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 : 1 : ... 37 : 38 : 39 : 40 : 41 : 42 : 43 : 44 : 45 : ... 233 : Next »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분홍빛의 묽은 스프를 억지로 삼키자 평소보다 몇 갑절 빠르게 의식이 흐리멍덩해졌다.

「평소보다 누월초를 강하게 썼군. 이거, 이래서는 치샤량 아닌가.」
숨이 멎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한 톨도 하지 않았음에도 속으로 툴툴거렸다.
어차피 쉽게 죽지 않는 몸이다.
치사량이 문제가 아니고 결정적으로 맛이 개판이다. 식초 비슷한데다 떫었다. 퉤, 하고 뱉고 싶은 맛이다.
차라리 몽둥이로 단숨에 머리를 쳐서 기절시킬 것이지 – 그릇을 통째로 뒤집어엎고 싶은 욕구를 참고 수저를 입으로 가져갔다.

마침내 눈꺼풀 아래로 무거운 납덩이가 달리자 멀리서 이를 훔쳐보던 하인이 서로 눈짓을 나누었다.
문이 열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여자가 작은 신사용 구두와 레이스로 깃이 장식된 겉옷을 들고 긴장한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서두르라고 누구 하나 입 뻥긋하여 말하지 않았음에도 여자의 보폭은 매우 컸다. 그 모양새가 흡사 불가에 오래 두고 졸아붙은 스튜를 화덕에서 내려놓기 위해 호들갑을 떠는 시골 아낙네 같아서 약간은 우스꽝스러웠다. 뛰는 것도 아니고 걷는 것도 아니다. 그 중간 어디쯤 될 것 같다. 무엇보다 여자는 씨근덕거리고 있었다.

약에 취해 눈을 감았던 소년이 인기척에 반응하여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보석처럼 새파란 눈동자였다. 좋게 표현하면 그렇다는 것이고 – 나쁘게 말하자면 사람 느낌이 일절 안 났다.
옷가지를 들고 있던 여자는 초점이 흐려진 소년의 시선이 얼굴에 닿자 경기를 일으켰다.

『아, 안전할 거라고 했잖아요!』
『약을 세 배는 더 썼어. 괜찮아.』

정확히 얼마나 더 썼는지 모른다. 허나 약을 더 쓴 건 사실이다. 그러니 세 배라고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
약을 가져온 본가의 시종장은 한 끼 식사마다 말린 잎사귀를 두 장씩 넣으라고 지시했다.
그렇지만 정량 따윈 잊은 지 이미 오래다. 잎사귀는 바싹 말라붙어 조금만 건드려도 부스러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형태를 잃고 가루가 되었다. 그 가루로 「잎사귀 두 장」 정도의 분량을 추측하라고? 말도 안 되었다. 그래서 게으르고 부덕한 하인들은 티스푼을 사용해서 눈대중으로 대충 양을 쟀고, 당연히 최초의 「잎사귀 두 장」 이야기는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알게 뭐람. 얼마면 어떠랴. 요컨대 요괴가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라는 거다.

옷이 입혀진 소년은 전쟁 포로처럼 양 팔이 모두 붙잡힌 채 다른 장소로 옮겨졌다.
무릎의 힘이 풀려 거의 끌려가는 수준이었지만 하인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신분이 위니악의 소공자 – 메디발의 공주가 배 아파 낳은 둘째 아들이었어도 그랬다.
『서둘러. 시간이 촉박하다.』
약에 취해 오락가락하는 소공자의 정신이 가끔씩 돌아올 때가 있었다. 그럴 적마다 소년은 흔들거리던 머리를 애써 세우곤 했는데 하인들은 그 때마다 히익 소리를 내곤 했다.
소문으로는 소공자가 입으로 용암을 내뿜는다고 했다.
물론 소문이다. 소공자는 용이 아니니까. 그래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다.

《어서 오세요.》
메디발의 공주는 왕가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은 한 떨기 장미꽃이었다.
곱슬거리는 금발머리는 장인이 만든 보관보다 아름다웠으며 피부는 백옥 같았다.
결혼을 하고, 나이를 먹고, 세 아이를 낳았음에도 여전히 그녀는 숨구멍조차 없는 완벽한 진주였다.
《오늘도 착하게 잘 지내셨나요.》
여인은 카나리아처럼 노래한다.
《어서 이리 오세요, 나의 작은 보물.》

소년은 흐려진 눈으로 여자를 응시했다. 초점이 맞지 않아 어미의 눈코입이 전부 뭉개져 보였다.
사랑스럽고 귀하다고 말하면서도 그녀는 한참 거리를 두고 서서 손깍지를 단단히 꼈다.
그 손을 내밀어 아이의 머리를 만져주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며.
행동은 하지 않고 오로지 입으로만 노래해 그 심장에 담긴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한다.
《사랑스런 나의 아이.》

힘들여 눈을 깜빡이자 잔상이 다소 가셨다.
그래봤자 여인의 얼굴은 다 마르지 않은 물감을 손가락으로 마구 뭉개버린 형상이었다. 빨갛고, 노랗고... 그리고 사방에서 불쾌한 빛이 번득였다. 덕분에 눈이 시려 눈물이 났다.
금발, 노란색. 빨강의. 두껍게 덧칠된... 아아, 피냄새. 그렇군. 소년은 느리게 깨달았다.

당신은 이미 죽었지.

순간 참을 수 없이 두통이 심해졌다. 도끼로 머리를 찍는 수준이었다.

『약이 너무 과한 거 아닌가.』
『아니옵니다. 평상시와 같사옵니다, 대공자님.』
『내 판단에는 그렇지 않은데. 앞으로는 좀 줄이게.』
주인의 말에 노인은 저어했다.
『저어, 죄송하오나 그러지 않는 편이...』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게.』
『알겠습니다, 대공자님. 약을 줄이라고 지시해 두겠습니다.』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콧잔등에 주름을 잔뜩 만든 사내가 서있었다.
언제나의 표정이었다.

무엇이 불쾌하다는 걸까. 무엇이 짜증스럽다는 건가.
방금 전 자다 일어난 사람처럼 헝클어진 머리? 끼워 맞춘 것처럼 보이는 옷? 그나마 격식을 갖춘 겉옷 아래로는 속옷이나 마찬가지인 셔츠 차림이다. 준 왕족이나 다를 바 없는 위니악의 후계자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추태일 터, 그 사실을 잘 알았기에 목깃까지 잘 채워져 있던 단추를 주먹으로 쥐고 뜯어버렸다.

『무슨 짓이냐.』
『숨 쉬기가 답답해서.』
누월초는 원래 독초다. 중독되면 심장박동이 느려진다. 그래서 숨이 느려지고 심하면 정신을 놓는다.
그 효능만 보자면 정적을 독살하기에 안성맞춤인 종류이나 무색무취의 다른 독과는 달리 감춰지지 않는 특유의 신맛이 있다. 그래서 보통은 사람을 쓰러뜨릴 종로서가 아니고 동물을 사냥할 적에 쓴다. 사냥꾼들은 누월초의 즙을 화살촉에 발라놓고 사용한다.

『역시 복용량을 줄이는 편이 좋겠어.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겠느냐.』
『지금은 눈이 잘 안 보여. 하지만 귀는 닫히지 않아 그 목소리는 잘 알아듣겠군. 형님.』
소년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축 늘어진 자세 그대로 고개만 까닥였다.
『한 달 보름여 만인가? 달력을 보며 세지 않아 정확하진 않지만.』
『세 달이다. 미안하구나, 일로이. 그동안 좀 바빴다.』
『전혀 미안해 할 것 없어, 형님... 덕분에 평안했으니. 매일 약에 취해 입을 벌린 채 침을 흘렸지. 정신을 차리면 밤이고, 다시 정신을 차리니 밤이더라고. 아주 달콤하고 태평한 나날이었어.』
순간 테이블에 놓여있던 장식 화병이 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일로이!』
『귀 아프다고. 소리 좀 지르지 마, 형님. 어차피 싸구려 도자기잖아.』
『싸구려가 아니야. 바다 건너 대륙에서 어렵게 공수해 온... 아니다. 지금 도자기 문제가 아니잖아!』
『그럼 뭐가 문젠데.』
『...』
남자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열두 살 어린 남동생의 제어되지 않는 이능이 골치라고는 말하기 싫었다.
그래서 대화가 잠시 중단되었고, 이윽고 몇 단계를 훌쩍 건너뛰어 다시 시작되었다.

대공자가 자세를 가다듬었다.
『네게 곧 놀이상대가 생길 거다.』
『뭐?! 갑자기 웬 놀이상대?』
『아니면 개인 시종이라고 생각하던지. 어쩌다보니 사정이 있는 어린아이를 잠시 맡게 되었다. 손님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니 저택에 머무르는 동안 그동안 밥값은 해야 할 테고, 아직 팔목에 힘이 없어 본관에서 일을 시키기는 무리더구나. 그래서 생각해본 끝에...』
소년이 재빨리 말꼬리를 잘랐다.
『맙소사. 그래서 기껏 생각한 게 내 놀이상대나 하라고? 하아? 지금 장난해?』

대공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상대가 한 배에서 태어난 동생이라 할지라도 말꼬리가 잘리는 건 무척 불쾌한 경험이다. 신분으로나 직급으로나 그의 말꼬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자를 수 있는 자는 왕국에서 손가락을 꼽을 정도밖에 없다. 그리고 정직하게 따지자면 열두 살 터울의 동생은 대공자의 말꼬리를 자를 위치가 전혀 되지 못한다.

자신도 모르게 턱이 당겨지고 말투가 싸늘해졌다.
『아무렴 장난이겠느냐.』
눈매도 가늘어졌다.
『참고로 말해두지만 지난 번 네가 「실수랍시고」 호숫가에 거꾸로 처박아 죽인 아이의 부모에겐 사과의 의미로 농작지를 따로 떼어 내려줬다. 그런데 새로 온 아이에게는 양친이 없으니 덜 부담스럽구나. 참으로 다행이지 않느냐. 천애고아라서. 어찌나 감사할 노릇인지. 내 죽은 자식의 몸뚱이가 왜 다섯 조각으로 돌아왔느냐는 물음에 수중에 사는 짐승에게 물어 뜯겼노라 거짓말 하지 않아도 되고.』
『...』
『존재하지도 않을 짐승을 잡겠다며 기사를 풀어 들판을 쑤셔대지 않아도 될 테고.』

그때 또 커다란 유리창이 쩍 하고 굉음을 내며 세로로 갈라졌다.
『일로이!』
『어쩌라고!』
소년과 사내는 서로를 죽도록 노려봤다.

Posted by 미야

2017/10/17 15:55 2017/10/17 15:55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2053

Leave a comment

일반적으로「심각한 상황입니다」라는 말을 들으면「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라고 물어본다. 이른바 육하원칙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리처드 D, 앤더슨은 많이 달랐다.

『좋아.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 한 번 말해봐. 예를 들자면... 1번, 싱크대 배관이 꽉 막혔다. 2번, 침실 유리창으로 물이 샌다. 3번, 흰개미가 마룻바닥을 먹어치우고 있다.』
이어지는 보기를 다 듣지 않고 딕 그레이슨은 최악의 상황을 거론했다.
『토네이도에 휘말려 건물 자체가 폭삭 주저앉았습니다.』
『허어... 토네이도.』

그것만으로 전부 알아들은 눈치다.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꼬치꼬치 캐묻는 일 없이 그저 잘 알겠다고 대답했다. 지금까지 벌어졌던 일 전부를 설명하기가 난감했던 딕 입장에선 숨통 트이는 일이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저 남자의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세상에, 지붕이 무너졌다는 비유만 듣고 상황의 심각함을 사람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느냔 말이다. 게다가 그의 직업은 경찰관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우울해지는 감수성 풍부한 세탁소 사장님이 결코 아니라는 말씀, 이건 아니다 싶은 나머지 입술에 침을 축이고 더 설명하려 했다.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됐거든?』
한마디로 말해 앤더슨은 예의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개차반이었다. 도움이 될 거라는 기대를 처음부터 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고함과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주택가는 언제나처럼 조용했다.
순찰차는 길가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상황이었는데 심지어 마이클은 차문을 제대로 닫지도 않았다.
신음하며 위를 올려다보니 아파트 4층으로 불이 훤히 들어와 있었다.
당연히 그럴 법했지만 딕 그레이슨은 한 가지 우려할 법한 점을 상기해냈다.
「시아라.」
승강기에 올라갔을 적에 버튼에 붉은 손자국이 찍혀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공포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은지라 하느님 맙소사 신음하며 소매로 자국을 문질러 닦았다. 죽었다 되살아났다고 해도 상처가 아물었을 리 없으니 출혈은 여전한 모양이었다. 승강기 내부만 그런 것이 아니라 4층 복도에도 손가락 모양대로 다섯 개의 줄이 그어져 있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벽에 손을 짚었던 것 같다. 아침에 아파트 주민들이 일어나 저 핏자국을 발견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하는 게 두려워졌다. 점점이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은「코피가 나서 그랬습니다」변명하기엔 양도 많았다.

어느새 그의 걸음걸이가 신중해졌다.
순찰차도 제대로 잠지 않았는데 자기 집 현관문 단속을 제대로 했을 리 없다. 5cm 정도 틈이 벌어져 있었다.
그대로 박차고 들어가는 대신 반 박자 숨을 내쉬고 가만히 손잡이로 손을 가져갔다.
맨발로 현관 아래 서있던 소녀가 인기척을 느끼자마자 히익 소리를 삼켰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보는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인지 오른손으로 식칼을 쥐고 있는 채였다.
「시아라. 시아라 맞지?」
소리를 지르지 말라는 의미로 검지를 입술에 가져갔다.
「도와주러 왔어.」

소녀는 큰소리를 내지 않을 만치 영특했다.
대신 빌어먹을 지경으로 자기 고집 또한 강했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며 식칼을 양손으로 단단히 잡았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찌를 수 있다며 표정을 아주 독하게 지었다. 얼마나 지독한지 손을 떨지도 않았다.
《여자가 작정하고 무기를 들면 남자보다 더 악독해지는 법이다. 여자라고 봐주면 안 돼. 결심하는 과정이 복잡해서 그렇지 그녀들은 한 번 작정하면 살상을 저지르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그리고 그 살상 대상엔 자기 자신까지 포함되어 있지.》
민간인에게 결코 공개되지 않는 전술교본에는 무기를 든 다수의 적이 있을 시 남자보다 여자를 먼저 행동불능 상태로 만들라고 가르친다. 부드럽게 표현해서 행동불능으로 만들라는 것이고, 내포되어진 진짜 의미는 원거리 헤드 샷이다. 아이와 여자를 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던 일반 사회의 암묵적 규칙이 여기서 완전히 뒤집어진다.
《자살 폭탄 조끼를 입고 있는 어린 소녀가 만약 너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온다면 어떻게 하겠나.》
글쎄다. 누가 뭐래도 틀림없는 한 가지는 이것이다.
자신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총을 쓰지 않는다.

쭈그리고 앉는 것으로 눈높이를 낮춘 그는 대화를 시도했다.
아이가 칼을 휘두르면 크게 베일 수 있는 간격이라는 점은 무시했다. 여차하면 알프레드에게 부탁해 꿰매면 된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마이클 선배가 많이 다쳐서 돌아왔을 거야.』
찌르겠다는 협박이 통하지 않자 시아라는 당황한 눈치다.
『그는 안에 있니?』
순간적으로 아이의 눈동자가 안쪽을 향했다. 입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훌륭한 대답이었다.
『혹시 그가 너를 다치게 했니?』
시아라의 어깨가 굳었다. 겁을 먹어서가 아니라 화가 나서다. 마이클 윈저를 내심 보호자로 여기고 있을 아이는 그 질문이 상당히 불쾌했던 것 같다. 소녀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리고 입을 벌려 F로 시작되는 욕을 퍼부으려고 했다. 절묘한 타이밍으로 냉장고에서 뭔가를 요란하게 끄집어내어 던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녀는 그 작은 입으로 F*** 단어를 대수롭지 않게 완성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시선이 의미심장하게 서로 얽혀 들어갔다.
시아라는 한층 더 불안해 보였다. 그리고 더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다급하고 간절하기까지 했다.
그제야 딕 그레이슨은 납득했다.
소녀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칼을 든 게 아니었다. 지키고자 할 대상은 따로 있었다.

『저어, 선배에게 도움이 필요할 것 같은데.』
안쪽을 손가락질하며 상냥하게 웃었다. 시퍼런 칼에는 일부러 시선을 주지 않았다. 오로지 아이의 눈만 보았다.
『내가 들어가 보면 안 될까.』
『안 돼.』
『왜 안 돼? 내가 마이클을 도우려는 게 시이라는 싫어?』
『싫은 게 아니야.』
소녀가 마른 입술을 핥았다.
『가까이 갈 수가 없어.』
나조차 가까이 갈 수가 없어 - 절망에 가득찬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와장창 소리를 내며 그릇이 바닥을 뒹굴었다.
심각한 싸움의 현장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마이클은 코를 킁킁거렸고 밀폐용기 안의 내용물을 씹지도 않은 채 목구멍으로 쑤셔 넣었다. 포크나 스푼을 사용할 여유따윈 없었다. 주먹으로 쥐고 모조리 입안에 털어 넣었다. 조리가 되지 않은 냉동식품 몇 가지도 이미 해치웠다. 포장이 찢긴 잔해물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는데 그중에는 날고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허겁지겁 삼켰으니 역류할 법도 했다. 우웨엑 소리를 내더니 누런 덩어리를 토해냈다.
그것만으로도 비위가 상할 지경인데 그걸 바닥에 손을 짚고 엎드린 자세로 다시 주워 삼켰다.
씹지도 않았다. 그냥 진공청소기마냥 흡입하고 있다는 게 맞았다.

『이쪽으로. 바닥에 그어진 붉은 선 안쪽으로 들어가선 안 돼.』
시아라가 딕의 옷자락을 세게 끌어당겼다.
발아래를 바라보자 정말로 테이프를 붙여서 만든 붉은 선이 보였다.
이게 무슨 선이냐고 물어보자 시아라는「패닉 라인」이라고 대답했다. 말은 그렇게 해놓고도 정작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는 듯 뺨을 일그러뜨렸다. 그게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워싱턴 조약에 대한 질문을 받은 직후 짓는 표정과 흡사한지라 딕은 더 자세하게 캐묻는 걸 포기했다.

이제 마이클은 구역질나게 느끼한 땅콩버터로 손을 뻗었다.
본인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다. 이마를 찌푸리더니 가볍게 신음했다.
내가 어쩌다 이 지경으로 - 착각이었을 수도 있는데 잠시나마 마이클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땅콩버터를 거꾸로 들어 내용물 전부를 쏟아냈다. 오른손을 포크레인처럼 사용해 그걸 입으로 가져갔다.
우웩 구역질 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그렇게 헐떡이던 것도 잠시, 토사물을 다시 게걸스럽게 주워 먹었다.

Posted by 미야

2016/08/02 16:51 2016/08/02 16:51
Response
No Trackback , a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2036

Comments List

  1. 방문자 2016/12/23 22:53 # M/D Reply Permalink

    dc는 캐릭터만 아는 수준이었는데 미야님 글이 좋아서 여기까지 읽었습니다. 늘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드려요. 마이클의 정체와 앞으로의 전개가 너무 궁금합니다. 딕이 굉장히 자상한 느낌이라 여심이 설레네요^//^ 뒤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곧 성탄절인데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Leave a comment
진즉부터 제법 많은 초현실적 존재를 만나왔다.
데미갓인 원더우먼부터 시작해서 크립톤 행성 사람인 슈퍼맨, 화성의 마지막 생존자인 마샨 맨 헌터라던가... 사이보그 기계인간이라던가.
죽어도 부활하는 존재도 알고 있다. 솔로몬 그런디라고, 지금은 마법으로 엄중 봉인되어 공동묘지 어딘가에 사일러스 골드라는 이름이 새겨진 측은한 묘비 아래 잠들어 있다. 그렇다. 이 세계에는 모자에서 흰 토끼를 끄집어내는 속임수로서가 아닌 마법 또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총에 맞아 쓰러져 죽었다가 멀쩡히 다시 일어나 숨 쉬는 자를 앞에 두고도 호들갑을 떨 까닭이 없었다.
『병원! 일단 병원부터! 아니다, 그보다는 응급처치를...!!』
그렇고말고. 어디까지나 그는 침착했다.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면 어디까지나 그건 당신의 시력 문제다.

레드후드의 헬멧을 아무렇지도 않게 갈취한 마이클은 빠른 걸음으로 입구를 향해 나아갔다. 제법 빨랐다는 것과는 별개로 걸음걸이는 여전히 불안했다. 방금 전까지 시체였다는 점을 무시하자면 술에 취했거나, 아님 중증의 파킨스 환자의 보행 장애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러면서도 용케 넘어지지 않고 있다.
『마이클! 기다려요. 부축해드릴게요.』
『아아.』
이도저도 아닌 대답이었다. 그래도 뭔가 도움이 되고 싶어 하는 딕의 호의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해서 가까이 오지 말라는 거절의 몸동작을 해보였다.
『미안, 너도 보다시피 내가 지금 살짝 맛이 가서 말이지... 더 가까이 오면 내가 뭔 짓을 할지 감히 장담을 못 해. 그러니 가까이 오지 말고 좀 떨어져줬음 좋겠어.』
협박이 아니다.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어디까지나 한 점 거짓 없는 사실이었으며, 사고회로가 금방에라도 바스라질 것 같다는 점에선 환각상태에 빠진 중증의 마약 중독자보다 더 위험했다.
『내가 뭔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말은 진짜야. 그러니 시험해보려 하지 말고 거기서 손들고 서있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마이클에 수중엔 개조한 글록 권총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권총을 흔들어 보이자 딕은 시키는 대로 뒤로 두 발자국 물러섰다.

참기 힘든 두통이 엄습하는 가운데 마이클은 인내력의 잔해물이라 부르는 찌꺼기를 바닥까지 긁어냈다.
『순찰차는 내가 가져갈게. 택시를 잡아탈 수 있을 거 같지가 않아서 그래.』
『그 상태로 운전이 가능할 리 없잖아요.』
『괜찮아. 살살 운전하면 돼.』
만취 상황에서의 운전보다 몇 곱절이나 나쁘다는 걸 알면서도 일단 우기고 보았다.
『그러지 말고 절 믿어줘요. 전 선배 편이에요. 제가 운전할게요.』
마이클은 헐떡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어. 대신 휴대폰으로 딕에게 대신 연락 좀 해줘.』
『딕?』
『너 말고 다른 딕.』
딕 그레이슨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지 관찰할 여유 따윈 없었다. 마이클은 정말 급했다.
『앤더슨 녀석에게 길게 설명하려고 하지 마. 그냥 비상사태라고만 해. 그래도 다 알아 들어.』
『선배님...』
『아우, 씨! 넌 그냥 전화만 하라고!』
탁상용 전화기나 쓰레기통이 주변에 있었음 홧김에 집어던졌을 것이다. 주변에 그런 게 있을 리 없었기에 대신 그는 일부러 쿵쿵 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래, 비상사태인 건 틀림이 없지.
마이클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딕은 다짜고짜 레드후드의 자켓 안주머니를 허락도 없이 뒤지기 시작했다.
『가슴에 총 두 발 맞고도 저는 무사합니다. 이렇게 걱정을 해주셔서 정말 감동 먹었습니다. 두 번 먹었습니다.』
화끈거리는 통증에 끙끙 앓던 레드후드가 이를 갈아댔다.
그런다고 딕 그레이슨이 조금이라도 미안해 할 거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더듬거리는 손길은 성추행에서 고작 한 큰 술 덜어낸 정도였고, 레드후드는 더욱 진저리를 쳤다.
『씨발아! 어딜 더듬어!』
『바이크 열쇠 어딨니.』
『허리춤에.』
『어디에 세워뒀는데.』
『건물 출입구에서 7시 방향. 그런데 빌려준다고 아직 말 안 했다.』
『......』
새파란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응시해왔다. 부탁을 하려는 게 아니라 어딘지 강압적인 분위기여서 레드후드는 기분이 언짢았다. 이럴 적엔 please, 한 마디를 덧붙이는 거라고 웨인 가(家)의 집사 알프레드가 조언했지만 아무래도 사내애들이다보니 효과는 없었다.
『시동을 걸려면 열쇠를 꽂고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으로 돌리는 거 맞지?』
시중에서 판매되는 바이크처럼 다뤘다간 점화장치가 그 자리에서 폭발한다. 도둑맞을 것을 염려하는 것도 아니면서 레드후드는 손버릇 고약한 이들을 겨냥해 악의적인 개조를 곧잘 했다. 짓궂은 장난이 아니라 살의가 충만하다는 점에서 그 성질이 매우 나빴다.
『흠집 내면 모가지 따버린다.』
마지못해 허락하며 레드후드가 투덜거렸다.

상당히 서둘렀어도 따라잡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말로는 살살 운전하겠다고 했으면서 순찰차는 시속 90km에 이르는 속도로 달렸다. 그리고 신호도 무시했다.
한적한 시간대여서 천만다행이었다. 아니면 운 나쁜 사람들 몇몇은 단순히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했다는 이유로 죽어나갔을 것이다.
「기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네... 진짜.」
훔쳐온 쇼핑카트에 전 재산을 싣고 가던 노숙자가 질겁해선 이를 피했다. 야, 이 미친 경찰 새끼야 - 철렁한 가슴을 쓸어내린 것으로는 부족했던지 노숙자가 꽤나 귀한 재산이었을 통조림 깡통을 두 개나 집어던졌다. 하나는 참치 깡통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파인애플이었다. 요란하게 굴러가다 뚜껑이 벌어졌는지 지나치자 달큰한 설탕 냄새가 맡아졌다.

「진짜로 집으로 가는 방향... 아, 위험!」
끔찍한 졸음운전 같았다. 차량이 좌우로 비틀거렸다. 그러더니 인도 위로 바퀴 하나가 올라갔다. 균형을 잃은 순찰차는 정신없이 덜컹덜컹 흔들렸다. 신문 가판대와 정면충돌까지 앞으로 3초, 아슬아슬하게 다시 도로로 내려오더니 운 나쁜 쓰레기통을 멀리 튕겨냈다.
「저러다 차량전복을 일으키고 다시 죽겠는데.」
곡예하듯 좌회전 하며 시야에서 잠시 사라졌을 적엔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딕 또한 바이크의 오른쪽 엑셀 손잡이를 미친 듯이 돌렸다.

D. 앤더슨은 어눌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아마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죽인다...》
그리고 돌아누워 베개에 바로 얼굴을 파묻은 것 같았다. 어찌나 조용하던지 딕 그레이슨은 통화가 자동으로 끊어진 모양이라고 착각하고 재다이얼 버튼을 누를 뻔했다.
『앤더슨! 이봐요, 앤더슨!』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비상사태입니다! 마이클 윈저가 전하랬어요. 비상사태라고요!』
혹여 다시 잠든 것은 아닐까 싶게 핸드폰 너머는 다시 조용해졌다.
『여보세요?!』
《듣고 있어.》
대답하는 앤더슨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또렷했다.

Posted by 미야

2016/07/27 15:32 2016/07/27 15:32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2035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 37 : 38 : 39 : 40 : 41 : 42 : 43 : 44 : 45 : ... 233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1024820
Today:
67
Yesterday:
493

Calendar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