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드롭 1-16

생각해보니 이 이야긴 주인공이 죽으면서 끝나는 새드엔딩이었습니다.
괜찮아요. 현 상황에선 엔딩 못 봅니다? 응?


『잠깐만요. 무기를 빌려 뭘 어쩌려고요.』
걱정을 산더미같이 끌어안은 핀치가 허푸덕거렸다.
『어쩌긴요. 당연한 거잖아요. 15세라면 자기 앞가림은 충분히 할 수 있는 나이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미성년이니 내버려둘 수 없죠. 가서 데려오겠습니다. 그러려면 도구가 필요해요.』

목젖이 까딱까딱 위아래로 움직였다.
안 돼! 카터, 주지 말아요. 그 남자의 정체는 로봇이에요. 최상위 통합 MOTHER-시스템으로부터 잔존 거주자를 학살하라는 명령을 수신 받았을 겁니다. 롭에게 무기를 줘선 안 돼.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 사실을 카터에게 말할 수 있겠어? 그렇게는 하지 못하지. 왜냐하면 너는 겁쟁이거든.
- 저 남자의 정체만 폭로하겠다고? 그 전에 먼저 네 정체부터 폭로해보시지.
- 속으로 환호하고 있지? 넌 결국 오른손을 자르는게 싫었던 거야.
- 그게 아니라고? 그럼 카터에게 말해. 저 남자는 로봇이라고.
- 못하겠어? 이거 왜 이래? 고개를 푹 숙이고 있지만 말고 말해봐.
- 뭐? 목소리가 안 나와? 핑계 좋다. 역시 넌 뼛속까지 비겁자야.

「위선자.」

마지막으로 들려온 외침은 이미 죽고 없는 친우의 목소리를 많이 닮았다.
그럴 리가. 핀치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친절하고 상냥했던 네이슨은 그에게 결코 상처가 될 말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옛날을 돌이켜보면 애매하게 말꼬리를 흐리던 친구의 작은 몸짓 하나하나가 그에게로 향하던 비난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차마 입을 열어 말하지 못했던, 지옥 언저리 부근으로 생매장시켜버린 불편한 진실...

카터는 가까이 오라는 투로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여 보였다.
『첫째, 두 번 다시 나를 미스라고 부르지 마세요.』
그리고는 가지고 있던 무기를 리스에게 흔쾌히 건네주었다.
『낡았다고 해도 10년 전에 만들어진 물건입니다. 그렇게 원시적인 건 아니라고요.』
두 사람의 신장 차이만큼 신발 사이즈 역시 차이가 났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구두 뒤축을 꺾어 억지로 넘쳐나는 발가락을 구겨 넣은 리스는 겅중거리며 카터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고맙다, 감사하다, 신세를 지게 되었다 식의 인사는 일절 생략, 건네받은 연발식 총을 신중한 태도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약실을 당기고, 다시 집어넣고. 탄창을 제거했다가 부드럽게 손바닥으로 밀어 넣었다. 탁, 소리가 나도록 올려치지는 않았다. 다음으로는 총신을 똑바로 세운 후 그 무거운 걸 어렵지 않게 한 바퀴 빙글 돌려 무기가 주는 중량감을 몸에 붙게 했다.
『대략 알 것 같아요. 당신 손의 크기와 몸집에 맞게 손잡이를 개조했군요. 공이 밑의 몸체 끝으로 반동을 흡수시키도록 했어요. 다만 눈으로 봐선 탄환을 발사했을 시, 오류각이 어느 정도 나오는지 모르겠군. 한 발 쏘고 테스트를 해봤으면 좋겠지만 지금 이 상황에선 무리겠죠. 이거, 소음이 꽤 상당하죠?』
오른쪽 어깨를 개머리판에 바짝 붙인 자세에서 가상의 표적을 조준해봤다. 예전에도 다루어본 적이 있다는 식으로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지켜보던 카터는 짐작가는게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수동식이군요.』
메뚜기를 콩과 같이 삶아먹는 이상한 소리를 한다며 카터가 눈썹을 찌푸렸다.
『당연히 수동식이죠. 델타에서 사용하는 무기엔 자동식이라는게 있나보죠?』
이번에는 리스가 콧잔등을 찌푸렸다.
『델타라는 건 뭡니까, 미스?』
델타는 중앙에서 비밀리에 운영하는 특수 부대의 별칭이다. 실체는 구경이 어렵고 그림자만 있는 존재다. 중앙으로 롭이 진격하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맡고 있다. 롭과 동등한 위치에서 교전을 벌인 것으로 여러 전설적인 무용담을 남겼다. 뭐, 얘기만 그럴싸할 뿐이고, 정작 그 정체는 고위 관료들의 호위 부대라며 평가 자체를 제멋대로 깎아내리는 사람들도 없진 않다. 그래도 지난 반세기동안 중앙이 괴멸당하지 않은 건 그들이 흘린 피 값이 있어 가능했다고 봐야 한다.

카터는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했다.
『델타가 뭔지 모른다고요?』
『모르면 곤란한 종류입니까.』
『이럴 줄 알았다니까. 됐어요. 더 이상 묻지 않을게요. 델타 출신이냐 물으면 다들 당신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델타가 뭐냐, 구워서 먹는 거냐, 이러고 발뺌하더군요. 하지만!』
『아. 그렇지. 미스라고 부르지 않을게요, 진짜로요.』
리스는 자신의 실수를 용서해 달라며 빌었다.

리스의 정중한 사과와는 상관없이 그녀는 수분을 섭취한 화초처럼 보다 싱싱해졌다. 늑대인간으로 착각할 정도로 기척을 죽일 줄 아는 자다. 저 남자가 돕겠다고 하면 뒤로 돌아가 움무 무리를 충분히 기습할 수 있다.
『좋아요. 그럼 작전을 새롭게 짜야겠군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기습 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 정면 돌파를 할 겁니다.』
『뭐요?』
말도 안 된다며 옆에서 카터가 펄쩍 뛰었다.
『무장을 한 상대가 모두 일곱 명이라고요!』
리스는 갸우뚱했다. 겨우 일곱 명 정도로 그녀는 왜 저러는 걸까. 아, 그렇군. 인질의 안전!
『아이가 안 다치게 주의하겠습니다. 약속하죠.』
『그런게 아니라! 젠장... 핀치! 거기서 가만히 있지만 말고 뭐라고 말 좀 해줘요!』
핀치는 비스듬히 고개를 돌린 채 꿀 먹은 벙어리 흉내만 낼 뿐이었다.
이제 와서 뭐라고 말을 하라고? 할 말이 없다. 굳이 하자면... 잘 다녀오세요?
그녀는 전혀 모르고 있다. 핀치의 마음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리스가 그러겠다 마음만 먹는다면 반각도 지나지 않아 도시 하나가 초토화된다. 그까짓 일곱 명의 움무, 머리가 척추에서 분리되지만 않아도 다행이다.
그런 핀치의 복잡한 심정도 모르고 곧바로 카터가 악을 쓰기 시작했다.
『핀치! 그 남자가 안 보여요! 빌어먹을! 그새 어디로 사라졌지?! 썩을! 우라질!』

뛰어서 가고 있다 표현하기에는 평소 알고 있던 상식이 방해했다. 한쪽 다리를 땅에 딛었다고 생각한 찰나 5미터 이상 가볍게 가로질러 간 상태다. 뒤돌아보면 어느새 작아진 뒤통수만 보인다. 체중이 있는 존재라고 여겨지지도 않는다. 착지한 순간보다 공중에 떠있는 순간이 갑절 이상 더 길다. 뿐만 아니라 무시무시한 속도를 유지한 채 늘어진 나뭇가지를 피해 자유자재로 달린다. 검은 장막처럼 드리워진 어둠을 상관하지도 않는다. 빛이 사라진 깊은 숲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장애물을 제치고 건너뛴다.
『저 앞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데.』
『무슨 소리?』
『몰라. 파도 소리 비슷한 것도 같고.』
『파도?! 여긴 산이야, 이 미친놈아. 바다따윈 부근에 없다고.』
『그러니까 비슷하다는 말을 썼잖아! 누가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고 했어?! 파도 같다고!』
그 정체는 빽빽하게 자라난 나뭇가지들이 큰 바람에 휩쓸려 자기들끼리 몸을 비벼대면서 나는 소리였다. 움무는 반사적으로 하늘을 보았다. 어쩌면 큰 바람을 동반한 소낙비가 다가오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구름 사이로 별이 반짝거린다는 점은 별도로 하고, 맑은 날에도 가끔씩 정신 나간 비가 내리곤 한다. 실제로 쏟아져 내린 것은 짐작도 못했던 거였지만, 아무튼. 움무는 몸이 젖는 걸 염려하며 옷깃을 바짝 여몄다. 그리고 그게 그가 기억하는 내용의 마지막 끄트머리였다.
강한 힘으로 머리를 얻어맞았다. 아프다는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뇌와 연결된 신호들이 전부 끊겼다. 차라리 그게 다행이었다. 몸이 붕 떠서 3미터 가까이 날려갔는데 의식이 있었다면 무척 고통스러웠을 거다. 땅바닥에 내팽겨 쳐지면서 팔이 비정상적인 이상한 각도로 돌아가 버렸다.
『뭐야! 누구야! 어떤 놈이야?!』
산속에서 파도 어쩌고 떠든다고 흉을 보던 자가 반사적으로 방아쇠로 손가락을 걸었다. 판단을 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동료의 몸이 뭔가에 떠밀려 튕겨나갔다. 그는 곰을 떠올렸다. 엄청나게 굶주린, 배가 고픈 살인 곰 비슷한 거 말이다. 그래서 여기다 싶은 곳으로 일단 한 발 쏘았다. 짐승은 총 소리를 두려워한다. 그렇지 않던가?
『아아악!!』
어둠 가운데서 돌연 잘 만들어진 사람 모습의 가면이 떠올랐다. 놀라서 탕, 탕, 두 발을 더 쏘았다. 이 정도의 거리라면 명중했어야 옳은데 사람의 얼굴은 쉬지 않고 빠르게 움직였다.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은 눈치다.
『제발 다가오지 마! 가까이 오지 마! 귀신아, 저리 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과 동시였다. 매우 딱딱한 물건이 명치를 정확히 가격했다.
자신의 배를 때린 물건이 장총을 닮았다는 건 훨씬 시간이 흐르고 나서 나중에야 기억해냈다.

『뭔가 왔다.』
보초를 서고 있던 두 명이 쓰러지자 나머지 움무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이프를 꺼내든 스틸스는 하도 울어 눈자위가 퉁퉁 분 소년을 재빨리 끌어당겼다. 그리고 후스코의 목 한 가운데로 날이 바짝 선 흉기를 들이대었다.

Posted by 미야

2012/09/10 13:12 2012/09/10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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