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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급자족용 오리지날 습작입니다.


가지라고 내민 몇 가닥의 솔잎을 쳐다보는 소년의 눈빛은 들개처럼 사나웠다.

가족과 헤어지고 익숙한 환경으로부터 강제로 뜯겨져 나온 아이들은 대다수 겁에 질린다.
겁에 질린 인간이 보이는 반응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숨는 것이고 하나는 공격하는 것이다.
어른과 달리 신체가 덜 발달한 아이들인 만큼 아무래도 공격을 시도하기 보다는 몸을 작게 움츠릴 거라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대기 일쑤다. 판단력이 미숙한 탓도 있고 작은 자극에도 쉽게 흥분하기에 그러하다.
더 가까이 가면 물어뜯길 것 같아 이대로 관둘까 싶었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한 걸음 앞으로 더 다가갔다. 실제로는 나보다 키가 한 뼘은 족히 컸지만 겉모양만 어린애인 나와는 달리 상대는 진짜 어린애다.
쳐다보는 눈빛이 몹시 광망하다 여기는 대신 시범을 보이고자 녹색의 잎을 앞니로 깨물었다.

『무슨 짓이냐.』
그래봤자 미친놈 쳐다보듯 하는 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만.
『멀미가 심하다고 들었어. 이러고 있으면 조금 진정되거든. 자, 이거.』
아이 눈치를 보던 나는 약간 비굴한 자세로 실실 웃었다.
『속는 셈치고 입에 물고 있어봐.』
가만히 손안에 잎사귀를 쥐어주자 소년의 표정이 바람 빠진 가죽공처럼 팍 찌푸려졌다.
글쎄다... 이딴 쓰레기는 필요 없다며 팽개치려나.
하지만 소년은 그럭저럭 예의발랐다. 뭐 씹은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배운 구석은 있어서 시선을 옆으로 돌린 채 썩 내키지 않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떡거렸다. 요컨대 최소한 고개는 끄떡거렸다.
『나는 멀미를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속이 좋지 않았을 뿐이야.』
『그려, 속이 안 좋다 치고 입에 물고 있어봐.』
『괜찮다니까.』
『괜찮지 않다는 걸 아니까 이러지. 자, 멀미는 결코 부끄러운게 아니야. 그러니 입에 넣어봐.』
나의 지적질에 옆으로 치우쳐져 있던 눈동자가 다시 불꽃을 뿜으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어쩌면 천성이 사나운 건지도 모르겠다. 쏘아보는 기세가 반드시 죽여야 할 원수를 바라보는 듯하다. 그 기세가 내가 아는 누구를 꼭 닮아서 나도 모르게 반가움 마음이 들었다.

멀미 탓에 식사도 제대로 못 했으면서 빈정 상해 화가 치솟았던지 소년은 배에 잔뜩 힘을 주어 버럭 외쳤다. 덕분에 발음이 귀에 쏙 잘 들어왔다. 대륙어 표준말이었다.
『너는 생판 모르는 사람이 준 걸 아무렇지도 않게 넙죽 입에 넣고 그러나 보지?』
『그러는 넌 이런 잎사귀에까지 독이 발렸다 생각하는 거냐?』
『뭐?!』
비아냥에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맞받아치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듯하다. 입이 살짝 벌어진 채 이쪽을 쳐다보는데 그 상대방이 말대답은 따박따박 잘하는 주제에 싱글벙글 웃기까지 하고 있어서 더 기가 막히는 눈치다.
자자, 그러니 그만 눈에 힘 풀고 이거 받으셔.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겨요.
『여기 이상한 거 안 묻었어. 진짜야.』
『그런 생각은 안 했어. 다만 네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도 될지 판단이 서지 않았을 뿐이야. 약초도 아닌데 그런게 효과가 있을 것처럼 보이진 않... 그리고 너.』
소년이 넌더리를 내며 쓴웃음을 삼켰다.
『그만 해. 이런 식으로 나와 말을 섞고 친해지려고 해봤자 좋을 거 하나 없다.』
이번에는 내 쪽에서 코웃음을 칠 차례였다.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어. 아무렴 어느 바보가 풀쪼가리 하나로 선심을 사려고 하겠냐.』
손에 쥐어줬던 솔잎을 도로 뺏어다가 입안에 넣고 질겅 씹었다.
『강요하지 않을테니 탐탁치 않음 관둬. 보기와는 달리 가리는게 심하군. 음... 잎사귀 씹는게 싫은 눈치니 생강 말린 걸 추천하지. 효과는 이것과 아마 비슷할텐데... 시종들 중 누군가 양념으로 쓸 종류로 말린 생강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니 가서 물어봐줄까?』
괜한 오지랖이었을까. 소년이 이 앓는 소리를 내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리고 아랫배를 진동시켜「생강따위 알게 뭐야~!!」소리를 버럭 지른 것과 동시였다.

『어머나~ 왜들 난리람. 어느 쪽이 먼저 싸움을 걸었을지 궁금하네.』
모란꽃이 그려진 부채를 오른손에 쥔 소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색동소매 상의에 비단주름 꽃치마로 화려하게 꾸민 아이였다. 심지어 몇 주간의 마차 여행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복잡하게 땋아 진주장식의 값비싼 머리꽂이로 고정을 시켰는데 몇몇 아이들이 피로에 지쳐 세수조차 귀찮아한 걸 떠올리자면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이질감이 엄청났다.
『보나마나 린청 오라버니겠지. 호호.』
맑게 웃자 공기마저 깨끗해지는 느낌이었다. 뽀얀 목덜미에 작고 붉은 입술, 상당히 귀여운 외모를 가지고 있어 인형 같다는 말을 귀가 아프게 듣고 자랐을 것 같다. 또한 스스로가 예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 타인의 시선과 칭송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눈을 동그랗게 해서 쳐다보는 나를 두고도 뺨을 붉히는 법 없이 당당했다. 
『시끄럽다, 추녀.』
물론 눈이 삔 종족도 어딘가에는 존재한다.

서로 잘 아는 사이인 듯했다. 가만 보니 생김새도 비슷했다. 한 집에서 오빠 동생 두 아이를 사친으로 보냈을 리 없으니 두 사람의 관계는 아마도 사촌일 거라 추측했다. 
『너는 왜 항상 내가 먼저 시비를 걸었을 거라 단정하지? 휘사.』
『그거야 린청 오라버니가 산적 놈처럼 지랄맞... 크음! 성격이 나빠서 그렇지요. 이렇게 예쁜 아이를 상대로 언성을 높이고... 쯧쯧, 얼마나 놀랐을꼬. 보세요, 아이가 꿀단지를 먹었네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비유가 약간 엇나갔으나 린청이라고 불린 소년은 별 무리 없이 잘 알아들었다.
『걱정 마. 방금 전까지 멀쩡하게 방언 터졌었다. 지금은 널 보고 혀가 굳은 거야.』
『어머나~ 그거 정말?』
소녀는 손뼉을 치며 눈에 띄게 좋아했다.
『나의 아름다움에 할 말을 잊은 거야? 나이는 어려도 보는 눈이 있구나. 무리도 아니야. 내 자태가 선녀처럼 곱기는 하지. 허락할테니 마음껏 찬양하렴.』

듣다 못해 린청이 꽥 하고 고함을 질러댔다.
『돌았냐?! 이런 산길에서 그런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있음 신기해서라도 누구나 쳐다보게 된다! 도대체 네 녀석 머리속엔 상식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는 거냐?!』
그 말을 듣고서야 시선을 내려 그녀의 발을 쳐다봤다.
용신님이여 굽어 살피소서. 치마 아래로 드러난 건 진짜로 금락 구두였다. 고가 높고 뾰족하여 실내에서 신어도 발이 끔찍하게 아픈 종류다. 굽의 높이가 한 뼘 이상이기에 몸 균형 잡기는 당연 어렵고 그런 걸 신고 자갈밭을 걸어야 한다면 발톱에서 피가 날 거다. 오죽하면 우아한 고문 도구라고 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휘사는 치맛단을 좌우로 펄럭이며「내 신발이 어때서」라고 했다.

『때와 장소를 가려.』
『날 빛나게 하는 일에 때와 장소를 왜 가려. 남자들은 생각하는게 진짜 이상하다니까.』
『네가 비정상이얏!』
『오라버니가 여자 마음을 몰라서 그래. 모래폭풍 지옥에서조차 머리를 빗고 화장을 하는게 바로 여자라고.』
그렇게 대꾸하며 한껏 멋을 부려 올린 머리를 소중하게 어루만졌다.

Posted by 미야

2015/04/27 14:29 2015/04/27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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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급자족용 습작입니다. 일부 써뒀던 부분은 하드 말아먹으면서 전부 날아갔고... 1년 넘게 좌절 삼태기였다가 1인칭으로 바꿔서 처음부터 다시 쓰기 시작했네요.


「제국에선 원래 이렇게 하는 거래요」라면서 그들은 풍성하게 늘어진 내 머리카락을 가위로 잘랐다.
물론 제국인들이 단정하게 보이는게 가장 좋다면서 짧은 머리를 선호한다는 걸 잘 알고 있기는 하다. 용신 다음으로 신성한 존재라고 여겨지는 황제도 긴 머리는 귀찮다고 정색하며 기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거야 어디까지나 남자들 이야기고.
가볍다 못해 허전해진 뒷통수를 매만지며 의아해 하는 표정을 짓자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한가닥씩 줍던 할멈이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머니까요.』
내심 당황했다. 듣고 보니 더 모르겠다. 내 판단으로는 그것과 이것은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데... 내가 몰랐던, 여행 전에 머리를 다듬는 풍습이라도 있는 건가? 멀뚱거리며 설명을 기대했으나 할멈은 줄줄이 얘기하는게 귀찮은 것 같았다. 아니, 그것만으로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 여기는 듯했다.
이봐요? 나는 여자아이라니까요?
마른침을 삼키고 있자니 더하여 굽 낮은 신발과 바지까지 준비하여 내밀었다.
『그럼 입는 것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안즈 님.』
그녀는 손톱자국이 남을 정도로 내 팔을 우악스럽게 꽉 잡더니 소매 속으로 억지로 끼어 넣었다. 팔목이 비틀려 나도 모르게 악 소리를 지를 뻔했다. 눈물을 글썽거리는데 홑겹의 면으로 만든 치마가 벗겨졌다. 단추를 채우는 손길은 야무지고 신속했다.
거울을 보자 어느 틈에 빼빼 마르고 왜소한 몸집의 소년이 이쪽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사친으로 간다 결정이 내려지자 짐을 꾸릴 시간조차 촉박해서 석별의 정을 나누는 과정은 과감히 생략되었다.
대신 아버지는 어떤 상황에서건 가문의 명예를 항상 염두에 두라는 딱딱한 내용으로 글을 적어 내려 보냈고, 어디로 사라지지 않을 그놈의 망할 허례허식에 따라 서찰은 값비싼 나전 장식이 된 검정 상자 속에 정중히 봉인된 채 하달되었다.
두 팔로 상자를 받아들자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려 했다.
내용물은 그렇다치고 자결용 단검이나 목을 매는 용도의 비단 끈이 들어가 있으면 어울릴 법한 상자이지 않은가. 진짜로 죽으라 하는 줄 알고 잠시나마 기겁을 했다.
「허! 상자를 팔면 돈은 되겠구먼. 하지만 왜?」
아무튼 아버지라는 사람은 어디서 잘못 배운 이상한 걸 흉내 내어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이제 그만 마차에 오르시지요, 안즈 님. 일정이 촉박합니다.』
『아.』
리세리를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는데.
손목을 잡힌 채 끌려가며 나는 내 귀여운 이복동생을 생각했다.
짐짓 돌아보니 우리 집 지붕이 궁궐처럼 드높았다. 높게 솟은 처마의 휘어짐이 무시할 수 없는 정도의 위엄을 내뿜었다.

『나 같으면 펑펑 울고 기절했겠구먼. 자기 처지를 알고는 있는 건가?』
『그러게. 완전히 남의 일이라는 식으로 멍한 얼굴이네.』
『단순히 바보인 건지도 몰러. 평소에도 꾸벅꾸벅 잘만 졸았잖아? 코앞에서 빗자루를 쓸며 일부러 먼지를 일으켜도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하긴. 평소에도 불도 안 킨 어두운 방에 움직이지도 않고 오도카니 앉아만 있곤 했지.』
『아유, 소름 돋아. 무슨 어린애가 그렇담.』
『옛날에 약을 잘못 먹어 저렇게 되었다는 말도 있던데? 너 혹시 아니?』
『아, 나도 그 얘기 들은 적 있다. 배앓이 약이랍시고 친모가 쥐약을 먹였다고...』
『쥐약을?! 어머나, 끔찍스러워라.』

이럴 적엔 귀가 좋은게 흉이 되어버린다.
아니, 이 사람들아. 나도 슬프거든요?! 집에서 내쫓겼다는 거 잘 알거든요?!
그리고 내 어머니가 나에게 쥐약을 먹였다는 건 얼토당토않은 유언비어거든요?!
『썩을 것들!』
짐을 싣던 짐꾼이 내뱉은 욕설을 들은 모양이다. 사내는 놀란 눈을 크게 치켜뜨고 입을 헤 벌렸다. 그러나 여전히 내 표정이 무덤덤했기에 이내 다른 이가 투덜거리는 말을 잘못 들었거니 스스로 납득하는 눈치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가 아니고 대략 일곱 살 전후로 원래의 인격과 기억이 돌아오게 되는데 이것에 대한 작동 원리라던가 구조라는 건 알지 못한다.
다만 지금까지 이 각성의 과정을 여러 번 경험해본 당사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젖먹이 시절에 그런 끔찍한 일을 경험하지 않아 그나마 다행스럽다 생각한다.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가 서서히 눈을 뜨고 깨어나는 모습을 상상했다면 그냥 웃겠다. 의외로 상당히 고통스럽고 폭력적인 경험이다. 탈피를 하려면 낡은 등껍질부터 부셔야 함과 마찬가지로 영혼의 외형이 깨져야만 그 속에 든 알맹이가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음이다. 고통은 아마도 그런 면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저녁식사 시간이었고, 하필이면 수저로 밥을 떠서 입안에 넣는 순간 각성의 때가 찾아왔는데 당시의 일을 회상하던 할멈의 표현을 빌리자면「별안간 밥상을 뒤엎더니 바닥에 쓰러져 다리로 벽을 차고,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삼킨 음식을 남김없이 토했으며, 이내 입술이 파랗게 변한 상태에서 두 팔로 자기 머리를 쥐어 몸통에서 뽑으려 하였습니다.」란다. 그거 참... 뭐랄까. 전해들은 이야기만으로도 오싹했다.
반응이 하도 격렬하니 독을 먹었다 착각할 법하다. 눈이 돌아간 상태로 거품까지 뿜는 걸 보곤 대뜸 쥐약을 떠올렸다고 한다.

- 돈을 요구하던 생모가 나리의 금전제공 거절에 불만을 품고 아이에게 약을 먹였다.

일경이 겨우 지났을 뿐인데 불경스런 수근거림이 온 집안에 퍼졌고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아버지는 호랑이 무늬가 조각된 비싼 벼루를 마룻바닥에 팽개치며 대노했다.
「누가 건드렸느냐. 내가 아직 허락하지 않았는데 누가 감히 내 명령 없이 손을 썼느냔 말이다!」
화를 내는 부분이 살짝 엇나가 있었지만, 아무튼.
나중에 듣기로는 개구멍을 통해 은밀히 집안으로 들어온 의원이 바닥에 흘린 반찬과 국을 싸서 조용히 가져갔다고 했다. 주방 일을 하는 여자들은 날벼락을 맞았는데 특히 찬을 만드는 이들이 뒷마당으로 끌려가 호된 매질을 당했다. 조사를 마친 의원이「수상한 점은 없었습니다」보고를 올렸음에도 사흘 내내 경을 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자리를 보전하고 드러누워 열에 들뜬 채 헛소리를 중얼거렸고, 때로는 노래를, 때로는 구애를, 그리고 누군가를 향해 애원과 사죄하기를 반복했다. 몇 백년간 누적된 기억과 이전의 삶의 무게에 말 그대로 깔려죽기 일보직전이었다. 나는 거의 실성한 채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엄청나게 많은 얼굴들을 떠올렸고, 커다란 대못이 머리를 뚫고 지나가는 감각을 생생하게 맛보며 그들의 목소리를 전부 기억해냈다.

아버지, 어머니, 나의 형제, 나의 친구, 나의 아내, 나의 아이.
나의 왕. 그리고 나의 용신...

밑바닥 없는 절망이 일곱 살의 어린아이를 통째로 삼킨 뒤 그 살을 씹어댔고, 그 날카로운 이빨에 곱게 갈리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건 없었다.
저항은 쓸데없어 마침내 눈을 떴을 때 나는 거의 말을 잃었다.
이것이 약을 먹어 천치가 되었다는 소문의 실체다.

『원래 많이 이상해.』
우리 집 하인이 손가락을 자기 이마에 대고 빙빙 돌렸다. 내 이야긴가 보다.
솔잎을 따서 입에 물고 있는 날 봐서 그런지 빙빙 돌리는 동작이 평소보다 배는 컸다.
『큰 나라로 어려운 공부를 하러 가는 거잖아. 그런데 저렇다니까. 큰일이야.』
청색의 두건으로 머리를 감싼 중년의 남자가 우리 집 하인이 내뱉은 흉을 듣곤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렇게 머리가 나쁜 것처럼 보이진 않던데. 게다가 너, 그런 말을 아무렇게나 막 하면 욕 본다. 우리 같은 것들은 자나깨나 입조심을 해야 한다고. 그런 식으로 주둥이 함부로 놀리는 거 아니다.』
『쳇! 같은 종놈이면서 훈계를 하는 거냐.』
『인석아, 그게 훈계냐?! 거기서 왜 눈을 부라려. 진짜지 성격 이상한 놈일세!』
『내가 뭐가 이상해. 나는 정상이라고?』
『아이고, 우리 주인처럼 깐깐한 분을 만나야 정신을 차릴려나. 네가 우리 주인을 모셔봐야 하는데. 우리 아가씨처럼 사흘 내내 신경질을 부려봐. 아주 미치고 펄쩍 뛴다.』
다른 사람이 맞장구를 치며 슬그머니 대화에 끼어들었다.
『신경질은 차라리 괜찮지. 말도 마. 우리 도련님은 멀미가 나서 계속 토하느라 바빠. 그리고는 자기 토사물 냄새에 반응해서 다시 구토하고... 악몽이야.』
보름 가까이 지나자 하인들끼리는 이미 친해진 모양이었다. 서로 말을 섞지 않는 아이들과 달리 그들은 불을 피우고 한곳으로 모여 음식을 나눠먹고 휴식을 취하곤 했다. 통성명을 하고부터는 불알친구라도 되는 양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그 중의 제일은 주인 흉보기였다.
『우웩, 어쩐지 너한테서 냄새 나더라. 아유아유아유아유 썩은 내.』
『뭣이 어째?!』
그 다음이 상대방 흉보며 눈 흘리기.
서로 싸우느라 정신이 없는 틈을 타 멀미로 고생한다는 소년이 있는 곳으로 슬그머니 걸음을 옮겼다.

Posted by 미야

2015/04/23 10:21 2015/04/23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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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38년 전, 나는 또 한 번 죽었다.
하늘에서 주신 명을 다 마치지 못한 채 이번에도 역시 젊어서 절명, 사인은 두부손상으로 인한 충격사... 라고 하면 지나치게 간결한 설명인데 화재로 인해 발생한 유독가스를 잔뜩 들이마신 나머지 정신이 가물가물해진 상황에서 출구를 찾아 헤매다 무너진 대들보에 머리를 얻어맞고 쓰러져 그대로 즉사 - 여기까지 떠올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나란 놈은 못난 사람이다. 그게 언젯적 일이라고 아직까지 그때의 일을 곱씹고 있다니.
숨이 끊어지면서 원한을 품은 것도 아니다.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건 피치 못할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평범한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 슬퍼하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후회는 없구나」읊조리며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 추구하는 목표인 만큼 그런 식의 횡액이 달갑지 않은게 사실이기는 하나... 어쩌겠는가, 상대방이 날 죽이겠다고 덤벼드는데. 그것도 나 하나 잡겠다며 남의 나라 수도 한 가운데로 군대를 보내기까지 했는데.

「소원대로 책과 함께 불살라주지.」

순간 무거운 한숨이 새어나왔다.
팔자가 기구하여 나란 녀석은 어디를 가든 매번 미움을 받고 만다.

옆에서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안즈 님.』
『별 거 아니오, 할멈.』
반사적으로 그렇게 대꾸했어도 마음 한 구석이 쓰라리고 아파왔다.
마음이 어지러우니 몸가짐 역시 흐트러진다. 나도 모르는 새 허리가 구부정해졌다.
못마땅했는지 할멈이 헛기침을 했다.
흠칫하고 다시 배꼽 아래로 힘을 주어 자세를 바로잡았다.

지금 나의 나이는 아홉 살이다. 한 달 보름 뒤에 생일이 돌아오는데 그 때는 열 살이 된다.
참으로 좋은 때다. 한창 어리광부리고 만사가 즐거울 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움을 받을 팔자라는 것인지 고귀하신 아버님께 문안을 드리기 위해 분수에 넘치는 예장을 갖추고 아침 식사도 거른 채 이렇게 무릎 꿇고 앉아 오전 한 나절을 쓸데없이 낭비하고 있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낭비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게 무려 3개월 전이고, 그동안 집안에선 항상 그래왔듯 나를 투명 인간 취급을 했다. 온종일 방에서 나오지도 못하게 하고 심지어 식사도 따로 챙겨 다른 사람과 구별되게 수저를 들게 했다. 이복동생 리세리가 받는 대접과는 하늘과 땅이라서 나는 누구와도 말을 섞을 수도 없었고, 누구에게서도 관심을 받지 않았다. 그들은 완벽한 방임 상태로 나를 아무렇게나 내버려뒀는데 귀족이라면 당연시 여길 몸치장을 도울 전속 몸종조차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런 마당에 부모님께 문안 인사 어쩌고는 사치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요컨대 아버지는 나란 아이에게 일절 관심이 없어서 어쩌다 정원 앞을 지나치는 나를 봐도 개나 고양이 취급을 하곤 했다. 두 발 달린 것이 천천히 움직이는구나, 덕분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는구나, 대략 이런 식이랄까.
그런 나를 아버지가 먼저 보자고 할 까닭이 없었다.
고로 기대도 하지 않았다. 이건 그냥 일종의 괴롭히기다.
다리가 저려 움직이지도 못할 지경으로 만들었다가, 힘들어하는 나를 몰래 훔쳐보며 큭큭 웃고, 나중엔 선심 쓰듯 별당으로 돌아가라고 하지 않을까... 분명 그럴 거라 생각했다.
허나 짐작했던 것과 달리 두꺼운 문평지가 양편으로 젖혀졌고「나리 납시오」라는 귀 간지러운 알림과 같이하여 아버지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강녕하시옵니까, 아버님.』
『음.』
정확히 열 다섯 걸음 떨어진 지점에서 예의바르게 절을 올리는 어린아이를 보고 남자는 어느 쪽으로도 해석하기 어려운 신음 소리를 냈다.
그래도 굳이 파악하자면 좋지 않은 쪽이다. 그 증거로 사내의 이마는 잔뜩 찌푸려진 채였다.

남자는 빈사국의 귀족으로 지위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다만 수려한 외모로 어려서부터 칭송이 자자했는데 그 덕에 입궐하여 왕의 잡무를 돕는 동아로 발탁되었다.
남자가 한 일은 왕에게 아침 세숫물을 은그릇에 떠다 바치는 일이었다고 한다. 참으로 별 거 아닌 허드레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자신이 대단한 일을 하는 대귀족이라도 된 것처럼 코를 세우고 허세를 부리기 시작했고, 의외로 그런 점이 통해 성년이 되어 궁을 나오고 난 뒤에도 주변에선 그를 보고 감히 넘볼 수 없는 고귀한 핏줄이라 단단히 착각하곤 했다.
무슨 놈의 세숫물 담당이 고귀한 핏줄이냐 따지지 말 것, 왕의 발 씻는 물도 귀하고 세숫대야도 귀하다.
그러니 모두 입을 모아 외치도록. 나리 납시오, 라고.
코웃음이 나올 상황임을 본인만 모른다. 스스로를 높여 자신을 귀하다 생각하고 있으니 무어라 할 수도 없다. 더하여 한 번 당연하다고 여기면 자식이 아비된 자 앞에서 신하된 자의 예를 보이며 머리를 조아려도 이상하다 생각치 못하게 된다.

거드름을 피우는 말투로 남자가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그만 머리를 들어도 좋다.』
『예.』
허락이 떨어졌으나 시선은 여전히 무릎에 둔 채로 행동을 조심했다.
나약한 분위기에, 얌전한 성격이고, 어른의 말에 순종하는 착한 아이. 남자가 원하는 모습대로 움직인다.
하지만 아버지의 표정은 여전히 찌푸려져 있는 채였고, 과장하자면 보기만 해도 끔찍스러운 걸 억지로 마주하고 있다는 식이었다.
『그래, 공부는 잘 하고 있느냐.』
『......』
선뜻 대답을 하기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완전히 빗나간 질문이었다. 그 누구도 나에게 책을 가져다주거나 선생님을 데려와 수업을 받게 한 적이 없다. 그런데 뜬금없이 공부라니?
당혹스러워하는 이쪽의 분위기를 읽었을까, 남자는 재빨리 질문 내용을 달리하여 말했다.
『글은 읽고 쓸 줄 아느냐?』
그래봤자 거기서 거기다. 글이라는 걸 가르쳐준 적이 없는데 이게 뭔 소리람.
재차 실수했음을 깨닫고 남자가 왼쪽 무릎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그러니까... 음. 글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은 없느냐?』
속사정이야 어쨌든 나는 이 집안의 장녀다.
남의 이목을 고려하여 드디어 나에게 글을 가르쳐줄 선생을 붙여주려나 보다.
촉을 세우며 기대 반, 근심 반,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배우고 싶사옵니다.... 만.』
아아... 틀린 답이었나 보다. 어쩐지 망한 것 같다. 아버지가 더욱 기분 나빠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냥「제가 쌀 축내는 것도 아깝죠? 전 분수를 알아요. 저 같은 놈에겐 글공부 같은 사치는 필요 없습니다. 얌전히 지내다가 이대로 죽을게요!」라고 외쳤으면 좋았을 거 같다.
『그럼 되었다. 사친으로 보내지는 건 안즈, 너로 결정하겠다.』
『네?』
『그렇게 알고 준비하거라.』

사친제도는 변방국의 귀족이나 왕족의 자제를 제국으로 보내 거기 상류층 자제들과 같이 여러 수업을 받게 하는 일종의 친화정책이다. 이쪽에서 희망을 하면 대학까지 보내준다.
이렇게 단순하게 말하면 너도나도 가겠다고 난리가 날만큼 좋은 제도라고 생각하시 쉽지만... 실상은 인질이다.
『제가 가도 되는 건지요, 아버님.』
5년에서 10년 가까이 공부시킨답시고 애를 그 먼 곳까지 데려다가 얼굴 한 번 안 보여준다.
당연히 부모들은 아이를 보내기를 꺼린다.
게다가 한참만에 다 커서 돌아오면 핏줄의 정 그딴 거 모르겠고, 결정적으로 낯선 모습으로 변한 아이들은 제국인처럼 말하고, 제국인처럼 옷을 입고, 제국인 입맛의 음식을 먹는다. 부모들의 당혹스러움이 정점을 찍는 순간이다. 당장 관리가 되어 입신양명하여야 할 터인데 이건 그냥 머리를 짧게 자른 외국인이다.
이렇다보니 너도나도 꾀를 부리기 시작해서 어느 해인가는 보내어진 사친 전부가 막둥이였던 적도 있다. 더러는 입양한 양자였다.
물론 머리 좋은 제국 황제가 그걸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장자를 보내라.」
그런 연유로 규율에 따르자면 사친으로 보낼 대상은 내가 아니라 이복동생 리세리가 될 터.

아버지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리냐. 네가 이 집에서 제일 먼저 태어나지 않았니.』
그리고 자식 앞에서 해서는 안 될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꺼냈다.
『돌아와도 집안을 잇지는 않겠으나 네가 첫째인 것은 틀림이 없지. 아무튼 네가 가지 않는다면 천한 출신의 네 어미를 일부러 돈을 주고 사서 임신시킨 보람이 없잖느냐.』

주먹을 쥐고 아버지라는 작자의 면상을 후려치고 싶어졌다.

Posted by 미야

2015/04/22 13:29 2015/04/22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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