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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기와 소형 카메라와 같은 첨단장비를 동원해 몇 주에 걸쳐 주도면밀하게 관찰해온 입장에서 개인적으로 마이클 윈저를 평가하자면 단 한 마디,「재미없는 사람」이라고 대답하면 족했다.

올해 나이 서른 둘. 브루스 웨인보다 한 살 어렸다.
결혼을 한 기록은 없고, 가족도 없다. 늦둥이로 태어났기에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이미 부모님들 연세가 제법 되었다. 나름 열심히 운동하고, 담배를 끊고, 채소를 많이 먹었지만 윈저 부부는 각각 심장마비와 급성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 여든 둘, 그리고 일흔 아홉이었다.
그렇게 되리라 짐작했기에 아들의 미래를 염려한 부모는 신탁을 예치하여 대학을 졸업할 학비 정도는 마련해줬던 것 같다. 현명했던 부모님 덕분에 마이클은 친척에게 손 벌리지 않고 스타 시립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공부가 그다지 적성이 맞지 않아 1년 만에 중퇴했다. 그리고 빈둥거렸다. 남자는 세계 일주, 봉사활동, 개인사업, 이런 거에 일절 관심이 없었다. 예금 잔고는 빠르게 줄어들었고 아르바이트로는 벌이가 영 신통치 않아 결국 생활비가 바닥났다.

신용 대출을 알아보던 중 덜컥 경찰시험을 봤다.
시민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흉악한 범죄로부터 지켜내고 싶다는 사명감 따윈 아마 없었을 것이다.
채용이 쉽게 되니까 무작정 지원했다고 본인 스스로가 자백했다.
빌런들의 위협 탓에 법 집행 종사직에 대한 선호도는 오래전부터 바닥이었고, 여차하면 목숨을 잃거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며 기피 대상으로 꼽혔다. 그런 만큼 경찰조직은 만성적인 인력부족을 호소하고 있었고, 경찰관을 뽑는 시험은 대놓고 형식적이었다. 오죽하면 시험지에 자필로 이름만 쓰게 하고 체력 테스트 딱 하나만 본다는 농담 아닌 농담이 나돌기도 했을 정도다. 일반 회사에 지원했다가 연거푸 쓴 잔만 맛봤던 마이클에겐 아마도 마지막 선택지였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보여주려는 것인지 경찰관으로서 근무 실적은 형편없었다.
그 결과 오랫동안 승진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당사자가 승진에 전전긍긍하지 않았다. 만사 의욕이 없었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욕구가 강했다. 열심히 일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봤자 몸만 피곤하잖아요? - 평소 입버릇이 관 뚜껑 열고 그 속에 들어가 30년간 죽어있었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참 한심한 인간이었다. 여자 친구는 물론이거니와 핸드폰 단축메뉴로 저장된 절친도 없었다.
유일한 취미는 텔레비전 시청, 그리고 잠자기. 극장이나 경기장에 가지도 않는다. 휴일이면 집에 틀어박힌다.
틈만 나면 졸고 있고, 근무태도는 불량하다. 노골적으로 뇌물을 받는 타입은 아닌데 통행 제한 구역에서 차렷 자세를 취하는 대신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식이다. 언젠가 실종자 수색을 하던 중에 제보 전화를 받기 싫어 수화기를 몰래 바닥에 내려놓은 적도 있단다. 수사과의 데이비슨은 대놓고 마이클을 경멸했다.

「그런 남자가 미스터 츄파춥스라는 건가. 고담시에서 범죄가 흑사병처럼 창궐하도록 만들려던 자라고?」
순찰차 조수석에 앉은 딕 그레이슨은 양팔을 가슴에 두른 자세로 고민에 빠져들었다.

게으른 악당.

어쩐지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피곤이 풀리지 않았다며 눈을 비비는 허수아비나, 졸음을 호소하듯 입이 찢어져라 하품하는 펭귄, 잠에 찌든 표정으로 턱받침을 하고 있는 아이비, 이불을 뒤집어쓰고 깨우지 말라고 투정하는 조커... 가능해? 그게 가능하냐고.
「배트맨은 분명 전부가 연극이라고 할 걸.」
그렇다면 마이클 윈저는 대단한 배우다. 경찰시험을 치루는 대신 포트폴리오를 들고 극장으로 갔다면 그는 아마 매년 금가루가 뿌려진 레드카펫 위를 걸어 다녔을 것이다. 신문은 대서특필 했겠지. 올해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자라고.
저 평범한 얼굴로.
여자 친구라고는 한 명도 없는 얼굴로.

옆에서부터 지긋이 내리 꽂히는 시선에 마이클은 백미러를 움직여 자신의 얼굴을 살폈다.
코털이 삐져나온 것도 없고, 체크.
아랫니에 음식물 찌꺼기가 끼지도 않았고, 체크.
겨드랑이도 이상 무. 바지 지퍼 이상 무.
그런데 어째서 나는 냄새 지독한 똥 방구를 뀐 사람 취급을 받고 있는 거지.

『저어... 무슨 문제라도?』
『글쎄요.』
『없으면 없는 거고, 있으면 있는 거지. 무슨 대답이 그따구야.』
『......』
딕은 무어라 대꾸하는 대신 손을 뻗어 제 위치를 벗어난 백미러를 적당히 조정했다.
『쳇, 알았어. 있다가 약국 들려서 생리대 사자.』
『저 지금 생리 안 하거든요?! 선배님.』
두 사람은 동시에 인상을 구기며 서로를 흘겨봤다.

빈정상하게도 먼저 눈을 내리깔은 건 마이클 쪽이었다.
쓴물처럼 올라오는 패배감을 애써 무시하며 업무 방향으로 이야기를 돌렸다.
『어제에 이어 쓰리스톤 12번가 * 코드 425야. 같은 장소로 신고가 또 들어왔대.』
『425(수상한 상황)? 너무 추상적인데요.』
『추상적인 게 아니라 그다지 심각하지 않다는 거지. 거긴 오래된 공장 지역인데 의류 산업이 몰락하면서 껍데기만 남은 곳이야. 재개발이 예정되어 있지만 시 예산 부족 탓에 사업 진척은 여전히 지지부진이고 듣자하니 렉스코프에 대규모 토지 매각을 추진 중이라고 하더군. 그 와중에 정치적인 것도 살짝 얽혀서... 그렇게 폐건물을 방치하다보니 한 달에 두세 번씩 신고가 들어와. 흘러나오는 불빛을 봤다던가, 철망이 뜯겨져 나갔다던가, 망치로 뭔가를 때려 부수는 쾅쾅 소리가 들린다거나... 뭐, 대충 그런 거지.』
마이클은 스타 시티 10대 철부지들이 자물쇠 뜯고 들어가 흥청망청 술파티를 벌이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딕 그레이슨은 마약 거래 현장을 상상했다.

『아냐, 아냐. 심각한 거 아니라니까.』
그렇게 말하며 손바닥을 좌우로 흔들었다.
유수 대기업을 개발 사업에 끌어들이고 싶어 하는 당국에서는 당연히 추문이 나는 걸 꺼려했다. 살인사건 현장으로 텔레비전 뉴스에 나오기라도 하는 날에는 다들 죽었다고 복창 - 시청 고위 공무원이 으름장을 놓자 불똥은 경무관이 입고 있는 제복 바지 위까지 튀었다. 경무관은 다시 새해 첫날 조무식에서 부하들을 갈궜고, 불똥은 이제 경위들에게까지 튀었다. 하여 까라면 까는 경장과 순경들은 정기적으로 순찰을 돌고, 에워싼 철조망 위로 큼직하게 협박 문구를 써서 달았다.

무단으로 침입할 시 좇 되는 거임. 왜냐면 하루도 안 빼먹고 이곳을 확인함.
푯말 바탕에 칠해진 흰색 페인트는 얼룩 하나 없이 깔끔했다.
다만 거리가 있어서 정확한 문구는 읽을 수 없었다. 그래도 아마 이와 비슷한 내용을 것이다.

『아직 크레이지 덤프가 잡히질 않았잖아? 지금 같은 상황에선 일선 경찰들이 제일 먼저 뒤져보는 곳이 바로 저기야. 그걸 우리도 알고 걔네들도 알고 있지. 바보가 아닌 이상 숨어들지 않아. 모르고 기웃거리는 건 수배중인 범죄자가 아니고 여드름투성이의 10대 철부지들이라고.』
마이클은 안전벨트를 푸르기도 전에 경광등의 작동 버튼을 눌러 귀에 거슬리는 삐익 소리가 크게 울리도록 했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딕 그레이슨은 완전히 질겁했다.
『소리를 꺼요!』
은밀하게, 신속하게, 그리고 신중하게 - 이 세 가지는 행동 요령은 싸그리 무시되었다.
뿐만 아니다. 마이클은 3분은 족히 자동차 운전석에 엉덩이를 붙인 채 가만히 버텼다.
설령 수상한 자가 폐건물 속에 숨어있었다고 해도 이러면 걸음아 나 살려라 이러고 전부 도망치고도 남는다.

『맞아. 전부 도망가라고 그래.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거야.』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했던가. 음... 글쎄. 전혀 아닌 것 같은데.

Posted by 미야

2016/06/29 15:50 2016/06/29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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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저녁식사를 마친 두 사람이 야간 근로를 하기 위해 경찰서로 돌아왔을 적에 그들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광경은 접수계의 클라라 래이번과 수작질 중인 딕 그레이슨의 뒷태였다.

두 명의 미취학 자녀를 두고 있는 래이번은 아이돌 가수를 영접한 19세 소녀처럼 뺨을 붉힌 채 미소를 짓고 있었고, 가끔씩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녀가 탄산이 들어간 음료수를 마신 뒤 만장하신 가운데 꺼억 소리 내어 트림을 한다는 걸 모르지 않는 리처드 D 앤더슨은 영문도 모른 채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래이번의 립스틱 색이 붉어졌다. 곱게 눈썹도 정리했다. 깨닫고 나자 다시 빡치는 기분이 들었다.
「배반자!」
「체리섬」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신입 여경 앞에서 하루 두 번만 하던 양치질을 다섯 번씩 했다는 과거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래이번을 노려봤다.

그 앞에서 딕 그레이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맞장구를 쳐주고 있었는데 들려오는 단어들로 유추해보자면 화젯거리는 그다지 영양가 없었다. 어느 가게에서 파는 컵케이크가 맛있다느니, 어느 가판대에서 파는 핫도그가 최고라느니, 소스는 케첩보다는 마스타드가 최고라느니, 순찰 돌 적에 지나치면 큰일이 나는 테이크아웃 커피 점포 이름 같은 게 튀어나왔다.

잘 들 논다.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깽판치고 싶다는 욕구와, 모르는 척하고 싶다는 욕구가 충돌하는 가운데 앤더슨은 어중간하게 손을 흔들었다.
『여어~ 좋은 저녁.』
래이번은 동료가 보낸 인사에 대한 답례로 보일락 말락 턱짓을 했고, 그레이슨은 손에 쥐고 있던 뭔가를 샴페인 잔처럼 들어보였다. 처음에는 볼펜인가 싶었는데 실눈을 가늘게 뜬 채로 보니 포장을 뜯지 않은 츄파춥스 캔디였다.
『오셨어요? 좋은 저녁이에요, 선배님들.』

트로피처럼 들어 보인 캔디를 본 두 사람은 미묘하게 뒤틀렸다.
마이클은 신 포도를 껍질 째 씹은 얼굴이었고, 앤더슨은 콧잔등에 주름을 잔뜩 만들어내며 대놓고 짜증을 냈다.
저녁에 그런 사탕을 먹으면 이가 썩어요 - 물론 자녀를 야단치는 엄마의 마음으로 눈총을 주는 것일 수도 있다. 허나 단순히 그렇다고 하기엔 묘한 껄끄러움이 덧발라져 있었다. 딕 그레이슨의 눈은 매의 그것처럼 두 사람이 흘려보내는 복잡한 감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송두리째 핥았다.

「이거, 예상했던 것과는 살짝 다른데.」
특이하다면 마이클보다 그다지 상관없을 것처럼 여겼던 앤더슨 쪽의 반응이 한층 더 격렬했다는 거다.
마이클이 시큰둥하게 감정 반응 스위치를 OFF로 내린 것과는 대조적으로 앤더슨은 보다 더 불편해했고, 보다 더 발끈한 상태였다. 누이동생에 대한 몹쓸 험담을 듣고 화가 난 나머지 당장에라도 주먹으로 칠 것처럼 말이다. 아니면 불법 텐트를 철거당한 노숙자들로부터 돼지, 대머리, 토끼 조루, 불능 등등으로 비난을 당할 적의 반응과도 흡사했다.
「앤더슨 쪽도 제대로 엮여있었던 모양이군.」
어쩌면 처음부터 둘이 한패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딕은 두 사람을 향해 넉살 좋은 미소를 지었다.

『두 분이서 저녁 식사를 같이 하고 오신 건가요? 질투나네요. 듣자하니 글리블링 다이너 단골이라면서요. 그 가게 음식은 맛이 어떻던가요. 괜찮다면 다음에 저도 끼워주세요.』
마이클 윈저가 퉁명스럽게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맛없어. 그리고 인테리어도 구려. 절대로 단골 아니야.』
접시 바닥까지 싹싹 핥아먹은 주제에 할 말이 아닌 듯하다만, 마이클은 3주 전 자신의 파트너가 된 이 신입 경관과 친목을 다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궁금한 걸 물어보면 적당히 대답해준다, 필요하다 싶으면 업무 요령을 가르쳐 준다, 딱 거기까지였다.
게다가.
어쩐지 웃는 낯에 속내가 따로 있는 듯한 놈이라.
마이클은 독 발린 화살처럼 겨누어진 츄파춥스 캔디를 애써 외면했다.
 
『그렇게 별로에요? 그럼 다른 가게로 가죠. 래이번이 방금 전에 꽤 괜찮은 가게를 소개시켜줬는데...』
『잘 됐군. 그럼 래이번과 같이 가면 되겠네.』
『와아. 단칼에 거절은 너무하다고요, 사람 민망하게. 제가 데이트를 신청한 건 선배님이라고요.』
『뭐?! 데이트?! 돌았냐. 너랑 내가~아?!』
『엇흠!』
적절한 타이밍에 끼어든 딕 앤더슨이 옆에서 헛기침을 했다.
그걸 신호라고 여겼던지 마이클이 잰 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앤더슨 또한 뒷목을 벅벅 긁으며 화장실로 향했다.

반대방향으로 헤어져 각자의 용무를 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던 딕 그레이슨은 흠, 하고 가볍게 콧방귀를 뀌더니만 결정했다며 앤더슨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뭐야. 왜 따라와.』
사탄아 물럿거라, 십자가 목걸이가 여기 있다. 용변을 보려던 리처드 D 앤더슨은 대놓고 질색했다.
『여쭤볼 게 좀 있어서요. 그러니까... 마이클 선배랑은 친한 사이죠?』
『인석아. 그런 걸 화장실에까지 따라와서 물어야겠냐?!』
결국 소변을 보는 건 미뤄야했다.
바지 지퍼를 만지작거리던 그는 비록 순서가 거꾸로였지만 소변기에 가 서는 대신 손부터 씻기 시작했다.

수도꼭지를 오른쪽 방향으로 돌리면서 앤더슨이 툴툴거렸다.
『절친은 아니야. 그냥 어쩌다보니... 내가 꼬맹이였던 시절에 잠깐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적이 있어. 단지 그뿐이고, 마이클과 다시 만난 것도 이곳 경찰서에서 근무하고부터야. 겨우 그 정도 관계라고.』

오, 별 거 아니야. 종업원을 부르는 단추인 줄 알고 눌렀는데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발사되더군. 아무 일 아냐. 그러니 안심하고 자리로 돌아가서 하던 일이나 계속 하자고.

이 사람들은 반어법을 너무 자주 사용해서 진짜를 가짜처럼 말하는 경향이 컸다.
『어린 시절에 같은 학교 다녔어요? 진짜 친했나 봐요. 혹시 같은 반이었어요?』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비누 없이 흐르는 물에 손을 문질러 씻으면서 앤더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에도 반어법인지는 파악이 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라면, 단순히 이력 내용만 보았을 때 두 사람의 접점이 전혀 없었다는 거였다.
리처드 D 앤더슨은 어렸을 적에 중서부 지역인 홈필드에서 살았다. 마이클은 남부에 가까운 클로버랜드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를 따라 이사를 자주 다녔는데 매넘이나 오르피나처럼 주로 동부와 남부지역이었다. 홈필드에서 살았다는 기록은 없었다. 물론 사정에 의해 몇 개월만 머물렀기 때문에 기록에서 누락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배트 케이브의 슈퍼 컴퓨터가 이런 정보를 체크하지 못 했다는 걸 인정하기도 어려웠다.
『몇 살 때였는데요?』
『여덟 살... 아니, 아홉 살.』
거울을 통해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대답은 꼬박꼬박 하긴 했으나 왜 그런 걸 묻느냐는 눈빛이었다.
『한창 장난이 심할 나이네요. 혹시 두 사람이 이웃집 현관에 개똥 놓고 도망가고 그랬어요?』
『나는 그런 유치한 장난은 하지 않았다.』
그는「우리」라는 단어가 아닌「나」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짝뚱 씨는 그랬나보지? 남의 집에 개똥 투척하고?』
『저는 소문난 장난꾸러기였죠. 마당에 널어놓은 남의 세탁물을 훔쳐서 달아나곤 했어요.』
그런 일은 없었지만 즉석에서 이야기 하나를 지어냈다. 다행히 먹혀 들어가는 눈치다. 경계심이 약간 풀렸다.

『있잖아요... 딕이 보기에 마이클은 어떤 사람 같나요?』
『게으른 사람.』
손수건 없이 물기를 툭툭 털면서 앤더슨이 꿍얼거렸다.
『되먹지 못한 사람이거나 심성이 나쁜 건 아니야. 그냥 천성이 게을러.』
『게을러요?』
『무지 게을러. 오죽하면 귀찮다는 이유로 사람과 친해지고 싶어 하지 않지... 그러니까 신참?』
이 정도면 궁금해 하는 부분에 대한 답이 되었느냐며 화장실 출입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형님, 오줌 좀 싸자.』
앤더슨이 쓴 웃음을 지으며 그레이슨을 화장실 밖으로 내쫓았다.

Posted by 미야

2016/06/27 15:03 2016/06/27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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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전야의 평온한 나날이 며칠 이어졌다.

크레이지 덤프는 수색망을 뚫고 여전히 도주 중으로, 긴급 체포 작전이 두 번씩이나 이어졌음에도 간발의 차이로 빠져나가 지휘부를 허망하게 만들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그랬다는 점에서 내부 정보가 새고 있는 거 아니냐는 의심이 이어졌는데 모르긴 몰라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부패경찰과 범죄조직과의 커넥션은 예전부터 골칫거리였고 좀처럼 그 뿌리가 뽑히지 않았다. 하나를 잘라내면 옆에서 다른 뿌리가 자랐다. 머리 하나를 자르면 잘린 부위에서 새로운 머리 두 개가 자라난다는 전설의 괴수 히드라 같았다. 그래서인지 청문감사반에서는 25%의 경찰이 상습적으로 뇌물을 받는다는 현실을 외면한 채 설령 조직이 괴사하는 한이 있더라도 전반에 걸쳐 맹독성 농약을 치고 싶다는 유혹을 느끼는 것 같았다.

『이번에 회람 도는 거 봤어? 마이클. 새로 차를 바꾸거나 고가의 시계나 명품 구두를 구입한 녀석들을 찾아 무작정 분풀이로 조지는 것 같더라고. 아무나 일단 걸려라 식이라서 옆에서 보기가 좀 그렇던데. 음... 그러고 보니 너도 못 보던 시계를 새로 샀네. 얼마짜리야?』
우물거리며 음식을 씹던 걸 멈추고 조신하게 대답했다.
『25달러.』
대답을 들은 딕 앤더슨의 눈매가 바늘처럼 가늘어졌다.
『짠돌이... 보나마나 알람 기능도 없겠군.』
『그런 거 필요 없어. 시간만 잘 맞으면 되지.』
『내가 봤을 적엔 이미 5분 이상 틀어진 것 같은데...』
『오! 잘 됐네. 늦잠 자서 지각을 해도 변명꺼리가 있는 거잖아.』
『잘도 변명이 되겠다!』

리처드 D 앤더슨이 입안의 내용물을 밖으로 튀게 만들며 언성을 높였다.
식사 예절이 영 아니었지만 마이클은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종이 냅킨을 들어 총알처럼 날아와 얼굴에 붙은 미세한 시금치 조각을 떼어냈고, 내친 김에 입가에 묻은 크림소스를 닦았다.
그들이 애용하는 글리블링 다이너에서는 매주 수요일마다「수요일 만찬」이라는 메뉴를 선보였는데. 메인은 빵가루를 입혀 튀겨낸 큼직한 생선이었다. 푸짐한데다 싸고 맛도 좋았지만 곁들여서 나오는 소스가 매우 기름지고 묽었다. 그래서인지 먹고 나면 입술과 턱이 번들거려 미관상 보기가 나빴다.

앤더슨도 냅킨을 들어 기름 자국이 남은 얼굴을 수습했다.
『하여간 시계를 고르는 요령이 잘못되었어. 잘 들어, 마이클. 무릇 괜찮은 시계라는 것은...』
그러면서 자신이 찬 시계를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앤더슨의 시계도 그다지 이름 있는 고급 제품은 아니었다. 두껍고 무거워 유행에 뒤쳐졌고 메탈 재질의 밴드는 색이 바랬다. 그래서인지 그 첫 느낌은 장롱에서 30년 묵힌 할아버지의 골동품 예물시계 같았다. 하지만 예물시계라고 볼 수 없는 게 시곗줄이 온통 긁힌 자국 천지라 실수로 자동차 바퀴에 깔린 적이 있다고 해도 믿을 판이었다.
『바로 이런 거야. 바로 이런 거.』

하얀 생선살을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며가던 마이클이 기가 막힌다며 눈동자를 데구르 굴렸다.
뭐가 괜찮은 시계라는 건가. 트랭크의 가게에 맡기면 이것 또한 알짤 없이 40센트짜리다.

설득이 영 먹히지 않자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은 앤더슨은 뾰로통한 표정이 되어 본격적으로 셔츠 소매를 접어 올렸다. 예의 무용담이 튀어나올 순서였다. 자세히 보라며 왼팔을 내밀었는데 시곗줄 안으로 보이는 피부에 시곗줄과 마찬가지 방향으로 길게 그어진 상흔이 보였다. 흉으로 남은 꿰맨 자국은 강도와의 격투로 생겼으며, 금속 재질의 단단한 시곗줄이 없었다면 분명 힘줄까지 잘렸을 거라나. 그렇게 손목의 칼자국을 보여주며 자신의 용맹함과 선견지명을 자랑하는 것이 앤더슨의 버릇이었다.

허나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하나 있었다.
앤더슨의 상처는 강도를 제압하다 생긴 것이 아니라는 거다.
마이클이 알기로 저 치명적이었을 베인 자국은 앤더슨이 열여섯 살 때 생겼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그의 신분은 경찰이 아니었고, 당연히 칼을 든 강도를 맨손으로 제압할 일도 없었다.
흉기 - 아마도 식칼이었을 무기를 휘둘러 방어하던 앤더슨의 왼손을 거의 잘라낼 뻔했던 이는 그와 혈연관계인 사람이었다. 그가 입 밖으로 언급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나 마이클은 그 사람이 앤더슨의 친모일 거라 짐작했다. 그리고 이는 무덤으로 가지고 갈 음습한 비밀이었다.

소매 단추를 도로 채운 앤더슨은 건방지게도 손가락으로 마이클을 가리켰다. 재수 없는 손가락질이었다.
『25달러는 날렸다고 셈치고 다른 시계를 사게, 마이클. 그 물건은 영 틀렸어.』
『날리긴 뭘 날려. 25달러는 돈이 아니냐?! 그 돈이면 핫도그를 몇 개 사먹을 수 있는지 알아?! 양파와 피클이 없는 걸로 여덟 개나 먹을 수 있단 말이야!』
『그걸 꼭 일일이 세어봐야겠어?! 네가 최 빈민국가 걸식아동이냐고, 망할 핫도그... 월급 받아 뭐에 쓰냐. 처자식도 없으면서 왜 그렇게 구질구질해!』
눈을 흘기던 딕 앤더슨은 탁 소리가 나게끔 물 컵을 내려놓았다.
『그냥 사. 칼로 내리쳐도 안 끊어지는 튼튼한 걸로 사라고. 신용카드 들고 백화점 가서 사!』
이렇게 외칠 적에 그의 굳은 표정은 지난 사흘 내내 또 다른 리처드인 그레이슨이 지어보였던 표정과 판박이어서 마이클은 이제 두 사람이 혹시 배다른 형제는 아닐까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물론 두 사람은 생김새부터가 완전 달랐다.
원조 딕은 붉은 기운이 도는 갈색머리고 짝퉁 딕의 머리카락은 검었다.
체격도 차이가 크다. 내사부 접수계에서 일하는 클라라 래이번의 표현을 빌리자면 리처드 2번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남신처럼 근사하기 짝이 없었고, 리처드 1번은 햄버거 가게 입간판 같다는 거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군살이 제법 붙었으나 다이어트를 고려해야 할 심각한 과체중까지는 아닌데 아무래도 비교 대상이 딕 그레이슨이다 보니 평가가 형편없었다. 평범한 민간인을 모델 옆에 세워두면 원치 않아도 오징어가 되는 법이라서 마찬가지로 새우, 광어, 우럭, 낙지 등등의 비슷한 수산물 취급을 받는 입장에선 입이 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역시.
똥을 시원하게 누지 못해 안절부절 하는 저 표정은 그리스 남신이나 햄버거 가게 입간판이나 똑같았다.
할 말이 있는데 - 꼭 해야 하는데 -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꺼낼 수가 없어서 답답해 미치겠다는 얼굴이다.
그냥 속 시원하게 털어놔도 되는데.
지금도 그렇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걸 강제로 집어삼키고 있다. 뺨 안쪽의 살을 안으로 빨아들여서 어금니로 물고 있는 건 또 어떻고. 약혼 6개월 만에 웨딩드레스를 고르고 있는 약혼녀를 옆에 두고 아무래도 결혼을 취소해야 할 것 같다고 중얼거렸을 적에도 저런 식으로 뺨 안쪽을 지그시 물고 있었다.

『있잖아, 마이클.』
오오, 드디어 결심했나 보다.
그는 신자의 고해성사를 기다리는 신부의 마음으로 차분히 손가락 깍지를 꼈다.
『듣고 있네, 딕.』
계산서 종이를 움켜쥔 딕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침통한 눈빛으로 마이클을 쳐다봤다.
그리고서 하는 말,
『나에게 뭐 털어놓을 거 없어?』

아니 이보시오, 리처드 D  앤더슨 양반.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요. 고해성사가 아니라 자아비판의 시간이었소?

이쪽에서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자 딕은 자기 혀를 깨물려 했다.
허둥대는 그 모습이 마이클을 한층 더 자극시켰다.
『새끼야. 내가 뭘 털어놔야 하는데. 누가 일러바치길, 내가 몰래 여자 속옷 입는다고 하든?』
『그게 아니라.』
『됐어!』
테이블 아래서 요란한 발길질이 이어졌다.

Posted by 미야

2016/06/23 16:44 2016/06/23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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