투에 오남은 읽던 종이에서 흘끔 눈을 들었다. 그래봤자 태영은 음료수를 홀짝홀짝 맛보는 일에 여전히 열중해 있다. 단순히 기분 탓인가 헷갈려하며 다음 장을 넘겼다.

이래서 파보라는 거다. 공왕의 치세를 찬양하는 요란하고 지루한 글이 지면의 절반을 뒤덮었고 그 덕에 비타아른 공왕국은 하품이 나오도록 평화로웠다. 이곳의 왕은 똥도 안 싸고 방귀도 안 뀌나 보다. 자세히 읽지도 않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특별한 소식은 없고 밀의 수확량은 작년과 비슷한 수준일 거라는 예측이 나왔다. 그래도 8년만의 축제 탓에 물가가 크게 올랐다. 특히 식료품 가격이 급등했다며 시장에서 불평이 터져 나오고 있다. 그래도 아직 위험한 수준까지는 아니라는 판단이었는지 여기 재정부는 물가 통제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좋은 태도는 아니다. 공급과 수요가 틀어지면 고통 받는 건 힘없고 가난한 자들이다.
이후의 지면에선 성공적인 축제를 기원하며 여러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를 실었다. 신관부터 소젖 짜는 아낙네까지 한 목소리로 설레는 감정을 풀어놓았다. 그런데 의외로 그 목소리들에 개성이 없다. 실제로 발품을 팔아 사람의 의견을 하나하나 귀로 듣고 지면으로 옮겼다는 느낌이 아니다. 목장의 여주인 안나의 정체는 실제로는 인쇄소 활자공이다? 그럴 가능성도 없진 않다. 파보에 글을 적는 자들은 반드시 참 말만 하진 않았다.
그런데 특이하게 딱딱해진 빵을 스프로 만들어 먹는 요리법도 하나 실렸다. 뜬금없는 주제라 오남의 눈썹이 비틀렸다.
『웬 요리법?』
그래도 끝 무렵에 이르러 편집자가 정신을 차렸는지 굳어버린 빵을 활용하는 요리법은 황급히 마무리가 되고 근처 바린 가에서 도로 일부가 함몰되어 주저앉았다는 소식이 뒤를 이었다. 덕분에 지나가는 마차가 옆으로 굴러 사상 사고로 이어졌다. 변을 당한 마부가 그 자리에서 죽었고 세 명이 크게 다쳤다. 다친 사람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으나 규모가 큰 잡화점 가게의 주인과 상속자인 아들, 그리고 동행한 하인이라 했다. 도로에 구덩이가 파였을 뿐인데 가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았다.

『혹시 더 필요한 건 없으신가요, 손님.』
다 읽은 파보를 접으려는데 살이 포동포동하게 오른 곱슬머리 종업원이 다가와 오남과 가만히 눈을 맞춰왔다.
계산을 마치고 그만 자리를 비켜달라는 뜻인가 싶어 나름 긴장했다.
허나 꼭 그런 의미는 아닌가 보다. 눈치를 주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저 말을 걸고 싶었던 모양이다.
『스콘을 새로 구웠는데요... 저어. 따뜻할 적에 드시면 맛있어요.』
귀여움을 강조하는 분홍색 앞치마를 걸친 종업원은 검은색 머리카락과 검은색 눈동자를 가진 태영이 마냥 신기했던지 조심스럽게 곁눈질을 했다. 그 모습이 과자를 굽고 있는 엄마를 훔쳐보는 어린애처럼 보여 오남은 자신도 모르게 싱긋 웃었다.
『그거 맛있나요?』
『당연하죠. 제가 직접 반죽해서 오븐에 구웠답니다. 맛있어요. 저어... 그런데.』
새로 구웠다는 따끈따끈한 스콘은 확실히 핑계였다.
곱슬머리 여자는 자신의 귀밑머리를 손가락에 감고 빙빙 돌렸다.
한참을 그러더니 결심했다며 자세를 바로 잡았다.

『이곳에선 후보자들의 행렬이 보이지 않거든요. 앞의 건물이 시야를 가로막아서.』
여행자들에게 나름 친절을 베풀고 싶었던지 그녀는 뺨을 붉히며 사정을 설명했다.
『멀리서 축제를 보러 오신 거 맞죠? 그렇다면 죄송하지만 우리 가게는 축제 행렬을 구경을 하기엔 자리가 나빠요. 목을 길게 내밀어봤자 올려 쌓은 축대밖에 안 보이니까요. 제대로 구경을 하려면 역시 광장으로 나가야할텐데 인파가 많은 까닭에 미리 자리를 잡지 않으면 힘들 거예요. 모르고 계신 것 같아 알려드리는 거에요. 구경을 놓치면 속상하실테니까요.』
『그렇군요.』
오남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여자에게 감사를 표현했다. 다시 말해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손등에 당장에라도 입맞춤을 하려는 것처럼 부드럽게 손을 감싸쥐었다는 얘기다.
그 즉시 태영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여자를 대하는 오남의 목소리는 꿀이 잔뜩 발린 것처럼 미끄덩거렸다.
『친절하시기도 하지.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귀엽고 상냥하신 분.』
『어머나, 뭘 이 정도 가지고.』
부끄러워하는 여자를 대신하여 태영이 테이블 아래서 얼른 발길질을 했다.
「짜증나, 이 성추행범.」
아무튼 걷어차인 정강이가 아파 붙잡은 여자의 손을 놓아준 건 결코 아니라는 말씀.

『그런데 꼭 광장으로 나갈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제 눈앞에 이렇게 사랑스러운 분이 계신데.』
이놈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테이블 아래서 태영은 다시 목표물을 노리고 발길질했다. 그만하라는 의미로 노려보기도 했다.
그래도 아저씨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살기를 내뿜는 황제폐하와 독대하면서 태연하게 과자를 주워먹던 사내다. 이 남자를 굴복시키려면 보다 강하고 다른게 필요하다. 이를테면 항아리에 든 독충 100만 마리 같은 거.
오남이 살살 눈웃음을 쳤다.
『아니면 지금이라도 당장 모시고 광장으로 나가고 싶습니다. 어때요. 저와 같이 축제에 참가해 보는 건?』
『아유, 빈 말이라도 참 잘 하시네. 아이 넷을 낳은 나 같은 아줌마보고 예쁘다고 말해줘서 참 고마워요.』
『그런 말씀 마세요. 진심이니까.』
입에 발린 말이라도 좋았다. 포동포동한 살집의 여자는 기뻐하며 몸을 꼬았다.

Posted by 미야

2015/09/23 21:50 2015/09/23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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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판단엔 이 아가씨를 채용하는 것이 가장 괜찮은 것 같아, 오남. 암산 실력 뛰어나고 외국어 능통이래.』
『어이. 지금 우리 가게에서 일할 직원을 뽑는게 아니라고.』
핀잔에도 불구하고 태영은 혀를 장난스럽게 내밀었을 뿐이다.

「처음엔 엄마 오리를 잃어버린 새끼처럼 보였는데. 이젠 다 컸군.」
환상대륙에서 이곳으로 넘어오고 난 뒤에도 태영은 흡사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처럼 말을 잘 했다.
고대 마법의 영향을 받은 거라 짐작은 했지만 오남은 신관이 아니라서 자세한 이치라던가 방식이라던가 하는 건 알지 못했다. 다만 그거 참 편리하군, 생각만 했을 뿐이다.
그래도 한계는 있어 대륙 표준어 이외의 방언은 알아듣지 못했다. 그리고 읽기와 쓰기가 불가능했다.
소년은 바짝 약이 올라 자신에게 반쪽자리 선물을 안겨준 신룡의 무신경함을 욕했다.
「내가 까막눈이라니!」
그리고 하얀 색은 바탕이고 검은 색은 글자인 책을 사정없이 패대기쳤다.
「제기랄, 두고 봐. 선행학습과 야간자율학습을 일만 년이나 해온 나에게 불가능은 없어.」
학구심과는 약간 다른 종류라고 생각되었다. 먹고 자고 씻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머리에 띠를 맨 채 하루에 열여섯 시간 이상을 온전히 책상에 앉아 공부에 몰입하더니 아동용의 읽고 쓰기 교재부터 시작해 맹렬한 속도로 글을 깨우치기 시작했다. 읽기까지 2개월, 능숙하게 쓰는데 5개월 걸렸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빨랐음에도 그는 표기체계가 온전히 하나인 표음문자였음 딱 한 달이면 가뿐하게 해치웠을 거라며 자랑했다.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병기하여 쓰는 일본도 아니고. 귀족 말쌈이 둥귁과 다른 것도 아니면서 평민들이 쓰는 표기법과 구분하여 쓰다니. 너희들 하는 행동은 참 이상하다. 그래도 뭐, 나름 재밌었어.」
소년은 으스대며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그려보았다. 그가 살던 곳에서는 승리를 의미하는 동작이란다.
그렇게 승리를 자축하는 동안 한쪽 코에서는 과로 탓에 시뻘건 코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오남은 아래턱을 어루만지며 일반 파베 문자로 적혀진 선전물을 대충 훑었다.
피곤에 찌든 경비원이 입에 담았던 두 사람, 에이딜렌과 안나의 이름도 보였다.
그중에서 외국어 실력이 탁월한 쪽이라면... 안나이던가. 에이딜렌이던가.
기억력 향상에 도움을 준다는 견과류를 앞으로 자주 먹어야겠다 다짐하며 태영에게 말을 걸었다.
『미인의 기준이 암산 실력과 외국어 능통은 아니지.』
『어쩔 수 없다고, 오남. 여기 적혀져 있는 건 하나같이 미인을 뽑는 내용들이 아닌 걸. 체중이나 가슴 사이즈 같은 신체 크기도 안 적혀져 있고.』
그러면서 태영은 자기가 아는 단위법을 이쪽의 단위법으로 고쳐가며 윗입술을 가만 깨물었다.
『1kg이 대략 2릭스. 1cm가 3시온. 그렇다면 169cm에 49kg 여성은 500so에 몸무게 98rx겠군.』

거기까지만 했음 참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태영은 손짓으로 풍만한 가슴을 표현하며 둥글고 무거운 가슴을 위로 받쳐 올리는 시늉을 해보였다.
『내 기준엔 이 정도가 딱 좋은데.』
『남이 볼까 무섭다, 인마.』
멜론처럼 큰 가슴을 묘사하는 음란한 손을 탁 소리 나게끔 쳐내며 정색했다.
환상대륙에선 비정상적으로 큰 가슴이 미인의 기준이라도 된다는 건가. 그렇다면 몹시 기괴하다.
『큰 가슴이야 기괴한 쪽이 아니고 로망이지. 그리고 내 기준으로는 오히려 여기서 하는 짓이 더 기괴해.』
맞은 손등이 아프다며 입을 삐죽 내민 소년은 그렇게 주장하며「요리 잘함」이라 적힌 선전물 글귀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미인은 요리를 잘 합니다. 아무렴요. 특제 토마토 소스를 만들 줄 알아야 미인인 거에요.

하지만 오남의 눈에는 그보다 훨씬 기괴한 요소가 있었다.
왕이나 귀족이 없는 세계에서 자란 소년은 무엇이 이상한지 전혀 모르는 눈치다만.
『그게 무슨 소리야, 오남. 내 세계에도 왕은 있어.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의 할머니 여왕도 있고, 대신관에 필적하는 교황이라는 분도 계셔. 귀족이라 부를만한 유산 계급 또한 존재하지.』
『하지만 텐. 넌 절대계급을 피부로는 그다지 못 느꼈던 것 같아. 그러니 이런 걸 눈으로 보고도 놓치지.』
『내가 뭘 놓쳤다고.』
『보라고, 그녀들은 보모에 과일가게 점원에다 보험사 직원일세.』
『그게 어때서. 그게 그렇게 이상한 거야?』
오남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아 소년의 어깨를 토닥였다.
『환영하오, 미지의 세계를 접하는 순진한 소년이여. 빙빙 돌려가지고는 네가 이해를 잘 못하는 눈치니까 그냥 이렇게 질문할게. 란데가스 제국에서 제1의 미녀는 누구지?』
뜬금 없는 질문이었지만 대답은 바로 튀어나왔다.
『그야 바르샬롯 황녀지.』
오남은 윙크를 했다.
『정답. 잘 맞추셨습니다. 그럼 제2의 미녀는 누굴까.』
『어... 그건 좀 어려운데. 레이나 카르튼 대공녀?』
『나는 개인적으로 일라이스 후작가의 영애가 더 미인이라고 생각하는데.』
『너야 드레스와 장신구를 판답시고 커튼 뒤에서 귀족가의 영애들을 직접 만나보았겠지만 난 아니거든. 난 일라이스 후작가의 영애의 머리카락 색이나 눈동자가 무슨 색인지도 몰라.』
『그렇담 카르튼 대공녀는 직접 본 적은 있고?』
『멀리서 딱 한 번.』
『그런데도 그 빨간머리 왈가닥을 제국에서 손꼽는 미인이라 생각한 거야? 수상하군... 어쨌든 좋아. 그럼 제3의 미녀는 누굴까.』
『아~ 씨! 미인대회를 란데가스 제국에서 여는 것도 아닌데 질문이 왜 이따구야. 게다가 3등, 4등, 5등을 가려 어쩌려고. 그래봤자 우승자는 이미 정해져 있는데.』
무작정 달렸지만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남은 희극조로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래. 전부 쓸데없어. 어차피 미인대회를 열어봤자 우승자는 무조건 황녀 전하야. 그런데 왜 그런지 아나?』
『그야... 황녀님이 제국에서 가장 예쁘게 생겼으니까?』
『허허허. 이리 오시오. 환영하오, 순진한 소년이여.』
오남은 재차 여러 가지 의미를 담아 태영의 어깨를 토닥였다.

같은 남자가 어깨를 만지는 건 싫다. 혐오감을 드러내며 태영이 어깨 위에 닿은 오남의 손을 털어냈다.
『이제 알겠어. 그렇다는 건 그 사람의 지위가 곧 미인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는 건가.』
『일반적으로는.』
『뭐야, 그게.』
태영은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게 절대계급이 존재하는 이 세상의 법칙이다.
바르샬롯 황녀보다 더 아름다운 빵 굽는 파티쉐는 있을 수 없다. 일라이스 후작 영애보다 더 빼어난 미모의 가정교사는 있을 수 없다. 제국은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

『어우, 좇 같아. 그렇담 미인대회에 직업이 보모인 평민 출신의 여성이 애써 참가를 해봤자 등수에 들 가능성은 요만큼도 없다는 얘기잖아.』
『맞아.』
그 생김새가 무척이나 아름다울 수는 있지만 그래봤자 태생적으로 그들은 미인이 아닌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게 자연스러워. 네가 그걸 인정하지 못 하는 건 왕 없는 세상에서 살았기 때문이야.』
『쳇. 저쪽 세상에도 왕은 있다니까 그러네.』
불쾌감을 피력하며 소년이 있지도 않은 날벌레를 쫓는 시늉을 했다.

Posted by 미야

2015/09/21 21:53 2015/09/21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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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이 차원이동물이면 주인공은 김태영이 되겠지만 정체는 괴기물이에요... ※


몇 년 전, 차가운 바다로 떨어진 충격으로 이후 태영의 기억은 뒤죽박죽으로 섞인데다 일부가 누락되어 버렸다.
자신에게 연년생 누이가 있다는 건 기억한다. 그런데 그 얼굴을 떠올리면 눈과 코가 없었다. 달걀형인 하얀 얼굴에 입술만 이물질처럼 떠올랐는데 특이하게 윗입술에 검게 점이 있었다. 그걸 가지고 여동생이 섹시하게 보인다며 자랑하던게 기억난다. 그런데 태영이 기억하는 동생의 얼굴은 섹시함과는 거리가 먼 달걀귀신이어서 유감이었다.
나머지도 죄다 흐릿했다. 이런 상황인지라 가족의 이름이 뭐였느냐 질문하면 말문이 막혔다.
아버지가 중소기업 회사원이었다는 건 안다. 특허가 있는 정밀기계를 제작하는 회사였다.
어머니는 요리를 잘 못했다. 생일은 8월 12일, 당신이 태어난 날에 집중호우가 쏟아져 부근으로 하수가 역류하여 홍수가 났었노라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그래서 외할머니가 엄청 고생을 하셨다고... 그런데 어머니 이름 석 자가 기억 안 난다.

「그렇게 초조해하지 않아도 언젠가 전부 기억이 날 거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태영.」
「그 말을 들은지 벌써 4년이나 흘렀어.」
「평생이 흐른 건 아니잖니. 이제 겨우 4년이야.」
「...... 말 하는 꼬락서니하곤. 저주하는 놈 아니랄까봐.」

간혹 꿈을 꾸는 것처럼 단편적인 장면들이 떠오르곤 한다. 전철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풍경과 지루하다 싶은 네모난 건물들, 교복을 입은 학생들, 편의점에서 먹던 컵라면의 맛... 그리고 동시에 가루가 되어 산산히 부서졌다. 알고 있는 것들이면서 동시에 생소하다. 전부 착각인 것 같고, 찰흙으로 빚어진 가짜처럼 느껴지고, 과거에 그러한 풍경을 정말로 보았는지 확신하기가 어려웠다.
알고 있는 것과 기억하는 것은 다르다. 태영은 머리를 휘젓고 다니는 이러한 단편적인 기억을 몸으로 체험한 것이 아니고 흡사 책을 읽어서 습득한 지식처럼 느꼈다.
그래서 기분이 나빴다.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함.

『미인대회라는 걸 구경해본 적 있어? 텐.』
허리를 똑바로 펴고 걷던 오남이 어둡게 그늘진 태영의 안색을 깨닫고 슬그머니 그의 눈치를 보았다.
『응. 본 적 있어.』
이번에도 기억이면서 동시에 지식처럼 느껴지는 파편들을 접한 태영은 가볍게 두통을 느꼈다.
그의 고향에서는 매년 미인대회를 열었다. 이미 대중적인 인기는 식었고 다들 식상해 하는 행사였다. 그 또한 흥미가 동하지 않아 그다지 관심 있게 보지 않았는데 늘씬한 몸매의 후보들이 포즈를 취한 수영복 심사 사진만큼은 챙겨 본 기억이 있다. 아무래도 한창나이인지라 훤히 드러난 가슴 굴곡이나 골반 라인에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화려하게 빛나는 왕관을 쓴 드레스 차림새의 사진은 별로였다. 그보다는 단연코 수영복이 최고였다.

『수영복 심사?』
각지를 떠도는 장사치인 만큼 아는 지식은 많았지만 오남은 환상대륙에서 쓰이는 용어엔 익숙하지 않다.
그렇다고 태영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는 것도 아니라서 그의 궁금증은 말 그대로 궁금증으로 끝났다.
대신 태영은 눈을 가늘게 한 채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동대륙의 여성들이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낸 속옷과도 같은 의상을 입고 과연 무대 위로 오를 것인가.
글쎄다. 이곳은 수영복이라는 개념이 없는 세계다. 헤엄을 치기 위해 옷을 갈아입는 사람은 없다. 이들은 물에 들어갔다가, 허겁지겁 도로 나와서, 젖은 옷을 벗고 새 걸로 갈아입었다.
「물속에 무서운 것들이 있으니까 물놀이라는 걸 모르는 거지.」
그렇다면 물놀이를 안 해도 좋으니 손바닥 크기의 천을 건네주며 입어보라 해보면 어떨까.
십중팔구 뺨을 맞을 것이다. 더러는 이런 남부끄러운 걸 몸에 걸치도록 요구하기 전에 가족에게 결혼 허락을 구하는 것이 먼저라며 강한 어조로 항의할 것이다.
「수영복 심사는 무리군.」
실망하며 지나가는 마을 여인들의 옷차림으로 눈을 주었다.
허리를 조이고, 주름을 잔뜩 넣어 땅에 끌리도록 나풀거리는 스커트를 보자 왠지 모르게「르네상스」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생각은 났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태영은 알 수 없었다. 뇌에는 저장이 되어 있는데 회로들이 다들 엉키고 꼬여 부르는 응답에 반응을 하지 않았다.
『오남. 르네상스라는게 뭔지 알아?』
『르네상스? 아까 말했던 수영복 심사를 말하는 건가.』
두 사람은 멀뚱거리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이건 아니잖아」속으로 중얼거렸다.

『에이... 뭐야, 결론은 미인대회라는 걸 잘 모르는구먼.』
『안다니까 자꾸 그러네.』
『좋아. 그럼 텐, 자네가 아는 미인대회라는 걸 나에게 한 번 설명해보게.』
『거창하게 생각할 것 없이 몸매 죽이는 예쁜 여자를 뽑는 거지 뭐. 그보다 오남. 너, 말투 바뀌었어.』
순간적으로 태영의 머릿속으로 다시「카멜레온」이라는 단어가 스치고 지나갔다.
진짜지 성가시다. 이런 식으로 환상대륙에서 쓰던 단어라던가 이미지 같은 것들이 예고도 없이 툭툭 치고 나갈 적마다 발밑이 꺼지는 기분이 들곤 한다. 그리고 그 또한 형태가 불분명한 유령이 된 느낌이다. 이곳에 속해 있으되 속해 있지 않다. 눈이 하나 뿐인 주민들 속에서 눈 두 개를 가지고 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다. 정상이지만 정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눈 하나를 뽑아 남들처럼 외눈박이가 되어야 할까. 쓸데없이 초조해진다.

돌아와서.
오남은 카멜레온 같은 자다. 빨간 나뭇잎 사이에선 자신의 빛깔을 새빨갛게 물들이는 사내다. 파랗게 칠해진 모래밭에선 새파랗게 빛날 것이다. 말투라던가 표정, 걸음걸이 같은 것들이 주변 색채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한다.
『그야 난 뼛속까지 장사꾼이니까.』
원래 그런 거라며 오남은 그런 자신의 버릇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하지만 태영은 지금까지 자신이 보았던 장사꾼들 중 이런 식으로 휙휙 변하는 자를 본 적이 없다.
때로는 성격도 변하는 것 같다. 더하여 가끔은 외모도 달라진다 싶었다. 란데가스 제국의 황궁 안에서의 그는 자비심이라는 걸 모르는 냉혹한 귀족처럼 보였는데 그때의 그의 얼굴은 늦잠을 자고 일어나 하품하는 평소의 얼굴과는 많이 달라서 딴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그랬어?』
『그랬다니까.』
『그보다 카멜레온이라는 걸 보고 싶군. 피부의 색이 자유자재로 바뀐다고? 어떤 동물일지 궁금해.』
『실제로 보면 실망할 걸? 눈이 빙글빙글, 이상하게 생겼거든. 게다가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이 따로 놀아.』
『뭐야. 그건.』
상상해보니 웃겼던 것 같다. 오남이 큭큭 소리를 내어 웃었다.
듣고 있으면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부드러운 웃음소리여서 지나가는 행인들이 덩달아 엄마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태영 역시 마주보고 서서 웃었다.
『양쪽 눈이 짝짝이로 돈다고? 어쩐지 더 마음에 들었어. 진짜야. 기회가 닿으면 정말 보고 싶어.』
『무리야. 나도 텔레비전을 통해 본게 전부니까. 탄냐파나 코카처럼 길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종류가 아니야.』
『텔레비전?』
『그런게 있어.』

또 돌아와서.
광장에는 미인대회 우승 후보자에 대한 선전물이 어지럽게 사방에 걸려 있었다.
전신 초상화는 헉 소리 나올 정도로 고가인 관계로 기대를 할 수 없었고.
자비를 들여 얼굴 초상화를 그려온 후보자는 몇 있었다.
그 외 대부분은「꾀꼬리와도 같은 목소리의 소유자」라느니,「겨울의 눈송이를 연상시키는 무결점 하얀 피부」식의 내용을 글로 적어 선전을 꾀하고 있었다.
태영은 턱을 괴고 생각했다. 말로 하는 건 그다지 효과가 없을텐데.
그래서 후보들은 높은 가마 위에 올라타 군중들 사이로 다니며 자신을 뽐내는 것으로 인지도를 높이려 했다.
『물어보니 아직 행렬 시간이 아니라고 하는군.』
『보통 몇 시에 하는데.』
『오전 11시, 그리고 오후 3시. 하루에 두 번. 오늘은 좀 늦을 수도 있다고 했어.』
고개를 끄덕거린 태영은 벽에 덕지덕지 붙은 선전 문구에 다시 집중했다.
비단과도 같은 머리카락. 사슴과도 같은 눈동자. 치유의 힘을 가졌어요, 감기 정도는 치료할 수 있어요. 2개 국어 자유자재로 사용. 사과와도 같은 뺨. 앙증맞은 발. 다섯 자리 숫자의 암산 가능.
이래서는 미인대회가 아니라 흡사 취업 박람회 같다는 것이 그 첫인상이었다.

Posted by 미야

2015/09/18 15:22 2015/09/18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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