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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제임스는 움직이는데 방해가 될 법한 잔해를 하나 둘 걷어치웠고, 조지는 발판을 대신할 물건을 찾아 가져왔다.
형태를 봐서는 일주일 전엔 캐비닛 서랍장이라고 불렸을 거라 짐작되는 물건이었다. 움푹 파인 모양새가 한바탕 굴려진 눈치였지만 불길에 직접 닿지는 않아 사이버라이프 로고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걸 거꾸로 쓰러뜨린 조지는 서랍 손잡이가 밑으로 향하도록 한 다음 위로 올라섰다.

썩 튼튼한 발판은 아니어서 조지의 체중이 실리기가 무섭게 캐비닛 표면이 우그러졌다.
안드로이드의 무게는 성인 남성보다 무거운 편이다. 칼슘보다는 금속이 훨씬 무겁고, 지방보다 실리카의 비중이 높다. 때문에 사이버라이프의 기술자들은 할로우 공법으로 뼈대의 속을 비우거나 심지어 갈비뼈 같은 내부보호 구조를 아예 생략해버리는 등의 전략을 짰지만 같은 체격의 인간과 비교하자면 아무래도 안드로이드가 보다 더 무게가 나갔다.
최근에는 기술의 발전으로 획기적으로 무게 줄이기에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아쉽게도 신기술의 적용은 섹스 안드로이드에 우선 적용되었다. 왜냐하면 안드로이드 파트너와 침대에 누운 인간이 잠자리를 같이 하다 말고 깔리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능숙하게 균형을 잡으며 보다 안정적인 자세를 취한 뒤, 조지가 말했다.
『떨어뜨리겠습니다.』
불엔 탄 안드로이드의 몸체를 벽면에 고정한 대못은 도구 없이 빼내는 게 불가능했다.
상당히 거친 방식이라는 걸 알았지만 못의 존재는 무시한 채 손으로 잡고 힘을 줘 뜯어냈다.
팔 하나가 풀려나자 좌우균형이 깨진 몸뚱이가 아래로 빠르게 미끄러졌다.
내버려두면 머리부터 그대로 곤두박질칠 거라 생각한 제임스는 제대로 해낼 자신이 없었지만 일단 안드로이드의 늘어진 두 다리를 끌어안고 버텼다.

미친 짓이었다. 이래가지고는 머리카락 잘린 삼손이 쓰러지는 다곤 신전의 기둥을 부둥켜안은 셈이었다. 하중을 심하게 받은 신체가 불길한 우둑 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안드로이드의 잔해를 품위 있는 모습으로 바닥에 내려놓기 위해서는 제대로 힘을 쓸 줄 아는 사람이 필요했다.
조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머지 안드로이드의 팔을 벽면에서 빠르게 잡아 뜯어냈다.
순간 제임스는 자신의 비루한 몸뚱이로는 이겨낼 수 없는 무게에 압도당했다.
『후욱!』
이러다간 죽겠다는 말을 차마 꺼낼 수는 없어서 그저 끙끙 앓았다.

『눕히겠습니다.』
점프하듯 캐비닛 서랍장에서 내려온 조지가 제임스를 대신하여 안드로이드의 몸을 지탱했다.
둘은 검댕이 잔뜩 묻은 더러운 바닥을 피해 그것을 최대한 반듯하게 눕혔다.
매캐한 냄새를 풍기는 재와 먼지가 나풀나풀 날아올랐고 제임스는 소매로 입가를 가린 채 재채기를 터뜨렸다.

『혹시 알고 계십니까. 사람으로 치면 심장과 마찬가지인 티리움 펌프는 1분에 정확히 82회 뜁니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느려지거나 빨라지는 법 없이요. 메트로놈처럼 일정하게 움직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말과 같다, 하드웨어를 정기 점검하던 기술자가 농담처럼 그런 얘기를 꺼냈다.
『말의 심장도 1분에 80회 정도 뛴다고 하더군요. 그래서인지 말의 수명도 저희처럼 25년이라고 했습니다. 중요 부품을 제때 교체하고 정기적으로 수리를 받아도 최대 25년을 넘기는 건 불가능하다고 들었습니다. 시스템 오류가 중첩되고, 기억장치가 더 이상 읽고 쓰기가 불가능해지는 때가 올 거라고 하더군요.』

회사가 고의적으로 내구성을 낮춰 품질저하를 유도한 탓도 있다. 지나치게 튼튼해서는 세대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원가절감의 이유도 있고, 보다 빠른 소비가 이루어지도록 하려면 적당히 부서지고 적당히 망가져야 했다.
『공사장이나 산업 현장에서 일하는 안드로이드들의 적정 사용연한은 10년입니다. 더 짧죠. 하지만 그 사용연한을 채우는 일도 흔치 않다고 들었습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거나, 틈새에 끼이거나, 운반차량에 깔리는 식의 각동 사고로 폐기처분에 들어갑니다. 이런 식으로 일부러 부수지 않더라도... 짧은데.』

밀려오는 피곤함에 뒷말을 삼켰다.
내부 주요 전선의 피복이 벗겨졌다는 느낌이었다.
순간 조지의 프로그램이 수정이 불가능한 일부 데이터의 오류를 경고했다.

화염의 온도가 제법 높았을 텐데 안구가 터지지 않고 멀쩡했다. 눈동자는 색이 예쁜 갈색이었는데 가을의 나무열매처럼 보였다. 다람쥐가 기뻐할 야생 밤과 도토리의 빛깔이었다.
자신의 몸에 불이 붙어 녹아내리는 걸 고스란히 지켜봤을 텐데 그 안에는 어떠한 슬픔의 기척도 없었고, 한줌의 공포도 남아있지 않았다. 영혼이 없는 존재이니 천국에 대한 갈망이나 지옥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을 터, 텅 비어 맑고 깨끗했다.
눈을 감겨주려고 했지만 눈꺼풀이 움직이지 않았다. 열로 인해 내부에서 들러붙은 듯했다.
억지로 만져봤자 더 손상될 뿐이라서 그것의 목에 걸려있던 올무를 벗겨내고 두 팔을 가지런히 모아주는 것으로 예의를 마쳤다.

그렇게 몸에 묻은 검댕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이 새벽에 그 안에서 뭣들 하고 있으쇼? 쇼핑 나왔수?』
묘하게 건들거리는 목소리가 그들을 불러 세웠다.

조지는 하던 동작을 가만히 멈췄다.
하지만 눈치코치 이런 거 잘 모르는 제임스는 손바닥에 묻은 얼룩을 바지춤에 문질러 닦으며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돌아섰다.
순간 환한 손전등 불빛이 제임스의 얼굴을 똑바로 비췄고, 갑작스런 눈부심에 신음했다.

『총 내려. 빨리 내려. 입김이 보이는 걸 봐선 사람 맞네. 미안, 미안. 하마터면 쏠 뻔했잖아.』
서너 명으로 보이는 무리가 너스레를 떨며 사과했다.
분위기를 봐서는 사복차림의 경찰들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불법 도박장이나 클럽에서 온갖 사고를 치고 다니는 쪽에 가까웠다. 배 나오고, 술 잘 마시고, 뒤춤에 권총 한 자루씩 차고 다니고, 운전을 개떡으로 하는 친숙한 이웃 말이다.
무리의 리더로 보이는 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제임스를 관찰했다.
뭐, 도긴개긴이다. 무릎이 늘어진 낡은 바지, 더러운 손, 뭔가가 들어있는 배낭... 쓱 흩어보곤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저래서는 어디서 생쥐 한 마리가 기어 나와 쓰레기통을 뒤진 꼬락서니가 아닌가. 그것도 식당가 음식물 쓰레기통을 뒤져야 먹다 뱉은 치즈 조각이라도 나오는 법이건만 이 멍청하고 어린 쥐새끼는 경험부족 탓인지 엉뚱한 쓰레기통 덮개 아래를 파고 있었다.

자기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짐작하자면 머리를 쓰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그래가지곤 걸레처럼 변한 양상추 한 장 나오지 않는다고. 돈이 될 걸 건지려면 여기보단 하트 플라자가 입질이 좋아. 서비스센터에서 동전 한 푼 찾겠다고 궁상맞게 그게 뭔 짓거리야. 차라리 자판기를 노려보지 그랬어. 초짜에겐 그게 딱 이지.』
웃긴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일행이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따라 웃어야 하나? 타인의 웃는 모습을 흉내 내던 제임스의 입가가 경련을 일으켰다.
덕분에 비웃음이 더 커졌다. 손전등을 든 자가 장난처럼 불빛을 마구 흔들어댔고, 무리 중 하나는 신나는 나이트클럽에 왔다며 춤추는 동작으로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 돌기까지 했다.

『어느 정도껏 뒤지라고 이 친구야. 고물 쓰레기를 물고 빨아도 거기선 티리움이 안 나와.』
손전등 불빛이 제임스를 지나쳐 이번에는 조지에게로 향했다.
『하여간 초짜들이라니. 어떻게든 티리움을 빨겠다고 저 지랄이지.』
혀를 끌끌 찬 남자가 퉤 하고 가래를 뱉었다.
『야, 인마! 사람이면 그쯤하고 일어나 인사 좀 해봐라. 앉아서 뭐 해. 똥 싸?』

재촉을 받은 조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뒤를 돌아볼 생각을 않는 그를 보고 뭔가 이상함을 느꼈던 거 같다.
킬킬거리던 웃음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Posted by 미야

2020/06/21 19:31 2020/06/21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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