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혼백, 망령, 그리고 엉망진창
※ 오리캐×설양(아님!) BL 호러물입니다. 잔혹한 묘사 있습니다.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돈 단위, 먹는 반찬, 풍습 이런 것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버려진 산적들의 요새 같은 장소에서 빠져나와 방향도 모르고 뛰고 보니 방향을 잃었다. 절도 중도 안 보이는 주변엔 모르는 산기슭에 평생 본적 없는 구릉이 펼쳐졌다. 이정표는커녕 제대로 닦여진 길도 안 보였다. 어쩌면 여기는 소산이 아닐 수도 있다. 제자리 뛰기를 하며 머리 위 태양의 위치를 확인했다. 해의 기울기가 신시(※오후3시~오후5시) 막바지라는 느낌이었지만 매일 보던 풍경이 아니니 확신은 가지 않았다. 이러면 동쪽과 서쪽 구분도 애매했다.
Y자로 갈라진 마른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수맥 탐지봉처럼 들었다. 그리고 우주의 기운을 받아들인 나뭇가지가 저절로 움직여 나아갈 방향을 지시하기를 기다려......는 개뿔. 나뭇가지를 아무렇게나 휙 던져버리고 일단 설양의 망자지옥 아지트로부터 최대한 멀어지려 노력했다. 다행스럽게도 뒤에서 따라오는 기척은 없었다.
채소가게로 돌아가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닐 것이다. 일단 내 몸은 지금 정상이 아니다. 시변한 건 확실하니 어쩌면 외모도 흉측하게 변했을지 모른다. 살을 만졌을 적에 시체처럼 딱딱한 느낌은 아니었다만 설양의 말대로라면 죽은 지 이미 열흘이었다. 숨이 끊어지고 단 3시간만 지나도 피부색이 바뀐다. 박테리아의 활동으로 인해 가스가 차기 시작하면서 몸이 부푼다. 일반적으로 열흘이면 안구는 다 녹아버린 뒤고 항문과 입을 통해 내장 녹아내린 물이 줄줄 흘러나온다. 주술인지 뭔지 하는 것의 힘으로 부패의 진행이 멈췄다고 해도 눈의 총기는 잃었을 거다. 돌아다니는 주시들 전부가 눈깔이 허연 빛깔이었다.
‘마을 한 가운데서 검은자위가 사라진 눈을 치켜뜨고 있음 보나마나 사람들이 도사님을 불러 날 없애려 하겠지. 게다가 배추배달 도중에 실종되었으니 화가 단단히 난 송씨 부인이 직접 날 불살라 없애버리려 할 거야. 우리 배추 값 물어내, 소리도 지르고. 먹고 재워준 은혜도 모르는 놈이라고 욕도 하고.’
주먹으로 이마를 치다가 이번엔 방향을 바꿔 구릉을 타고 넘어가기 시작했다. 허리 위까지 길게 자란 풀들이 파도치며 훼방했다. 그러든 말든 수풀을 헤치며 움직이는 속도는 줄지 않았다. 해가 지면 이동하는 일도 쉽지 않다. 등불도 없이 산속을 헤맨다는 건 ‘나 죽여 줍쇼’ 하는 말과 같은 뜻이다. ‘뭐, 이미 죽었지만.’ 승냥이 같은 들짐승이 주시를 먹으려 할지 잘 모르겠다. 썩은 고기도 마다않는 애들이면 훌륭한 잔칫상이겠지만...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죽은 사람이면서 몸은 피곤하고 목이 말랐다. 배도 고파 따끈한 탕에 고소한 누릉지가 먹고 싶어졌다. 꾸르륵 소리도 나는 것 같았다.
탄식하며 밥과 물을 달라고 난리치는 뱃가죽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이래선 마치 죽어본 적 없는 사람 같잖아.’ 언제 죽은 적 있느냐는 식으로 몸이 반응했지만 딱 한 가지만은 달랐다. 펑펑 울고 싶어도 눈물이 안 나왔다.
물을 찾아 인적이 끊긴 외진 길가에 위치한 우물가에 당도했을 적엔 두 명의 선객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행색으로 추측하자면 한 사람은 덫을 놓아 꿩이나 토끼를 잡는 사냥꾼처럼 보였고, 한 사람은 마을과 마을을 돌아다니며 바느질 도구나 연지 같은 화장품을 파는 방물장수인 것 같았다. 나이가 많아 머리가 하얗게 센 방물장수는 대나무 보퉁이를 가까운 바닥에 내려놓은 채 품질이 썩 좋아 보이지 않는 연초를 입에 물었고, 그 아들뻘 나이인 머리 지저분한 사냥꾼은 허리를 숙여 끈 떨어진 신을 임시로 수리하고 있었다. 나는 수풀에 몸을 숨긴 채 최대한 기척을 줄였다.
“당분간 이 짓도 못해먹을 거 같수다. 어찌된 게 사람이 없어, 사람이.” 사냥꾼이 투덜거렸다. 방물장사로부터 얻은 색끈으로 매듭을 묶어보지만 그게 영 신통찮은 눈치였다. 여자들이 머리를 묶을 적에나 쓰는 끈은 약해빠져서 힘을 줘서 묶으려 하면 할수록 올이 풀리고 찢어지려 했다. 사냥꾼은 이내 짜증을 내며 망가진 자신의 신발을 패대기쳤다.
“형씨도 그러하오? 나도 장사를 시원하게 말아 잡쉈지. 연지 하나 못 팔았소.” “어휴... 어쩌겠수. 선동요에서 먼저 난리가 나더니 소산도 난리가 났다던데. 뿐만 아니라 수행자가 요술에 걸려 시변을 했다며 멀쩡한 대낮에도 시장에 사람이 안 돌아다녀요.” “뭐요? 그게 참말이오? 수행자가 시변을 했다고? 그게 가능한가? 내가 알기로는 도를 닦는 분들은 거 뭐라더라... 안혼례를 치러 악귀로 변할 일이 없다 했는데?” “노인장이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네. 그거야 높으신 분들 이야기고. 듣자하니 밑바닥부터 고생해서 그 자리까지 올라간 선자(※여성 수행자를 일컫는 말)라던데. 그럼 뻔한 거 아니겠소.” “쯧쯧... 안혼례와는 거리가 멀었겠군. 예전에 내 귓동냥으로 들은 적이 있소. 안혼례 비용을 치르려면 집안 기둥 하나는 부순다고 하더군.” “기둥 하나가 아니라 셋이오, 셋! 딸을 부잣집에 시집보내는 것보다 몇 곱절 더 들어간다오. 게다가 일곱 살이 넘으면 제 아무리 큰돈을 써봤자 안혼례도 효과 없다던데 차라리 그 돈으로 시귀를 막아주는 부적을 사고 말지.”
방물장수가 눈을 가늘게 뜨며 궁금해 했다. “시귀를 막는 부적이 있소?” “내가 어찌 알아! 남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가보다 하는 거지. 그래도 부적인데 없는 것보단 좋을 거 아니오. 자, 이거 받으슈. 선동요에서 얻은 부적이오. 한 장에 열닷 푼! 엄청 싸다! 주시가 들러붙는 걸 막아준다고 하더이다. 이걸 이렇게, 이렇게 해서 시변한 것들에게 딱 붙이면!!!” “붙이면?” “얌전해져서 움직임을 멈춘다고 합니다. 노인장, 하나 드려요?”
조용히 뒷걸음질 쳐서 그들의 대화가 들려오지 않는 곳까지 멀어졌다. 부적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 다음으로 이어진 내용이 섬뜩해서다.
“수행자까지 시변했으니 드디어 상씨 세가가 나서겠구먼. 지금까지는 그 정도의 일은 알아서 하라 분위기였지만 이젠 모르는 척할 수가 없겠지.” “노인장 말씀이 옳아요. 시변한 수행자가 어디 보통 일인가요.” “그럼 야렵은 언제쯤...” “글쎄요. 이 근방 주민들이 겁을 집어먹고 밭일까지 포기한 채 죄다 문을 걸어 잠갔으니 늦어도 일주일 뒤엔 해결을 보겠지요. 오래 시간을 끌면 농사를 망칠 테니까요.”
이 세상에는 4대 현문세력이 운몽, 난릉, 고소, 청하 각 지방을 지배하고 있고, 이 망할 놈의 땅이 워낙에 광활한 탓에 여러 군소 토착세력이 틈새를 비집고 존재하고 있다. 저 사람들이 말한 상씨는 약양에서 세를 펼치고 있는 지방 토착세력이라 할 수 있다. 내 이해 방식대로라면 그들은 봉토를 가진 영주 대행쯤 된다. 잘 훈련된 사병을 데리고 있고 소출에 대한 세금도 가져간다. 그래서 주민들이 밭일을 거부하고 외출을 삼간다는 소식에 반응하는 거다. 문제는 저들이 검을 쓰는 사람들이라는 거다. 전신갑옷을 입은 서양의 기사들이 말을 타고 행군하며 스켈레톤 해골병사를 썰어버리는 걸 상상해봤다. 큰일이다. 상씨가 주시들을 토벌하러 나오면 나도 모가지가 썩둑 잘린다.
우물에서 물 마시는 걸 포기하고 능선을 따라 높이가 낮은 산을 여럿 넘어갔다. 멀리서 음산한 바람이 불어왔고, 짐승의 이빨소리 비슷한 신음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쉬지 않고 걸었더니 어느새 땅거미가 질 무렵이 되었다. 저물어가는 노을이 야산에 붉게 불을 지르는 걸 지켜보며 뭉친 종아리를 주물렀다. 배달로 단련된 종아리가 적당히 하라며 난리였다. 이정표라도 보이면 오죽 좋으련만. GPS와 구글 없는 세계가 원망스럽다. 더는 안 되겠다 싶어 길을 찾아 산자락을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큰 길로 나가면 장사치와 여행자들을 위한 표지석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다. 희망사항이라면 부생이나 곡여라는 글자가 보였음 했다. 곡여는 소산을 기준으로 삼았을 적에 선동요보다 거리가 더 먼 마을이었다.
“이게 뭐야. 전에 봤던 우물이잖아.” 그렇게 헤매고 돌아다녔는데 원위치. 거짓말처럼 한 바퀴를 돌아와 지금 내 시야에 들어온 건 사냥꾼이 집어던진 헤어진 신발 끈이었다. 넋이 증발할 것 같은 기분에 방물장수가 앉았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있던 체력, 없던 체력 쥐어짜서 산을 몇 개나 넘었는데 제자리. “귀신에게 홀렸나.” 불가능했다. 내가 지금까지 아무렇게나 내키는 대로 걸었던 게 아니다. 태양을 기준으로 삼아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지구는 둥그니까 일직선으로 걸으면 언젠가 제자리로 돌아온다지만, 지금은 아니다. “미치겠네. 이러다가 아예 출발지점으로 되돌아가는 거 아냐?” 근심하며 먼지를 털고 일어나 1시진 가량을 더 걸었다.
“......” 말이 씨가 된다고 정말로 되돌아왔다. 산적들이 집 짓고 살다 버리고 간 모양새의 산채 앞에서 말을 잃었다. 절반은 무너진 입구 앞에서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서있던 설양은 ‘산책은 즐거웠어?’ 손을 흔들며 물어왔다. 이러니 줄곧 추적하는 기척이 없었던 거다. 처음부터 내 신세는 어장 속 물고기였다.
“설 공자. 나는...” 목이 갈라져 피가 날 것만 같았다. “됐다. 말 하지 마렴.” 내 앞에서 그가 풀피리를 입에 물었다. 피리릭 풀피리 음색이 울려퍼지자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건지 모를 일백의 주시가 나를 포위하며 몰려들었다.
Posted by 미야
2021/10/27 13:02
2021/10/27 13:02
- Response
-
No Trackback
,
-
http://miya.ne.kr/blog/rss/response/2205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제2장 혼백, 망령, 그리고 엉망진창
※ 오리캐×설양(아님!) BL 호러물입니다.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나는 다시 심하게 멀미했다. 돛단배를 타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속이 어찌나 뒤집어지던지 이젠 내가 진짜로 죽은 사람인지, 가짜로 죽은 사람인지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웩웩 소리를 내는 동안 알 수 없는 힘이 내 머리를 뽑아 긴 엿가락 모양으로 늘어뜨리려 했다. 12리(※대략 5km) 이상 늘어지지 않나 싶었을 적에야 강하게 잡아당기던 힘이 느슨해졌다. 흰옷을 입은 소년들과 택무군이라고 불리우던 자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지 오래였고, 얇게 늘어진 내 몸은 바다 속을 유영하는 해파리처럼 나풀나풀 흔들렸다.
“돌아와, 걸람.” 날 부르는 목소리는 매우 거만했고, 단호했다. “당장 안 돌아오면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거다.” 목소리만 들었을 뿐인데 나도 모르게 목이 움츠러들었다. 얼마나 살기등등하던지 그냥 해보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다리뼈를 분지르겠다는 어조였다. “술법이 잘못된 건 아닌데 왜 이리 돌아오는 속도가 늦지? 내가 모르는 실수라도 있었던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아님 이릉노조의 글에 빠진 내용이 있었던 건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내 머리카락과 뺨을 만졌다.
순간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나, 지금 누가 날 만졌다는 걸 인지한 거야? 죽었는데?
차가운 손이 피부 결을 따라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니, 차가운 건 상대가 아니라 내 쪽이라 해야 맞았다. 체온을 잃은 내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을 거고, 죽음으로 인해 가닥가닥 끊어진 신경회로로 방금 전 재가동 불이 들어오면서 온기의 주인을 착각했다. “아걸... 내 말 들려? 깨어난 거 맞지?” 설양이 여자 꼬시는 목소리를 내며 자신의 아래턱으로 내 이마를 지그시 눌렀다.
두 눈이 번쩍 뜨였을 적에 제일 먼저 시야를 장악한 것은 수천 장에 이르는 부적이었다. 구멍을 제외하고 – 눈구멍, 귓구멍, 콧구멍, 입의 칠백을 제외하고 부적이 얼기설기 달라붙은 상태였다. 기겁을 하고 상체를 일으키자 약한 장력으로 목과 가슴에 붙어있던 종이부적이 바닥으로 우수수 흘러내렸다. 아니 이거 진짜 뭐냐고. 비주얼이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이잖아. 바닥에는 피로 그린 것이 분명한 진법이 제법 큰 크기로 그려져 있었고, – 저게 제발 사람 피는 아니길 빌었다 - 내가 누운 자리에만 마른 지푸라기가 이불모양으로 깔려 있었다. 어디선가 물방울이 똑똑 소리를 내며 떨어졌고, 얼마 되지 않은 초로 밝힌 주변은 컴컴하고 습했다. 동굴인가, 아님 지하실? 흙벽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풀풀 피어올랐다. 연무에선 언짢을 정도의 악취도 났다. 습도 높은 장마철에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단칸방에서 맡을 수 있는 그런 냄새였다. 무언가 상했고, 썩어가는 중이었다.
벌벌 떨며 시선을 아래로 내려 손을 이리저리 살폈다. 오랜 노동으로 거칠어진 걸람의 손이었다. 다만 핏기가 없어 분칠을 바른 것처럼 피부가 뽀얀 빛깔이었다. 움직임에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어 주먹을 쥐고자 하자 쥐어졌고, 도로 펴자 펴졌다. 문제는 다행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는 거다.
“맙소사. 이게 뭐야. 나에게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가슴이 저미는 것 같았는데 눈은 메말라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사람을 멋대로 죽여 놓더니 이젠 맘대로 되살려놓고... 이러는 법이 어디에 있어.” 몸에 붙은 부적들이 살을 파먹는 구더기라도 된 것 같았다. 나는 진저리치며 손에 잡히는 부적 전부를 계속해서 잡아 뜯었다. 뜯어서 던지고, 구겨서 던졌다. 검에 찔려 숨이 끊어진지 얼마나 되었다고, 잠깐 눈 감고 떴을 뿐인데 언데드가 되었다.
“열흘이나 깨어나지 않았어.” “네?” “열흘이나 깨어나지 않았다고. 진짜지 더 늦어지면 날 우습게 여기는 거라 생각하고 벌을 주려 했지.”
설양은 명랑하게 재잘거리며 미리 준비한 것으로 여겨지는 작은 소반을 가져왔다. 소반 위에는 무려 금박을 정교하게 입히고 모란무늬가 음각된 술잔 두 개와 붉은 천으로 입구를 막은 술병이 올라가 있었다. 저런 비싼 술잔은 어디서 가져왔대? 박물관에 전시될 법한 물건이 나왔다. 아니지, 지금 그게 문제냐. 인마,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미성년자야! 하지만 목구멍이 솜으로 틀어 막혀 외침은 나오지 않았다. 사람은 – 귀신도 기가 막히면 말문이 막히는 거였다.
이쪽에서 끙끙거리는 것도 모르고 술상을 내려놓은 설양은 자리에 털썩 앉았다. 이 세계에선 미성년자 음주에 관대한 탓에 포장을 벗기고 술을 따르는 자세가 매우 능숙했다. “명령이야. 이리 와서 앉아.” 나는 거부의 의사를 밝히며 도리질했다. “주인의 명령이다. 이리 와서 앉아.” “누가 주인이라는 거야. 너는 내 주인이 아니야.” 그간 기분 좋아보이던 설양의 얼굴색이 내 반말투에 약간 거칠어졌다. 마음 같아선 술상을 뒤엎고 행패를 부리고 싶은 것 같았지만 애써 숨을 고르는 눈치였다.
설양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 까딱까딱 흔들었다. “한 번은 봐주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혼란스러운 것 같으니까. 딱 한 번만 봐주는 거야. 그러니 잘 들어, 아걸. 죽은 너를 이릉노조의 술법으로 내가 되살렸어. 내가 주인이고 너는 내 인형이야. 이릉노조가 온녕을 귀장군으로 만든 것처럼 내가 널 만들었어.” “이릉노조? 귀장군?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넌 내 인형이니 내가 하라는 대로 하면 돼.” “누구더러 인형이래. 내가 왜 네 말대로 해야 하는데.” “아걸! 닥치고 네 주인에게 복종해! 여기 와서 앉아! 명령이야!”
어디선가 딸랑 소리를 내고 방울이 울렸다. 그러자 손오공이 긴고아로 머리가 조여졌을 적에 어째서 근두운에서 떨어졌는지 이해가 갔다. 그건 두통이라 부를 종류가 아니었다. 펜치를 사용해 잘게 부순 두개골을 야무지게 뽑아내는 아픔과 같이하여 대규모 지옥 합창단이 ‘복종해, 복종해, 복종해, 복종해.’ 노래를 불협화음으로 불렀다. 게다가 접속곡 가락은 엇박자로 꼬이기까지 하여 ‘해복종, 해복종, 해복종.’ 이러며 존재할 리 없는 가사로 바뀌기까지 했다. 오금에서 힘이 빠져나가면서 바닥에 머리부터 처박은 모양새로 고꾸라졌다. 콰직, 이러고 두꺼운 나무토막이 분질러지는 소리가 났는데 부디 목뼈가 부러진 건 아니길 바랐다.
“아걸, 너는 이제부터 내 귀장군이야.” 설양이 화가 잔뜩 나 씨근덕대며 말했다. 저기요? 저더러 장군이라고 하면 부끄러운데요. 키가 8척이기를 해요, 관우처럼 수염이 났기를 해요. 나더러 장군이라고 하면 다들 애기 장군이냐며 비웃기부터 할텐데. “누가 뭐래도 넌 내 귀장군이야.” 벌레처럼 꿈틀꿈틀 기고 있는 나를 싸늘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설양이 재차 강조했다. “내 거야. 내 거라고.”
설양이 내 뒷덜미를 잡고 술잔이 있는 소반 앞으로 끌고 가려 했다. 아 좀~!! 여전히 긴고아가 내 머리를 빈틈없이 조여 대고 있었지만 나는 끝까지 반항했다. 밤 11시까지 야근하고, 다음날 아침 6에 서울로 출근했던 경기도 거주 직장인의 근성을 무시하지 말란 말이다! 두통? 그런 건 편의점에서 컨디션 하나 빨면 가라앉아! 두 팔로 바닥에 굴러다니는 지푸라기를 움켜쥐곤 설양의 다리를 뻥 걷어찼다. 그래! 염라대왕이 소원성취 하라고 날 지상으로 다시 불러들였구먼. 설양을 한 대 때려주고 싶다는 내 말을 알아들은 거였어. 아이고 시원하다, 아이고 고소하다.
“복종해!” 설양이 두 팔로 내 머리카락을 잡아 뜯었다. 그것도 다른 사내와 정분이 나 도망간 마누라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식으로 매우 찰지게 뜯었다. 우습게도 두피가 뜯겨나갈 것 같아 아파 미치는 줄 알았다. 되살아난 시체인데 통증이 웬 말이냐. 나는 놓으라며 바락바락 대들었다. 그리고 젖 먹던 힘을 다해 그를 밀었다.
한 움큼이나 뜯겨져나간 남의 머리카락을 손에 쥔 채 밀려난 설양이 어이없어 했다. “뭐야... 어째서 내 말을 듣지 않는 거지. 음호부로 되살렸는데 어째서... 내 말을 안 듣는 거지. 술식이 잘못되었어? 뭐야. 이럴 리가 없는데. 이릉노조가 아니라 내가 만든 음호부라서 실패한 거야?” 그런 거 난 몰라. 이릉노조이고 철도노조이고 닥치라고 해. 어딘지 넋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설양의 얼굴을 향해 스트레이트 펀치 한 방을 날린 뒤, 꽁무니가 빠져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Posted by 미야
2021/10/26 13:32
2021/10/26 13:32
- Response
-
No Trackback
,
-
http://miya.ne.kr/blog/rss/response/2204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제2장 혼백, 망령, 그리고 엉망진창
※ 오리캐×설양(아님!) BL 호러물입니다.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게임 오버 화면을 보는 느낌이었다. 주위는 그저 검고, 까맣고, 시커멓고, 어두웠다. 죽음에 이른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 여전히 당혹감에 빠져 어찌할 바 몰라 했다. 영화나 소설을 보면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빛의 사다리가 내려온다던가, 좁고 어두운 동굴을 지나 사바나 초원이 펼쳐진다던가, 아니면 저승사자가 나타나 수첩을 펼치고 주민등록번호를 물어본다던데 내게는 해당 없는 일이었다. 주먹을 쥐락펴락하다 ‘아무나 계십니까?’ 크게 외쳐봤다. 목구멍 밖으로 나온 외침은 물 먹은 느낌이었고 별 반응이 없었다. 크게 낙담하며 제자리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남들도 그런 거야, 아님 나만 이런 거야. 다음은 드레곤이 돌아다니고, 영주가 있고, 이름이 알렉스나 카일이 되는 영어권 세계로 떨어지는 거 아냐? 아... 진짜 다음번엔 언어패치 제대로 해줘야 하는데.’ 쓸데없는 희망사항을 중얼거리며 가슴팍을 더듬거렸다. 피가 흐르지는 않았지만 검에 찔린 자리는 적자색의 상흔으로 남아있었다. 날이 날카로웠던 탓에 뼈를 가르고 상처는 가슴에서 거의 등까지 닿아 있었다. 순간 열이 확 올라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땅을 다시 쳐다봤다. 지학(※15세)의 나이도 되지 않은 어린애를, 여자 손목도 붙잡아보지 않은 애를 이렇게 죽이면 과잉살상 아니냐고. 바람구멍이 난 옷깃을 단정히 여미며 쓰게 웃었다. 전생 시절 할머니 말씀으로는 사람이 큰 상처를 입고 죽으면 환생해도 그 자리에 좋지 않은 큰 반점이 생긴다고 했다. 사람은 곱게 죽어야 한다,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목에 있는 붉은 반점을 보여주시곤 했다. 이제 앞으로 내가 그 말을 하게 생겼다. 다시 태어나면 분명 가슴에 큰 흉이 있을 테니. ‘설양, 이 개새끼. 이럴 줄 알았으면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걷어 차주는 건데.’ 비통하다는 감정 이전에 약이 바짝 올랐다. ‘아 진짜. 그 새끼 딱 한 번만 때려봤음 좋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난 죽었는데. 숨이 끊어지기까지 고통이 짧았다는 점에 위로를 얻는 수밖에.
그만하면 충분히 쉬었다는 판단을 하고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넋 놓고 있다 그대로 먼지가 되어버리면 곤란하니 여기서 나갈 길을 찾아보는 것이 좋을 듯했다. 그래서 길을 잃었을 적에 써먹기 좋은 대처법 – 손바닥에 침을 뱉곤 손가락으로 튕겼다. 동서남북도 확실하지 않은 장소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기도 했으나, 저승에서 조난당할 수는 없는 일이다. 침방울이 날아간 방향을 확인하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저기요... 여기 누구 없어요?!” 저승사자가 파업 중인가. 아니면 그간 이름 없이 살아온 여파인가. 평소 내 이름으로 불리던 ‘걸람’은 거지를 먹 냄새 나도록 부른 것에 불과해서 저승사자 명부에 오류가 생겼을 수도 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저기요? 여보세요?’ 마구 외쳤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오류를 바로잡는 업데이트가 계속 지연되고 있는 건지 저승사자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눈앞에 나타난 건 흰옷 차림새의 망자였다.
가슴이 먹먹했다. ‘비명소리가 심상치 않더니, 선사도 나와 같이 죽었구나.’ 하얀 옷엔 핏자국이 낭자했고 올려 묶은 머리는 풀어헤쳐져 산발이었다. 엎드린 자세였기에 내 쪽에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는데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먹 쥔 모양과 몸을 떠는 모습만으로도 품고 있는 분노와 좌절감이 충분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더하여 고통도 심해보였다. 신음하며 오른손을 뻗어 바닥을 세게 긁었는데 손등으로 검게 변한 핏줄이 도드라지게 솟아나온 게 보였다. 부풀어 오른 혈관은 금방에라도 터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터지면 새빨간 선혈이 아닌 먹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게다가 손만 저런 상태인 게 아닌 것 같아.’ 숙이고 있는 목덜미에도 나무뿌리가 지나간 것 같은 검은 선이 보였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내 기척을 알아차린 건지 선사가 아, 아, 이러며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내었다. 나는 가만히 도망갈 태세를 취했다. 아무래도 선사는 죽어 악령이 된 듯했다. 지금이다. 하지만 걸음아 나 살려라 달아나는 내 동작보다 선사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그녀의 두 팔이 몸체에서 뚝 떨어져 나오더니 무슨 로켓처럼 날아와 도망치던 내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잠깐만! 잠깐만요! 선사님, 살살! 제발 살살!!” 어깨가 어떻게 되는 줄 알았다. 애걸에도 아랑곳없이 몸통에서 떨어져 나온 팔은 날 어디론가 끌고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한참을 끌려가 어딘가에 내동댕이쳐졌을 적에 나는 거의 반 기절 상태였다. 산 사람도 아니고 망자였는데도 정신이 반쯤 날아갈 정도니 심각하게 빠른 속도였다. 환상통처럼 멀미가 났고 엎드려 구역질했다. 귀신이 된 주제에 이게 다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 한참을 웩웩거렸고 초항성 워프를 마친 엔터프라이즈호 선원이라도 된 느낌을 원 없이 만끽했다. 두통에 어지럼증은 부록처럼 따라붙었다.
“택무군! 사령입니다! 사령이 여기까지!” “조용히 하거라. 운심부지처에선 소란 금지다.” “하지만 사령이!!”
웅성거리는 분위기에 천천히 고개를 들자 오래된 큰 절간 같은 곳으로 장소가 달라져 있었다. 열린 창밖으로는 푸른 나무가 빼곡했고 편백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를 머금은 공기는 서늘했다. 눈꺼풀을 깜빡이며 사방을 두리번거리자 시야가 약간 더 밝아졌다. 건물 안쪽 문방사구를 놓은 서안 앞으로 꽤 젊어 보이는 청년이 앉아있었는데 용모가 따뜻하고 우아했다. 평소에도 예의바르고 점잖을 것 같은 사내였는데 나의 갑작스런 등장에 감정적으로 동요를 한 탓인지 눈매가 살짝 치켜 올라가 있었다. 입구에는 개개인의 구분이 잘 가지 않는 비슷한 흰옷을 차려입은 소년들이 서너 명 모여 내가 있는 방향을 향해 일제히 손가락질하는 중이었는데 호들갑에도 불구하고 소년들의 준수한 외모로 인해 그 삼감 없는 태도가 무례하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역시 사람은 잘 생기고 볼 일이다.
그나저나 어쩐다. 어쩌다보니 대치 상황이 되어버렸다. 밖으로 나가려니 입구에 선 소년들이 쉽게 길을 내어줄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다. 남의 집안까지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날아들었지만 내가 의도한 것도 아니고... 천천히 서책이 가득한 책장이 있는 쪽으로 물러섰다. 여차하면 책을 들어 던질 작정이었다. 간소하게 꾸민 방안에선 던질만한 물건이라곤 책밖에 없었다. 구석에 자리한 네발 향로는 크기나 무게로나 무기로 써먹기에 적합했지만 부숴먹기엔 고가품이었다. 양심이 있지, 정교하게 조각된 향로는 박물관에서 볼 법한 물건이었다.
“이럴 수가. 결계를 깨고 사령이 여기까지 들어오다니!” “사령이 움직입니다!” “택무군! 어떻게 하죠?! 공격할까요?” 애들이 더 난리가 났다. 그리고 나도 덩달아 난리가 났다. 금방 죽어 영체가 된 몸인데 책을 집어들 수 있을 리가.
“숙부님은 어디에 계시지. 명당에 누가 있느냐.” 서안에 앉아있던 자가 침착하게 운을 떼며 책에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나를 향해 강하게 시선을 주었다. 나는 귀신인데 매우 잘 보이는 눈치다. 더듬거리며 책의 표지를 만졌을 적에 표정이 매우 나빴고, 손을 떼자 올라갔던 눈썹이 도로 내려온 걸 봐선 보이는 게 맞았다. “저 사령은 초혼으로 불려나온 것이 아닙니다. 명당에는 지금 아무도 없습니다, 택무군. 선생님은 운심부지처 밖으로 외출 중이세요.” 그리고 바로 그때 낮은 탁자에 놓여있던 고금이 디링, 딩 소리를 내며 저절로 울렸다.
자리에 있던 사람과 귀신이 모두 놀랐다. 소년들에게 택무군이라고 불리운 사내가 내 쪽을 향해 다시 시선을 주었다. 마치 ‘자네가 그런 건가.’ 묻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그런 게 절대 아니었다. 전생에서도 그랬고, 걸람도 그러했고, 나는 악기를 다루는 일에 매우 서툴렀다. 유일하게 잘 썼던 악기가 탬버린이니 말 다했다. 그나마 박자감이 떨어져 노래방에서 신나게 탬버린을 흔들다보면 부장님이 ‘곱게 말할 적에 내려놔!’ 호통을 치곤했다. 그런 내가 금을 뜯었겠냐고.
“방금 전, 그 소리! 문령이었나요?!” 소년 중 하나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그렇다.” 심각한 표정을 한 택무군이 금에서 난 소리가 문령이 맞다고 확인해줬다. “뭐라고 하던가요.” “그게 ‘사부님’ 이라고...”
그리고 나는 보았다. 그때까지도 내 어깨를 잡아당기고 있던 여인의 하얀 팔이, 투명하게 빛나던 선사의 조각난 몸이, 고운 고루가 되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걸 보았다. 스스로 혼백을 두 동강 내어 ‘사부님’ 이라 단 한 마디만 겨우 외치고. 더 이상의 힘은 남아있지 않다며 거품처럼 공기 중에 녹아내렸다.
Posted by 미야
2021/10/25 16:01
2021/10/25 16:01
- Response
-
No Trackback
,
-
http://miya.ne.kr/blog/rss/response/2203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Recent Comments
Site Stats
- Total hits:
- 1019105
- Today:
- 811
- Yesterday:
- 133
Calendar
«
2024/12
»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