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노잣돈 없음 저승에 가질 못한다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이후 설양이 뭐라고 떠들어댔는지 효성진은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다. 뭐, 대충 짐작은 갔다. 속이 뒤틀린 놈은 고매한 분위기의 효성진이 아니꼬웠을 테니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음담패설을 잔뜩 늘어놓았을 거다. 삐---에 삐---를 해서, 삐---를 한 다음, 삐---를 보여주마, 대략 그런 내용으로 떠들면서 손을 가랑이에 대고 자위하는 시늉을 했겠지. 마무리로는 ‘어차피 너나 나나 엄마가 음탕한 그 짓을 해서 태어난 거잖아. 다 똑같다고. 뭘 아닌 척하고 그래!’ 신나게 조롱했을 거다. 그 정신 나간 짓거리에 한 번 휘말리면 귀가 벌개 지고, 심장이 뛰고, 주먹질이 고파진다. 원효대사도 꼭지가 돌 거다. 설양은 사람 미치게 만드는데 도가 튼 녀석이었다.
“도장님도 대단하네요. 때리고 싶은 걸 어떻게 참았어요?” 내 질문에 효성진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꼬리를 돌렸다. “송자침이 나서 모든 걸 4대 현문 종주들 앞에서 지금까지의 일을 설명해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더구나. 음호부로 흉시를 만들어 상씨 세가를 공격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를 보기 전까지 신중하게 접근하겠다고... 설양이 소산 지역에 소음기를 설치한 일이나, 고소 남씨의 문하생을 살해한 뒤 시변하게 만들어 약양 상씨가 야렵에 나서게 유인했다는 것도 일방적인 주장 아니냐고...”
문하생을 잃은 고소 남씨는 어떤 사건에든 매번 신중한 입장을 취한 탓에 이번에도 한 발 물러섰다고 했다. 시변한 시신은 이미 수습에 들어갔고, 자체적으로 조사에 들어갔으니 그동안 말을 삼가겠다며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렇게 일정 선을 긋더니 고아하게 고소로 돌아가 버렸다.
운몽 강씨 종주는 설양이 이릉노조가 탈사한 것일 수도 있다는 송자침의 주장에 밥 먹다 젓가락을 쥔 채로 어검하여 날아왔다고 한다. 젊고, 성격 급하고, 입이 험한 강씨 종주는 이릉노조에게 원한이 매우 깊었는지 말 그대로 앞뒤 가리지 않은 채 설양이 갇힌 감옥으로 곧장 쳐들어갔다. 순서를 밟아 감옥 문을 열어야 한다며 말리는 수사를 채찍으로 갈기고 기어코 설양을 꺼냈다. ‘염병할. 뭐야 이 쓰레기는.’ 소동 끝에 자리로 돌아온 강 종주는 송자침과 효성진 두 사람을 향해 ‘댁들 눈깔은 옹이구멍이오?’ 쏘아붙였다. 송자침은 당황하여 얼굴을 붉혔는데 그게 강씨 종주의 심기를 더 긁었던 것 같다. ‘젊은 나이에 노안이 왔다니, 안타깝구려. 앞으로 눈에 좋은 견과류를 많이 까 잡수시게들.’ 조롱까지 하더니 흥, 콧소리를 내고 옷자락을 털었다. 재수 옴 붙은 걸 털어낸다는 뜻이었다.
금릉 난씨의 종주는 가문의 객원이 술을 먹고 기물을 파손하는 등 추태를 부렸으니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다며 모두에게 사과했다. 피해보상도 약속하며 앞으로 난릉 금씨의 이름을 팔아 폭력을 휘두르는 수행자를 단속하겠노라 했다. 이미 아들 광요에게 지시했으니 곧 일이 바로잡힐 거라 하였다. 사실상 상씨 세가의 참변에 설양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넌지시 돌려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음호부는 세상에 없소이다. 이릉노조가 죽기 전 자신이 만든 음호부를 파괴하였지요. 그것이 그 배덕자가 행한 유일한 덕행이었소. 망가진 조각을 전부 모아도 이릉노조의 술법 없이는 복구가 되지 않소. 그리고 젊은 강 종주께서 친히 설양은 이릉노조 위무선이 아니라고 확인을 해주셨지요. 명월청풍 효성진 도장은 포산산인의 제자로서 창생을 위해 하산한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아 이릉노조의 술법을 얘기로만 접했지 직접 본 것은 아니오. 그러니 이쯤 합시다.’
유일하게 효성진과 송자침 주장에 손을 들어준 청하 섭씨는 ‘죽여라! 사악한 것들을 모두 죽여라! 목숨으로 대가를 치루게 하라!’ 이러고 기운을 폭발시켰다. 음호부와 음호부로 만들었다는 흉시를 굳이 눈으로 볼 필요도 없다며 죽여라 일갈했다. 앞뒤 맥락도 없이 무조건 죽이자고 덤비니 반대로 효성진이 나서 말려야 할 지경이었다. ‘효성진! 그대의 주장은 무엇이오!’ ‘정의 실현입니다.’ ‘그렇담 사법을 쓴 범인을 찢어 죽여야지! 뭣들 하는 거냐. 나를 감옥으로 안내하라. 내가 직접 처단하겠다!’ ‘지나치게 흥분하셨습니다. 진정하십시오, 섭 종주.’ ‘왜 그러오, 효성진. 왜 나를 말리는 거요. 설마, 거짓이오? 지금까지 한 이야기가 거짓이란 말이오? 그게 아니라면 썩 비키시오!’ 살기가 지나쳐 탁자가 둘로 쪼개졌다. 이러한 섭 종주의 성마르고 과격한 태도는 일 처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설양은 난릉 금씨의 이름을 팔아 술 먹고 행패를 부린 협잡꾼이 되어 있었고, 음호부 이야기는 쏙 들어갔다. 송자침은 성급하여 엉뚱한 사람을 잘못 고발한 수행자가, 효성진은 능력은 좋으나 경험이 부족한 탓에 일을 그르친 자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결국 설양은 무전취식으로 감옥에 갇힌 거예요? 와아, 망한 거네요.” 나는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애초에 송자침과 효성진이 ‘부정할 수 없는 증거’인 날 이곳에 떼어두고 간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동시에 나쁘지 않은 결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전설급 범죄자 알 카포네도 300명 이상을 살해한 죄로 체포당한 게 아니었다. 그의 죄명은 탈세였다.
“뭐, 긍정적으로 생각하도록 하죠. 죄명이야 어쨌든 감옥에 갇혔으니 그것으로 충분...” “난릉 금씨가 음식 값과 망가진 집기 값을 모두 보상하면 설양은 곧 풀려날 거다.” “와아, 진짜... 이건 정말.” 이래서야 젊은 혈기에 대기업 비리를 고발하려다 물 먹고 지방 좌천한 신임 검사 꼬라지잖아.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혹독히 배웠구먼. 정의를 외쳐봤자 옳고 그름으로 딱 떨어지지 않지.
턱을 괸 자세로 질문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예정인데요.” “설득해야지.” 이 양반이 여전히 정신을 못 차렸네. 나는 짜게 식은 눈으로 효성진을 쳐다봤다.
“그러지 말고 날 데려가 세워요. 그럼 설양도 자신의 행위를 인정할 거고, 깔끔하게 잘 해결될 거예요.” “네 말대로 하는 건 그건 그리 좋은 수가 아닐 거다.” “왜요?” “설양이 계속 모르는 척하고, 금씨 종주가 널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깊은 곳에 감춰버리면 그만이야.”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대안이 없잖아요. 뭘로 사람들을 설득할 건데요.” “설양이 썼다는 음호부를 찾으면 된다.” 옳거니. 물증 부족이니 살인도구를 찾자는 거군. 나는 고개를 끄떡거렸다.
“감옥에 갇혔을 적에 이미 소지품을 검사했을 거고, 물건이 여태 발견되지 않았다면 설양이 근거지 어딘가에 숨겨뒀을 거라는 얘기군요.” “네가 설명한 버려진 도둑산채 같은 장소에 대한 지식이 그래서 필요하다.” “아... 제가 죽었다 깨어난 장소 말씀이군요. 그런데 음호부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아세요? 저도 그게 어떻게 생긴 건지 모르는데요.” “나도 직접 본 적이 없으니 확실하게는 모른다. 허나 보면 알 수 있을 거다.”
영 못 미더운데. 그래도 나름 최선을 다해 내가 깨어난 장소에 대해 묘사했다. 입구 밖으로 달려 나왔을 적의 해의 모양과 눈에 들어온 구릉의 모습을 최대한 자세히 설명했다. 흡사 동굴 같았던 내부의 모습, 피로 그려진 문양과 밧줄, 주렁주렁 달린 부적들, 무너진 도량 같은 겉모습에 대해 손짓발짓을 섞어 전달했다. 그러다 어째서인지 작은 소반에 올라가 있던 술잔이 뇌리에 떠올랐다. 장소에는 어울리지 않는 술잔이었다. 금박이 화려했고 모란 문양이 있었다. ‘정신 나간 놈. 죽었다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 나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려 했지.’ 어쩌면 나에게 건 주술의 완성은 술을 먹임으로 끝나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금박을 입힌 모란 무늬 술잔이라고 하였느냐?” “무척 화려한 모양새여서 기억이 나요. 비싸 보였으니 분명 어디서 훔쳤을 거예요.” “......” “왜요? 갑자기. 사람 궁금하게.”
효성진 도장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할 말이 남았다는 눈치였으나 깊은 숨을 한 번 몰아쉬더니 그대로 침묵했다. “아, 뭔데요. 중간에 똥 끊고 나온 표정으로 왜 그러는 건데요.” “별 거 아니니 신경 쓰지 말거라. 것보다 다음엔 옷을 가져오마. 넝마 차림새로 스승님에게 보일 수는 없지.” “응?” “송자침과 상의해본 끝에 내린 결정이다. 널 내 스승인 포산산인께 데려갈 거다. 지금 네 처지에 갈 수 있는 곳이라곤 딱히 거기밖에 떠오르지 않더구나. 하지만 근심하지 말거라. 포산산인은 속세의 이치를 뛰어넘은 분이니 네가 사람이 아닌 시체라고 해도 그리 박해하진 않으실 거야. 분명 널 거둬 제자로 삼아주실 거다.” “뭐라고요?” 포산산인은 신선이라며. 지금 날 신선에게 데려갈 테니 제자 되라고 말한 거야?! 제정신이야?!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가 없던지 손보고 있던 돌칼로 하마터면 효성진을 찌를 뻔했다. “얌전히 있거라. 도중에 척한(※상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글로 적음)할테니.” “척한? 도장님, 저는 아직 글을 몰...... 아아악!”
바람처럼 와 구름처럼 떠나니 진정한 신선이로다.
“저런 식이니 설양이 범인이라고 설득 못 시킨 거잖아!!!”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넣어 마구 헝클어뜨리며 욕과 비난을 바가지로 퍼부었다. 그래도 주먹밥 은혜를 생각해 머리카락 빠지라는 저주는 관뒀다. 송자침과 둘이서 잘 해낼 거라 믿어보자.
꽤 여러 날이 지났을 때, 새가 하늘에서 둥글게 같은 자리를 세 번 날고는 종이를 떨어뜨렸다. 세 번 접은 종이를 펴자 한석봉이 쓴 정갈한 서체가 보였다. ‘잘 썼군.’ 칭찬하고 종이를 품에 넣었다. 이 양반들은 이 세계의 평민 아이들이 글을 익힐 짬도 없거니와 배움의 기회도 없다는 걸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나야 전생 시절에 한문을 접하긴 하였지만 영어단어 외우는 걸 주로 한 탓에 획이 많은 어려운 글자는 음독하는 법도 몰랐다. 그런 까닭에 효성진이 보낸 편지는 불쏘시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음호부를 찾았다는 얘기겠지? 앞으로 일이 잘 진행되어야 할 텐데. 두 사람이 고생이 참 많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하고 그동안 어렵게 만든 토굴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흙을 파내고 위로 나뭇가지를 가득 덮어 지은 토굴은 박물관에서 본 선사시대 움집을 따라 만들었다. 비가 오면 무너질 확률이 높았고 땅을 파서 만든 자리는 벌레가 많아 안락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일단 내게는 최선이었다. 이름 모를 벌레를 밖으로 내쫓으며 두 다리를 뻗었다. 좁았지만 익숙했다. 채소 가게 송씨네 창고에서 신세를 졌을 때보다 환경이 더 나쁜 것도 아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 움집이 무너지기 전에 효성진 도장님과 여기를 떠날 테니.’ 그게 얼마나 방만한 생각이었는지는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뭐라고 적혀진 건지 모를 편지가 두 번 더 날아들었고, 나는 근심에 빠졌다. 매우 안 좋은 일이 생겼다는 건 마지막 편지의 모양새로 알 수 있었다. 새를 배달하던 새가 고꾸라져 죽어버렸고, 몸통에 화살이 스친 흔적이 있었다.
이후 소식이 뚝 끊겼고, 몇 번의 봄과 겨울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제3장 노잣돈 없음 저승에 가질 못한다, 끝.
Posted by 미야
2021/11/08 14:27
2021/11/08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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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노잣돈 없음 저승에 가질 못한다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나는 일종의 분노조절 장애 상태에 빠졌다. 하루에도 수십 번 세상을 원망하고, 업무태만에 빠진 저승사자들을 향해 손가락 욕을 날리고, 미친놈 설양을 저주하고, 내 신세를 한탄했다. 효성진과 송자침 두 양반들에게도 화를 냈다. 그들은 날 이런 식으로 방치해서는 안 됐다.
물론 주먹으로 바위를 치며 신경질을 부린다고 상황이 나아질 리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이성이 돌아오자 대학물 먹은 기억과 즐겨 시청하던 유튜브 동영상을 떠올려... 말이 안 되잖아. 정신쇠약 초기인지 자아가 붕괴했다는 느낌이다. 고개를 흔들고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했다.
손목에 감긴 곤선삭을 끊어버리는 일이 제일 시급했다. 두 손이 자유롭지 않으니 아무래도 행동에 제약이 컸다.
모서리가 날카로운 돌을 골라 발바닥 사이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보았느냐, 이것은 톱이다. 밧줄 감긴 손목을 가져가 같은 방향으로 반복하여 움직였다. 문제는 사흘을 문질러도 보풀조차 안 일어났다는 거다. 재질이 무엇인지 곤선삭은 진짜 강철 같았다. 누가 이기나 보자 오기가 생겼다. 어차피 남는 건 시간밖에 없었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고 했다. 일주일간 더 정성을 들여 문질렀다. 그러고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미친 내구력이잖아!” 궁리 끝에 범죄 드라마에서 보았던 방법을 고려했다. 수갑을 차고 도망치던 특수요원이 엄지손가락을 희생했던 걸 기억하고 발바닥 사이에 낀 돌에 대고 곤선삭이 아닌 손가락을 문질렀다. 이쪽은 내구도가 형편없어 얼마 지나지 않아 손가락이 끊어졌다. 아픔을 참지 못하고 마구 비명을 질러댔다.
이쯤하여 내 몸의 상태가 일반적인 언데드와 많이 다르다는 걸 인지했다. 통증은 둘째고 상처에서 피가 흘렀다.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서 뼈와 살이 떨어져 나갔을 시의 출혈량은 아니었으나 종이에 피부를 베었을 때처럼 소량의 피가 났다. 그리고 피의 색은 정맥혈처럼 검붉었다. ‘내 기억으로는 주시 고것들의 콧잔등을 주먹으로 갈겼을 적에 코피를 흘린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고통을 못 참고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그 생각을 했다. 아픔 끝자락으로는 정체불명의 열감이 올라왔다. 큰 턱을 가진 개미가 다친 부위를 에워싸고 갈작갈작 쏠아대는 것 같았다. 혐오스럽고 싫은 감각이었다. 소매를 잘게 찢어 붕대처럼 손에 감고서 나무 기둥에 이마를 쿵쿵 박아댔다. 그 덕에 산기슭에서 조용히 움직이던 야생동물들이 화들짝 놀라 줄행랑을 쳤다. 모습이 고라니 비슷하게 생긴 것들이었다.
미친 짓이 끝나자 나에게는 자유로운 두 손과 빈 시체자루, 그리고 곤선삭이라는 초보자 아이템이 주어졌다. “그래봤자 불을 피우는데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잖아.” 해가 떨어지면 숲은 놀라울 정도로 온기를 잃고 식어갔다. 시변한 몸뚱이가 체온 저하로 죽을 일은 없겠지만, 추위는 매우 고달팠다. 그리고 그보다 더 시급한 일은 산짐승을 쫓는 일이었다.
아직은 상위 포식자가 진법 가까이 접근하는 일은 없었다. 그것들도 나름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밤이 되면 짐승의 노란 눈이 이쪽을 가만히 응시했다. 가끔씩 멧돼지처럼 지능이 낮은 것들이 몰려와 주둥이로 흙을 파며 염탐을 시도하는 일도 있었다. 떼를 지어 몰려든 그것들과 눈을 마주칠 적마다 모닥불 생각이 어찌나 간절하던지. 언젠가 제대로 붙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 전에 불을 피워야 했다.
“쉬운 일이 아니야. 톰 행크스도 캐스트 어웨이에서 불 피운다고 죽을 똥을 쌌잖아.” 주워 모은 솔방울과 잎사귀들은 수분을 빨아먹어 축축했다. 불이 붙을 상태가 아니었다. 나뭇가지를 문질러 마찰열로 불을 피우는 건 이 상태에선 불가능했다. 궁리 끝에 부싯돌을 떠올리고 이번에는 양손에 돌을 쥐었다. 막상 돌을 양손에 쥐고 보니 이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부싯돌은 부시와 돌의 합성어다. 철기시대부터 쓰인 이 인류의 오랜 도구는 돌과 철편이 한 세트다. 쇠붙이를 때려야 산화 반응으로 미세한 불똥이 피어오르는 거지, 돌에 돌을 더해봤자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는다. 딱딱 소리를 내어 돌을 부딪치다 짜증이 치솟아 죄다 던져버렸다. 지금 내 수준은 석기시대라서 철기시대 도구는 언감생신이었다.
“괜찮아! 파이팅!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야!” 잘 타게 생긴 나뭇가지를 모아 젠가 블럭처럼 쌓고 바람이 잘 통하는 자리에 두어 건조시키는 일부터 시작했다. 사흘째 되던 날에 그간 내 노력을 엿 먹이며 비가 쏟아졌다. 염라대왕에게 쌍욕을 날리고 시작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했다. 내가 제일 먼저 염두에 두었어야 했던 건 비를 가려줄 지붕이었다. 무엇 하나 쉽지가 않았다. 원시적 형태의 가림막을 만들려고 해도 망치라던가 도끼 같은 기본 도구가 필요했다. 수중엔 다 없는 종류였다. “돌칼부터 만들자.” 그래서 효성진 도장이 오랜만에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적에 나는 적당한 모양새를 갖춘 돌을 주워와 그 표면을 갈아 날을 세우느라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걸람아.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효성진 도장은 내가 만지작거리고 있는 물건의 정체가 돌칼이라는 걸 못 알아봤다. 결코 내 손재주가 못난 탓이 아니다. 날카로운 패검을 들고 다니는 자가 돌로 만든 칼이 뭔지 알겠어? 하던 작업을 잠시 뒤로하고 나는 그에게 적당한 바위를 골라 아무렇게나 앉으라고 시늉했다. 어쩐지 집주인이 기별도 하지 않고 찾아온 손님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하는 모양새였지만... 넘어가자. 다행히 신선님도 별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나는 신선이 아니다. 신선은 내 스승님 같은 분이지. 속세를 떠나 산속에 살고, 선도를 닦고 도통하여 불노불사의 경지에 오르셨으니 신선이지. 하지만 나는 이미 산 아래로 내려와 인계와 얽혔으니 신선이 될 수 없단다.” 쓰게 웃으며 그가 바위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그의 안색은 나빴다.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니면 간에 문제가 생겼거나. 피곤에 찌든 사람 특유의 누렁내가 맡아지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 그가 날 이 산속에 처박은 본인이라는 것도 잊고 몸은 괜찮냐고 근심하며 물었다. 송자침과 둘이서 설양을 잡으러 갔다는 걸 아는데 얼굴이 죽상이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도장은 내 질문에 이렇다 답은 하지 않았다. 대신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더니 소매를 뒤져 조릿대 잎사귀로 포장한 주먹밥 두덩이를 꺼내 내게 건냈다. 송자침에게 키 작은데 주먹밥 하나라도 보태어준 적 있느냐 쏘아붙였던 걸 기억해둔 눈치였다. 눈에서 하트를 뿅뿅 날리며 조릿대 포장을 풀었다. 멸치볶음과 장아찌가 내용물로 든 주먹밥은 꼼꼼한 포장 탓에 여전히 부드럽고 약간의 온기까지 남아 있었다. 한입 베어 물자 신음이 절로 나왔다. 제대로 된 음식을 먹는 건 죽고 나서 처음이었다.
“곤선삭을 풀었구나.” “덕분에 고생 좀 했죠.” 붕대를 푼 지 이미 오래였고, 잘린 엄지손가락도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흉터는 남았지만 효성진은 내가 곤선삭을 풀기 위해 손가락을 잘랐다는 건 모를 것이다. 입가에 묻은 밥풀을 떼어내다 말고 엄지손가락을 구부려봤다. 잘리기 전과 비교해도 큰 변화가 없다. 어떤 원리로 이런 일이 가능한지 나는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결코 이것에 대해 깊게 생각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설양은 금방 잡았다.” 주먹밥 한 덩이를 다 해치우고 나머지로 손을 가져갈 즈음에 효성진 도장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설양을 잡았다니. 좋은 소식이었다. 그런데 도장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설양은 무려 마을 세 곳을 돌아다니며 무전취식과 기물파손을 반복했다고 한다. 고주망태가 되어 집기를 부수고, 이를 항의하면 폭행을 저지르고 다녀 굳이 위치를 묻는 연통을 돌릴 필요가 없게 소재 파악이 쉬웠다고 한다. 송자침과 효성진 도장이 작정하고 팔을 걷어붙였을 적에 설양은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로 만취한 상태로 두 사람을 맞아들였다. 몇 합 겨루지도 않고 제압에 성공한 송자침은 ‘뭐 이딴 녀석이 다 있어!’ 화를 냈다. 이들의 눈에 설양은 그냥 구제불능의 난봉꾼이었다. 사마외도를 익혀 사악한 술법으로 한 집안을 몰살시킨 위인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도 잡혀온 설양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증거 있어? 생사람 잡고 시비 거는 거 아냐?’ 술을 마시고 돈을 내지 않았다는 건 인정했다.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탁자를 부수고 직원을 때린 것 같다고도 말했다. 최근 언짢은 일이 있어 주량을 자제하지 못했다며 사과했다. ‘그렇다고 내게 주살(呪殺)의 죄를 뒤집어씌우는 건 너무하지. 차라리 내가 기산 온씨의 생존자이고, 현문 세가를 대적해 사람을 죽이고 다녔다고 주장을 하지 그러슈. 약양의 상씨? 기억에 없는데... 내가 몰살시켰다고? 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 얼마나 대단하신 분들이기에 증거도 없이 이런 식으로 사람을 학살자로 몰아세우는 거야? 물어나 봅시다. 댁들 어느 가문 분들이우?’ 능글능글 웃으며 내뱉는 설양의 말에 송자침이 위액을 토했다고 한다. 효성진은 고아였고, 송자침은 평범한 집안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었다. 능력이 아무리 출중해봤자 출신이 비루하니 거짓으로 범인을 꾸며내려 한다는 주장에 송자침은 이런 모욕은 없다며 펄펄 뛰었다. 분통 터지게도 설양의 그런 주장이 다른 사람들에게 먹혀 들어갔다고 한다. 상씨 세가의 참변 소식을 듣고 모인 현문 세가의 높으신 분들도 증거가 있느냐 묻기 시작했다.
‘증거는 있다.’ 알 카포네처럼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되지 않고 풀려나는가 싶었는데 도중에 뒤집혔다.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있었다. 내가 머리에서 뽑아내어 버린 은침이 그 증거였다. 효성진이 은침을 설양에게 보여주었을 적에 그의 표정이 돌변했다고 한다.
문제는 그게 궁지에 몰린 쥐새끼의 표정이 아니었다는 거다. 설양은 기쁜 듯이 웃었고, 녹색의 눈을 반짝였고, 즐거움이 끓어 넘치는 것 같았다고 효성진이 말했다. ‘이거 어디서 났어?’ 묻는 목소리는 한껏 들떠 있었고, ‘너, 봤구나? 내 귀여운 장난감을. 그건 내 거야!’ 주체할 수 없는 흥분으로 몸을 떨었다고 했다.
Posted by 미야
2021/11/06 23:18
2021/11/06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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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노잣돈 없음 저승에 가질 못한다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나는 송자침의 주장이 일리 있다고 생각했다. 곤선삭으로 단단히 묶었다지만 전자발찌 끊고 도주하는 일도 부지기수인데 언제든지 끊어버릴 가능성이 있었고, 나라는 존재는 무려 일흔 명을 죽게 만든 원흉이었다. 자루에 넣어 보관했다가 궁금해 하는 사람들 앞에서 풀어 보여줬는데 갑자기 내가 이성을 잃고 막 날뛰어봐라. 불발탄이라고 리어카에 싣고 고물상으로 가져가면 엿 되는 거예요. 그래서 송자침은 내 몸을 태워 불안의 근원을 없애버린 뒤, 상자에 재를 담아 가져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증거가 될 수 있다며 효성진을 설득하려 했다.
“금종주 금광선도 귀장군 온녕을 재로 만들어 뿌렸네. 흉시는 없애야 해. 왜 그렇게 주저하나. 혹시 재를 가져가면 사람들이 자네 말을 믿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 “그건 아니고...” “그럼 어서 태워버리자고. 자네는 포산산인의 제자이고, 세간에선 풍모가 맑고 수행의 경지가 높다며 자네더러 명월청풍이라고 칭송하고 있잖아. 그런 자네의 말을 의심할 자는 없어. 흉시를 직접 증거라고 가져가지 않아도 되네. 그리고 저것은 상씨 집안의 원수이니 가주 상평 대신 처단했다고 해도 누가 뭐라 하진 않을 거야. 오히려 효성진 자네의 명성을 또 한 번 드높일 기회일세.”
효성진은 그깟 명성에는 관심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나는 그저 정의를 실현하고 싶을 뿐이야, 자침.” “흉시를 재로 만드는 일도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라네.” “하지만 내 패검 상화가 저 아일 베어버리길 주저했네.” 송자침이 김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난 또 뭐라고. 그게 어때서. 상화는 포산산인이 내려주신 검이니 이렇게 말하면 큰 실례지만... 음, 그 검은 좀. 크흠! 변덕스럽잖아.” “이보게 자침! 지금 뭐라고? 지금 스승님이 내려주신 내 패검더러 변덕스럽다고 했어?” “솔직히 그렇잖아. 상화 성격이 이상한 건 사실이라고.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생각 안 나? 상화가 멋대로 검집에서 빠져나와 내가 쓰고 있던 모자를 둘로 쪼개버렸어. 아끼던 거였는데.” “뒤에서 갑자기 팔을 잡아당기니까 그렇지.” “그럼 어떡해. 불러도 대답 없이 휙 가버리니까 급해서 그런 건데.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후딱 결정하고 후딱 해치워 버리자며 송자침이 자루를 털어 시체를 꺼냈다. “......” 그리고 바깥으로 드러난 내 얼굴을 보곤 목구멍이 턱 막힌 듯했다.
버럭 고함을 지른 건 한참 뒤였다. “이래선 내가 악당이 되어버리잖아! 작아! 너무 작아! 생선 말린 것도 아니면서 이게 뭐야! 이 비쩍 골아 말라비틀어진 건 뭐냐고!” “생선이라니! 실례입니다!” “사실을 언급했을 뿐이다. 죽었을 때 몇 살이었냐.” “아마 열여섯... 정도 되었을까요? 세어본 적은 없지만.” “알겠다. 이 녀석 숫자를 모르는구나. 열둘 다음은 열셋이다.”
왜 항상 사람들은 내 나이를 열셋이라고 멋대로 정해버리는 건지. 어쨌거나 자루 속에서 상상하던 것과 달리 송자침은 왜소한 체구에 어깨가 좁았다. 키도 작은 편이었다. 아, 오해는 하지 말자. 그러니까 나란히 섰을 적에 효성진 보다는 작았다는 얘기다. 그래도 선골의 몸이라 소산 사람들보다 손가락 한 마디는 더 컸다. 그래봤자 손가락 한 마디 차이다. 나는 발끈했다.
“작은데 보태어준 거 있으세요?! 주먹밥 하나라도 주신 적 있으시냐고요!” “주먹밥을 준 적은 없지만 내가 틀린 말한 건 아니잖아. 백설관 우리 막내 사제가 열 셋인데 너랑 비교해도 이만큼이나 키가 떠 크다고.” “저도 고기랑 밥 많이 먹었으면 컸어요!” “아유, 알았다. 귀 따가우니 그만 소리 질러. 배고파 죽었으면 기운이 없어 조용했을 텐데 억울하게 죽었다고 목소리도 크네.” 톡 쏘아붙이는 어조는 여전히 쌀쌀맞았지만 표정은 어쩐지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이 자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쩔쩔 매는 친구를 보던 효성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침... 얼른 태워 가루로 만들자며.” “어.” “그런데 왜 아이 머리에 시체자루를 도로 뒤집어씌우는 건가.” “생각해보니 마냥 급한 일은 아닌 듯하여.” “아닌 척하긴. 자네도 양심에 가책을 느낀 거지?” “절대 아니네. 다만 일에는 뭐든지 순서가 있지 않은가. 밥을 먹은 뒤에 차를 마시고, 세안을 한 뒤에 머리를 묶는 법이지. 설양을 잡고 난 뒤에 이걸 태워도 순서가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꾸물꾸물 변명하던 송자침이 애먼 자루 매듭을 툭툭 건드렸다. 그 모습이 어쩐지 늘어나는 외상장부를 보며 서안 가장자리를 툭툭 치던 채소가게 송씨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그 행동을 가리켜 번민의 회랑에 꿇어앉아 목탁을 두드린다 말하곤 했다.
두 사람은 무엇이 그리도 마음에 걸렸는지 목소리를 최대한 낮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겉모습은 괜찮아도 정체가 시체이니 객잔으로 가져갈 수 없다, 듣자하니 물도 마셨다던데 이젠 주먹밥을 사줘야 하는 거 아니냐 식의 쓸데없는 대화가 오고 갔다. 그러다 내가 자루 속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음을 깨닫고 아예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전생에 무협지를 읽어본 적이 없어도 그게 전음이라는 건 눈치로 알았다. 낮은 저주파로 웅웅거리기만 할 뿐, 사람의 말로는 들리지 않았다. 신기하게 효성진의 전음 주파수는 낮았고, 송자침의 전음 주파수는 높았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얘기를 어떻게 진행한 건지 그들은 날 산속 깊은 곳에 숨겨두기로 결정했다. “설양을 잡기 전까지 널 이곳에 두려고 한다.” 그렇게 말한 송자침은 여전히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그래, 양심이 있음 그래야지. 풀과 나무밖에 없는 깊은 산 한 가운데 나 혼자 있으라고 하면 양심에 찌르는 듯한 가책을 느껴야지! 그것도 양손을 곤선삭으로 묶어둔 채로! 아저씨! 진심이야? 곰 나와! 이런 숲이면 곰 나온다고! 나는 믿지 못하겠다는 투로 말했다. “진심이에요?!” 방치 플레이라니! 방치 플레이라니!!
효성진 도장이 검집을 높게 들었다. 그러자 푸른빛을 내며 패검 상화가 빠른 속도로 튀어 올랐다. 반사적으로 목을 움츠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곳에 진법을 그려놓을 거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상화가 번개처럼 날았다. 주인의 의도는 잘 알고 있다며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휙휙 움직였다. 빛을 반사하는 모양새가 내 눈에는 카메라 플래시가 펑펑 터진다는 느낌이었다. 보고 있자니 눈이 시려 인상을 찌푸렸다. 그걸 다른 의미로 해석한 효성진이 설명을 덧붙였다. “안에서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나를 제외하곤 밖에서도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바위를 긁고, 땅을 헤집고, 나무를 동강내더니 할 일을 모두 마쳤다며 상화가 효성진에게로 돌아왔다. “결(結).” 여덟 개의 빛의 기둥이 솟구쳤고, 아주 잠깐 동안 영력으로 채워진 패턴이 공중에 떠올랐다. 문양이 사라지기 직전, 효성진 도장이 큰 소매를 펄럭이며 팔과 손가락으로 몇 가지 동작을 덧붙였다. 이해는 안 갔지만 비범한 재주였다. “금방 다시 오마. 설양도 곧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가만히 있거라.” 그러면서 자신이 급조한 결계의 대략적인 크기를 설명해주고 어느 이상 나가지 않는 것이 좋을 거라고 차분한 어조로 경고를 했다.
나는 당황했다. 가만히 있으라니? 제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있는 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독방에 가둬두면 사람이 얼마 만에 맛이 가는지 이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지금 장난해요?!” 내 장례는? 내 장례는~!!! 재로 만들 거라며. 불에 태워 재로 만들 거라며! 막판에는 화가 치밀어 마구 고함을 질렀다. “나쁜 사람들 같으니! 십 리도 못 가서 사타구니에 무좀 걸려라!” 절망하여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오늘도 역시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YOU DIED’ 메시지를 보고 재시작 버튼을 눌렀더니 응답까지 앞으로 남은시간 24만6천5백일, 지금 이게 내 상태다.
효성진 도장이 만들었다는 결계의 크기는 학교 운동장 넓이 정도 되었다. 산중턱이다 보니 경사가 있어 짐작이 어려웠어도 아무튼 고압전선 불꽃이 튀는 곳을 따라 둥글게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부러진 나뭇가지를 질질 끌며 걸어왔던 길을 반복하여 걷자 한쪽이 눌린 타원형의 원이 그려졌다. 공중에서 보면 한 입 베어 문 찐빵의 형태일 거였다. 진법의 구성은 완벽한 원이나 사각형을 그리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듯했다.
돌을 던져 밖으로 던졌을 적에 그것은 별 영향 없이 결계 밖으로 넘어갔다. 대신 턱을 앞으로 내밀며 통과하고자 하자 전자레인지에 실수로 알루미늄 포장호일 넣고 돌렸을 때처럼 불꽃이 튀면서 반발하는 힘으로 날 안쪽으로 밀었다. 평범한 보통 사람이었으면 크게 다쳤을지도 모르겠다. 불꽃이 닿은 부분은 피부가 검게 타고 벗겨졌다. 쓰라리고 톡톡 쏘는 통증이 가라앉자 뜨뜻하게 열이 오르며 흉터가 생겼다. 시일이 지나자 흉터의 색이 엷게 변했다. 열감이 가라앉는 건 그보다 더 오래 걸렸다. 밖으로 나가보려는 시도는 이후로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동물은 자유롭게 왕래하는 것 같았다. 머리 위로 새가 여럿 날아가 그럴 것이다 추측했다.
사람은 이후 구경을 못 했다.
Posted by 미야
2021/11/05 14:00
2021/11/0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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