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되, 사람은 사람이 아니로다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뒷문을 열고 나온 남자는 건장한 체격이었다. 그런데 눈의 모습이 좀 이상해서 초점이 맞지 않고 왼 눈과 오른 눈이 각자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다. 소름끼치기 이전에 상대방이 나를 보지 않고 다른 곳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어서 불편했다. 그런다고 해도 뒷문을 열고 나오게 만든다는 소정의 목적을 달성했기에 한껏 느긋해진 마음가짐으로 그에게로 접근했다. 약간의 헛소리를 주절거린 뒤, 적당히 손찌검을 당하고 내쫓기면 되는 일이었다. 나는 그에게 동전을 뜻하는 저급한 손동작을 취해보이며 헤헤 웃었다.
“나리, 연고 없는 그것을 가지고 오면 이곳에서 값을 후하게 쳐주신다 하여...” “누가 그런 말을 하더냐.” “아이코! 언짢게 여기지 말아주십시오. 나리의 표정을 보아하니 소인이 헛소문을 들었나 봅니다.” “누구에게 들었느냐.” “저는 그저 은밀히 돈벌이를 하고 싶었을 뿐으로... 보시다시피 제 사정이 좋지가 않아서요. 그런데 실수를 한 것 같네요. 나리, 화내지 마십시오. 제가 엉뚱한 착각을 했나 봅니다. 그냥 이대로 갈 터이니 못 본 척해주십시오.” 이쯤에서 뺨 싸대기가 날아들어야 했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충격에 대비했다.
그런데 망했다. 검은 갈기의 강아지가 사납게 짖으며 달려왔고, 그 겁 없고 쬐꼬만 녀석은 사내의 가랑이 사이를 쏙 지나쳐 건물 안으로 냉큼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달리면서도 계속 짖어 흡사 모양새가 도둑을 잡으러 가는 것 같았다. 나도 당황했는데 남자는 오죽했겠는가. 저 새끼 잡으라며 사내가 몸을 비틀어 돌렸다. 나는 뒷문 도로 닫지 말라고 발을 밀어 넣었다. 순간적으로 우리 두 사람의 동선이 뒤엉켜 모양새가 아주 우스워졌다. 이 마당에 남의 말 절대 안 듣는 금릉이 밥상에 밥숟가락을 얹는다며 뛰어들었다. 절대로 내가 그린 그림은 이런 게 아니었다. 골치가 다 아파왔다. 내가 주문한 음식은 카레 돈가스 매운맛 2번인데 이래서는 조리해서 나오는 음식이 우유 없이는 먹을 수 없다는 마라탕 매운맛 7번이 될 판국이었다.
여전히 초점이 잘 맞지 않은 눈으로 날 쳐다보던 남자가 부리나케 문을 움켜잡았다. 그가 원하는 건 내가 발을 끼워 넣어 닫지 못하게 된 뒷문을 닫는 거였다. 서둘러 발을 빼지 않으면 발이 뭉개질 참이었다. 나도 젖 먹던 힘을 내며 뒷문을 꽉 움켜잡았다. 보았느냐. 이것이 배추 250근을 배달하던 팔뚝의 파워다. “에이, 그러지 마시고! 그냥 갈 테니 못 본 척 해주십시오. 저도 어디 가서 입 뻥끗 안 하겠습니다.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듣지 않았습니다. 저기요, 사장님. 맹세코 소문 안 나게... 꽤액!” 힘은 남들보다 곱절로 세도 몸무게는 체중미달이었다. 사내는 앞뒤 가리지 않고 나를 한손으로 들어 그대로 반으로 접어버리려 했다. 금릉이 번쩍 달려와 니킥을 날리지 않았다면 가뜩이나 얇은 뼈가 동강이 났을 뻔했다.
“구린내! 엎어져 있지 말고 일어나!” 편석 바닥으로 거침없이 내던져진 나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한쪽 뺨과 이마가 몹시 쓰라렸다. 내팽개쳐지면서 편석에 피부가 갈린 모양이었다. “금릉, 이 망둥어 꼴뚜기 같은 놈... 얌전히 보고만 있으랬지 누가...” “구린내! 빨리 일어나라니까!” 금릉이 늘어진 내 몸뚱이를 짐짝처럼 끌고 건물 안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보통 이 경우엔 건물 밖으로 나가야 하는 거 아니었나. 가까운 곳에서 강아지가 사납게 짖고 있었다. 금릉은 그 소리를 따라 거침없이 안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무릎으로 명치를 맞은 사내가 거기 서라고 고함을 질러댔고, 이제 식탁으로 올라온 음식은 위장이 녹는다는 불짬뽕 매운맛 10번이 되었다.
가까스로 눈을 뜨고 보니 그 어디에도 불빛이라 할 게 없어 진짜로 폐가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텅 비어있는 건 아니었다. 마당 한 가운데로 거대한 닭장처럼 철책이 빙 둘러져 있었고 그 속으로 헐벗은 남자들이 저마다 술 취한 것처럼 몸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죄다 얼굴은 시퍼랬고, 눈은 썩은 동태 눈깔이었다. 몸을 흔들다 옆 사람과 부딪치면 그르륵 그르륵 이상한 소리를 내며 다른 방향으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뭐야 이건! 좀비가 닭장 안에 바글바글하잖아!’ 금릉과 내 인기척을 알아차린 좀비 하나가 철책에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눈동자가 절반은 썩었으니 앞을 볼 리 없는데 정확히 내 쪽을 바라보며 이를 딱 소리를 내어 물었다.
“금릉아. 여기는 폐쇄된 감찰소라며. 감찰소라는 게 원래 이런 거 모아놓는 곳이야?” “너, 바보냐?! 그럴 리가 없잖아!” 금릉이 옆으로 날 밀치며 소리쳤다. 아슬아슬한 간격으로 번쩍이는 칼날이 스치고 지나갔다. 상대방이 무기를 들었으니 금릉도 검을 빼들었다. 그런데 내가 봐도 금릉이 열세였다. 일단 주변이 너무 어둡다는 게 문제였다. 불을 켜두지 않은 것도 그렇지만 솟음 장대 위로 천을 커튼처럼 걸어 작은 별빛까지 차단했다. 금릉은 재주가 빼어난 편이었지만 어둠 속에서 적과 대치할 정도로 수련을 한 건 아니었다. 가까이 다가온 검 날의 빛을 보고서야 가까스로 막기만 했다. 남자의 실력이 수준 아래라서 다행이었다. 솜씨가 좋았더라면 어림짐작만으로 검을 막는 일도 쉽지 않았을 터였다.
“신호탄! 금릉아! 신호탄 같은 거 없어?!” “그런 촌스러운 건 하인들이나 가지고 다니는 거야!”
내가 진짜 여기서 무사히 나가면 학부모 면담 간다. 품을 뒤져 가짜 도사에게서 받았던 불쏘시개 부적을 꺼내들었다. 손바닥에 대고 짝 소리 내어 박수를 쳤다. 요령이 없어서인지 반응이 없었다. 그럼 더 세게 간다. 다시 박수를 짝 쳤다.
주황색 불꽃이 솟구치자 바로 코앞으로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데 낯빛이 감마선에 오염된 헐크 색깔이었다. 아무래도 걸어 다니는 시체가 철책 안에만 머물러 있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기겁을 하고 코앞으로 다가온 역겨운 녹조라떼를 힘껏 떠밀었다. 덕분에 불타는 부적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기껏 얻은 광원이 제 역할도 못해보고 사그라졌다. 괜찮다. 별 거 아니다. 당황하지 말자. 공짜로 얻은 부적이 아직 두 장이나 남았다.
이때 스윽, 스윽, 빗자루로 마당을 쓰는 소리가 들렸다. 이 난리통에 바지런히 청소를 하는 건 아닐 테고. 갑자기 빛을 본 눈이 어둠을 낯설어하여 사물이 죄다 흐릿했다. 그런 나와는 반대로 상대는 매우 능숙하게 섬돌을 밟고 내려왔다. 그가 걸을 적마다 뱀이 기어가는 것처럼 스윽, 스윽, 이러고 독특하게 끄는 소리가 났다. 아마도 옷자락이 매우 긴 옷을 입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다시 부적을 꺼내 짝 소리 내어 손뼉을 쳤다. 불꽃이 타오르자 어둠에 잠겼던 남자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을 입었는데 무장은 하지 않았고 대신 상황에 맞지 않게 손에 대나무 피리를 쥐고 있었다. 우리 둘의 눈이 마주쳤다고 느낀 순간 그가 피리를 입으로 가져갔다. 본능적으로 피리를 불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 전에 이미 숨을 불어넣은 악기에서 쨍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공기가 바뀌었다. 피리 소리는 차갑고, 기괴했으며, 얼얼했다. 좋지 않은 것들이 피리소리를 듣고 저마다 웅성거리며 동요했다. 그리고 나 또한 저 밑바닥으로부터 동요했다. 귀 안으로 집게벌레가 잔뜩 들어가 살을 물고 뜯으며 쟁알쟁알 떠드는 느낌이었다. 아프다기 보다는 소름끼쳤다. 덕분에 쥐고 있던 부적을 또 떨어뜨렸다. 시야가 다시 어둠에 잠겼고, 바로 옆에서 터벅터벅 걷는 소리가 들렸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넙죽 엎드렸다. 피리소리에 반응한 주시가 딱딱 턱을 놀리며 공격의 대상을 찾고 있었다. ‘느리다.’ 장르가 좀비물인 건 맞는데 고전 흑백영화인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었다. 이게 ‘부산행’이라던가, ‘킹덤’이였으면 어떻게 해보지도 못하고 바로 물어 뜯겼을 거다. 제일 가까이 접근한 주시의 바로 등 뒤로 바짝 붙어 요령껏 그것의 팔을 잡아당겼다. 딱딱 이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다가오던 주시가 당겨진 팔을 덥석 물었다. 예, 그럼 식사 맛있게 하십쇼. 빈틈을 노려 그대로 내뺐다.
주시들의 움직임이 영 신통치 않자 피리소리가 더 가파르게 변했다. 조급해 하는 것도 같았다. 그런다고 해도 빠르게 뛰는 법도 모르는 좀비들이 음색에 맞추어 더 빠르게 움직여줄 것 같지는 않았다. 저것들은 그냥 느려 터진 굼벵이들이었다. 상대적으로 마음을 놓고 금릉을 찾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이쪽은 주시보다 곱절에 곱절로 빠르게 뛸 수 있으니 차분하게 잘 피해 도망을... “놓아라! 놓으란 말이다!” 순간 이마를 쳤다. 전장에서 황금 투구를 쓰고 있는 화려한 외모의 장수가 칼을 휘두르고 있는데 어느 멍청이가 제대로 갑옷도 걸치지 않은 말단 군졸을 잡겠다고 설치겠느냔 말이다. 애초에 나라는 존재에는 관심이 없었고, 피리소리를 들은 주시들 전부가 팔을 뻗어 금릉을 잡겠다며 아우성이었다.
아이의 낯빛이 새파랬다. 좋아하는 아이돌을 향해 팬들이 달려들어도 식은땀이 난다던데, 달려오는 그것들 전부가 좋다고 달려드는 것들도 아니었고 사생팬도 아니었다. 금릉은 필사적으로 앞뒤로 검을 휘두르며 거리를 벌려보고자 기를 썼다. 그런데 들판에 굴러다니는 더러운 시궁창 취급이나 받는 주시의 무서운 점이 바로 칼로 베이는 정도로는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는 거였다. 피와 살이 튀어도 어차피 그것들은 시체다. 피리의 곡조가 가파르게 오르락 거렸다. 이제 금릉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렸다. 포위망이 더 좁혀졌다. 금방에라도 목덜미를 잡힐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애가 얼마나 고집쟁이면 살려달라는 말을 결코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개가 짖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건물 안에서인지, 밖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나 또한 눈앞에 있는 주시의 등짝을 잡아당기며 개처럼 짖었다. 시체가 입고 있던 낡은 옷이 당기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찢어졌다. ‘틀렸어! 이럴 게 아니라 저 망할 피리 소리를 당장 그치게 해야 해!’
황급히 몸을 돌려 검은 옷의 사내가 서있던 마당을 향해 뛰었다. 썩은 내를 풍기는 팔이 튀어나와 내 몸을 낚아채려 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부적을 꺼내어 쥐고 세차게 박수를 쳤다. 짝 소리와 함께 불이 붙었다. 동시에 눈에 초점이 맞지 않았던 사내가 튀어나와 제 주인을 지키려는 듯 검을 가로방향으로 후려쳤다. 아까도 말했지만 처리곤란의 더러운 쓰레기 취급이나 받는 주시의 무서운 점이 바로 칼로 베이는 정도로는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는 거였다. 피와 살이 튀어도 어차피 나는 시체다. 살갗이 베어나간다는 감촉을 고스란히 맛보며 팔을 뻗어 불타오르는 부적을 사내의 눈구멍으로 있는 힘껏 쑤셔 넣었다. “으아아악~!!” 부하가 끔찍한 비명을 지르자 검은 옷의 보스가 황급히 피리를 입에서 떼어냈다. 이제 그와 나 사이의 간격은 다섯 자 길이밖에 되지 않았다. 목표물은 저 피리다. 나는 손을 뻗어 피리를 붙잡으려고 -
바로 그때 먼 곳에서 쟁! 하고 현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순간 몸이 뻣뻣해졌고 거짓말처럼 기운이 죽 빠져버렸다.
Posted by 미야
2021/11/23 15:22
2021/11/23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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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되, 사람은 사람이 아니로다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동물을 싫어하진 않는다. 직접 키워본 적은 없어도 개는 귀엽고, 고양이는 예뻤다. 그런데 이렇게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남의 종아리를 잘근잘근 씹고 있는 개는 하나도 안 귀엽고 하나도 안 예뻤다. “......!!!” 나는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고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았다. 그런데 그것도 어느 정도 것이어야지.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괴성을 목구멍 안으로 삼키며 고꾸라졌다. 아직 어린 강아지라고 해도 이빨은 날카로웠다. 문제는 얘가 사람을 물고도 그저 재밌는 장난으로 여기고 있다는 거였다. 검은 갈기를 가진 강아지는 흡사 간식을 조르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살기는 요만큼도 없었다. 그런데 왜 잘근잘근 물어뜯는 거냐곳! 내 종아리는 간식용 닭가슴살이 아니얏!
다리를 질질 끌고 몇 걸음 걸었다. 강아지도 질질 끌려왔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바닥에 누웠다. 강아지도 따라 누웠다. 아니 진짜 얘가 왜 이러는 건지 알려줄 사람? 나는 입안으로 주먹을 쑤셔 넣었다. 저 수상한 저택에서 집 지키는 용도랍시고 이 어린 강아지를 풀어 키우며 ‘맹견 조심’ 안내 문구를 붙였을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비명을 지르면 필연적으로 사람이 밖으로 나오게 되어있었다. 그럼 우르르 몰려나온 사람들에게 뭐라고 할 건가. 한 푼만 줍쇼?
갑자기 개의 무는 힘이 달라졌다. 열심, 열심, 열심, 이러면서 나를 어디론가 끌고 가려 했다. 덩치는 조랭이떡 같은 게 고집은 또 대단해서 싫다고 했더니 더 꽉 물었다. “살살, 제발 살살! 따라갈 테니 제발!”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리 멀리 가진 않았다는 점이다. 높은 담장을 따라 모서리를 돌고 나자 씹고 있던 나를 퉤! 뱉고, 제 주인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향해 꼬리를 흔들며 앙앙 짖었다.
“꼬마 선자야, 조용히 해. 쟤는 똑똑한 것 같으면서도 가끔씩 이상하게 굴더라.” 높은 담벼락을 절반쯤 기어 올라간 소년이 짖지 말라며 손가락을 하나 세워 입에 가져갔다. “쉬, 쉬! 것보다 뭘 끌고 온 거야. 그건 요괴가 아니잖아. 식살귀를 찾으라니까 거지를 물고 왔네.” 날 보고 거지라고 하는 건 괜찮지만 일단 담벼락에서 내려온 뒤에 뭐라고 했음 좋겠다. 이제 나는 근심에 젖었다. 개가 짖고 있고, 개 주인으로 보이는 이는 도둑처럼 담을 넘는 중이다. 발을 딛은 부분의 회석이 떨어져 증거도 충분했다. 소란을 알아차리고 집안에서 사람이 나온다면 뭐라고 해야 할까. 개와 놀다 실수로 공이 안으로 넘어갔는데 죄송하지만 주워다 주시겠어요?
“무슨 소리야. 도둑질이라니. 여긴 사람 사는 집도 아닌데. 말투가 괘씸하군.” 소년이 발끈하더니 올라타던 담벼락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러더니 적반하장 격으로 화를 냈다. 아니, 지금 화를 낼 사람이 누구인데. 댁의 개가 날 물었다고. 손으로 종아리를 쓸어보니 작게 구멍이 뚫렸다. 살짝 검붉은 피도 베어 나왔다. 나는 손을 들어 소년에게 피를 보여주었다. 피라고 하기엔 색이 지나치게 검어 흡사 연필 검댕처럼 보이긴 했지만... 어쨌든 구멍 났다. “네 강아지가 날 물었어.” “아직 훈련이 덜 되어서 그래.” 소년은 별 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그 태도가 몹시 못마땅했다. “훈련이 덜 된 개를 데리고 도둑질을 하려 하다니. 미친 거 아냐?” “너 바보냐? 여긴 집이 아니라 기산 온씨가 오래전에 세운 감찰소잖아. 저기 걸린 간판 안 보여? 폐쇄되어 문 걸어잠군 감찰소에 뭐 훔쳐갈 물건이 있다고 도둑질을 하겠... 어라.” 달빛에 비친 내 얼굴을 알아보고 개 주인이 펄쩍 뛰었다. “이게 누구야. ‘구린내’잖아? 약양에 간다던 놈이 왜 여기에 있어?” 부잣집 귀한 도련님 금릉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삿대질했다.
시간과 장소가 매우 적절치 않았다. 강아지가 둘이서만 놀지 말라며 앙앙 짖었다. 금방이라도 뒷문을 열고 사람이 나올 것만 같아 가슴이 쫄깃거렸다. 얼굴을 쓸어내린 나는 일단 장소를 옮기자고 했다. 천만다행으로 금릉도 새벽부터 짖는 강아지가 부담스러웠는지 그러자 하고 내 뒤를 따라왔다.
“어떻게 된 거야?” 적당히 떨어진 골목길에서 우리 둘이 동시에 말했다. 좋다. 레이디 퍼스트. 나는 질끈 눈을 감고 금릉을 향해 먼저 말해보라고 했다.
“소문에 이 부근으로 식살귀가 나온다고 해서 잡으러 왔어.” 열 세 살짜리가 공덕을 쌓겠다고 아주 몸이 달았다. 선부의 가정에선 어디까지를 상식으로 여기는 건지 모르겠으나 주변에 정신이 제대로 박힌 어른이 있다면 말려야 하는 거 아닐까. 지금은 10대 아이들이 밖을 돌아다니기엔 매우 늦은 시간이었다. 애초에 10대 아이가 귀신을 잡겠다고 날뛰는 것부터가 나에겐 이해 불가능이긴 하다.
“식살귀? 그럼 산으로 올라갔어야지. 다른 수행자들은 무리를 지어 다 산으로 올라가던데?” 팔짱을 낀 자세로 내가 그 부분을 지적하자 금릉이 심통이 난 표정을 지으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얼굴만 봐도 대충 견적이 그려졌다. 의욕 하나는 드높았으나 막상 현장에 도착해보니 식살귀를 잡는 도사들끼리 경쟁이 치열해서 일찌감치 흥이 깨진 거다, 이 녀석은. “흥! 실력도 없는 어중이떠중이들만 잔뜩 몰려 있더라고.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다는 말도 있잖아? 이 귀하신 몸이 그런 놈들과 같이 뛰어야 할 이유를 못 느끼겠더라고.” 말은 저렇게 했지만 정작 산에서 내려온 이유는 어른들이 아직 어려 보이는 이 소년을 사냥에 끼워주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날 더러 방해하지 말고 저리로 가라 고함치던 머리 허연 수사를 떠올리자 의심은 곧 확신으로 바뀌었다. 고지식한 수사는 그저 자기 나이가 많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금릉을 깐봤을 거다. 때로 어떤 자들은 재산이나 실력 이전에 나이를 권력으로 따지는 법이다.
“아항, 어른들에게 밀려났구나.” “아니거든?! 산에 있어봤자 얻을 소득이 없을 거라는 걸 알아서 내려온 거야!” 주인이 목소리를 높이자 검은 갈기의 강아지가 덩달아 장단을 맞춰가며 옆에서 깡깡 울었다. 주인더러 힘을 내라는 건지, 아니면 약을 올리려는 건지, 개의 표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내 시선이 개에 꽂힌 걸 알아차린 금릉이 코를 으쓱였다. 비싼 개인가 보다. “결정적으로 개가 산속에서 짖지 않았어. 이 개는 작은아버지가 주셨는데 아직 새끼지만 매우 영험한 영견이야. 아무나 키울 수 없는 매우 귀한 개지. 얘는 귀신을 보고 요괴를 물어. 꼬마 선자가 짖지 않았으니 산 위에는 아무 것도 없는 거야. 그래서 다른 선사들은 허탕 치라 하고 나 혼자서 내려왔어.” “영견? 날 향해선 짖던데? 물기도 했고.” “아직 새끼라서 그래. 어리니까 실수도 하고 그러는 거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금릉이 무릇 사내라면 사소한 건 가볍게 넘겨야 하는 법이라며 타박했다. 결국 이놈은 개가 날 물었다는 점에 대해 사과할 마음이 일도 없는 거구먼. 캬아...
“그러는 너는. 내 하인이 되기 싫다며 약양으로 간다고 했잖아. 어떻게 된 거야?” 네 하인이 되기 싫다는 말을 한 기억은 없다만. 애가 엄한 현실 왜곡을 하며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도 잘 씻지 않아 구린내가 난다며 코를 쥐었다. 살짝 억울했다. 씻는 걸 열심히 하지 않은 건 맞는데 얼마 전 묘지를 파는 바람에 더러운 걸 묻혀 와서 악취가 좀 나는 것뿐이다. 그 전까지는 사흘에 한 번 꼴로 개울가에서 세수도 하고 찬물로 사타구니와 겨드랑이도 잘 닦았다.
“사람 일이라는 게 항상 잘 풀리는 법은 아니지.” “그럼 지금까지 구걸을 하고 다녔어?” “구걸은 무슨... 세상 구경을 하고 다니는 거지. 그러다 친절한 분들에게 밥도 얻어먹고.” “그게 구걸이지! 그런데 구린내 너도 참 요령이 없다. 밥을 얻어먹으려면 부뚜막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집을 골랐어야지. 보다보다 문 닫은 감찰소 앞을 기웃거리며 밥 얻어먹을 궁리를 하는 놈은 처음 봐.” 감찰소가 뭐 하는 장소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사람 없는 폐가라는 금릉의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두 눈으로 똑바로 보았거든. 뒷문이 열리고 시체를 몰래 운반하던 사람이 들어갔다 사례비를 받고 도로 나왔다.
“뒷문이 열렸었다고? 구린내 네가 잘못 봤겠지.” 감찰소는 일종의 파출소 역할을 하던 장소였던 것 같다. 예전에는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을 잡아와서 벌을 주던 곳이라고 했다. 그러다 수사들이 점차 타락해 나쁜 짓을 하지 않은 사람들도 잡아와 제멋대로 처벌했기에 지금은 감찰소에 머물던 기산 온씨들을 모두 ‘죽.이.고.’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도록 술법을 써서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고 한다. ‘하여간 이 세계는 뭐든지 극단적이야. 감찰소에서 일하던 사람을 파면하는 게 아니라 전부 죽였다고?’ 내가 아는 상식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경지다. 거기다 몰살한 수사들을 제대로 장례를 치룬 것도 아니고 감찰소 내 너른 부지에 합장하여 개개인의 구별 없이 묻었다는 거다. 그게 벌써 십년도 더 지난 옛날 이야기란다.
“그래서 안에 뭐가 있을지 살펴본답시고 문 닫힌 건물의 담을 올라갔어?” “소문만 무성한 산속보단 이쪽이 훨씬 더 그럴듯하잖아. 악령이 나와도 하나도 안 이상하지.” 언젠가 금릉의 부모님들을 한 번 만나 면담을 해봐야 할 것 같다. 아무래도 아이를 잘못 키웠다. 공덕을 쌓겠다는 욕심도 이해를 하고, 본인 실력에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진 것도 다 이해하겠다. 10대니까.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게 담을 넘는 건 진짜 아니거든. 아무리 오냐오냐 자란 도련님이라서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르고 보는 스타일이라고 해도 무단침입은 좀 그렇잖아. 얘는 진짜 어른이 확실히 잡아주지 않음 커서도 사고뭉치가 되고도 남겠어. 무엇보다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담을 넘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했을 수도 있다는 걸 얘는 모르나?
“지금 내가 잘못했다는 거야?!” “당연히 잘못했지. 금릉, 넌 조심성을 키울 필요가 있어.” “뭐?! 조심성을 키워?!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어?!” “그래, 너 잘났다. 그래도 조심성 없다는 말은 사실이야. 일단 내 말을 하나도 안 믿는 눈치니까 저 건물 안에 진짜로 사람이 있다는 걸 보여주지. 단, 가까이 있지 말고 멀리서 숨어서 보고 있어. 개가 소리 내지 않도록 잘 지키고. 그럼 잘 봐.”
그렇게 말하고 조심해가며 뒷문으로 다시 접근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무 장대로 문을 통통 건드렸다. 그리고 ‘나리, 잠시만 나와 보세요. 제가 의장지기 아래서 막일을 하는 심부름꾼인데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요.’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이틀밖에 되지 않아 신선해요.’ 남이 들어도 뜻 모를 말도 덧붙였다. 그래도 인기척이 없자 장대로 다시 문을 통통 건드렸다.
“뭐야 너는. 무슨 헛수작인데.” 포기할까 싶을 즈음에 뒷문의 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한 뼘 정도 열렸다. 빙고.
Posted by 미야
2021/11/22 12:33
2021/11/22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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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되, 사람은 사람이 아니로다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같은 자리를 더 맞으면 바보가 될 지경이었다. 나는 울상을 지으며 빌었다. “성장기 청소년은 잠자리에 들 시간이에요. 왜 밖에 나와 계시는 거예요, 공자님들. 밤에 잠을 충분히 자지 않으면 키가 크지 않습니다.” “이 낯짝 두꺼운 거 보라지. 그러는 너는 다 큰 어른이라서 멋대로 돌아다니고 있고?” 야무지게 찰싹 소리가 또 한 번 났다. 남경의의 손바닥 맛은 상당히 매워서 맞은 자리가 후끈후끈했다.
의외였다면 착한 경찰, 나쁜 경찰 역할 중 착한 경찰 쪽을 맡은 남사추가 불쌍하니 때리지 말라며 말릴 생각을 전혀 안 했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는 속눈썹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얻어맞고 있는 나를 빤히 관찰했다. 그러고 보니 시장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에도 이릉노조의 초상화와 부적을 사고 있던 나를 저런 식으로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더랬다. 괜히 찔렸다. 그래요! 자백할게요! 저 사람인 척하는 흉시예요!
“누구와 닮았다는 느낌인데 잘 모르겠어. 저번에도 그러더니 생각이 날 듯 말 듯 안 나네.” 입속으로 혼잣말을 굴린 남사추는 계속해서 인상을 쓰며 나와 눈을 맞췄다. 하지만 비루먹던 고아인 나와 구름 위에서 사는 현문 세가의 자제 사이에 무슨 접합점이 있을 리가 없었다. 기억도 흐릿한 걸람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어쩌다 높으신 분들 집에서 하인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고 쳐도 저들 남가 소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걸람의 부모가 죽었으니 시간상으로도 맞지 않았다. 남사추가 내 얼굴을 보고 도대체 누굴 떠올린 건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거울이 귀한 관계로 나도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르니 막연한 건 나도 마찬가지다.
“좋습니다. 그건 그렇고 도령, 이 늦은 시간에 무슨 까닭으로 무덤가를 어슬렁거린 겁니까.” 어조는 부드러웠지만 따져 묻는 남사추의 표정은 상냥한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별 거 아닙니다. 낮에 떨어뜨린 물건을 찾고 있었어요.” “해가 없어 어두운데 어떻게 찾으려고요.” “손으로 더듬어서요.” “그렇게까지 해서 급히 찾아야 했던 물건이 무엇이었지요?” “돈주머니요.” 거짓말은 디테일에서 나오는 법이다. 나는 급히 허리춤을 뒤져 예전에 노잣돈으로 쓰라며 받은 보라색 돈주머니를 꺼내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동전 하나 안 들어가 있었지만 지금 수중에 있는 물건 중 핑계로 써먹을 값나갈 종류라곤 그거 하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이 돈주머니를 본 몇은 자기에게 팔 생각이 있느냐 물어본 적도 있다.
“양심도 없는 놈! 입만 열면 그냥 술술 거짓말이 나오는구나. 누가 속을 줄 알아?!” 제법 그럴 듯한 변명이라 여겼건만 남경의가 욕을 하며 또 내 머리를 때렸다. “어검을 하여 진작부터 따라와 전부 보고 있었다! 그냥 머리통에 ‘수상한 짓을 할 겁니다, 앞으로 사고를 또 치겠습니다.’ 써 붙이고 있는데 두고만 있을 거라 생각했나! 이래서 애들이 제일 싫다니까!” 저 어린애 아닙니다만. 댁들보다 나이를 더 먹었습니다만. 어쨌든 머리 꼭대기에서 전부 보고 있었다는데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치지 않고 남사추가 한숨을 푹 내쉬며 굳은 표정으로 훈계했다. “도령. 사술을 익히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근골 없는 몸으로 태어나 영력을 가질 수 없다고 사마외도로 관심을 돌려봤자 결과가 좋게 끝나지 않아요. 효과가 빠르고 자질의 제한이 없어 유혹적으로 보이는 건 압니다. 하지만 이릉노조의 최후가 어떠했는지를 떠올려 보세요. 수련자 정신과 신체의 근본이 망가집니다.” 그 양반 최후가 어땠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완전 오해를 샀다. 이릉노조에게 관심을 보이고, 가짜 부적에 환장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사술에 집착하여 도사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난 걸로 완전 찍힌 모양이다. 그럼 한밤중에 내가 이리로 몰래 와 무덤을 뒤진 것도... 아이구야.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묘지에서 사술에 쓸 원기를 박박 긁어모으는 중이라고 착각하고 저리 화를 내는 거였다.
억울하다는 생각 이전에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수진계 사람들은 진짜지 내 인생에서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닙니다만.” 절로 말투가 딱딱해졌다. “현장에서 걸렸는데 뭐가 아니라는 거야. 너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을 우리가 한 두 번 봤는 줄 알아?” “목소리 높이지 마. 내가 분명히 아니라고 했다.” “어쭈?! 애기 도사가 이젠 대놓고 반말을 하네?” 남경의가 또다시 주먹을 들어 때리려는 자세를 취했다. 그런다고 쫄 거 같아?! 나는 까치발을 들고 언성을 높였다. “애기 도사라고 하지 마! 분명히 말해두는데 나는 마법이나 도술 이런 거에 관심이 없어! 선입관을 가지고 멋대로 판단하지 마! 내 소원은 전국제패가 아니라 극락왕생이고, 무엇보다 나는 이릉노조의 추종자가 아니라 피해자다! 그러니 주제도 모르고 떠들지 말고 내 앞에서 썩 꺼져!”
남사추와 남경의가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저거 간이 배 밖으로 나왔어?” 그러더니 발끈하고 진짜로 해보자며 남경의가 소매를 걷어 올렸다. 멋대로 하라지. 무덤가에서 패싸움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체면 때문에 개싸움을 못하는 건 그들이지 내가 아니다. 나는 경멸의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며 흙먼지를 털고 돌아섰다.
해가 밝아오자 동네는 어수선했다. 식살귀를 잡겠다며 밤새 산속에서 날뛰던 선사들은 피곤에 지친 모습으로 내려와 뜨끈한 국물에 만 국수를 먹으며 배를 채우는 중이었고, 나와 다퉜던 남가 소년들은 그새 동네를 떴는지 아예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저 사람들 헛다리 짚은 거라니까. 있지도 않은 식살귀를 잡겠다니. 쯧쯧.” 부지런히 찐빵을 찌며 음식을 만들고 있는 가게 옆에서 어제까지도 이릉노조의 초상화와 부적을 팔던 가짜 도사가 당분간 업종을 바꾼답시고 나무를 깎아 만든 구슬장식을 가지고 좌판을 펼치고 있었다. 옷도 바꿔 입었다. 오늘은 콘셉트는 고도로 숙련된 조각 장인이어서 스님 비슷한 느낌을 내고 있었다. 그래봤자 초상화에 코를 안 그려 넣는 실력이 어디로 갈 리가 없어 팔 물건이라고 가져온 나무 구슬은 어린애도 안 쳐다볼 정도로 죄다 조잡하기 그지없었다. 심지어 그건 둥글게 다듬어지지도 않았다.
“도사님 나오셨어요?” “입 조심해라. 누가 도사라는 거니. 선사님들이 듣고 오해하실라.” 야단을 치며 나무구슬을 색실로 묶어 진열했다. 장난감인가? 아님 열쇠고리? 용도를 물어보니 쓰고 싶은 사람 마음이란다. 내키면 방문 손잡이에 걸어두라나. 손에 쥐고 굴리면 지압이 되어서 좋다는 말도 했다. “하나 살 겨?” “지금은 돈이 없어서요.” “그럼 남의 장사 방해하지 말고 비켜.” “예이, 예이. 하나만 알려주심 얼른 비켜드리죠. 혹시 요 근래 야밤에 수레를 쓰는 사람은 없었나요?” “응? 어느 미친놈이 수레를 밤에 써.” “모른다는 말씀으로 듣죠. 그럼 많이 파세요, 저는 갈게요.” 수레자국이 있었다. 들기면 곤란한 걸 싣고서. 그러니 사람의 시선이 닿는 낮에는 움직이지 못했을 거다.
배고픔을 알아도 배고파 죽을 일 없고, 수면부족이 고통스럽다는 걸 알아도 뇌가 망가져 죽을 일 없는 몸으로 한적한 길가에 자리를 잡았다.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이런 외진 곳에서 구걸을 하면 소득이 없어 곧 굶어 죽을 거라고 걱정을 해주는 사람도 간혹 만났다. 대다수는 무심하게 내가 있는 곳을 지나쳐 각자의 용무를 보러 갔다. 나는 가끔씩 ‘한 푼만 주세요, 나리.’ 운을 떼며 나무장대로 흙바닥을 툭툭 치곤 했다. 하품이 나올 정도로 한가로웠다. 우마차가 지나갔다. 여행길에 오른 과년한 여성이었는지 뒤로 덩치 큰 하인들도 붙어갔다. 행상인 무리도 지나갔다. 그들이 쓰는 수레는 크기가 컸고 바퀴의 폭도 넓었다. 밤이 되자 인적이 끊겼다. 나는 나무장대로 다시 바닥을 툭툭 쳤다. 다음날이 지나고, 다시 그 다음날이 지났다. 좀이 쑤셔 미칠 것 같아 장소를 바꿔볼까 고민하던 찰나, 하현달이 뜨던 날의 축시(※밤1시~3시)에 내가 기다리던 수레가 지나갔다.
두건을 눌러 쓴 두 명의 사내가 조를 이뤄 작은 수레를 끌며 바삐 갈 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한 명은 수레를 끌고 가고, 다른 한 명은 등불을 들었는데 특이하게도 등불 한 면에 어두운 색의 종이를 덧붙여 빛이 사방으로 퍼지지 않게 세심하게 조절을 했다는 점이다. 싣고 가는 물건은 부피도 크지 않고 무게도 그리 심하게 나가는 종류가 아니어서 가끔씩 바퀴가 달각달각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이들이 들고 가는 등에는 ‘질(疾)’ 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제법 그럴 듯하네.” 저러면 눈에 띄지 않는다. 설령 눈에 띈다고 해도 다들 보지 못한 척할 것이다. 사람들이 거지 행세를 하는 나를 눈에 담지 않은 척하며 지나간 것과 마찬가지다. 감탄하며 몰래 수레 뒤를 따라갔다. 병자의 시신을 구분하여 묻으러 가는 길이라고 하기엔 방향이 이상했고, 갈림길에 이르자 야산으로 올라가는 길 대신 교외로 방향을 틀었다. 마침내 그들이 도착한 건물은 담장이 엄청 높았고, 크기만 컸지 외관이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한창 때의 약양 상씨 저택과 비교했을 적에 급이 많이 떨어지는 건물이었다. 남자들은 정문이 아닌 뒷문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여전히 달빛이 어두운 시간이었음에도 톡톡 문을 치는 소리에 빠르게 반응하여 뒷문이 열렸다. 이미 안쪽에서 사람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얘기다.
어둠에 숨어 주위에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는 걸 확인한 후, 뒷문으로 다가가 귀를 대어보았다. 틀렸다. 내 귀로는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다. 높이가 있는 담 안쪽을 기웃거릴 방도를 궁리하며 둘레를 조금 걸었다. 그때 뒷문이 다시 열렸고, 용무를 다 마친 건지 후련한 얼굴을 한 두건을 쓴 두 사람이 등불과 빈 수레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등불을 든 자가 수건으로 싼 걸 꺼내더니 즉석에서 둘로 나눠 수레를 끄는 자에게 건넸다. 받은 돈을 나눠가지는 듯했다.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그러더니 왔을 때와는 다르게 등 돌리고 헤어져 각자 자기 갈 길로 떠났다. “버크와 헤어 맞네.”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는 걸 지켜보고 다시 뒷문으로 접근했다. 온 신경을 집중하여 귀를 문에 대고 안에서 들리는 소리가 있는지 잘 들어보려 했다. 누구는 이렇게 해서 옆집 사는 여자들 옷 벗는 소리까지 엿들었다는데 내 귀는 영 성능이 떨어지는지 아무런 소음도 포착을 못했다. 답답한 마음에 머리카락을 귀 옆으로 잘 빗어 넘기고 다시 귀를 가져갔다. 돌연 묵직한 통증이 종아리를 강타하지만 않았어도 계속 귀를 대고 있었을 거다.
와앙. 어디서 굴러온 건지 모를 강아지 한 마리가 내 종아리를 콱 물었다.
Posted by 미야
2021/11/19 14:05
2021/11/19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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