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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가 듬성듬성 연결되는 망측한 꿈을 꾸는 중이었다.
낡은 버스를 타고 달리는 중 손을 들어 신호하여 도중에 내렸는데 아뿔싸, 세상은 건물 하나 없는 허허벌판이었고 하늘은 당장에라도 방사능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형광 빛 진한 연녹색이었다.
어디서 핵폭탄이라도 떨어졌던가. 아님 적대적 관계의 외계인 우주선이 지구를 향해 유해한 광선을 발사했는가.
어딘가에 있을 생존자를 찾아 마른세수를 하고 걷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오른쪽 신발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좌우 발높이가 틀리다는 위화감에 눈썹을 찡그리며 내려다보니 양말에 구멍이 뚫려 엄지발가락이 보였다.
까딱까딱 움직이자 벌어진 틈새로 발가락이 머리를 내밀고 튀어나오려 했다.
음... 그렇다면 일단 바느질을 하여 양말을 꿰매야할 것이다.
그런데 마이클은 요술처럼 쨘, 하고 튀어나온 반짓고리 상자에서 바늘과 실을 꺼내는 대신 커다란 가위를 골라 엄지발가락을 자르려 했다.

안 돼, 안 돼. 내가 지금 뭘 하려는 거지. 내 발가락은 소중하다고.
소스라치게 놀라 숨을 들이켰다.

『미키, 깼어? 일어나봐. 밖에 누가 왔어. 아까부터 계속 노크하고 있다고.』
꿈속이 아닌 현실에서 누군가 그의 발가락을 오락기 버튼처럼 붙잡고는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미키. 일어나. 아홉 시간이나 잤음 충분하잖아.』
아직 채 어른이 되지 못한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미키! 마이클!』
그러나 여전히 남자는 비몽사몽이다. 신음하며 이불 속에서 뒤척일 뿐, 잔뜩 찌푸린 얼굴을 베개에 파묻으려 했다.
 
『쳇. 시체구먼.』
하는 수 없이 정신 못 차리고 잠에 취한 집주인을 대신하여 시아라가 문을 열기로 했다.
『알았어요, 나갈게요. 그러니 그만 좀 두드려요. 옆집에서 시끄럽다고 항의한다고.』
물론 체인을 걸어 안전장치를 해두는 걸 잊지 않았다. 이 근방은 치안이 좋지 않은 편이라 피자를 배달하는 척하며 강도짓을 하는 일이 제법 흔하다. 배달원이 쓰는 빨간 모자만 보고 무심코 문을 활짝 열었다간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이 그 즉시 셔츠를 찢게 된다. 여기서 더 나쁜 건, 빈집털이범은 금품만 노리지만 배달원을 위장하는 녀석들은 무심코 문을 열어준 여자들에게 몹쓸 짓을 하기를 즐긴다는 거다.
시아라는 올해 열 두 살이지만 생물학적으로 여자였기에 강간의 위협에서 그다지 크게 자유롭지 못했다.

『어...? 그게. 이상하네. 선배는 미혼이라고 했는데.』
좁게 벌려진 틈새로 경찰관 제복을 입근 키가 큰 젊은 남자가 보였다. 그는 생각지 않게 등장한 시아라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매우 낮은 눈높이로 보이는 어린이의 정수리를 볼 거라고 생각을 못했기에 당황한 모습이었다.
『저어, 있잖아. 내가 지금 마이클 윈저 씨를 찾고 있는데 실수로 건물 호수를 착각한 걸까? 아가씨.』
『착각하지 않았어요. 집은 잘 찾아 왔어요.』
그 첫 번째 감상. 이 남자, 치아 미백했다.
『그리고 나는 아가씨가 아니에요.』
두 번째 감상. 열 두 살 여자아이를 습관적으로 꼬시려 한다. 바람둥이다.

범죄율이 높은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란 소녀는 피부로 학습한 그대로 행동했다. 그러니까 눈을 가늘게 뜨고 낯선 방문자를 경계했다. 사실은 노려보며 으르렁댔다.
『이 동네 분은 아니군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쪽은 누구시죠?』
『저런, 그렇게 쏘아보면 슬퍼지는데. 수상한 사람 아니에요, 귀여운 꼬마 아가씨. 내 이름은 리처드 그레이슨이고 괜찮다면 딕이라고 불러주렴. 마이클 선배와 같은 경찰서에서 근무하고 있단다. 마이클 선배가 안에 있으면 불러줄 수 있겠니?』
그러면서 경찰 배지를 무슨 고양이 장난감인양 눈앞에서 흔들어댔다.
『이거 보렴. 멋지지? 이거 진짜란다.』
글쎄다, 장난감 권총을 가지고 노는 다섯 살 소년들은 좋아하겠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하여 세 번째 감상. 이 남자, 재수 없다. 얼굴은 엄청 미남이어도.

『이번 주는 야간 근무에요. 출근 시간은 아직 멀었고 미키는 여전히 자고 있어요, 경찰 아저씨.』
『딕이라고 부르래도.』
『죄송하지만 처음 뵙는 분을 애칭으로 부를 정도로 개방적인 성격이 아니라서요, 제가.』
하도 흔들어 제대로 관찰하기 어려웠던 경찰 배지에서 시선을 뗀 소녀는 차갑게 말했다.
『어쨌든 지금은 썩 좋은 때가 아닌 것 같으니 죄송하지만 돌아가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오, 나도 알아. 하지만 급한 일이라서. 선배의 황금 같은 휴식 시간을 방해해서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급한 일이라는 게 뭐죠. 혹시 빌린 돈 받으러 온 거에요?』
『응? 빌린 돈? 전혀 아닌데.』
『그렇담 다행이네요. 우리 미키는 기억력이 나빠서 돈이나 물건을 빌려도 금방 잊어버리거든요. 그러니 미키가 헤헤 웃으며 손바닥을 벌리면 그레이슨 씨는 그 즉시 귓구멍을 막도록 해요.』
남자는 떫떠름하게 웃었다.
『어... 그래. 충고 고맙다.』
『별 말씀을. 그럼 용건은 끝나신 거죠? 자, 그럼 안녕히. 만나서 반가웠어요.』
『뭐?! 기다려! 아니야, 아가씨. 아직 문 닫지 말라고. 어이! 뭐가 용건이 끝났다는 거니!』
이게 아니다 싶은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이마를 찌푸렸다.

『두 사람 다 시끄러. 내 집인데 어째서 내 집에서 마음대로 쉴 수가 없는 거야!』
비번인 날엔 작정하고 침대에 누워 이불 밖으로 꼼짝하지 않는 게으른 사내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전생에 지은 죄가 많은 게야... 아아. 내 이불, 내 베개.』
관속에 드러누워 30년 정도 죽어있었음 좋겠다.
그러든 말든, 이름이 산드라인지 샌디인지 하는 어린 계집애는 허락도 없이 이불을 걷어 반으로 접었다.
낙원 박탈.
것보다 열쇠도 없이 그녀가 도대체 어떻게 집안으로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그가 거주하는 아파트는 4층에 자리를 잡고 있기에 창문을 타고 넘어오는 것도 불가능하다. 산드라인지 샌드라인지 하는 이 어린 소녀는 정체가 메타휴먼이라 콘크리트 벽을 간단히 통과할 수 있는 건가? 메타휴먼이라서 허락도 구하지 않고 그의 냉장고를 열고, 그가 돈을 주고 구입한 생수병의 뚜껑을 따고, 식탁의자에 앉아 다리를 흔드는 걸까?
남의 집에 자연스럽게 들어와 마치 자기 집인양 행동해도 그닥 개의치 않게 여기곤 했지만 언젠가 그런 일이 가능하게끔 만든 재주에 대해 작정하고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산드라.』
『내 이름은 산드라가 아니야.』
『알았어, 샌디.』
『시아라다! 이 멍청아!』

그들의 대화를 가만 듣고 있던 리처드 그레이슨이 손바닥을 짝 쳤다.
『그렇군. 이제 알겠다. 저 소녀는 선배님의 여동생이었군요.』
『아닌데.』
『응?』
『얘랑 나는 완전 남남.』
마이클은 냉장고 문을 열고 있는 시아라와 자신을 번갈아 손가락질했다. 턱이 빠져라 하품도 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웃사촌 비슷한 거야. 쟤는 이 건물 2층에 살고 있지. 아님 도둑이거나... 어, 산드라. 그 피자 조각은 내가 먹으려고 남겨뒀던 거야. 너무하잖... 야! 베어 물었던 걸 도로 접시에 뱉지 말랬지! 어휴, 저 말썽꾸러기 지지배!』
버럭 고함지르다가 이게 아니라 생각이 들었던지 고개를 좌우로 세게 흔들었다.
『아냐, 아냐. 이게 아니지. 지금 우리가 저 망할 꼬맹이 얘기를 한가롭게 나누고 있을 때가 아니잖나. 것보다 무슨 일이야? 신참. 허락도 없이 우리 집에 제복 차림새로 쳐들어오고... 내가 사전에 누누이 강조하지 않았던가. 휴일근무는 지옥에나 가라. 추가 근무? 엿 드셔. 시간외 수당은 시의 재정 상황을 악화시킨다. 그러니 딕 그레이슨 순경 나리, 난 지금 매우 궁금하다네. 지금 자네는 무슨 까닭으로 평소 내 신념과 철학을 물 말아 잡수시라 하고 있는 건가?』
구석에서 딱딱하게 굳은 피자 조각을 우물거리던 시아라가 추임새를 넣었다.
『같잖은 신념과 철학.』
구겨진 침대 시트 위에서 양반다리로 앉은 마이클은 목에 핏줄을 세웠다.
『이거 왜 이래! 조물주도 천지를 창조하신 뒤에 쉬셨단 말이다!』
그래봤자 범죄자들에겐 남의 일이다. 그들은 휴식이라는 걸 모른다.

TV 리모컨을 눌러 텔레비전을 켜기가 무섭게 요란한 경광등 소리가 배경음으로 들려나왔다. 움찔 귀를 접은 마이클은 음량 조절 버튼을 재빠르게 세 번 연속 눌러 녹색의 바가 거의 바닥으로 내려오도록 만들었다.
흥분한 남성 리포터가 어디서 전쟁이라도 났다며 날카로운 쇳소리를 지르고 있었는데 하단부에 자막으로 상세 설명이 흘러나왔기에 그닥 상관없었다.
『뭐시여, 내셔널 밴코프 은행에 무장 강도? 거 참...』
그리고는 침대에서조차 풀고 있지 않았던 싸구려 손목시계로 눈을 내리깔았다.
4월 20일. 오후 4시 50분.
순전히 버릇이다. 생활 기스가 잔뜩 생긴 투명한 유리판을 손톱으로 가볍게 톡톡 쳤다. 마치 그렇게 함으로 시계 초침이 한층 정교하게 움직이게 되리라고 믿는 것처럼.

『인질이 무려 스물 여섯이래요.』
『그래서 뭐. 아직 근무시간도 아닌데.』
『선배...!!』
리처드 그레이슨은 목소리를 내리깔고 그를 나무랐지만 마이클은 요지부동이었다.
『아놔, 썅. 그래서 뭐 어쩌라고. 네놈이 원래 굴러다니던 블뤼드헤이븐에선 분위기가 어쨌는지 모르겠는데 여기는 스타 시티라고. 우리 같은 말단은 은행 강도가 헬기를 요구하며 인질극을 벌이든, 엉덩이를 까고 고추장 쌈장 춤을 추든 아무 상관이 없단 말이다. 기껏 지원 나가봤자 도로 통제가 하는 일의 전부인데... 쳇.』

- 그리고 어차피 이쪽에서 힘을 쓰기도 전에 히어로가 알아서 다 해결해줄텐데 뭐.

속말을 삭히며 굴러다니는 셔츠 안으로 팔을 꿰었다.
옷에서 꿉꿉한 냄새가 났지만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다. 게으름병이 도저 빨래를 사흘 가까이 하질 못했다.

단추를 채우고 있는데 소매 끝자락에 묻은 검붉은 얼룩이 보였다.
토마토 소스 얼룩일 거라 여기며 손바닥으로 얼룩을 문질렀다.
그러자 녹슨 쇠 냄새를 풍기는 가루가 자극을 받고 아래로 떨어졌다.


*** 애니 영저스티스를 너무 재밌게 봤엉용.
1,2화 통합. 1회 분량을 한글로 1페이지로 잡았는데 너무 짧군요.

Posted by 미야

2016/05/30 16:57 2016/05/30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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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입니다. 솔직히 저도 내용을 다 까먹었습니다.

인적이 드믄 장소를 찾는다고 했지만 때와 장소를 염두에 둬야 했다.
이래서는 휴가철 행락객들이 잔뜩 모여든 모래사장에서 빈 파라솔 찾기다. 축제 탓에 어디에고 사람들이 넘쳐났다.
게다가 어디를 봐도 외지인으로 보이는 그들은 잡아먹기에 안성맞춤인 존재였다. 잘게 썰어 적당히 물기를 뺀 사과를 꿀물에 버무린 간식거리를 파는 어린 소녀가 웃으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나이는 어렸지만 여행객의 주머니를 털겠다는 굳건한 의지가 엿보이는 눈빛을 반짝였다. 그녀 뒤로는 파로 국수를 파는 장사꾼이 손바닥을 비볐고, 그 다음으로는 쭉정이 같은 싸구려 기념품을 파는 장사꾼이, 그 다음으로는 갈증을 해소해줄 시원한 음료수를 파는... 그 다음으로는.
이래서는 끝이 나질 않겠다 판단한 오남은 슬그머니 손바닥을 펴 보이며 건물 위로 흘끔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펄럭이는 빨랫줄 틈새로 새가 푸드득 날갯짓을 하였다.
동시에 뭔가가 쏜살같이 내려와 오남의 소매 속으로 숨었다.

『웩. 몇 번을 봐도 기분 나빠.』
『그럼 보지 않은 셈 쳐.』
오남이 잘 보이지 않는 작은 것을 갈무리하며 감추는 것과 동시에 생명 징후를 잃은 새가 발치로 뚝 떨어졌다.
아니, 그것은 원래부터 죽어 있었던 것이다. 아까부터 날개를 퍼득이며 움직임을 보이던 건 전혀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혹처럼 달려 있던 것이 죽은 새로부터 떨어져 나와 살아있는 사람인 오남에게 들러붙은 것이냐 - 그의 설명으로는 아니라고 한다. 그가 다루는 정령은 원래 살아있는 생물에 기생하는 종류도 아닐뿐더러 가진 힘으로는 고등동물을 조정하는 건 무리라나.
『그 고등동물이라 함의 기준이 뭐지? 오남.』
『밥 먹고, 잠자고, 배설하고, 성생활 이외의 걸 할 줄 아는게 고등동물이지.』
『엇? 그럼 위험하잖아. 너에게 기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딨어.』
『야, 인마.』
기분이 상했던지 오남이 발길질을 시도했다.
태영은 살짝 다리를 들어 피했다.

어쨌든 태영은 그렇게 해야 하는 상황이 닥친다고 해도 흡사 뽑혀 나온 눈알처럼 생긴 걸 소매 속에 감추고 싶은 마음은 요만큼도 없다. 협박해도 거절이다. 그것이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 달라붙지 않으니 안심하라고 말해줘도「어디서 약을 팔아」대꾸할련다.
게다가 그 눈알은 터진 주둥이도 없는 주제에 말도 했다.

《중중입니다.》
『그랬나. 하지만 중중이라 하기엔 미스트 자네가 여기까지 뚫고 들어오는데 시간을 좀 잡아먹은 듯한데.』
여기서 중중은 상, 중, 하의 중을 일컫는다. 그리고 그 중을 다시 세분화해서 상, 중, 하 단계로 다시 나눴다. 총 아홉 단계다.
《어... 흠, 그런가요. 그럼, 저. 중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래 걸렸나요?》
그것이 말을 더듬었다는 부분이 중요한게 아니다. 중중이든, 중 대가리든, 문제는 지나가는 여인의 미모를 품평하는 것도 아니고 시내 유명 레스토랑의 스테이크 맛 품평 또한 아니라는 거였다.
이들은「결계」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다.

이 세계에는 결계라는 것이 존재한다.
태영은 그 부분이 희한했다. 마법사라 부를만한 종족이 있는 것도 아닌데 여기엔 결계가 있단다.
「결계?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투명한 막 같은 건가?」
하늘과 땅을 가로지르는, 매우 튼튼하여 뚫고 지나가기가 불가능한 천막을 상상했더니 비웃음 당했다. 오남 왈, 어린애도 그런 깜찍한 상상은 하지 않는단다.
「결계라며.」
입을 삐죽이며 불평했더니「그러니까 내 말이.」라며 더 비웃었다.
흡사 텔레비전이라는 물건을 모르는 사람에게 텔레비전을 설명하는 것과 비슷했다.
이만한 크기의 네모난 상자가 있는데 전기로 작동하고요, 전원을 켜면 화면에 실물과 흡사한 그림이 빠르게 지나가며 춤도 추고 얘기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럽니다.
전기라는 걸 모르는 사람 앞에서 전기로 작동하는 물건에 대해 설명해봤자.

「굳이 상상하지 말고 머리로 받아들여, 텐. 국경선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잘 될 거야. 저 어딘가로 넘지 말라고 약조된 선이 있는 걸세. 그게 결계야.」
제대로 된 설명도 아니었다. 국경선은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주지만 결계는 인간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지 않는다. 아주 특수한 경우를 빼고는 눈으로 볼 수도 없다. 결계를 넘나들어도 기침 한 번 하지 않는다. 머리가 아프지도 않다. 그걸 넘는다고 벌금을 무는 경우도 없다. 체포당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결계의 존재가 왜 중요한가.

『여기에 바다가 있어. 그리고 바다 속에는 많은 물고기가 살고 있어. 그 중엔 얕은 물에 사는 물고기도 있고, 깊은 물에 사는 물고기도 있겠지. 더운 바다에서 사는 녀석도 있고, 반대로 더운 바다에서 살고 있는 녀석도 있어. 서로가 사는 공간이 나눠져 있는 걸세. 그런데 알고 있나? 바닷물은 찬물과 더운물이 층을 이룬 채 서로 잘 섞이지 않아. 미묘하게 구분되지. 결계는 그런 거야.』
『지금 무어라?』
『그러니까 더운물에 사는 생선과 찬물에서 사는 생선을 나눠놓은 거라고. 자네와 나는 더운물에 사는 생선이야. 그리고 내 손에 있는 이 미스트는 일종의 찬물 생선이고. 이제 좀 이해가 가나?』
『전혀.』
『...... 닭대가리.』
『누구더러 닭이라는 거냐, 이 개새끼. 설명을 거지처럼 해놓은 주제에!』
더운물 생선은 왈칵 화를 냈다.

이를 갈면서 동시에 태영은 생각했다.
예전부터 오남은 시장조사를 핑계로 대륙의 결계를 하나하나 확인하고 다녔다. 때로는 그 일에 황제가 직접 끼어드는 일도 있었다. 자세한 건 모른다. 다만 그 문제로 오남이 황제와 독대하는 자리에서 찻잔과 물병이 신명나게 날아다녔다는 소문이 있다. 심지어 오남이 먼저 던졌다는 얘기도 있는데 그랬다간 모욕죄로 목이 달아났을 터이니 화를 내며 물건을 집어던진 건 역시 황제 쪽이 먼저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지지 않고 대응했다는 부분에서 오남은 역시 보통 사내가 아니긴 하다.
「황제로부터 경쟁 국가의 결계를 약하게 만들라는 주문을 들었던 걸까? 오남은 그걸 거부하고?」
파도물결 잔잔한 깊은 바다에서 생선들이 저마다 지느러미를 흔들어가며 헤엄을 쳤다.

『중상이면 나빠?』
『그다지.』
『흠... 그래도 상 레벨로 올리는게 네 목표겠지?』
『전혀.』
『어? 그래? 찬물 생선과 더운물 생선이 한곳에 섞이면 안 좋은 거 아닌가?』
『좋을 건 없지.』
『뭔 대답이 그리 민숭민숭하누.』
타박하는 말에 오남이 슬그머니 태영을 쳐다봤다.
동시에 그의 손바닥 안에서 미스트가 제멋대로 빙글 돌아 손등으로 위치를 옮겼다.

Posted by 미야

2016/01/18 16:57 2016/01/18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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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적으로 그는 비싼 옷을 파는 장사꾼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여느 장사치로는 안 보였다. 옷을 파는 자가 호랑이 기백으로 화를 낼 수는 없으니까.
분식회계 금지법안을 코앞에 두고 어찌할 바 모르는 부정부패한 대소신료들 앞에서 지팡이로 바닥을 쿵쿵 찧는 백발의 원로대신 비슷하달까... 혐오감에 실망감, 짜증으로 뒤범벅이면서 밖으로 말은 삼가고 대신 차갑게 미소를 짓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중립일진대 그 속은「한 마디만 떠들기만 해봐.」다. 이른바 폭풍전야다.
쉽게 말해 웃는 얼굴이면서도 어디로 칼날이 튈 지 믿을 수 없다는 얘기다.

『그렇군. 그 남자로부터 부탁을 받았다는 건가.』
나긋나긋한 목소리지만 그거야 겉 표면에 불과하고. 바삭거리는 과자 껍질 안엔 부드러운 카스타드 크림이 아닌 맵고 톡 쏘는 고추냉이가 알차게 들어 있다. 모르고 실수로 베어 문 날엔 입안에서 붉은 지옥이 펼쳐질 것이다.
『관두자고 하거나, 도망치자고 할 적마다 옆에서 세 번 안 된다고 말하라고 그랬~다?』
『오남, 너 또 말투 바뀌었어. 이번엔 궁중 노인네 말투야.』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소년도 보통내기는 아니다.
하긴, 제국의 황제더러 아무렇지도 않게 그 남자, 이 남자 운운할 정도이니 말 다했다.
게다가 그는 분식회계가 뭔지도 모른다. 앞에서 비난의 눈초리를 던져봤자 까마득히 모르는 걸 어쩌라고. 학교에서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배운 적은 있어도 재무제표 만드는 법 같은 건 가르쳐주지 않았다.
『워, 아저씨. 지금 눈에 힘주고 날 노려보는 거야?』
그러니 위엄 넘치는 눈빛으로 겁주기를 해도 통하지 않는다.

청년은 팔을 위로 올려 목 뒤에서 손깍지를 꼈다.
『애시당초 이 몸께서「안 돼」라고 말해봤자 무슨 강제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여기서 뭐라 한다고 귀담아 들을 것도 아니잖아. 나는 그저 손을 들고 외칠 뿐, 안 돼. 그러니 너는 네 맘대로 하시라고요.』
식탁에 앉아 손이 닿지 않는 소금 병을 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같은 수준이었다.
황제는 딱 세 번만 저 사내를 말려달라고 했다. 중도에 포기하고 툭 하면 도망치기를 잘하는 자니 옆에서 자극을 좀 줘야 한다나 뭐라나.
『누군가를 칼로 찔러 죽여야 한다거나, 우물에 독을 풀어야 한다거나, 여염집 아가씨를 납치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으면 절대 하지 않겠다고 했을 거야. 하지만 들어보니 별 거 아니더군. 네가 보따리를 들고 여기서 도망치겠다고 할 때마다 세 번 안 된다고 옆에서 말만 하면 된다는 거야. 굳이 행동으로 옮기지 않아도 된다고 했어. 그래서 못할 것도 없겠네요, 라고 대답했지.』
『하아?!』
『그게 전부였다고. 진짜야. 새끼손가락을 걸고 맹세한다. 그러니 안심해라, 오남. 그 남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막으라는 주문은 하지 않았어.』

피로감이 드러난 맨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뭘 안심하라는 거야, 뭘! 포인트가 빗나갔다고! 망할! 일개 옷장사에게 이러는 법이 어디에 있누! 요는 돌멩이를 던져 두 마리 새를 동시에 잡겠다는 거잖아!』
중신관을 상대로 트러블을 일으킨 김 태영을 데리고 나가 바람이나 쐬고 오는 여행이라고 얕잡아 봤는데.
실수다. 란데가스의 황제씩이나 되는 위인이「가서 잘 놀고 오렴.」이러고 손수건을 흔들어줄 리가 없었던 거다.
뭔가 있다. 촉이 온다. 도망치겠다는 의지를 꺾어야 할 정도의 중요한 뭔가가 이곳에는 있는 것이다.
8년 축제가 벌어지는 이 땅으로 별 거 아닌 것처럼 위장하여 해서 그를 보내고,
「무슨 꿍꿍이인 거야, 그 사내는!」
김 태영을 끌여들여 무려 세 번씩이나 도망치겠다는 그의 의지를 꺾겠단다.

『나는 여성복을 파는 옷장사야, 태영.』
『옷장사라굽쇼? 솔직히 말해 난 네가 스파이라고 생각해.』
찰나의 머뭇거림도 없이 튀오나온 대답에 오남은 눈썹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내가 스파이라고.』
『그래. 스파이. 이곳 말로는 세락이라고 한다며? 발리반이테 할아버지가 그랬어. 오남은 세락이라고.』
『인석아. 무늬만 귀족이라고 해도 공작 각하에게 할아버지가 뭐냐, 할아버지가!』
『어...? 그럼 곤란한 거야? 저번에 할아버지 오랜만이에요, 그렇게 인사했는데 나더러 뭐라 하지 않았거든.』
『내가 못 살아. 아니지...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행여라도 담벼락에 엿듣는 귀가 없는지 주의하며 목소리를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세락이 아니라 세작이겠지. 신분을 감추고 어떤 대상의 정보를 몰래 알아내어 자신의 편에 넘겨주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세작이라고 한단다.』
억울하다는 뉘앙스지만 부정은 하지 않는다. 바로 그 점이 중요하다고 태영은 생각했다.

그는 오남상회의 상단주다. 여러 번 말했지만 그의 가게에선 귀족이나 왕족들이 입을법한 매우 비싼 여성복을 판다. 사라사 비단 같은 원단과 보석들도 같이 취급하지만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는 완제품인 옷을 판다.
그렇다면 드레스가 전시된 가게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눈을 씻고 봐도 동대륙 그 어디에도 옷을 걸어둔 가게가 없다.
일보 양보하여 엄선된 주문제작 방식이라 쇼 윈도우 룸이 달린 공간이 딱히 필요 없다고 치자.
무슨 놈의 상단주가 시장조사를 한다면서 맨손으로 돌아다니느냔 말이다.
그 흔한 종업원도 곁에 없고.
대신 옆에 붙은 건 검은 머리카락의 이단아에, 더하여 정체불명의 미스트다.

푸드득 소리를 내며 그들 주위로 작은 새가 날았다.
종류는 멥새나 참새 비슷한 종류일 거라 생각한다. 굉장히 작은데다 갈색의 털이 소박하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기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지나친다. 하지만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나뭇가지 위로 앉은 새의 모습에서 다소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참새의 목덜미 뒤쪽으로 등 부위에 작은 혹이 달렸다. 그런데 평범한 혹이 아니다. 가만 보면 짐승의 눈을 닮았다. 눈꺼풀까지 달려 사람처럼 눈을 깜빡이기까지 하고 있다.

《주인님.》
참새가 사람의 말을 뱉었다.
태영은 머리 위에 앉은 참새를 흘깃 쳐다본 뒤에 노골적으로 혐오의 표정을 지었다.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끔찍한 냄새를 풍기는 것도 아니다. 저것은 그저 새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으로 주인인 오남의 명령에 따르는 정령 같은 거라고 들었다.
하지만 투명한 날개를 가진 쭉쭉빵빵의 미녀를 상상하던 태영은 반발했다. 저런 흉악한 것을 정령이라 부르는 건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보다는 끈적거리고 껄끄러운 존재다. 미스트는 정해진 형태가 딱히 존재하지 않으며 죽은 것에 기생한다. 때로 죽은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 몸에 달라붙은 채 나타나 기겁한 적도 있다.
「정령 같은 소리하고 앉았네. 차라리 요괴라고 할 것이지.」
본능적으로 그는 소리가 들린 부분으로부터 시선을 피했다.
무서워서 피한게 아니다. 더러워서 피한 거다.

『생각보다 많이 늦었군... 어쨌든 여기는 보는 눈이 많아.』
《그럼 장소를 옮길까요.》
미스트의 목소리는 어린 소년의 것과 흡사했다. 변성기를 맞지 않은 아주 어린애 말이다.
오남은 그러자고 하며 인적이 드믄 적절한 장소를 찾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Posted by 미야

2015/10/22 16:19 2015/10/22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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