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 : 1 : 2 : 3 : 4 : 5 : 6 : 7 : ... 16 : Next »

[마도조사] 풀피리 42

제7장 나라카(地獄)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물결에 일렁이는 태양을 본 것 같다고 막연히 생각하는 것과 물에 둥둥 떠내려가고 있음을 깨닫는 건 거의 동시였다.
주변에서 큭큭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높이가 허벅지 정도밖에 오지 않는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으면 바나나를 밟고 넘어진 것과 마찬가지의 효과가 발생한다. 웃음이 터지는 거다.

한참을 허푸거리며 몸을 세우자 높이가 낮은 점방 다리가 보였다. 큰 비가 오면 쉽게 떠내려가도록 설계된 점방 다리는 허름한 모습과 달리 지나가는 통행인이 제법 있는 편이었는데 이 근방의 물살이 약하고 물의 깊이가 낮아 먼 길을 돌아서라도 구태여 이쪽으로 건너가는 눈치였다.
그리고 나는 그 다리 위를 걷다 아무래도 발을 헛디디고 떨어진 것 같다.
“젊은 놈이 대낮부터 술에 취했냐? 아하하!”
짐을 지고 가던 지게꾼이 내 꼬락서니를 보곤 배가 터지도록 웃느라 바빴다. 여인들도 마찬가지로 손가락질을 하며 웃었다. 어지간히도 모양 빠지게 굴렀던 모양이다.

귀에 들어간 물을 빼기 위해 머리를 탁탁 소리 내어 때렸다.
웃긴 건 웃긴 거고, 나는 누구고 여긴 어디여.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
구경꾼들의 웃는 소리가 요란한 중에 물살을 가르며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옷을 입은 채로 물기를 쥐어짜고 있자 그제야 사람들이 구경을 멈추고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필름 중간이 깨끗하게 잘려져 나갔는디?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거?
‘금린대로 가는 길에 습격이 있었고, 눈을 베였고, 납치를 당했고, 고문을 당했고...’
강가 주변을 두리번거려봤다. 당연한 얘기지만 생전 처음 와보는 낯선 곳이었다.

그도 그렇지만 시선의 높이가 평소보다 높아 뭔가 잘못된 듯해서 걱정스럽다.
입고 있는 옷의 소매 길이가 졸아든 연근처럼 짧았고 바지도 발목이 드러났다. 이래선 동생 옷을 잘못 입고 나온 몰골이다. 운심부지처에선 튼튼하고 좋은 옷감을 쓰는 줄 알았는데 물에 젖으면 확 줄어드는 성질이 있었던 걸까, 혼방이 아닌 면 재질의 옷을 잘못 빨면 줄어든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다.
‘햇볕에 말리면 지금보다 더 줄어드는 거 아냐? 그럼 곤란한데.’
근처 나뭇가지에 겉옷을 잘 펴서 널어두고 근처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앉고 나서도 시선의 높이가 예전 같지 않아 어쩐지 어색했다.

“어이, 거기! 다리에서 떨어진 덜 떨어진 놈!”
가죽 보호구를 착용한 남자 둘이서 손을 깔대기 모양으로 만들어 입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물 많이 먹었냐? 다친 곳은 없고?”
방범대원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제대로 군사훈련을 받은 건 아니지만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치안조직 소속의 사람들인 것 같았다. 옆구리에 소박한 모양의 칼을 하나씩 차고 있었고, 소속감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멋을 내기 위함인지 감청색 망토 같은 걸 두르고 있었다.
나는 괜찮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팔을 흔들어 보였다.

두 사람이 자기네들끼리 대화를 나눴다.
“지나가는 사람이 너무 많아. 통제를 할 필요가 있겠어. 다리도 너무 흔들려.”
“괜찮아. 점방 다리는 원래 흔들리는 법이니까. 균형을 못 잡고 떨어지는 사람이 이상한 거지. 염곤 나루터에서 수신귀가 나타났다고 해서 다들 이쪽으로 몰려오는데 통제까지 하면 더 혼란해져.”
“상황을 더 두고 볼까나. 그래도 다리에서 떨어진 사람이 있다고 보고는 하는 게 좋겠어.”
“보고를 하는 김에 확실히 하자고. 어~이. 거기 홀딱 젖은 놈! 누가 밀어서 떨어진 건 아니지?”
모르겠다. 기억이 안 났다. 어쨌든 다들 웃었으니 남들과 시비가 붙은 건 아닐 거다.
나는 재차 팔을 흔들어 걱정하는 그런 종류가 아니라고 표현했다.
누가 밀어서 라기 보단 눈이 흐릿해서다. 상처는 거진 나았어도 시력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발을 헛디뎌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그나마 빠진 곳의 깊이가 얕아 다행이었다. 최근 비가 내린 적이 없는 거다. 청수오는 평소 수량이 적었지만 집중호우가 쏟아지는 날엔 수위가 급격히 올라...

“잠깐. 이건 내 기억이 아닌데?”
쓰게 웃으며 고장 난 라디오를 고치는 요령으로 머리통을 툭툭 쳤다. 라디오 채널이 엇나가 잡음이 잔뜩 섞인 느낌이었다. 옆에선 간첩들이 난수방송 중이고 바늘을 미세하게 조정하자 라디오 DJ의 말소리와 음악소리가 겹쳐서 들려오는 거다. 이쪽에서 클래식 음악을, 저쪽에선 성인 가요 타임이다.
이를 어쩐다.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꿈이 아니었고, 머릿속으로 다른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여긴 어렸을 적에 살았던 곳과 가까운 장소라 잘 아는 것뿐이야.》
“저기요? 온서염 씨?”
《왜.》
“진짜로 온서염이네.”
완전 망했다. 도대체 무엇부터 잘못되었다고 해야 할지 짐작도 안 갔다. 사실 전부 잘못되었다.
콧물인지 강물인지 모를 국물을 들이마시고 침착함을 가장했다.
그래봤자 온서염이 나고, 내가 온서염이다.

“차근차근 하자고. 일단 여기가 어디야.”
《형주.》
강원도라고 하면 내가 알아 듣냐고! 삼척, 동해, 강릉, 이런 식으로 압축해줘야지!
“보다 자세하게 안 되겠어? 정신을 차렸는데 장소도 모르겠고, 날짜도 모르겠고, 지금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황당하잖아. 눈치껏 보아하니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그동안 잘만 돌아다닌 눈치인데 이거 전부 네 짓이지?”
《그럼 네가 기절해 있는 동안 다리 뻗고 누워 있으라고? 열흘이나?》
“열흘?!!! 그럼 깨웠어야지!”
《항의는 저쪽에다 해. 깨우고 싶어도 깨울 수 없었어. 초혼을 한답시고 네 혼을 들었다 놓았거든.》
“초혼?”

습격이 있었다고 보고가 올라갔을 거고, 하인들 대다수가 살해당했다. 나는 실종상태였다. 아니, 시체만 못 찾은 상태였다. 나 홀로 살아남았을 거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을 거다.
그래서 혼백이라도 불러 사연을 들어보자며 운심부지처 사람들이 걸람을 부르며 초혼을 한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꿈인지 생시인지 어두운 방안으로 택무군과 남계인 선생님, 함광군, 그리고 세 명의 다른 수사들이 기괴한 음률로 고금을 튕기고 있었다.
‘나 아직 안 죽었거든요?! 빈사상태이긴 한데 안 죽었거든요? 당장 멈추라고, 멈추라고! 이 개새끼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택무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초혼의식을 서둘러 중단시켰다.

손바닥으로 이마를 철썩 때렸다. 그것도 꿈이 아니었다는 거지, 미치고 환장하겠네.
욕설을 듣고 남계인 선생님 거품 물었겠군. 그것만으로도 이미 사형 확정이다.

“그래서 열흘 동안 의식불명이었다고?!”
물이 줄줄 흐르는 바지를 쥐어짜며 물어보았더니 온서염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내 혼이 정신을 못 차리는 동안 혼자 남은 온서염은 도주를 결심, 예전에 어머니와 같이 숨어 살던 집을 떠올리고 거기로 찾아가려 했단다.
“거기가 어디인 줄은 알고?”
나로서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초혼의 실패로 내가 안 죽었다고 밝혀진 셈이니 고소에서 수사들을 풀어 내 행방을 미친 듯이 찾고 있을 텐데 얘는 엄마와 살던 집에 가겠다고 제멋대로 딴 짓 중이었다. 도중에 강에 빠져 물이나 먹고. 자~알 한다.
《시끄러. 너도 고소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잖아.》
“당연히 아니지. 고소로 잡혀가면 죽어. 거기 사람들이 사술을 얼마나 끔찍하게 여기는데.”
꿈이라고 여겼지만 주시를 잡아먹은 기억이 있다. 어쩌면... 산 사람도 먹은 것 같다.
토기가 올라오려 했다. 실제로도 헛구역질을 했다.
《먹지 말라고 했을 적에 말을 듣지 않은 건 너야.》
“됐고요. 그만 꺼지세요.”
혼선된 주파수를 어떻게든 고쳐놓던가 해야지. 졸지에 이중인격자가 되어버렸다.

제대로 마르지 않아 쉰내가 진동하는 겉옷에 팔을 꿰었다.
외지인의 몸으로 물가에 앉아 혼잣말을 하고 있음 사람들 눈에 너무 띈다. 지금도 점방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 다수가 내가 있는 방향을 흘끔거리고 있다. 일단 다리는 안 건너는 것이 좋겠다. 고개를 숙여 땅만 쳐다보며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그래서 옛날 숨어 살던 곳이 어디라고?”
《꺼지라고 할 때는 언제고.》
온서염이 단단히 삐진 투로 말했다. 나는 살살 달래는 목소리로 산 사람 소원도 들어주는데 죽은 사람 소원을 못 들어주겠냐며 재차 거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옛날에도 숨었으니 지금도 숨을 수 있지 않을까.”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그리 말했다.

온서염의 어머니는, 그러니까 내 어머니는... 이쯤해서 혀를 깨물었다.
어머니는 이릉노조 위무선처럼 일종의 마법사였던 것 같다. 아들이 병사하자 남편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음철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어쩌면 ‘훔쳐내어’ 주시로 되살려냈다.
그리고 은밀한 곳에 아들을 숨겨뒀다.
사실을 캐묻자 남편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아들이 있는 방에 밀어 넣었다.

앞만 보고 걷는 속도가 나도 모르게 빨라졌다. 다리가 엉킬 지경이었지만 속도를 줄이진 않았다.
남편을 죽이고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몸을 숨겼다.
그 와중에도 여러 가문의 수행자들을 잡아 아들에게 먹였다. 당시는 전쟁 중으로 – 나도 모르게 나뭇잎을 잡아 거칠게 비틀었다. 엿본 기억이 전부 망상이나 꿈이 아니라고 한다면 온서염이 먹어치운 사람은 두 자리 수를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다.
그래서 병사를 풀어 모자를 잡아 죽이려한 거다.
신음이 터져 나왔다.
쫓기고 쫓겨 어머니는 결국 죽었다.
여자는 자신의 최후를 짐작했던지 도중에 아들을 흙속에 파묻었다.
‘기혈을 눌러 반 가사상태로 만들기는 개뿔...’
직접 온서염을 죽여 묻었던 게 아닐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자신의 얘기지만 객관적으로 접근해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타당하다.
그리고...... 여섯 살로 추정되는 걸람은 지저분한 모습으로 소산 거리를 방황하다 사람들 눈에 띄었다.
채소 가게 아들이 이거나 처먹으라며 썩은 과일을 던졌다.
걸람은 과일을 먹고 탈이 단단히 났다. 열이 펄펄 끓었고 의식이 없었다. 그 상태로 의장에 던져졌다.
그래서 죽었다. 아마도 그랬을 거다. 탈수증이 왔는데 자연치유가 되었다고? 그럴 리 없다.
그렇게 몇 번이나 죽고, 몇 번이나 되살아나고, 다시 죽고, 다시 살아나고... 자리에 우뚝 서서 원망을 담아 하늘을 쳐다보았다.

여기는 지옥이다.
나는 이 세계에 갇혀버렸다.

Posted by 미야

2021/12/14 16:18 2021/12/14 16:18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2239

Leave a comment

[마도조사] 풀피리 41

제7장 나라카(地獄)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삼킨 물을 토하는 거라 생각했다.
입안에 가득 찬 이물질을 뱉어내는 동안 호흡이 어려워 괴로웠다.

이발소 의자에서는 벗어난 상태였다. 엎드린 자세로 정신을 차린 곳은 상투를 푼 채 칼을 쓰고 앉아있으면 어울릴 법한 감옥이었고, 뿌옇게 흐려진 눈에는 온통 검댕밖엔 안 보였다. 어쩌면 눈이 잘못되어 얼룩이라 착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 요란하게 쿨럭거렸다. 그런데 실제로 뱉어낸 물의 빛깔이 석탄의 색이었다. 온통 뿌옇고 검었다.
기침이 멎지를 않았다. 이제 코로도 검은 가루가 쏟아졌다.
‘그렇군, 꿈을 꾸고 있는 거군.’
코로 가루를 뿜고 있음에도 몸은 가벼웠다. 역시나 꿈이다. 그렇지 않다면 내 몸 주변으로 나풀거리며 날아다니는 검댕의 존재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검댕은 빠르게 멀어졌다가 봄의 왈츠를 추듯 스륵 돌아 나에게로 돌아왔다. 손으로 가볍게 쥐자 정전기가 일어난 것처럼 따끔했다. 날벌레에 물린 것 같기도 했다. 손을 펴자 날파리처럼 생긴 것이 날아올랐다.

갑자기 카메라 앵글이 바뀌며 시야의 높이가 변했다. 앉았다가 벌떡 일어서기라도 한 것 같았다.
꿈이라면 가능한 일이기에 이상하게 여기진 않았다. 덜 회복되어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옥문을 움켜쥐고 흔드는 내 손이 들어왔다. 배추 250근을 한 번에 들어 올리는 괴력에 정체불명의 검은 가루까지 합세하자 강철로 만든 경첩이 둘로 쪼개지며 옥문이 주저앉았다.
큰소리가 나자 경계를 서던 자가 횃불을 들고 뛰어왔다.
가까이 불을 비춰보고는 어째서인지 비명을 질렀다.
검은 가루가 파리 떼처럼 몰려가 그 남자의 얼굴을 덮었고 자지러지던 비명이 뚝 그쳤다.
‘와... 특수효과가 꼭 영화 미이라 같다.’
사람이 저리 죽을 리 없으니 역시 꿈이다. 쓰러진 남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쳐 출구를 찾았다.

한쪽은 복도였고 한쪽으로 감옥 같은 공간이 길게 나열되어 있었다. 그 감옥의 어둠 깊은 속에서 그르륵, 그륵 이러고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소음이 들렸다.
‘이건 워킹데드 1시즌이네.’
가까이 접근하면 썩은 손톱이 달린 마른 여자의 손이 튀어나와 벽을 긁을 것이다.
‘이곳에 죽은 자가 있음! 접근하지 마시오.’ 경고문이 걸려 있음 딱 주인공이 깨어난 병원 장면이었다.
호기심이 생겨 그 안을 들여다보고 싶었는데 원래 꿈은 자각몽이 아닌 이상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이라서 금세 장면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불편한 다리로 계단을 오르는 중이었다. 시야가 좋지 않아 몇 번을 미끄러졌는지 모른다.
무릎을 찧었을 적엔 제법 아팠다.
‘응? 아프다고?’
허우적거리다 말고 이상하다 생각했다. 꿈에서 넘어지면 무릎이 아픈가?
벽면을 더듬거리며 방향을 잡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쩌면 턱이 아픈 걸 착각한 것일 수도 있다. 멍들고 어금니가 빠져 얼굴이 퉁퉁 부었다.

계단을 올라가 출구를 찾았다고 여겼는데 막다른 방이 나왔다.
이번에도 검은 벌레가 출동해서 자물쇠를 갉아먹었다. 황제의 보물창고 문지기도 이 벌레들 앞에선 맥을 추지 못할 것이다. 커다란 쇠붙이가 형태를 잃고 추락하자 안에서 희게 눈을 까뒤집은 주시들이 무더기로 튀어나왔다. 입고 있는 옷은 단정했으나 피부가 썩어 냄새가 엄청났다. 그런 놈들이 딱딱 턱을 놀리며 내 몸을 씹으려 했다.

이러다 이빨 자국 생긴다 걱정하던 찰나 위치가 역전되어 내 입으로 남의 살이 가득 찼다.
이제 살을 씹고 있는 건 걸람, 피를 흘리는 자는 아버지가 되었다.
아버지가 발버둥 쳤다.
‘이게 무슨! 이게 무슨!!’
나는 눈을 하얗게 까뒤집고 게걸스럽게 살을 탐했다.
‘살려주시오! 부인! 살려줘!’
문밖에서 어머니가 지키고 서계셨다.
여자는 남편이 산채로 잡아먹히고 있음에도 결코 문을 열지 않았다.
‘상공, 아들을 위해섭니다. 온서염, 내 아들아. 그렇게 먹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주지 않았느냐.’
걸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고 씹던 살을 뱉어낸 아이는 까맣게 변한 손을 뻗어 아버지의 맨 살을 더듬었다.
‘명혼을 삼키는 거다. 붙잡고 끌어와 네 것으로 삼으렴.’
어머니의 지시에 아이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겁에 질린 아버지가 어떻게든 걸람을 뿌리치려 했지만 아이는 괴물처럼 자신의 입을 아비의 심장이 있는 피부로 가져갔다.

《그만둬. 이런 걸 떠올리고 싶진 않아.》
경고하는 온서염의 목소리가 들렸고 나는 걸어 다니는 시체로부터 얼른 입술을 떼어냈다.
《그런 건 먹지 마. 여기서 나가.》
온서염의 말대로 더는 움직이지 않게 된 시체를 바닥에 집어던졌다.
시체 곁을 방황하던 검은 벌레들이 꾸물거리며 미련을 드러냈지만 내가 다른 길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하자 얌전히 따라왔다. 뒤를 돌아보자 흐릿한 검댕 얼룩이 꼭 도둑놈이 남긴 발자국처럼 보였다.
그 자국이 재밌다고 생각하며 도로 앞을 향했는데 갑자기 벽이라고 생각한 곳에서 창이 튀어나와 내 옆구리를 깊게 찔렀다.

“아?”
벽이 아니라 벽으로 위장된 통로였다.
창을 든 남자가 날카롭고 짧게 휘파람을 불어 동료에게 신호하자 이번엔 검을 든 사람이 나타났다.
이런 일에 대비하여 평소 훈련을 해왔는지 창과 검의 호흡이 딱딱 맞았다.
“흉시야? 이거 흉시냐고. 얼굴이 피범벅이잖아.”
“몰라. 어쨌든 물리면 안 돼. 최대한 벽으로 밀어!”
그러다 검을 들고 있는 쪽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무기를 떨어뜨렸다. 돌아보자 검댕이 그의 얼굴을 빈틈없이 덮고 있었고, 한눈에 봐도 살 가망이 없어 보였다.
창으로 미는 힘이 약해졌다. 흉살을 당한 동료의 모습에 놀라 무의식적으로 팔에서 힘을 빼버린 거다.
옆구리 살이 찢어지는 걸 개의치 않아하며 몸통을 비틀자 창을 든 자의 자세가 나빠졌다.
그걸 기회로 그 자의 목덜미를 와지끈 물어뜯었다.
《먹지 말래도.》
온서염의 잔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며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눈이 제대로 낫지 않아서인지 소매에 묻은 체액의 색이 붉지 않고 검었다.
아무래도 눈을 찾아야겠다. 불편해서 참기 힘들었다. 잘 보이는 눈으로 갈아 끼워야겠다.
그리 생각하며 여기저기를 쏘다니다 미로 같은 구조를 벗어나 운 좋게 출구를 찾았다.

오랜만에 들이마시는 공기가 시원했다.
검댕으로 얼룩진 눈은 빛을 거의 구분하지 못했지만 머리 위로 따스한 햇살이 비치고 있음은 냄새로도 알 수 있었다. 화창한 날이었다. 시각은 대낮이었다. 운심부지처의 문하생들은 지금쯤 몸을 풀고 체력단련을 한창 하고 있을 때였다.
다만 지금 여기서 빠르게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은 거기 문하생들처럼 체력단련의 시간을 가진 눈치는 아니었다. 소지한 무기의 종류가 압도적으로 창이 많았는데 몸에 금단을 맺고 수련을 하는 사람들치고 창술을 연마하는 자는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창은 리치가 길어 일반인들이 익히기엔 좋은 무기지만 영력을 사용하는 무기로는 걸맞지 않았다. 그러니 여기 모인 사람들은 도를 수련을 하는 자가 아니고...... ­
“야, 이 새끼들아! 깜짝 놀랐잖아. 니들은 예의도 없냐. 꼼짝 마라, 이런 말부터 해야지!”
사극 드라마도 안 보는 것들 같으니.
에워싸고 창으로 찌르려 해서 하마터면 고슴도치가 될 뻔했다.
나를 보호하려는 건지 철가루 검댕이 미친 듯이 회오리쳤다.
그깟 석탄 가루라고 얕보면 큰 코 다친다. 오는 길에 몇 명을 먹어치운 뒤라 힘이 장사였다.

비명소리가 요란했다. 검댕 묻은 얼굴을 쥐어뜯으며 바닥을 뒹굴던 자들이 칠공으로 피를 뿜었다.
거치적거린다. 비켜라.
똑바로 걸어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느라 바쁜 놈 앞에 섰다.
음...... 신장의 차이 탓에 올려다보고 있자니 불쾌했다.
내 마음을 읽었는지 철가루 검댕이 일제히 몰려가 남자의 몸을 강제로 찍어 눌렀다.
“거의 숨을 쉬지 않았...는데, 어떻게?! 분명 그랬는데?! 그리고 그 힘은...!! 허억.”
손이 작으니 손바닥을 활짝 펴도 남자의 얼굴을 다 덮는 건 무리였다. 농구공처럼 가지고 놀다 땅바닥에 드리볼을 해볼 작정이었는데 이래선 무리다. 쯧, 하고 혀를 차고 손을 치우자 손가락 숫자만큼 눌린 자국이 생겼다. 둥글게 눌린 붉은 자국이 연지라도 찍은 모습이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아니, 그런데 마음대로 웃지도 못해.
내가 웃자 강제로 꿇려져 나를 올려다보던 눈에 공포가 서렸다.
무서워하긴. 나는 물고문도 안 할 건데. 상냥하게 웃으며 덥석 남자의 머리통을 물었다.
비명소리로 귀가 다 얼얼했다.

“이건 꿈이지?”
《응.》
“그리 기분 좋은 꿈은 아니네. 프로이드의 이론대로라면 나는 아직도 구강기 단계라는 거잖아.”
피투성이가 된 입을 닦으며 그렇게 말했더니 온서염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사실 나도 잘 몰라. 교양수업으로 심리학 개론 들은 지도 오래고... 구항남잠생, 구강기-­항문기-­남근기-­잠복기-생식기, 이러고 개굴개굴 염불 외웠던 것밖에 기억 안 나. 그런데 구항남장생 이런 거 몰라도 사는 데 아무 지장 없지. 우울하면 치맥이고, 슬프면 노래방이야.”
《치맥이 뭐야?》
“그러게. 치맥이 뭘까. 그게 어떤 맛이었는지 이젠 생각도 안 난다.”

내가 열고 나온 길을 따라 제법 되는 숫자의 주시들이 비틀비틀 걸어 나왔다.
다들 썩은 내를 심하게 풍겼고 눈은 동공이 없이 흰자만 보였다.
농사를 짓던 사람들일까, 아님 가게에서 장사를 하던 사람들일까.
입고 있는 옷의 옷감이 좋은 것으로 보아 생전에 그래도 나름대로 한 가닥 했던 사람들이었을 거다. 어떤 사연인지는 모르나 시변한 이후부터 오랫동안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던 것 같다.
놀랍게도 그중에는 여인도 있었고, 나이 많은 노인도 섞여 있었다. 얼굴이 썩어버린 탓에 전부 형제자매처럼 보였는데 어쩌면 생전에도 한 가족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은 엄마, 이 사람은 아빠, 그리고 저기서 구멍 난 머리통을 맛있게 먹고 있는 건 삼촌...
아비규환이었다. 검댕 벌레들까지 합세해서 서로 먹고 먹히고 난리였다. 쩝쩝 소리가 요란했다.

이제 그만 꿈에서 깨고 싶다. 머리를 주먹으로 툭툭 때렸다.
왜 깨질 않는 거지. 게다가 눈은 왜 이렇게 시리고 쑤시는 걸까.
머리를 들자 물속에 잠수한 채 올려다 본 햇님처럼 일렁이며 반짝이는 밝은 빛이 보였다.
어쩐지 그게 꼭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느껴져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Posted by 미야

2021/12/10 17:09 2021/12/10 17:09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2238

Leave a comment

[마도조사] 풀피리 40

제7장 나라카(地獄)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사람은 의외로 튼튼한 구석이 있어 손가락뼈가 다섯 번 부러지는 정도로는 의식을 잃지 않았다.
웅웅거리는 귀로 소리를 듣고, 침 흘리는 입으로 신음을 뱉으며 기절하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상대는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며 고통의 가감을 조율했다.
여기가 어디고, 나는 누구인지를 한참 헷갈리고 있는데 뺨을 여러 번 맞았다.
눈을 떠도 앞이 새카매서 제대로 반응을 못했더니 마지막에는 주먹으로 후려갈겼다.
목구멍으로 빠진 어금니가 넘어가는 걸 느끼며 흐느꼈다. 어떻게든 편안해지고 싶어 차라리 더 세게 맞고 싶었다. 기절만 하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효성진 도장을 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 그동안 난 산속에 살인 곰이랑 같이 갇혀 있었다고.”
그동안 내가 떠들어댄 내용은 두서가 없었다. 아무튼 닥치는 대로 떠벌렸다. 배추 배달을 하면서 얻어먹던 엿기름 바른 누룽지 이야기에 밭에 거름을 뿌리던 진소 노인 이야기까지 다 했다. 약양의 의장에 숨었던 일, 내세에 부자가 되기를 기원하며 지전에 일억 원, 십억 원 금액을 적었던 것도 떠들어댔다. 송자침이 주먹밥 하나 보태어준 적 없으면서 나더러 덩치가 작다 흉봤던 것도 시시콜콜 일러바쳤다.
“이봐요... 듣고 있어?”
목이 타들어갔다. 그렇지만 물을 달라고 부탁하기가 겁이 났다.
고문이 취미생활인 저 자는 나에게 물을 먹인다면서 입이 아니라 콧구멍에 주전자 주둥이를 꽂고도 남았다. 앉은 의자의 기울어진 각도를 보아 물고문 코스는 여흥거리로 이미 준비가 되어있을 거였고, 내가 먼저 물을 달라고 하여 고통을 앞당기고 싶진 않았다.
“듣고 있냐고. 이 씨발 잡놈아. 5년 동안 아무 소식을 듣지 못했어. 효성진 도장이 어디서 잘 살고 있는지는 나도 몰라. 알았음 내가 짐 싸들고 쳐들어갔을 거야.”

문득 효성진이 나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내용이 떠올랐다.
난릉 금씨와 고소 남씨는 한패다. 믿지 마라. 미안하다.
잘 살고 있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소식하진 않지. 나는 넋 나간 사람처럼 흐느끼며 웃었다.

“이제 음호부에 대해 말해봐라.”
“켈로그 콘푸로스트. 아침마다 호랑이 힘이 솟는다.”
“왜 이래. 아직 괜찮잖아? 재미 보는 중에 정신 나간 척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야.”
그가 맞아서 퉁퉁 부운 내 뺨을 꾹꾹 눌렀다. 눌릴 적마다 피부가 질척거렸다.
“정신 안 나갔어. 음호부가 뭔지는 나도 알아. 호랑이라고 들었어. 호랑이 호. 호랑이 조각.”
“그래, 음철로 만들어진 호랑이 조각이다. 효성진 도장이 빼돌렸지.”
“응? 음철? 뭘 빼돌려? 음호부? 뭔 미친 소리야. 그럴 리가 없는데?”
낄낄거리는 내 목소리가 DC 빌런 조커의 그것처럼 기괴해졌다. 감정이 조절이 되지 않았다. 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폭소를 터뜨렸고, 막판에는 갈비뼈가 아려질 지경이 될 때까지 마구 웃었다.
“맙소사, 뭘 빼돌렸다는 거야. 못 찾았어. 팔관 저택 참상의 증거라고 송자침이랑 둘이서 그렇게 찾아다녔는데. 설양 그 망할 새끼가 어디에 숨겼는지 결국 못 찾았다고. 그 덕에 고소 남씨는 뒤로 빠지고, 운몽 강씨는 이죽거렸고, 난릉 금씨는 과장된 헛소문으로 치부해버렸고, 청하 섭씨는 쫄딱 망했다! 하하하! 아, 그런데 아저씨, 설양이 누군지는 아세요? 하하하!”

웃다가 사례가 들려 잠시 꺽꺽거렸다.
“당신이 음호부가 뭔지 알아? 동네 깡패 같은 놈이 음호부를 만들었지. 설양 그 새끼가 음호부를 만들... 아니다. 이릉노조라고 했는데. 응? 아니다. 설영이 맞아. 그 자식이 음호부를. 그 자식, 새끼손가락이 없었어. 앗핫핫이히힛!”

요괴를 잡고 악신을 겁박하실 신묘하신 설 공자,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심지어 새끼손가락만 있어도 충분할 겁니다.
그런데 그에겐 새끼손가락이 없었다.
새끼손가락이 없으니 요괴를 잡고 악신을 겁박할 수 없다며 그가 화를 내며 말했다.
‘내 기분이 어떠했겠어, 걸람. 너도 짐작이 가지? 슬펐어. 화났어. 속상했어. 속에서 분이 올라왔어. 그러자 내 새끼손가락을 망가뜨린 인간에게 복수가 하고 싶어지더라. 당연하지! 복수를 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그래서야. 내가 상씨 집안 사람들 전부를 죽인 건 그래서야.’

웃음을 뚝 그치고 정색하며 질문했다.
“아저씨는 새끼손가락 있어요?”
대답 대신 긴 한숨이 날아왔다.
요즘 애들은 의지박약이니, 우리 때는 더 심신이 강인했다느니 식의 불평을 늘어놓으며 그가 내 콧구멍으로 금속의 기다란 관을 삽입했다.
그 다음부터는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뒤로 기대어 누운 상태에서 주는 물을 꼴깍꼴깍 받아 삼키며 아가미가 제거된 금붕어처럼 팔딱거렸다. 채 삼키지 못한 물이 기도로 넘어가 기침이 터져 나왔지만 물을 붓는 속도는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높으신 분의 술잔을 채워나간다는 식으로 얼마나 정성을 들이던지 물이 옆으로 새지도 않았다.
시원하게 한 잔 들이키면 좋았을 물이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었다.
머리에서 하얗게 불꽃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점멸했다.
차라리 기뻤다. 이제 드디어 기절이라는 걸 할 수 있었다. 꼬록 소리를 내며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여자와 남자, 그리고 어린 남자아이.’
귀신이 보였다. 내 앞으로 허깨비처럼 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한 가족인 듯하다. 세 사람 모두 얼굴 부위가 새카맣게 지워진 상태여서 내가 알던 사람인지 알아볼 수는 없었다. 부부는 젊었다. 아이는 여섯 살 정도로 되어 보였다.
여자가 아이 손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어쩐지 화가 난 기색이고 말을 붙이기가 두려울 정도로 신경질적이었다. 부부싸움이라도 했는지 남자는 모자와 떨어져 덩그러니 혼자 서서 바닥만 쳐다보았다.

‘안 됩니다, 부인.’
‘무엇이 안 된다는 겁니까. 당신은 다른 누구도 아닌, 해와 함께 공적을 빛내며, 해와 함께 장수하는 온씨 사람입니다!’
‘그러니 안 된다는 겁니다. 아니. 부인 말대로 못하겠습니다. 저는 못합니다.’
남자의 거절하는 말에 여자의 기세가 악귀처럼 흉흉해졌다.
‘이 우유부단하고 지질한 인간 같으니라고! 그저 작은 조각만 가져오면 된다고 했잖아! 손톱보다 작아도 됩니다. 정말 작은 조각이라도 괜찮아요. 그것조차 못한다는 겁니까! 당신 아들을 살리는 일인데?’
‘죽은 건 죽은 거요. 음철을 사용하겠다는 계획은 포기하시오.’
‘싫어. 포기 못하겠다고! 우리 아염을 살릴 방도가 있는데 당신은 아비가 되어 포기하겠다는 겁니까!’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가 남자의 등을 때렸다.
‘쌀알처럼 작아도 됩니다. 아염을 살리려면 그 조각이 필요해. 가져와, 가져오라고!’

어머니 옆에 선 키 작은 어린아이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이는 병색이 짙어 몸집이 왜소했다. 얼굴은 새카만 안개 같은 것으로 덮여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익숙했다.
“걸람?”
《내 이름은 온서염이다.》
아이가 나와 똑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그렇지 않다.
어떻게 해도 같을 수가 없었다. 지금의 나는 서른네 살의 회사원 안선준이었으니까.

나는 놀란 얼굴로 아직도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부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럼 저 두 사람은...”
《내 부모님이다.》
아... 그렇군. 알겠다. 이건 걸람의 기억이다. 이렇게 구분지어 말하는 건 모양새가 우습지만 여섯 살 이전의 걸람의 기억이 물고문으로 쇼트가 난 뇌에서 강제 재생이 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본명을 떠올렸으면서 왜 부모님 얼굴 부분이 진하게 먹칠이 되어 있는지 그 까닭을 모르겠다.

호기심이 생겨 세 사람에게로 가까이 접근했다.
그러자 싸움을 멈춘 부부가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똑바로 섰다.
걸람까지 합세하여 세 사람이 나란히 서자 마치 의류상가에 장식된 마네킹 장식 느낌이었다.
“이 사람이 내 아버지?”
펑퍼짐한 체격에 싸구려 바람막이 점퍼를 곧잘 입고 다녔던 그 사람이 내 아버지였다. 젊어서 상처하고 누나와 나를 힘들게 키워내셨다. 키가 크고 몸이 호리호리한 이 남자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다.
“어머니?”
어째서인지 여자를 봤을 적에 생리적으로 싫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그립다던가, 품에 안기고 싶다던가, 고운 살결을 만지고 싶다는 생각은 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 감정은 걸람의 것이 아니라 서른네 살 회사원 안선준의 것이다. 나와는 다르게 걸람... 아니, 온서염은 작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어머니의 옷자락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한손으로 팥알처럼 생긴 금속조각을 목숨인양 쥐고 있었다.

《나는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해.》
온서염이 말했다.
《그러니 너도 기억을 하지 못할 거야.》
온서염이 손바닥을 펼쳐 팥알처럼 생긴 그걸 나에게 보여주었다.

뭔가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다이아몬드나 루비, 에메랄드라면 그만한 크기도 눈 튀어나오게 비쌌을 거다. 그런데 이건 그냥 쇳덩이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불순물 조각이었다. 검은 빛깔에 가까웠고 광택은 거의 없었다. 땅바닥에 떨어뜨리면 도로 찾을 수는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만큼 볼품이 없어 쓰레기라고 생각하고 휴지통으로 버려도 그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지.’
월석 같은 걸까? 아니면 운석? 부부가 다투면서 이걸 뭐라고 불렀더라...... 그래, 음철이었다.
‘운철이라 했는데 내가 잘못 들은 걸지도? 운철이면 그거잖아. 루팡3세 이시카와 고에몽의 검. 그런데 표면이 지저분한 걸로 보아 운철이 아닌 것도 같고... 뭐지? 이건.’
경계심을 드러내며 손톱으로만 조각을 살짝 건드려 보았다.
모르겠다. 아무 느낌도 없고 그냥 막연했다.
나는 뒷목을 긁으며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너도 기억을 하지 못하는구나.》
아이가 무감각한 어조로 말했다.
기억을 하지 못해 유감이라는 건지, 아니면 기억을 하지 않아 다행이라는 건지 구분이 안 갔다.
어쨌거나 내가 기억하는 단편적인 조각은 어머니가 날 흙속에 묻었다는 거다. 어머니는 창과 칼을 든 병사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나는 흙에 파묻혀 죽어갔다.
《아니야.》
그 이전을 떠올려 보라며 걸람이 잔뜩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떠올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몸이 약했어. 어머니가 지극정성을 들였지만 죽어버렸지.》
소년은 검어 보이는 조각을 내게 내밀었다. 마치 가져가라고 종용하는 듯했다.

《이것이 바로 음철이다.》
걸람이 내 손바닥 위로 조각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허벅지까지 닿지도 않는 작은 어린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안개처럼 흐릿했지만 걸람의 뺨은 하도 울어 눈물범벅이었다. 거기다 눈물마저 검은색이었다.
모든 것이 검었다. 검은 재와 검은 먼지, 검댕이 사방에 있었다.
아이가 입을 벌렸다. 순간 아이의 입속으로부터 검은 철가루가 폭발하듯 비산했다.

Posted by 미야

2021/12/09 10:03 2021/12/09 10:03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2237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2 : 3 : 4 : 5 : 6 : 7 : ... 16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990281
Today:
61
Yesterday:
128

Calendar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