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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조사] 풀피리 48

제8장 어린아이는 사고를 쳐야 어른이 된다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지금은 평화 시기다.
하지만 고작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가문끼리 연합하여 대항쟁전을 벌여 엄청난 숫자의 사람이 죽어나갔다고 하니 여파가 여전히 잔불처럼 남아있다고 봐야 했다. 이 세계는 빠르게 변화하지 않았고, 앙금은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그래서 이릉노조 위무선이 죽은 지 ‘아직’ 11년밖에 흐르지 않았다. 아직도 길바닥에서 노는 아이들은 이릉노조 흉내 내기 놀이를 한다. 그러니까 울트라 빔을 맞고 쓰러지는 최고의 빌런 역으로 말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이릉노조를 기억했고, 증오했고, 가끔은 추종했다.
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상주 허씨가 이릉노조 추종자야?”
내 질문에 금릉이 화들짝 놀라며 그 무슨 밥 먹다 돌 씹는 소리냐고 따졌다.
“뭔 소리야. 넌 뭐든지 이릉노조와 연관시키는구나.”
남경의도 맞장구를 쳤다.
“이릉노조 추종자는 너잖아. 상주 허씨는 감시대 건립에 필요한 운영비 각출에 불만이 많았던 거겠지.”
외진 곳에서는 주시가 발생해도 빠른 대응이 어렵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선문세가로 소식을 넣어도 한 세월이고, 설령 소식이 도착해 수사들이 도착해도 한세월이다. 그동안 이미 주시들은 밭을 점령했다.
그런 폐단을 줄이고자 깡촌에 감시대를 세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했다.
의도는 좋다. 그리고 효과도 좋다.
다만 모든 복지 서비스는 공짜가 아니다.
“결국 돈 문제라고?”
맥이 풀리는 결론이지만 한두 푼이 들어가는 사업이 아니니 심각한 분쟁을 일으켰을 거라고 나름 추측해볼 수 있다.

남경의가 국물까지 싹싹 긁어먹은 접시를 안타깝게 쳐다보며 말했다.
“감시대 건립 반대는 핑계고 염방존이 무작정 싫었던 거겠지. 겉으로는 손바닥을 비벼도 선독이 서자 출신이라고 얕보는 놈들은 많거든. 죄다 돌아서선 딴 짓이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탁자가 덜컹 흔들렸다.
보이지 않는 시선 아래서 한바탕 발차기와 걷어차기가 오고간 눈치다.
나야 높으신 분들의 속사정 따위는 알 바 아니고, 겉으로 보기에 세 녀석들의 안색은 크게 변화가 없었다. 누가 발로 차고, 누가 맞은 건지 내 눈엔 구분도 안 갔다.
알게 뭐람. 서자 출신인 게 뭐 어떻다고. 영조는 무수리를 엄마로 뒀어도 조선의 왕이 되었다.

그보다는 염방존이 이참에 눈엣가시 하나를 치워버린 느낌이라 그게 마음에 걸린다.
이 세계는 재판 같은 것도 없는 세상이다. 무슨 증거로 상주 허씨가 범인으로 몰린 건지 모르겠다.
어쩌면 증거 같은 건 없었을 수도 있다.
중세시대엔 점 부위에 바늘을 찔러 넣어 피가 나오면 유죄였다. 가끔은 피가 나오지 않아도 유죄였다.
법치주의에 익숙한 나는 불편함을 느꼈지만 여기선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다.
피해자인 나에게 사건에 대해 물어본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범인이 누구라고 결론까지 났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얌전히 입 다무는 거다.

수살귀를 조사한다는 핑계를 대고 나왔으니 조사하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나.
식사를 마친 우리들은 소화도 시킬 겸 냇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물살이 그다지 세지 않은 곳이어서 여름에 물놀이를 하면 좋을 것 같은 장소여서 수살귀와는 인연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재작년과 작년 연속으로 비가 많이 온 뒤 익사자가 나왔다고 한다. 저래보여도 갑자기 깊어지는 곳에선 물살이 소용돌이치는 경우도 있으니 만만하게 보아선 안 된다. 같은 장소에서 익사자가 연거푸 나올 적엔 귀신 장난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물속 흐름이 문제인 경우가 태반인데 그래도 일단 확인이다.

“물에 빠지는 건 둘째고 자갈이 미끄러워 뒤통수가 깨져 죽을 거 같다.”
금릉이 투덜거렸다. 말로는 그러면서도 물고기를 잡고 싶어 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금릉의 눈이 거뭇거뭇한 물고기 그림자를 부지런히 쫓고 있었다. 마치 어항에 사로잡힌 고양이처럼 말이다.
물가에서 떨어진 산속에 살고 있는 남씨네 두 소년들은 상대적으로 물고기에 대한 관심이 적었지만 성실하고 근면한 운심부지처 사람답게 익사자가 나왔다는 곳까지 가서 냇가의 너비라던가, 물살의 흐름 같은 걸 살펴봤다. 단, 어디까지나 형식적이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조약돌을 주워 누가 멀리 던지나 내기를...
“아니거든요!”
남사추가 결코 아니라며 많이 억울해했다.
“그러니까 약간의 영력을 넣어 돌을 던지면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요괴가 반응을 일으킵니다.”
“아하! 물속에 있는 요괴가 머리 위로 돌이 떨어지면 화를 낸다는 거구나?”
“아뇨. 그냥 마구잡이로 돌을 던지는 게 아니라 영력을 조금 불어 넣어 요령껏... 표정이 이상한데요. 농담이 아니고 진짜입니다.”
“내 표정이 어때서.”
“걸람. 방금 웃었잖아요!”
“착각이야. 안 웃었어.”
일단은 시치미를 잡아떼고 신발을 벗었다. 아까부터 신경 쓰이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다.

“뭘 확인한다는 건데.”
“중간에 옷이 걸려 있잖아. 누가 빨래하면서 흘린 모양인데. 주워와야지.”
떠내려가다 재수 좋게 도중에 걸렸는지 남자의 중의로 보이는 옷이 물속에서 어른거렸다.
옷은 제법 비싼 물건이다. 빨래하다 옷을 잃어버린 사람은 큰 낭패를 본 거다. 건져서 대충 널어놓고 있음 찾으러 올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옷이라고? 어디에?”
금릉에 물음에 나는 옷이 보이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런데 금릉의 눈엔 물속에 잠긴 옷이 잘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계속해서 어디? 어디? 이러고 찾기만 했다. 답답해진 나는 첨벙 소리를 내며 물속으로 두어 걸음 들어가 저기라며 다시 손으로 가리켰다.
깊은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니 차라리 그냥 걷어 와서 보여주는 것이 더 빠를 것도 같았다.

남사추와 남경의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선배들 말씀에 보고서를 쓰려고 하면 없던 요괴도 나타난다고 하더니만.”
“하지만 이런 장소에? 너무 뜬금없잖아. 게다가 물의 깊이도 수살귀가 나오기엔 너무 얕아.”
“분명 일반적이진 않네. 뭐, 어쨌든 썩 좋은 종류가 아니니 없애고 보자. 걸람? 거기서 꼼짝 마세요. 더 가까이 가면 그것이 발목을 잡아당길 겁니다.”
경고와 동시에 떠내려 온 빨랫감이 슈슉 이러고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경의가 먼저 검집에서 검을 뽑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뒤이어 남사추도 검을 뽑아들었다.
금릉은 어이없어 했고 나는 당황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옷이 몸에 들러붙은 상태로 무릎에도 오지 않는 얕은 물에 첨벙 주저앉았다.
“뭐시여? 이게 수살귀라고?!”
“수살귑니다.”
남사추가 내 몸에서 달라붙은 옷가지를 떼어내고 영력을 불어넣은 검으로 찔렀다.
뭔가 이상했다. 그건 요괴라기보다는 그냥 무단으로 버려진 쓰레기로밖엔 안 보였으니까.
“진짜로?”
“수살귀가 무서운 건 배 밑바닥이나 헤엄치는 사람에게 들러붙어 수면 아래로 끌어들이기 때문이에요. 겉모습은 대수롭지 않죠. 해초가 뭉친 모양이거나 이것처럼 사람이 벗어던진 옷 모양입니다. 이런 게 수백 단위로 나타나면 배가 침몰합니다.”
“옷 모양이 아니고 그건 그냥 옷인데?”
“간혹 익사자가 입고 있던 옷이 수살귀로 변하는 경우도 있지요.”
붕대를 슬그머니 내리고 왼쪽 눈으로 보자 물비린내 날 것 같은 젊은 남자의 하얀 팔뚝이 보였다. 화들짝 놀라 얼른 붕대를 제 위치로 돌려놓았다.

마을로 돌아와 작년에 물에 빠져 죽은 이가 누구냐 물어보니 허씨 성을 가진 남자라고 했다.
젊은 사람이었는데 혹자는 노름과 도박으로 전 재산을 잃자 실의에 빠져 자진했다고도 했고, 누구는 술을 너무 마셔 야밤에 실수로 물에 빠졌다고도 했으며, 또 다른 이는 아름다운 기생에게 반해 연심을 바쳤지만 거절당한 충격으로 죽은 거라고도 했다.
이유는 어떻든 간에 물에 빠져 자살하기엔 발견된 장소의 깊이가 너무 얕았다.
“그거야 비가 많이 온 뒷날이었거든요.”
그렇게 말한다면야 할 말이 없기는 하다.
어쨌든 수살귀를 처치했으니 올해는 익사자가 나오지 않을 거라며 남경의와 남사추가 크게 기뻐했다.
“쳇, 어쩌다 수살귀 한 마리 잡은 거면서 좋아하긴.”
그 옆에서 금릉이 툴툴거리며 싫은 내색을 했다. 말로는 그까짓 걸로 저렇게까지 기뻐하냐 흉을 보았으나 질투하는 기색이 뚜렷했다.
수살귀를 때려잡는 건 물가에 사는 운몽 사람들의 특기라면서 제 외숙부를 보러 가겠다고 몸이 달아 어쩔 줄 몰라 하는 걸 보면 분명 질투였다.

그래. 외숙부에게 비법을 전수받고 돌아와라.
돌아와서 나 좀 도와주도록 하고.
뜻하지 않게 곤경에 빠진 나는 어디서 굿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근심에 잠겼다.
“인석아! 바닥에 물을 또 질질 흘렸잖아! 걸레 가져와, 걸레!”
영력을 넣은 검에 찔렸으면서 기어코 사람에게 들러붙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마시던 차를 엎지른 것처럼 내 주변으로 정체불명의 물이 흥건했다.
양이 어중간한 관계로 옆에선 죄다 내가 실수를 저질렀다 생각했다. 물이 뚝뚝 흐르는 젖은 빨래를 옮겼다고 오해도 받았고, 양동이를 엎질렀다고 야단도 맞았고, 선자가 오줌을 쌌는데 치울 생각은 않고 보고만 있었다고 비난도 들었다.
“개의 오줌이라면 냄새가 나겠죠. 하지만 이 물에선 지린내가 안 나잖아요.”
“그래서 아니라는 거야?! 이게 어디서 변명을 하고 앉았어!”
어서 치우라며 걸레가 얼굴을 향해 날아들 적에 정말이지 살심이 돋았다.

“수살귀라며! 퇴치했다며! 익사자가 더 이상 안 나올 거라며!”
전화 같은 수단이 있음 운심부지처에 연락을 넣고 따졌다.
그러나 문명의 이기에 기댈 수 없으니 어쩌겠는가. 음기 가득한 내 체질이 문제라고 자포자기하고 엎드려 바닥에 떨어진 물방울을 닦아냈다.
약을 올리려는 건지 닦은 자리에 다시 물방울이 뚝뚝 흘렀다.
걸레를 쥔 손에 필요 이상으로 힘이 들어갔다.
“아니 도대체 왜! 나랑 무슨 원수가 졌다고!”
왼쪽 눈을 가린 붕대를 치우고 위를 올려다보자 물미역처럼 뭉친 사람의 기다란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 순간만큼은 화내는 것도 잊고 비명을 질렀다.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사람이 물미역이 되면 ‘전설의 고향’ 드라마에서나 보던 귀신이 된다.
제법 무서웠다.

Posted by 미야

2022/01/06 15:40 2022/01/06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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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조사] 풀피리 47

제8장 어린아이는 사고를 쳐야 어른이 된다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선자는 매우 똑똑한 개였다.
인간의 지능으로 치자면 일곱에서 여덟 살 어린아이는 될 것이다.
그 어린아이가 어떤 사고를 치고 다니는지를 곱씹자 치미는 울화가 약간은 가라앉았다.
밀가루 포대를 뜯어 주방 바닥을 어지럽히고 본인은 손가락 그림 그리기에 열중한 아기 사진을 본 적이 있는가. 딱 그거다. 신문지 뜯어놓고, 소파 갉아먹고, 꽃병 깨뜨리고, 현관에 똥싸놓고, 이어폰 줄 씹고, 휴지통 뒤엎고, 냉장고 문 열어놓고, 액자 떨어뜨리고, 거울 박살내고, 빨랫감 어지럽히고, 침대 위에 쉬하고. 개들이 하는 짓이 다 그렇지.
네 죄를 알렸다 눈빛으로 쏘아보자 선자는 하품을 하는 척하며 입을 벌렸다.
그리고 두 눈을 반짝이며 내 종아리를 노렸다.
얘는 진짜 날 깨무는 걸 너무 좋아해서 문제다. 아무래 무는 힘을 조정한다고 해도 날카로운 이빨로 물면 피를 보는 건 순리다.

“선자야. 이것아!”
씹는 장난감이 부족해서 그런가 싶어 부드러운 나무토막을 골라 적당한 크기로 잘라준 적이 있다.
가대와 달리 반응이 대단히 시큰둥했다.
버리기가 아까워 나무토막으로 멀리 던지고 다시 가져오기 놀이를 했는데 얘가 덩치로 사람을 치고 전속력으로 달려 나가니까 재앙이 따로 없었다. 마치 볼링 핀들을 쓰러뜨리는 것 같았다.
다시는 나무토막 물어오기를 시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다친 사람들에게 일일이 사과하고 다녔다.
그동안 선자는 모란을 가꾼 화단 한 가운데로 질펀하게 똥을 싸는 것으로 나에게 엿을 먹였다.

“우리 진짜 잘 해보자. 제발.”
애원에도 불구하고 선자는 하품을 하며 딴청을 부렸다.
“응, 그래. 니 똥 굵어.”
돈을 억만금을 줘도 아무나 못 키운다는 영견은 똥 치운다고 쭈그리고 앉은 내 등에 대고 뒷발차기를 하며 흙을 덮는 시늉을 했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PD에게 제보하고 싶다.

밥을 챙겨주는 것도 까다로웠다. 이 세계에 공장에서 만들어진 사료가 있겠냐고.
그 말인 즉, 주방에서 식재료를 따로 얻어 선자가 먹을 밥을 직접 만들어줘야 한다는 거다.
사람이 먹다 남긴 잔반을 섞어 대충 만들어주면 당연히 먹지 않는다. 그리고 털을 세워가며 진심으로 화를 냈다. 애가 은근 입이 고급이었다.
그 먹는 문제로 사고를 치는 일도 있어 골치가 아팠다.
애초에 ‘닭을 잡아먹지 않도록 잘 감시하라.’ 지시를 왜 했겠는가.
닭고기를 좋아해서 라기 보다는, 순수하게 사냥본능을 일깨워 닭을 쫓아다니는 걸 즐기는 눈치였다만... 일주일에 한 번씩 축사가 뒤집어졌다.
그때마다 불호령이 떨어지고 나는 분노한 인민 앞에서 자아비판 시간을 가져야 했다.

“불쌍한 닭들은 내버려두라고 그랬잖아.”
때린다고 말을 잘 듣는 건 아니니까 귀한 영견에게 주먹만 보여줬다.
버르장머리가 개판이라 내가 뭘 잘못했냐며 선자가 왕왕 짖었다.
“시끄러! 사고는 네가 쳐도, 축사 담당자에게 혼쭐이 나는 건 나라고!”
개의 양쪽 귀를 잡고 이리저리 비틀어대면서 나도 같이 울부짖었다.
개와 사람이 동격으로 싸우는 거냐며 금릉이 어이없어 했지만 평소 예뻐해 주기만 하고 관리는 전혀 하지 않은 도련님은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거다.
“네 개는 진짜 사람 말을 안 들어, 도련님.”
“당연하지. 얘는 내 말만 듣거든. 꼬마 선자야, 앉아.”
으이그, 선자 저 못된 것.
밥 한 번 준 적 없는데도 제 주인이라며 금릉 앞에서 꼬리를 흔들어대는 걸 보니 배알이 뒤틀렸다.
개에게도 표정이 있다. 분통을 터뜨리는 날 보고 선자가 씩 웃었다.

선자를 훈련시켜야 하니 금린대 밖으로 따라오라는 금릉의 명령에 하늘이 노래졌다.
여기선 개에게 목줄을 채우는 습관이 없다.
민가로 내려오자 선자는 말 그대로 펄펄 날았다.
가판대를 세워두고 만두를 팔던 상인이 기겁을 했다. 그래도 똑똑한 개라 만두를 먹겠다며 가판대를 뒤엎는 짓은 하지 않았다. 대신 녀석은 만만한 내 몸통을 장사꾼을 향해 밀었다.
“사탄 같은 놈!”
이러다간 만두 팔던 상인과 뒤엉켜 쓰러지게 생겼기에 원하는 걸 들어 선자의 주둥이로 넣어줄 수밖에 없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지 만두 상인 또한 체념의 향기를 풍겼다.
“사탄 같은 놈!”
다 먹고 입맛을 쩝쩝 다시는 녀석을 향해 재차 욕설을 퍼부어주었다.
상인은 개의 털이 검으니 가루석탄(沙炭)이라 부르는 구나 여겼지만 아무튼 쟨 사탄이었다.

“걸람~!!”
금릉과 사전에 언질을 주고받은 건지 남사추와 남경의가 나타났다.
“진짜로 살아있었구나! 살아있었어!”
예상도 못한 일이기에 깜짝 놀랐다. 택무군은 그렇다 치고 날 불량아 취급하던 남계인 선생님이 학생들과 내가 만나도록 허락을 했단 말이야?
기본적으로 결벽증을 장착하고 있는 남씨 사람이면서도 이번만큼은 예외로 두기로 한 건지 남경의가 덥석 날 끌어안았다. 옆에서 사추는 감정이 벅차올랐던지 눈물을 글썽였고, 조금 지나자 코를 흘렸다.
쳐다보는 시선들이 부끄러웠던 것 같다. 길 한복판에서 이러는 거 아니라며 금릉이 서둘러 우리들을 음식점 안으로 떠밀었다.

닭고기 요리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곳인지 지지고 볶는 맛있는 냄새가 입구서부터 진동했다.
미리 예약이 되어 있다며 웃으며 달려 나온 직원들이 준비된 장소로 우리를 안내했다.
하인인 내가 들어가서 공자들과 동석을 해도 되는 건가 걱정이 앞섰지만 포커페이스가 장기인 점원은 내 옷차림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대했다.
움찔한 쪽은 다른 손님들이었다. 누가 봐도 신분이 낮은 내가 명가 출신 도련님들과 식탁에 나란히 앉으려 하자 표정이 굳었다. 빌어먹을 신분제 사회 같으니라고.
그 와중에 선자는 무료한 표정으로 마을 한 바퀴 돌고 오겠다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금릉은 그러라며 자기 개를 내버려 두었다. 훈련을 핑계로 마을로 내려오면 늘 이런 패턴이었는지 꼬리를 세우고 걷는 선자의 뒷모습은 위풍당당했다.

“여기는 어떻게 온 거야?”
습관대로 반말을 하다 살짝 눈치가 들었다.
“커, 흠! 두 분 공자님들, 여기까진 어떻게 오신 건가요?”
“솜털 곤두선다. 뭐라고 안 할 테니 평소 하던 대로 해.”
남경의가 소름끼친다며 팔뚝을 쓰다듬었다. 예절을 중시하는 남씨 가풍에 전면 위배되는 행동이었지만 나라는 존재가 워낙에 비일상의 연속이었기에 편하게 나가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덕분에 마음 편하게 터놓고 반말했다.

“우리가 걸람을 만나고 싶어 하는 걸 알고 금릉이 힘을 써줬어요. 고마운 일이죠. 수살귀를 조사한다는 핑계를 대고 나왔으니 돌아가서도 수살귀 보고서를 쓸 겁니다. 그런데 얼굴의 붕대는 왜 그런 건가요?”
남사추의 질문에 금릉이 대신 답했다.
“변장이야.”
그러면서 오늘에야말로 크리스마스 선물포장을 뜯어보겠다며 붕대 끝을 쥐었다.
왜 이런 거에 집착하는 건지 모르겠다. 건들지 말라는 의미로 금릉의 손등을 찰싹 후려쳤다.
“왜! 말액도 아니잖아! 남씨에게서 이상한 것만 배워와서는.”
이번에도 금릉은 화를 벌컥 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밥상 앞에서는 누구든지 변장을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 말이 맞느냐며 남사추에게 물어봤더니 사추는 이렇게 대답했다.
“운심부지처에서는 식사 시 금언입니다만, 금린대에서는 변장풀기가 규칙인가 보죠. 한 번 속아준다 셈치고 풀어보세요.”
“의원 앞이면 모를까, 밥상 앞에서? 굳이?”
아웅다웅하는 와중에 요리들이 속속 도착했고 나는 젓가락을 들어 금릉을 찔렀다.
하지만 남경의와 남사추도 궁금해 하는 눈치인지라 결국 왼쪽 눈을 가리고 있던 붕대를 풀었다.

“것 봐, 멀쩡하잖아. 내가 말했잖아. 다 변장이라니까.”
금릉은 별 거 아니라는 투로 그렇게 말했지만 남씨 자제 두 명은 심각해졌다.
확실히 금릉보다 나이를 더 먹었더니 눈치도 귀신이었다.
“걸람... 그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나요? 잘 보여요? 어쩌다 그런 거래요? 치료는 제대로 한 거예요?”
“하나씩 물어봐. 다 말해줄게. 그런데 먹으면서 듣기엔 입맛 떨어질 텐데.”
맑게 끓인 닭볶음탕이 주 메뉴였다. 고춧가루를 팍팍 넣어 매콤하게 조리했음 풍미가 더 좋았을 것 같은데 여기 사람들은 매운맛을 즐기지 않아 소금으로 간을 하여 단백하게 끓여냈다.
살을 발라내어 입에 넣으니 쫄깃하고 맛있었다. 국물은 마늘 향을 살짝 품어 시원했다.

“일단 재수가 없어 눈을 다친 거 맞고, 치료는 저절로 잘 되었고, 운이 좋아 여전히 앞을 볼 수 있어. 그런데 사람의 눈에는 조리개라는 것이 있어 빛에 따라 동공이 커지거나 작아져서 눈을 보호하거든. 운이 나빠 내 경우 그게 잘 되지가 않게 되었어. 이러면 밝은 곳에서 눈을 다치기 쉬워. 그래서 붕대로 빛을 보지 못하게 가린 거야.”
남경의가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왼쪽 눈만 동공이 확 풀린 상태라 상당히 기이하게 보였을 거다. 거울을 봤을 적에 나조차 이상하다 여겼으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어쩌다가? 진짜로 강도에게 당한 거야?”
“강도라면 강도겠지. 그보다... 금릉아. 닭 뼈를 아무렇게나 바닥에 버리지 말렴.”
“어? 그럼 어디다 버려?”
“거기 접시에 모아둬.”
물론 중세시대 서양에선 먹고 남은 뼈를 바닥에 버리는 게 매너였다. 식탁에 쌓아두면 배우지 못해 무식하다고 손가락질을 받았다. 배운 자라면 무릇 뼈를 바닥에 버리고 국물이 묻은 손가락을 테이블보 모서리에 문질러 닦아야 했다. 꺼지라고 해라. 나는 그런 꼴 못 본다.

“방금 네 말은 강도가 아니라는 것처럼 들려, 걸람.”
“그럼 그게 강도겠냐. 어느 간덩이 부운 강도가 염방존이 타고 가는 마차를 노리겠어. 택무군이 마차를 타고 가는데 강도가 덤볐다고 하면 너네는 믿을 거냐.”
남경의가 그건 말이 안 된다고 칼처럼 부정했다.
“택무군은 마차를 타지 않아.”
부정하는 쪽이 거깁니까. 택무군에겐 강도가 안 덤빈다고 해야지!

“범인이 상주 허씨라던데.”
“응?”
“소문이 그래. 종주에게 반기를 들고 그 의지를 보인다며 금릉의 작은아버지 암살을 계획한 거라던데.”
뼈를 주섬주섬 정리하던 금릉이 자기도 들은 적 있다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응! 나도 들었어! 그래서 작은아버지가 상주 허씨를 전부 잡아들일 거라고 했어!”
이번 얘기는 좀 놀라웠다. 금릉은 이제 겨우 열셋이다. 염방존은 겨우 열셋 나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조카에게 자신이 암살당할 뻔했고, 그 범인인 상주 허씨에게 보복할 거라고 사실대로 말해줬다는 거다.
열다섯 살의 남경의가 술을 시켜도 되겠느냐고 물어볼 정도니 이 세계의 상식이 내가 아는 상식과는 전혀 다르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다만, 피 냄새 진동하는 암투를 아무렇지도 않게 어린 녀석들과 공유한다는 점에서 나는 질색했다.

Posted by 미야

2021/12/27 15:18 2021/12/27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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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조사] 풀피리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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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의 가장 적절한 반응은 사람 살려 울부짖으며 우는 것이다.
실제로 아이들이 바라는 것도 그거였다.

금목현의 시선은 하늘로 올라간 연이 아니라 내 얼굴을 향해 있었는데 그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라 아무리 의젓한 척해도 아직 애구나 싶었다.
그런데 이걸 어쩐다. 이 몸뚱이는 눈물샘이 고장 나 울지를 못한다. 게다가 뇌신경 프로세서가 엉겨 붙어 울음이 나와야 하는 순간에 웃음이 터진다. 이게 마음대로 되는 일도 아니고, 여러 번 죽고 되살아난 탓에 맹독성 화학약품 통에 빠지고 난 뒤에 훼까닥 돌은 DC 빌런처럼 되어버렸다.

나도 모르게 웃어버린 듯하다. 금목현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아냐, 너 비웃은 거 아냐. 자존심 긁으려는 의도 아냐.
마음의 외침이 닿지 않은 탓에 금목현의 격려(?)에 따라 화살 재장전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아이들은 이번에야말로 연을 떨어뜨리겠다며 서둘러 화살을 쐈다. 마음이 급했으니 조준은 더 엉망이었고 애먼 화살에 얻어맞을 위기에 처한 나는 말 그대로 연의 줄을 쥔 채 이리저리 움직이며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덕분에 연의 움직임은 거의 미친 망아지 수준이었고, 소년들은 독이 바짝 올라 거의 폭발 일보직전까지 이르렀다. 무리 중 활을 가장 잘 쏜다던 금목현도 연을 맞춰 떨어뜨리는데 실패하자 울컥하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그게 내 탓이냐고! 나 또한 울컥했다.
고함과 야유가 터지는 와중에 금목현이 승부욕을 보이며 활 두 개를 한꺼번에 줄에 끼웠다.
“그래! 날려버려!”
“본때를 보여줘!”
그들이 노리는 게 연이 아니라 꼭 나인 것 같아 줄을 놓고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닐까 고민되었다.
그런데 정말로 그랬다간 화살이 내 등짝에 꽂힐 것 같아 두렵기도 했다.

“아까부터 귀 따가워 죽겠네. 누가 오리처럼 꽥꽥거리는 거야!”
누군가 짜증을 내며 시끄럽다 타박을 하는 것과 동시에 금목현이 당겼던 줄을 놓았다.
찰나의 순간 약간의 삑사리가 난 것 같았지만 어쨌든 화살 하나가 성공적으로 연을 꿰뚫었다.
나머지 하나는... 음, 담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갔다.
“진짜 못 쏘네.”
화려하게 장식된 화살 통을 메고서 날아가던 화살의 궤적을 지켜보던 소년이 밥상 위로 올라온 국이 짜다는 투로 툭 내뱉었다.
금릉이 하던 말을 듣고 있던 금목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호기롭게 두 개의 화살을 걸어 한 번에 쐈는데 그 중 하나만 명중했으니 그렇게 안 하니만 못했다.

부끄럽기도 하고 수치스럽기도 하기에 금목현은 남 탓을 했다.
“저 하인 놈이 연을 제대로 날리지 못해서 그래.”
멈추지 않고 광역 스킬을 걸어 공격의 범위를 넓혔다.
“그리고 이 방법으론 활쏘기 수련이 잘 되는 것 같지도 않아. 우리가 잘 아는 어느 분께서 말씀하시길, 운몽 제자들은 연을 맞추는 걸로 활쏘기를 배운다고 해서 따라 해봤더니 우리 금씨에겐 영 안 맞는 것 같단 말이지. 방식이 별로야. 후져. 역시 금씨에겐 금씨의 방식이 있고, 강씨에겐 강씨의 방식이 있는 거겠지. 뭐, 누구는 금씨 방법은 내버려두고 강씨 방식으로 수련하는 걸 좋아하지만 말이야... 난 관둘래. 나랑 맞지 않아. 연습을 해도 실력이 안 늘잖아.”

금목현이 지목한 그 어느 분이 아무래도 금릉인 것 같았다.
금릉의 예쁜 얼굴이 왈칵 찌푸려졌다.
그러나 이런 식의 시비가 늘상 있던 일인지 금릉의 대응은... 음, 소인배 그 자체였다.
시비에 비아냥으로 대응했다는 얘기다.
“그런가? 평소에 시시덕거리며 연습을 하니 실력이 안 느는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 뭐라고?”
“뭐긴. 네 말이 맞는 것 같다고. 네 수준으론 방식이 안 맞았던 거야. 고정된 과녁으로 연습을 해야 하는 단계인데 움직이는 연을 무슨 재주로 맞추겠어. 내가 생각이 짧았어. 평소에도 실력이 좋다 하도 과시하기에 그만 착각했지 뭐야.”
응, 이러면 맨주먹으로 싸우자는 거 맞지.
키 큰 소년들이 저보다 작은 금릉을 둥글게 에워쌌다.
그리고 우리 금릉은 참지 않았다. 다수를 상대한다는 불리한 조건에서도 일련의 망설임 없이 자기가 먼저 주먹을 날리고 보았다.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는 한 마리 치와와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럼 나는 어떻게 했느냐고?
연줄을 감아 정리하고, 떨어진 연을 줍고, 땅바닥에 꽂힌 화살을 뽑았다.
높으신 도련님들끼리 싸울 적에 천한 것이 함부로 끼어드는 거 아니다.
자기들끼리 바쁜 것 같으니 알아서 꾸벅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아니, 뜨려 했다.
“야! 도중에 가긴 어딜 가려고!”
금목현이 내 목덜미를 덥석 쥐었다.
소동을 눈치 챈 어른이 싸움을 말리려고 여기까지 달려오면 금릉이 먼저 주먹질을 날렸노라 확인을 시켜줄 목격자가 필요하단다.
그런데 내가 왜?
나는 뻔뻔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모두 앞에서 얼굴에 빨갛게 세로줄 그어진 소년을 지목했다.
줄을 제대로 당길 줄 몰라 화살 한 번 쏘아보지 못했던 소년은 분함과 억울함에 뒤로 넘어가려 했다.
그게 뭐. 내 얼굴에 붕대 감은 거 안 보여? 마무리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눈을 다쳐 사물이 흐릿한데다 전부 같은 색의 옷을 입고 계시니 감자바위 같고 구분이 가지 않습니다.”
나 빼고 자리에 모인 감자바위 전원의 눈이 실처럼 가늘어졌다.

“야!”
“예, 도련님. 따로 시키실 일이 있으신가요.”
턱 아래가 벌겋게 부어오른 금릉이 의원에게 치료받으러 간다면서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너, 구린내 맞지.”
“아닌데요.”
“어쭈? 이것 봐라. 맞잖아, 구린내. 얼굴 절반을 붕대로 감았어도 내 눈은 못 속인다. 네가 죽었다고 남씨네 것들이 광광 울던데 전부 거짓말이었네?”
길을 가로막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덕분에 넘어질 뻔했지만 그보다 금릉은 내 눈을 가린 붕대에 관심이 쏠린 상태였다. 하지 말라는데도 계속 손을 가져가 풀려고 했다. 크리스마스 선물 포장지도 아닌데 붕대 끝을 잡은 손끝이 집요했다.
“뭐야, 뭐야. 어째서 그따위로 변장까지 한 거야? 붕대는 영 아닌데. 야, 왜 자꾸 피해.”
“제 이름은 구린내가 아닌데요.”
“그래. 오늘은 몸에서 냄새 안 나네. 그런데 네 이름이 뭐더라.”
“안선준입니다.”
“이게 누굴 속이려 들어. 걸람이잖아, 너.”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으면서 괜히 한 번 찔러본 거냐, 홧김에 붕대 끝을 쥐고 있는 손을 찰싹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치와와는 참지 않는다. 금릉도 지지 않고 내 팔뚝을 찰싹 때렸다.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 얼마나 맵고 따가운지 맞은 자리를 세게 문지르며 신음했다.

“아오, 아파라. 얘가 은근히 손맛이 맵네. 맨날 싸워서 단련이 잔뜩 되어 있구먼.”
“그래서 뭐. 너도 다른 애들과 친하게 지내라고 설교하려고?”
“미쳤냐? 그런 싸가지들과 뭐 하러 친하게 지내. 그런 놈들은 이쪽에서 친하게 지내자고 하면 호구 잡을 것들이야. 적당히 거리를 두고 너나 엿 많이 잡수세요 해야 뒤탈이 없다고.”
금릉이 눈을 끔뻑거렸다. 지금까지 싸우지 말라는 말만 들었지, 나처럼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나보다.
“어... 그렇지.”
“그리고 너처럼 다굴 당하면 안 되는 거야. 그게 싸움의 기본 원칙이라고.”
“다굴이 뭔데?”
“아까처럼 혼자서 다수를 상대하는 거.”
“그럼 거기서 꼬리를 내리라고?”
“상황에 따라서는 그렇게 해야 할 때도 있지.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딱 한 놈만 골라 줘 패. 이놈도 때리고, 저놈도 때리고, 힘들게 노력해봤자 피해가 분산되잖아. 그러니 딱 하나만 노려.”
골목대장 놀이를 해본 적도 없으면서 조언이라고 떠들고 앉았으니 내 얼굴 두께도 참 두껍다.

화살 통을 메고 가는 내 옆에서 도련님이 뒷짐을 지고 걸었다.
“구린내, 너도 사촌들과 자주 싸웠어?”
“싸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어. 자주 왕래를 안 했거든.”
내뱉고 나서 생각해보니 이건 온서염이 아닌 안선준의 기억을 토대로 나온 이야기였다.
온서염은 소산 거리에서 발견된 이후 고아처럼 자랐으니 왕래고 뭐고 친척 자체가 없었다.
안선준의 가족은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만 왕래했는데 사촌과는 연령대도 맞지 않고 서로 교차점이 없어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쳐도 알아보지 못했다. 한선준이 중학생이었을 때 사촌은 대학생 졸업반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적에 장례식장에서 담배 심부름을 시켰던 기억이 났다. 그 정도뿐인 얄팍한 관계였다.
“뭐야. 경험이 많은 것도 아니면서 싸우는 요령에 대해 날 가르치려 들어?”
내게서 화살 통을 도로 빼앗아 들면서 금릉이 어이없어 했다.
음, 그렇게 따지면 할 말이 없다. 나는 어깨를 으쓱여 보이곤 금릉에게 얼른 의원에게 가보라고 했다. 붓기가 빠지기도 전에 멍이 들 텐데 위치가 또 애매하게 턱 아래라서 밥 먹을 적마다 쑤실 거다. 그러니 약초든 뭐든 미리 잔뜩 발라놓는 게 좋았다.

“어쨌든 내가 먼저 주먹질한 거 아니라고 말해줘서 고마워.” 
“별 말씀을.”
“그런데 그 자식들 나중에 보복하러 올 수도 있어. 그... 뭐냐. 금목현은 꽤 치사해.”
“내가 봤을 적에도 그럴 것 같더라. 하지만 괜찮아. 그래봤자 애들이잖아?”
“웃기고 있네. 너도 애거든?!”
여기까지만 하고 우리들은 헤어졌다. 서로 길게 대화를 나눌 처지도 아니었고, 나만 보면 짜증을 내는 유수관이 날 발견하자마자 아까부터 계속 놀고만 있을 거냐며 내 귀를 잡아 뜯으려 했기 때문이다.
살아 움직이는 과녁 역할을 하다 화살에 맞을 뻔했어도 유수관 입장에선 놀이에 불과했다.

“너를 어디다 써먹어야할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설거지, 물 길어오기, 청소하기, 짐 나르기, 가리지 않고 힘든 일은 다 시키더라.
바쁘게 움직이다보니 일주일이 금방 흘러갔다.

이 와중에 금릉이 은밀하게 손을 쓰기라도 한 건지 개 한마리를 돌보는 일이 내 앞으로 떨어졌다.
“귀한 개다.”
압니다. 그리고 내 종아리 씹는 걸 대단히 좋아하는 놈이기도 하죠.
꼬마 선자는 ‘꼬마’ 타이틀을 붙이고 있기가 민망하게 커다랗게 자랐다. 처음 봤을 적엔 주먹밥 크기였던 선자는 대형견 아프간하운드보다 덩치가 더 커졌다. 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움찔하게 될 크기랄까, 털은 촘촘했고 짧은 편이었다. 목덜미에 검은 갈기가 있어 늠름한 수컷의 위용을 보였는데 사실 얜 암컷이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거기로 불알이 안 보이니까 아는 거지 그게 뭐 대단한... 음.
주인을 닮아 처음부터 시비조다. 이번에도 선자는 어김없이 내 다리를 와앙 물었다.
썩을 놈의 유수관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아무 것도 못 본 척했다.
“밥을 주고, 털을 빗겨주고, 똥을 치우고, 닭을 잡아먹지 못하게 지켜보면 된다. 참 쉬운 일이지.”
“그보다 식자재를 운반하고 싶습니다만. 그냥 포대자루 옮길게요.”
“안 돼!”
선자를 돌보는 일이 설렁설렁 해치우는 종류가 아니라 일종의 벌칙수행이라는 건 유수관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Posted by 미야

2021/12/23 13:47 2021/12/23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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