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드롭 1-15

『좋아요, 존 리스. 그럼 이제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보세요.』
기록부에 인적사항을 기록하는 요령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부근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다. 키는 187cm 이상, 체격은 마른 편이고, 눈썹이 살짝 아래로 처졌다. 눈동자 색은 어두워서 파악 불가. 회색의 새치가 드문드문 보이는 머리카락은 짧게 다듬었다. 부랑자는 아니다. 영양상태가 좋지 않은 부랑자는 입가에 부스럼이 생긴다. 리스의 피부는 상당히 깨끗한 편에 속했다. - 물론 흙먼지를 다량 뒤집어쓰긴 했다.
옷차림은 생소했다. 몰개성의 셔츠에다 허리를 밴드로 처리한 편안한 바지를 입었는데 상하의 모두 미묘한 광택이 있는 재질로 만들어졌다. 비단은 아니다. 중앙에서 값비싼 비단으로 몸을 휘감은 여성들을 본 적이 있는 카터는 재질의 차이점을 구분할 수 있었다. 비단이 보다 호화롭다. 그가 입은 옷은 인공적이면서도 대량 생산된 싸구려라는 느낌이 강했다.
그리고.......... 그리고 어째서인지 맨발. 양말도 안 신고 맨발. 영광의 아베베 비킬라.
늑대인간 어쩌고 줄거리가 스멀스멀 그녀의 머릿속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카터가 그의 발을 물끄러미 쳐다본다는 걸 알았다. 리스는 입맛을 쩍쩍 다셨다.
『어. 제 이름은 이미 말씀드렸고요, 저는... 음. 이걸 뭐라고 하면 좋을지.』
『늑대인간?』
『설마!』
지금 농담하냐며 리스의 한쪽 눈썹이 활처럼 구부러졌다.
『오늘밤에 보름달이 뜬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런게 아니고 실은.』
그렇게 적당한 단어를 고르기 위해 그가 잠시 숨을 고르던 찰나,
『우와악~!! 카터! 내가 막을게요! 어떻게든 할 테니까 어서 달아나요!』
엉금엉금 네 다리로 기어온 핀치가 리스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그보다는 옷자락을 잡아당겨 바지를 아래로 끌어내렸다고 보는게 훨씬 더 정확한 묘사겠지만, 아무튼. 생각지도 못한 기습에 당황한 리스는 재빨리 허리춤을 붙들었고, 카터는 외간 남자의 살색이 드러나는 걸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카터! 도망쳐요! 빨리!』
내가 왜? 거기서 더 잡아당기면 엉덩이 굴곡까지 공짜로 전부 구경할 수 있겠구먼.
『왜 가만히 서있는 거예요! 이 남자가 당신을 헤치기 전에 어서 피해요!』

그의 얼굴색이 울그락불그락 난리가 났다. 씩씩거리는 소리가 카터가 서있는 곳까지 들려왔다. 머리꼭대기까지 짜증이 치솟았다. 폭발을 언제 하느냐만 짐작하면 되겠다. 3초, 2초, 1초,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암, 그 기분을 충분히 이해하다마다.
콧구멍이 두 배로 벌어진 리스가 핀치의 이마를 또다시 찰싹찰싹 두드리기 시작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이불빨래에 경악한 엄마가 오줌싸개 말썽꾸러기를 마구 혼내주는 모양새다. 말리고 싶은 생각은 그래서 요만큼도 들지 않았다. 대신 팔짱을 끼고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관망했다.

『그만! 그만해요! 아파! 아프다고!』
『에잇, 더 맞아라. 더 맞아! 이 정도로 울먹거리긴. 흥! 이봐요, 해롤드. 어째서 아까부터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고 있는 겁니까! 지금 이 순간 여기서 제가 죽이고 싶다 간절하게 생각하고 있는 대상은 오직 당신밖에 없다고요. 그걸 아셔야지.』
『어.』
『진짜라니까. 전 지금 당신 모가지를 비틀고 싶어 안달이 났어요.』
『그.』
『뭐요? 안 들리니까 더 크게 말 해봐요. 충동? 무슨 충동. 내가 무슨 충동을 느낀다고?』
『우?』
『말도 안 돼! 제가 이성을 잃고 저 여성을 덮치기라도 할까봐 그러는 거예요?! 제가 그렇게 파렴치한 인상인가요?! 그러냐고요!』
『아.』
『깨달았으면 제 바지는 그만 잡아당기세요! 절 발가벗기고 싶은게 아니라면 말이죠.』
「발가벗기려 한다」라는 말에 핀치는 황급히 그에게서 손을 떼었다. 매 맞아 벌겋게 달아오른 이마 말고도 뺨과 목덜미 역시 홍조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무엇인지 깨닫자 입이 헤 벌어졌다. 리스의 바지는 이미 허벅지까지 내려온 상태였다.
『잘못했습니다.』
『사과는 필요 없고. 우리, 조용한 곳으로 가서 대화 좀 하죠.』
까딱하면 혼내주겠다는 경고의 의미를 담아 리스가 손가락 하나를 세워보였다.
핀치는 꼼짝 못하고 혼이 전부 빠져나간 모습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바지를 추스르는 모습은 둘째고 사람을 쏘아보며 화내는 리스는 엄청 무서웠다.

『그나저나 붕대를 이상하게 감아놨군요. 누가 이랬답니까? 이래서는 피가 통하지 않을 겁니다. 팔을 이리 내요. 제가 다시 제대로 처치를 해볼게요.』
전의를 상실한 채 얌전해진 핀치의 모습에 감정이 한층 누그러진 모습이 된 리스는 제일 먼저 핀치의 오른팔을 칭칭 감은 헝겊조각에 관심을 보였다. 한눈에 봐도 완전히 비상식적인 처치다. 상처를 낫게 하기는커녕 썩게 만들 거다. 얼마나 꽉 묶어뒀던지 혈색을 잃은 손톱이 청색이다. 콧잔등에 가로주름을 만든 그는 몸을 뒤로 빼는 핀치의 동작에도 아랑곳없이 강압적인 태도로 매듭을 풀어내려 했다.
『안 되요.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 있습니다, 미스터 리스.』
어렵게 묶은 매듭을 풀지 말라며 핀치가 애원했다.
『아이가 인질로 잡혀 있어요. 그래서 인질범들에게 제 오른손을 잘라주기로 했습니다.』
『네? 고양이가 말가죽 뒤집어쓰고 강물에서 헤엄치며 노는 것도 아닌데 그게 무슨 소립니까.』

설명은 결코 쉽지 않았다.
리스는 움무가 뭔지 모른다. 중앙이 어떤 곳인지도 모른다. 컴퓨터 칩에 대해선 잘 알고 있겠지만 사람의 피부 아래로 이식하는 칩이라는 건 생소할 거다. 당연한 얘기다. 그가 살았던 시대와 지금은 약 200년의 간격이 벌어져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2세기면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그리고 그동안 형용하기 힘든 많은 일들이 있었다. 정말로 많은 일들이.

『특이하군. 요즘 인질범들은 돈을 내놓으라고는 안 하는 모양이죠?』
요점만 간단히 정리해서 짧게 말해주었더니 역시 이해를 못 했다.
『그래서 용의자는 모두 몇 명입니까, 핀치.』
허리를 접고 앉아 핀치의 신발 두 짝을 모두 벗겨내다 말고 리스가 질문했다.
『일곱 명이오. 그런데 뜬금없이 내 신발은 왜 벗기는 겁니까.』
『빌리려고요.』
그리고 카터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미스, 괜찮다면 그쪽에게선 무기를 좀 빌렸으면 합니다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Posted by 미야

2012/09/06 17:08 2012/09/06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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