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나라카(地獄)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잔인한 표현 가감 없이 사용합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암살에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일반적으로 범인은 현장에서 빠르게 달아나는 것이 국룰이다. 복면을 사용하여 얼굴을 감췄으니 정체가 드러난 것도 아니다. 공력을 쓰는 수사들은 청하로 방향을 튼 염방존을 따라가 여기엔 마차를 끄는 마부와 하인들밖엔 없었다. 1회 출연 알바비 5만원 지급에 이름도 나오지 않을 엑스트라를 굳이 수고를 들여 죽여 없앨 까닭이... 내 옆에서 가슴을 찔린 하인이 꾸르륵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다. 폐에 피가 고여 익사하는 중이다. 그 옆에선 복면인이 하나하나 급소를 찔러 확실하게 죽었는지를 확인을 했다. 아직 죽지 않은 자가 외쳤다. “약속이 틀리잖소!” 맨 처음에 내 등을 떠민 남자다. 이상했다. 저 대사는 ‘나는 외아들이고, 집에 늙은 어머니가 계시오! 제발 살려주시오!’ 여야 했다. 저래선 원래 복면인과 처음부터 한통속이었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고통으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멱살이 잡혀 들어 올려졌다. “이놈이 맞느냐?” 어째서인지 복면인은 무릎을 꿇고 앉은 하인에게 내 얼굴을 확인시켰다. 부처에게 향을 올릴 기세로 절을 하며 ‘그놈이 맞다.’ 하자 그 즉시 칼춤이 이어졌다. 무엇을 약속받았는지는 몰라도 복면인은 처음부터 그를 죽일 계획이었는지 손속에 머뭇거림이 없었다. “그깟 돈 몇 푼에 열리는 입이라면 살려둘 필요가 없지.” 그렇게 말한 사람은 비어있는 마차를 조정하던 마부였다. 암살자가 마차를 노리고 뛰어내렸을 적에 마부는 재빨리 고삐를 집어던지고 바닥을 굴렀다. 돌이켜보면 잘 짜인 각본대로의 움직임이였던 것도 같다. 정신이 실 가닥 같이 끊어지려는 찰나, 마부와 내 눈이 서로 마주쳤다. 아니, 내 눈과 마주친 건 잘 버려진 단도 날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똑바로 세워진 칼날이 내 눈을 가로로 그었다.
“뭐야. 씨발 것들. 염방존을 노린 거라며...... 야, 이 미친 새끼야! 아악!” “앞으로 눈은 필요가 없을 것 같아 미리 없앴다. 혀는 필요하다는 게 참 아쉽군.”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나를 거적 같은 것으로 대충 싸더니 다시 나무로 된 궤짝 같은 곳에 넣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 내가 들어간 상자가 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다만 관은 아니었다. 안에서 다리를 똑바로 펼 수 없어 무릎을 접어야 했다. “옮겨라.” 우두머리로 짐작되는 자가 명령하자 궤짝이 들어 올려졌다. 이동은 신속했다.
‘염방존을 노린 것처럼 술수를 부렸지만 처음부터 노린 건 나였어. 이놈들 정체가 뭐지.’ 고통을 참지 못하고 신음하자 궤짝이 크게 요동쳤다. 조용히 하라는 말을 참으로 와일드하게도 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라면 강도로 위장했을 텐데...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아파 죽겠어! 날 이렇게 잡아가는 이유조차 모르는데 눈도 안 보이게 되고!’ 눈꺼풀은 절반이 잘려나갔고 대신 그 자리에 피가 엉겨 붙었다. 상처는 아물겠지만 시력이 돌아올 것인지는 확신이 가지 않았다. 일부러 눈을 망가뜨렸으니 치료를 제대로 해줄 리도 없고, 흉터가 남은 눈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해줄지는 알 수 없었다. 눈도 그렇지만 그보다 당면한 문제가 더 심각했다. 궤짝에 틈새가 없어 얼마 지나지 않아 산소가 고갈되고 있었다. 게다가 거적으로 둘둘 말린 상태다. ‘산소부족으로 얼마 후면 기절하겠는데.’ 그걸 노린 거라면 칭찬해주겠다. 귀에서 이명이 들렸고, 물 먹은 솜이 코 속으로 가득 들어오는 기분이 들면서 의식의 줄이 뚝 끊어졌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적엔 궤짝에서 꺼내어져 실내로 이동되어 의자에 묶인 상태로 바뀌어져 있었다. 눈이 회복되지 않았기에 공기의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 분위기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는데 악취가 상당했다. 가까운 곳으로 피가 살점이 썩어가고 있어 도축장인가 생각했을 정도다. 동물을 도축했든, 사람을 도축했든, 청소상태가 매우 불량해서 생리적으로 구역질이 나왔다. 지금의 내 상태를 의식한다면 구토는 어떻게든 참아야 했다. 역겨운 오물을 한바가지 쏟는 것도 그렇지만 이물질이 기도로 들어가는 날엔 대 참사다. 내가 이런 걱정을 하는 까닭은 앉은 의자의 각도가 예사롭지 않아서이다. 손님의 면도를 돕기 위해 뒤로 젖혀진 이발소 의자 같았달까, 비스듬하게 눕혀져 있으니 토하면 필연적으로 구토물 일부가 목으로 넘어가게 되어 있었다. ‘이발소 의자일 리 없으니 고문용 의자이겠군.’ 끙끙거리며 의자에 묶인 팔과 다리를 버둥거렸다. 움직임에 따라 철겅거리는 쇳소리가 났다. 중세시절 고문의자처럼 쇠고리에 사지를 고정시켜 둔 것 같았다. 주먹을 쥐고 팔을 움직이자 삐걱거리는 소리만 났을 뿐, 움직임이 용이하지 않았다.
“효성진 도장의 제자님께서 드디어 정신을 차리신 거 같군.” 거짓말 보태지 않고 펄쩍 뛰었다. 아무리 눈이 보이지 않아도 귀는 멀쩡한데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이 있다는 기척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거기다 목소리가 들린 방향도 짐작이 쉽지 않았다. 방음설비가 된 음악실처럼 벽이 울퉁불퉁하여 소리의 전달을 먹어치우는 눈치다. 나는 겁을 집어먹은 채 보이지 않는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알았지만 의외로 상대는 나를 볼 수 있어도 나는 상대를 볼 수 없다는 점이 무서웠다.
“거기 누구요!” “지금 이 시점에서 그게 중요할까?” 스윽, 스윽,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숫돌에 날을 가는 소리와 비슷하게 들려 전설의 고향 드라마에서 구미호가 나그네의 간을 꺼낸답시고 부엌에서 칼을 가는 장면이 연상되었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공포는 배가 되었다. “그럼 무엇이 중요하다는 거요!” “네가 효성진의 제자라는 것이 중요하지.” “제자? 누가요. 나? 나 그 사람 제자 아닌데?? 언제부터 내가 제자가 되었지?” “그래, 어쩐지 그렇게 나올 거 같더라. 처음부터 고분거릴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 다시 작게 달그닥 소리가 이어졌다. 그게 밥그릇을 정리하는 소리 같기도 하고, 아니면 치과에서 썩은 이빨 쑤실 도구를 정리할 때 나는 소음처럼 들리기도 했다. 물건은 핀셋처럼 가벼운 종류부터 망치 같이 무거운 종류까지 다양했다.
순간 훅, 하고 얼음처럼 찬바람이 불었다. 나는 질겁했다. “몇 살이지?” “이거 하나는 확실하게 합시다. 제대로 대답을 하기 싫어서가 아니고요... 진짜로 제가 나이를 정확하게 몰라요. 어쨌든 댁에게 최대한 협조하고 싶은 마음이라는 건 알아주세요!” “그래서 몇 살이지?” “올해 스물하나라고 하면 믿지 않으시겠지만 제가 헤아려봤을 적엔 그 정도 나이가 됐습니다! 거짓말로 속이려는 것도 아니고, 농담 따먹기 하자는 건 더더욱 아닙니다!” “몇 살이지?” “아, 진짜! 저에게 왜 그러시는 건데요~~!!”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걸 봐선 제대로 걸린 거다. 상대는 전문가였다. 나는 대충 이쪽이겠거니 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최대한 불쌍하게 보이도록 울상을 지어보였다. 효과는 없겠지만 어쨌든 상대방에게 협조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었다. 나는 숨기는 것도 없고, 감추고 있는 비밀도 없다.
“몇 살이지.” “스물하나 입니다. 그런데 못 먹고 자라 열네 살이라고 다들 착각합니다.” “몇 살이지.” “선생님.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웃자고 이러는 거 아닙니다. 저는 어려서 고아로 자랐고, 그래서 나이를 정확히 모릅니다.” “몇 살이지.” 갑자기 끌려와 어딘지도 모르는 장소에서 정신이 들었는데 상대방은 계속 내가 몇 살이냐 묻기만 한다. 이러면 내가 굳이 대답을 할 의미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답이 없자 다른 질문이 이어졌다. “사람의 뼈가 모두 몇 개인지 알고 있니?” 전생에서 퀴즈로 잘 써먹는 의학 상식이다. 206개다. “그럼 손에는 모두 몇 개의 뼈가 있는지는 아니?” 세어본 적도 없어 모른다. 농구를 하다 손가락뼈를 삐었을 때 엑스레이도 찍어봤지만 몇 개인지는 모른다. 알고 있었어야 하는 거였나. “손가락뼈는 열네 개. 손바닥뼈는 다섯 개, 손목뼈는 여덟 개란다.” “꽤 많군요.” 대답하기가 무섭게 엄지손가락이 뚝 부러졌다. “으하하악, 아륵!!” “축하한다. 이제 네 손가락뼈가 열다섯 개로 늘었구나.”
이러지 말고 그냥 원하는 게 뭔지 시원하게 물어봐줬음 좋겠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발버둥 쳤다. 굳이 기선제압 이런 거 하지 없어도 순순히 다 말해줄 거였다. 뭘 원하는데. 뭘 바라는데. 아니면 그저 고문이 좋아서 이러는 거냐고. 그러지 말고 궁금한 거 있음 다 물어보라고. 팬티 사이즈에 동정 잃은 날짜까지 다 말해줄 수 있다. 나는 지켜야 할 자존심 같은 건 가지고 있지도 않고, 신념이나 신앙도 가지고 있지 않다. “표정이 왜 그래. 기쁘지 않은 거니? 그럼 손가락뼈가 열여섯 개가 되면 행복해질까?” “아니오!” 대답을 듣고도 놈은 삶은 닭 뼈 고르듯 손가락 이곳저곳을 만지작거렸다. 이어 우드득 불쾌한 소리를 내며 뭔가가 끊어졌다. “아으악! 악! 아니라고 했잖아! 아악! 악악!” “그래, 넌 올해 몇 살이지?” 확실히 알겠다. 이놈은 제정신이 아니다. 사이코다. 내 나이가 몇 살이나 묻는 건 핑계고 내 뼈의 개수를 하나둘 늘려가면서 기뻐하고 있다.
“이유나 좀 알자! 그냥 취미생활로 이러는 건 아닐 거 아냐!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러는 건데!” “여전히 화를 내는 걸 보니 아직 팔팔하네. 한참 즐길 수 있겠어.” 그가 기특하다는 투로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과연 명월청풍 효성진이 제자로 삼을 만해. 그럼 나랑 같이 오랫동안 놀아볼까? 자, 그럼 다시 질문할게. 네 나이가 몇이지?” “야, 이 개새끼야악~!! 허윽.” 비명 섞인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맹렬하게 두뇌를 풀가동시켰다.
‘명월청풍 효성진의 제자.’ 이 사람들은 효성진과 연관 지어 나를 고문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Posted by 미야
2021/12/08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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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구름 위의 무간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볶은 땅콩 먹어볼래요?” 금린대로 예절공부를 하러 떠나기 일주일 전, 남사추의 처소로 초대를 받았다. 모두의 눈초리가 흡사 곰벌레를 보는 듯하였기에 남사추의 이러한 호의는 가뭄의 단비 느낌이었다.
단짝인 남경의는 사추와 단 둘이서 방에 남으면 좋지 않은 소문이 돈다는 이유로 깍두기 역할을 자처하고 옆에 앉았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목적은 주전부리였다. 사추가 나 먹으라고 사온 과자도 한주먹이나 쥐어선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밀가루 반죽에 단감조림과 땅콩을 넣어 불판에 구운 과자는 기차역에서 팔던 호두과자 느낌이었는데 크기가 훨씬 더 크고 맛도 달았다. 남사추와 나는 하나만 입에 넣고도 금방 질려버렸지만 먹보 돼지 남경의는 덥썩 물어 세 개를 먹어치웠다. 고소 사람들은 다들 식욕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데 얘는 남씨 직계라면서 돌연변이처럼 굴었다. 부스럭 소리를 내며 아예 봉지를 품에 끌어안고 네 개째를 손에 쥐고 먹는 걸 보니 웃음도 안 나왔다. 그래도 예의를 따져 음식을 입에 물고 있을 적엔 떠들지 않아 그거 하나는 좋았다. “그래, 단수 양반. 금린대에 공부하러 가서는 아무에게나 결혼해달라고 하지 말라고?” 두 번 씹고 벌써 끝났다. 과자가 입에서 살살 녹는가 보다. 입안 음식물을 삼킨 남경의가 리얼 탄산 100% 음료의 쏘는 맛으로 말했다. “금릉에게 실수로라도 청혼하면 뼛가루로 변해 운심부지처로 돌아오게 될 테니 조심해.” 네이밍 센스가 괴상한 사람은 세상에 두 명으로 나눠지지 않았다. 슬프게도 금릉과 여란은 동일 인물이었다. 진짜지 사람은 하나인데 본명과 자, 호로 나눠 부르는 이유를 모르겠다. 금릉은 이름이고 금여란은 자라고 한다. “얘가 은근 상식이 부족해서 말이지.” 과자 부스러기를 옆으로 치운 남경의가 종이에 기호를 그려가며 장황하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름은 부모와 스승, 매우 절친한 관계, 부부가 아니면 부르지 않는다. 남자가 지학의 나이가 되면 어른이 되었다고 여겨 자로 부른다. 호는 거처하는 곳이나 자신이 지향하는 뜻, 좋아하는 물건을 대상으로 한 경우가 많다. “금릉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하니까 하루라도 빨리 자로 불러달라고 우기고 있는 거고.” 마찬가지로 남사추의 이름은 남원이고, 사추는 함광군이 직접 지어준 자라고 한다. 함광군이 밖에서 데려와 아들처럼 키웠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어쨌든 네 입장에서 금릉, 금릉 지금처럼 이름으로 부르다간 경을 친다.” 잘 외워지지 않으면 어른은 ‘나리’ 소년은 ‘공자님’으로 명칭을 통일하라고 꼼수를 가르쳐 주었다. “아니, 진짜로 얘가 일반 상식이 없어도 너~무 없어서 말이지... 금린대에 가서 한바탕 크게 사고 칠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야. 그러니 외워! 무조건 외워!” 난릉 금씨. 가문의 상징은 모란. 정확하게는 금성설랑모란문. 가문의 종주는 염방존. 금릉의 작은아버지이고 택무군과는 의형제 사이. 두 종주는 사이가 좋다. “잠깐만. 고소 남씨의 종주님은 가장 나이가 많은 남계인 선생님이 아니었어?” “맞을래?” 협박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야무지게 꿀밤을 때렸다. 때리면 머리에 잘 들어간다나. 이어 남경의는 이번 대 가주 염방존의 일대기로 전밀(傳密), 복살(伏殺), 결의(結義), 은위(恩威)는 꿰고 있는 것이 좋을 거라며 간단한 설명에 들어갔다.
전밀, 기산 온씨의 집에 잠입하여 정보를 빼내다. 복살, 온씨 가주 온약한을 암살하다. 결의, 금씨와 섭씨, 남씨의 종주가 의형제를 맺었다. 은위, 염방존이 선독의 자리에 올라 선독령을 추진했다.
음, 그러니까 제이슨 본 같은 사람이었나 보다. 잠입에 암살에... 화려하고 반짝거리는 외모로 뮤지컬 장르를 떠올리기 쉬우나 실제로는 장르가 느와르인 사람이었다. “잘 해야 해, 걸람. 진짜로 금린대로 가서 잘 해야 한다고. 아님 너 죽어.” “응, 노력할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금린대에 도착하기 전에 꾀를 내어 도중에 다른 곳으로 달아날 작정이었다. 운심부지처에서 금린대까지 두 다리로 걸어서 가려면 며칠을 가야 했고, 중간에 강을 건너거나 여장을 풀 일이 분명 있을 터였다. 죄인처럼 묶어 끌고 가지는 않을 테니 사람의 시선을 피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거고, 뭣하면 배에서 뛰어내릴 각오도 했다. 수영을 못해 물을 먹겠지만 익사할 일은 없다. 죽었다고 여기면 찾는다고 법석을 떨 일도 없을 테니 가능하면 깊은 물을 골라 일을 저지를 작정이었다. 나중에 적당한 겉옷가지 하나 흘려보내면 익사했다고 여길 거다.
“뭔가 수상한데.” 남경의가 불경스럽게 나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꼭 그때 같잖아. 박선망 두 개 망가뜨렸던 날! 날이 늦었으니 그만 집으로 가라고 했더니 저런 표정을 짓고 공동묘지로 샜지. 분명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뜨끔하여 볶은 땅콩을 주워 먹는 척하며 시선을 피했다. “저거! 저거!”
금방이라도 드잡이를 할 것처럼 구는 친구를 도로 자리에 앉힌 남사추는 골치가 아프다는 걸 숨기지 않아하며 이마를 꾹꾹 눌렀다. 언제부터인지 남경의가 나만 보면 감정적으로 구는 것도 문제였지만 딴청을 부리는 나도 문제이긴 마찬가지였다. 내가 운심부지처를 겉돌며 마치 낯을 가리는 것처럼 굴고 있다는 건 두 사람 다 알아차린 뒤다. 왜 그러느냐 이유를 물어봐도 대답을 회피한 채 실실 웃기만 했더니 이제 더는 까닭을 묻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인내심이 닳고 있었다.
“정말로 사고 치면 안 돼요, 걸람. 요즘 같은 때는 더더욱요.” 이릉노조 위무선 사후 11년. 저승의 왕으로 군림할 것 같은 희대의 네크로멘서가 혹시라도 죽은 자의 모습으로 다시 이 땅으로 현신할까봐 수진계 사람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사후 첫 해, 아무 일도 없었다. 그 다음 해, 아무 일도 없었다. 그 다다음해, 역시나 별 일 없었다. “이릉노조의 제자라고 주장하는 무리가 나타나서 택무군이 신경을 많이 쓰고 계세요.” 10년쯤 지나니 슬슬 진퉁은 잊히고 대신 짝퉁이 나서서 설치기 시작했다. 염방존이 운심부지처로 방문하여 택무군과 상의한 일도 자칭 이릉노조의 제자라고 깝치는 무리에 대해서라고 한다.
“그래봤자 이릉노조의 이름을 내걸어 가짜부적을 비싸게 팔아치우는 사람들이겠지.” 나도 경의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그간 장터를 돌아다니면서 만났던 도사들은 영력이나 기를 쓰는 재주는 없었고 점수를 후하게 줘도 차력사 느낌이었다. 이릉노조의 초상화를 그려 파는 사람들도 제자를 자처했으나 음호부에 대해 물어보면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아냐, 경의. 이번엔 어른들 분위기가 제법 심각한 눈치던데.” “심각해봤자 저번처럼 피리를 불어 주시들을 덩실덩실 춤추게 하고 싶어 하는 놈들이겠지.” “농담이 아니라는데도 자꾸 그러네.” “흉시를 만들었다면 모를까, 위무선의 재주를 따라한 사람은 여태껏 아무도 없었어. 아니면 위무선이 다른 사람의 몸으로 탈사하여 진짜로 돌아왔다는 얘긴데 그럴 능력이 있음 10년이나 걸렸겠느냐고. 그러니 이번에도 죄다 헛소문이고, 어른들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야.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일 뿐이야.”
손을 번적 들고 질문했다. “경의나 사추는 흉시를 직접 본 적 있어?” 대답 대신 꿀밤을 또 맞았다. “너는 그런 거에 관심 갖지 말라니까 그러네.” 결론만 말하자면 사추와 경의는 흉시를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볼 수가 없었다. 이릉노조 위무선이 만들었다는 최강의 흉시는 이미 금린대로 끌려가 잿가루가 되었고, 이후 사술비법에 관심이 많은 자들이 흉시를 만들고자 했으나 재주가 부족하여 뜻한 바를 이룰 수 없었다.
남경의가 주먹으로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어디 가서 흉시 본 적 있느냐 묻고 그러면 안 돼. 진짜로! 지~인짜로! 금린대에 가서 흉시 어쩌고 입 벌리는 날엔 너 죽어. 흉시 금지! 귀장군 금지! 온녕 금지! 위무선 금지! 음호부 금지!” “뭔 금지가 그리 많아.” “농담이 아니야. 귀장군 온녕이 금릉이 갓난아기 시절일 적에 걔 아버지를 죽였거든.” “어? 금릉 네 아버지 안 계서?” “아...... 진짜!!” “그럼 어머니는?! 혹시 어머니도 안 계시는 건 아니겠지?!” “미치겠네. 금릉의 어머니는 위무선에게 살해당했어.” “맙소사. 그럼 내 학부모 면담은?!!!” “무슨 면담?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군.” 되었다. 어차피 금린대로 갈 생각 자체가 없었으니까. 그래도 어쩐지 어제 먹은 밥이 지금에 와서 체한 느낌이었다. 효성진 도장이 만든 진법이 파괴되었을 적에 금릉은 정신을 잃은 채 계속 엄마 아빠를 찾았다.
위장이 있는 부분을 손바닥으로 문지르자 남경의도 덩달아 속 아픈 표정을 지었다. “너, 진짜 금린대에 가서 잘 할 수 있겠어? 내가 진짜 걱정이 돼서 그래.” “정 힘들면 편지해요, 걸람. 택무군께 말씀드리고 다시 운심부지처로 돌아오게 할 테니.” “자, 그런 의미에서 복습이다. 흉시 금지! 귀장군 금지! 온녕 금지! 위무선 금지! 음호부 금지!” “에잇, 귀찮아. 아무렴 까무러치겠냐.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결론만 말하자면 까무러쳤다. 그것도 금린대 그림자도 못 밟아보고서 말이다.
“습격이다~!!!” 약속대로 나를 데려가기 위해 염방존이 자기네 수사들을 운심부지처로 보냈다. 그렇게 금린대로 귀환하려는 수사들과 합류한지 이제 겨우 반나절. 원래대로라면 염방존이 타고 있어야 했을 마차는 텅 비어 있었다. 도중에 그의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가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편지를 보낸 이는 청하의 섭 종주였다. 염방존은 말을 갈아타고 소수의 수행원들과 같이 청하로 길을 바꿨는데 습격을 계획한 복면의 무리들에겐 그 따뜻한 알림소식이 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분수를 모르고 선독의 자리에 오른 염방존은 죽어라!” 평소 제이슨 본에게 원한을 품은 무리가 제법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하늘에서 박쥐처럼 퍼덕이며 날아들어 시퍼런 칼날을 마차에 바로 꽂아 넣었다. “비었잖아!” 습격을 실패했음을 깨달은 복면인은 칼날을 나 같은 잡객과 하인들에게 돌렸다. 벌벌 떨고 있던 하인 하나가 지 목숨을 부지해보겠다며 내 등을 떠밀어 복면괴인에게 바쳤다. 복면괴인이 검을 휘둘렀고 어깨가 스걱 잘렸다. 쓰러지면서 투덜거렸다. 어렵게 탈주계획을 세웠는데 뭐 하나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다, 진짜.
제6장 구름 위의 무간, 끝.
Posted by 미야
2021/12/07 11:24
2021/12/07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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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구름 위의 무간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택무군에게 말대꾸를 한 일로 집안 제일 높으신 분이 화가 단단히 났다. 남선생님은 서슬이 퍼렇게 되어 문하생에게 명령해 날 정당 마루에 강제로 세우게 했다. 교훈을 뼈에 새기려면 매질을 해야 한다고 믿는 양반이라 찬바람이 쌩쌩 부는 얼굴로 책편(회초리)으로 무려 서른 대를 때리겠다고 했다. 절편은 크기가 빠따라서 어린애를 때리는 용도로는 적합하지 않다나. 그나마 봐줘서 회초리 서른 대였다.
문하생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바지를 허벅지 위까지 걷어 올렸다. “......” 오른쪽 어깨를 붙들고 있던 문하생이 내 몸에 남은 흉터를 보고 흠칫하더니 숨을 삼켰다. 잘렸다가, 찢어졌다가, 붙었다가, 도로 떼어내는 걸 반복하면 아무래도 흔적이 남는 법이다. 왼편에 선 문하생은 감정을 드러내는 건 적절하지 않다 여겼는지 아예 정면만 바라보며 내게 눈길을 주지 않았...... 남계인 선생님이 호랑이처럼 포효했다. “나라에는 정해진 규칙이 있고, 민간에서는 서로가 정한 약속이 있다. 이러한 약속을 무시하고 혼인을 장난처럼 여기었으니 네가 어떠한 만행을 저질렀는지 알겠느냐!” 읭? 지금 뭐라굽쇼?
거리를 두고 법정 증인처럼 뒤에 선 수사들이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밤마다 여성 수사들 거처를 찾아 뒷산을 헤맨다는 소문이 있어 어린 녀석이 밝힌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봤더니 정체가 단수였대. 그 주방에서 일하던 채수당 넷째아들 있잖아... 그 넷째한테 당장 혼인해주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 막 소리를 지르며 행패를 부렸다는 거야.’ ‘허어... 단수라고 차별하긴 싫지만 소동은 반갑지 않군.’ ‘어디를 가든 단수가 말썽이군. 얼마 전 거기서도 비슷하게 안 좋은 일이 있었다고 하지 않던가. 이름이 금현우... 금현우였을 거야. 전 종주의 혼외자식인 자가 단수취향이라서 저 사람이 좋아, 이 사람이 좋아, 이러고 엄청 해괴한 짓을 저질러 결국 성씨도 빼앗기고 모친 집으로 쫓겨났다고 하더라고.’ ‘나도 그 소문 들었는데. 그런데 그 단수 놈이 집적거린 대상이 하필이면...’ ‘크흠! 그건 말하지 마시게. 좋은 이야기도 아닌데. 그리고 마침 악보를 배우는 목적으로 손님께서 걸음을 하셨으니 실수로도 귀한 분의 귀를 어지럽혀선 안 될 것이야.’ ‘아무튼 말세로고. 깝데기가 벗겨지지도 않았을 나이에 남자를 덮치다니. 발칙하군.’ ‘채수당 넷째는 혼절하여 쓰러졌다던데?’ ‘깨어나선 소지품을 꾸려 집으로 도망쳤다더군.’ ‘미친놈이 결혼해달라고 쫓아오면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쳐야지. 현명한 처사야.’
왼편에 선 문하생은 귀가 안 들리는 척하며 여전히 정면만 쳐다보았다. 오른편의 문하생은 귀가 붉었다. 남계인 선생님은 단호했다. “때려라!” 맞는 건 괜찮아도 오해는 풀어야 했다. 나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남계인 선생님을 응시했다. 선생님은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기가 무섭게 금언술을 걸어 주둥이를 꿰매어 놓았다. 아니야. 그거 아니라고. 내 입! 말하게 해줘! 억울해. 오해야!
회초리를 다 맞고 난 뒤엔 상처에 약을 바를 엄두도 내지 못하고 한실 구석에 서서 다시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종아리가 아픈 건지, 아니면 의도치 않게 퍼진 헛소문이 억울한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나더러 단수취향이란다. 나에게 시비를 걸던 놈에게 연심을 품어 – SM 취향이냐. 그게 말이 돼?! - 결혼하자며 덤볐고, 청혼 받은 놈은 미친놈에게 순결을 잃을 수 없다며 운심부지처를 떠났...... 택무군을 보며 손가락으로 내 입을 가리켰다. 홧홧한 통증이 문제냐. 이러면 내가 가해자가 되어버리잖아!
금언술은 풀릴 기색이 없고, 한실은 주인의 기분을 대신하듯 온도가 싸늘했다. “종아리를 맞았음에도 반성을 하는 태도가 아니구나.” 억울하다고! 서안 앞으로 조로록 달려가 손짓 발짓을 열심히 했다. 홧김에 ‘결혼하자!!’ 소리를 질렀던 건 맞다. 그런데 ‘혼인빙자 욕설죄’가 ‘무고’보다 더 심한 취급을 받으면 그건 형평성이 안 맞지. 공평하게 따지려면 심안인지 심선인지 하는 애를 잡아다 물증도 없이 날 도둑놈 취급한 죄부터 물어야 할 거 아냐. 게다가 평소에 그렇게 날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는데. 그런데 걘 집으로 돌려보내고! 아, 그런데 걔 이름이 도대체 뭐지. 계속 이놈, 저놈, 부를 수는 없는데.
“이름도 모르고 청혼한 거냐!” 택무군이 책망하는 얼굴로 따졌다. 화가 단단히 나 평소의 우아하고 따뜻한 분위기는 간 곳 없고 냉랭하고 쌀쌀맞았다. 표정이 딱딱해지자 동생과 정말 일란성 쌍둥이처럼 빼닮아 내심 신기했다. 함광군이 형장, 형장, 이러고 극존칭을 쓰는 걸 보면 차이가 많이 나는 형제인데 냉기를 저리 풍기자 하루 한시에 태어난 사람들 같았다. “손바닥을 내밀거라!” 어른에게 말대꾸한 걸 꾸짖기 이전에 예절교육이 더 절실하다며 보충설교가 이어졌다. 여기서 보충설교라 함은 손바닥을 대나무 편책으로 때리는 걸 의미한다. 중학교 시절에 플라스틱 자로 손바닥을 맞는 것처럼 따끔거리는 게 느낌이 비슷했다. 내 몸 상태를 고려하여 일부러 힘을 빼고 때리는데도 벌이 와서 침을 쏘는 듯했다.
“그렇군요. 저 아이가 최근 둘째 형님의 골칫덩이라는 그 걸람이라는 아이군요.” 악보와 고금을 준비하고 네발 향로 옆에 다소곳이 앉은 이가 낮은 소리로 쿡쿡 웃었다. 공식적인 접객실인 아실이 아니라 개인 처소인 한실에서 잠시 자리를 비운 택무군이 돌아오길 기다려도 괜찮은 특별한 손님 – 금언술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 벌겋게 변한 손바닥을 감추며 그를 향해 가만히 머리를 조아렸다. 사내는 미간에 붉게 단사를 찍고, 옷깃과 소매, 허리띠에 화려한 꽃을 수놓은 옷을 입고 있었다. 금사로 자수를 놓은 무늬가 빛에 따라 번쩍번쩍 빛이 났다. 과한 느낌으로 금을 써 복장이 요란스러울 법도 한데 사람 자체가 화사해서 그런지 잘 어울렸다. 머리에는 비단으로 만든 검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사극에서 관리들이 쓰고 다니던 관모와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중앙으로 큰 보석을 달아 보다 화려했으며 역시나 테두리로 금박을 입혀 번쩍번쩍했다. “명월청풍 효성진에게 이름을 받은 아이라고 들었는데.” 입꼬리를 올려 살짝 웃자 방안이 환해졌다. “과연 그렇군. 바람이 불어 운심부지처의 나무가 소란스럽구나. 산바람이 거세면 숲이 시끄러우니 그래서 걸람(傑嵐)이야. 명월청풍 효성진이 사람을 잘 보았어. 너 때문에 둘째 형님의 장탄식이 늘었다. 이 말썽꾸러기 악동아.” 현대식 양복을 입고 수제 구두를 신고 있으면 전도유망한 배우라고 해도 통할 것 같은 사람이었다. 택무군과는 종류가 다른 미인이었다.
척 봐도 혈연관계는 아닌데 서로 형님, 아우님, 호칭을 하는 것으로 보아 꽃이 만개한 도원에서 날을 잡아 같이 술을 마신 관계가 아닐까 싶었다. 아우임을 자처한 자가 하얗고 고운 손을 모아 택무군을 향해 예를 표했다. “둘째 형님, 이 아우의 식견이 아직 짧습니다만, 그래도 감히 말씀드리자면 예절의 배움이 성현의 글을 익히는 것보다 먼저입니다. 예(禮)를 모르면 덕(德)을 모르고, 덕(德)을 모르면 도(道)에 이르지 못하니까요. 그러니 그 아이에게 급한 건 글공부가 아니고 예절공부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도울 일이 있음 돕겠습니다. 형님께서 저 아이로 인해 고민이 많으시니 이 아우, 가만히 있지 못하겠습니다.” “아니야. 너까지 고민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둘째 형님. 저는 조카 여란이 때문에 속을 썩인 적이 많아 이런 문제엔 능숙합니다. 그런데 둘째 형님은 지금껏 천둥벌거숭이를 다룬 적이 없으시지요. 함광군은 어려서부터 모두의 모범이었고 몸가짐이 특출했으니 어른 속을 썩일 일이 언제 있었겠습니까.” 택무군은 동생 칭찬을 들었음에도 어쩐지 할 말이 있다는 얼굴로 잠시 머뭇거렸다. 보아하니 그 함광군도 어른 속을 제대로 썩인 적이 있는 거구먼, 눈치껏 때려 맞췄지만 겉으로 내색하는 건 주제 넘는 일이었다. 지금의 대화 주제는 함광군이 아니라 말썽꾸러기인 나였다.
학부모 면담을 요청받고 교무실로부터 콜을 받은 젊은 아버지의 안색을 한 택무군이 눈알을 위로 굴렸다. 평소에는 볼 수 없는 모습이어서 옆에 선 나는 그저 황송할 뿐이었다. “조카가 또 말썽을 피웠느냐?” “마음이 조급하여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하니까요. 개를 키우면 책임감도 생기고 조금 의젓해지지 않을까 생각하고 새끼 영견을 주었어도 똑같이 말썽을 부리더군요. 얼마 전에는 이종사촌 아이들과 몸싸움이 났는데 반성하라 꾸짖었더니 가출을 하고, 이튿날 이릉노조의 제자라는 것들을 잡는다고 장터를 뒤집었습니다. 알고 봤더니 이릉노조의 제자가 아니라 시장에서 가짜 부적이나 팔던 장사꾼이었지요.” 이번에는 꽃무늬 남자가 눈알을 위로 굴렸다. 두 사내가 한숨을 쉬자 축구공으로 학교 유리창을 깨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그런데 뭔가 익숙한 내용이었다. 영견, 이릉노조의 제자, 가짜 부적. 우울해하는 두 학부모 옆에서 같이 눈알만 또로록 굴리고 있는데 택무군이 부피가 대단한 책을 건냈다. 방금 손바닥을 때려놓고 아픈 손으로 필사하라는 건 아닐 테니 머리 위로 들었다. 정답이었다. 잘 보이는 곳에서 책을 머리 높게 들고 있으라 지시한 택무군이 손님과 같이 악보를 펼쳤다. 고금을 연주하면서 둘이서 새 노래를 배우려는 것 같았다.
연주에 들어가기에 앞서 줄을 튕겨 조율을 하면서 꽃무늬 남자가 말했다. “둘째 형님, 진심이에요. 금린대로 보내 1년만 예절을 공부하게 하세요. 그럼 사람이 될 겁니다.” 금린대! 그 말에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릴 뻔했다. 아슬아슬하게 자세를 바로잡고 놀란 눈으로 사내를 다시 봤다. 제대로 보지 못한 나, 반성해라. 꽃무늬가 아니라 모란 무늬였다. 저 화려한 것은 모란이었다. “왜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라느냐. 금린대에 가면 밥을 굶을 것 같아서 그러느냐?” 내 쪽을 보며 사내가 활짝 웃었다. “하인으로 여기진 않을 테니 크게 염려하지 말거라, 걸람아. 둘째 형님이 네게 그리 신경을 쓰는 걸 알고 있는데 아무렴 그런 네게 물을 긷고 산으로 가 나무를 하라 시키겠니. 금린대로 오면 너는 예절공부와 몸가짐을 배우게 될 거다. 마침 조카 여란이가 네 또래이니 친구가 되어도 좋겠지. 조카는 영견 꼬마 선자 말고는 친한 친구가 없어 늘 외로워 했단다. 그러니 꼭 친구가 되어주렴.” 그때까지도 우거지상이던 택무군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영견 이름이 꼬마 선자라고? 그 이상한 이름은 누가 지었지?” “조카가 직접 지었답니다. 귀여운 이름이지요?” “귀엽지 않고 이상... 커험! 아니네. 귀엽네. 잘 지었어. 귀에 쏙 들어오네.”
내 다리 맛있다고 질겅질겅 씹던 똥강아지 걔도 이름이 꼬마 선자였는데. 아니겠지? 아닐 게야. 네이밍 센스가 괴상한 사람이 또 있었던 거지. 걔 주인 이름은 금릉이었지 여란이가 아니었거든. 응, 아니야.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책을 머리 위로 드는 일에 온 힘을 다했다. 드디어 악기 조율을 마친 두 사람이 악보를 보며 금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맑고 청아한 음색이 한실을 가득 채워나갔다.
Posted by 미야
2021/12/04 19:40
2021/12/04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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