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아가씨께서 그렇게 신경쓰실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레이워즈 후작은 나긋나긋 웃으며 테이블 위로 펼쳐진 지도를 돌돌 말아버렸다. 『도적떼 출몰 이야긴 단순한 동네 헛소문이었나 봅니다. 여기까지 오는데 도둑놈들은 하나도 나오질 않았답니다. 제 부하놈들이 열심히 뒤졌음에도 머리카락 하나 안보이던걸요.』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놈들도 눈치가 있는데「날 한 입에 잡아 잡슈~」하고 군인에게 덤벼들까. 차라리 밧줄을 들고 스스로 교수대를 향해 걸어간다. 그것도 아니라면 온 몸에 날고기 매달고 상어 밥이 되겠습니다 복창한 뒤에 바다 한 가운데로 뛰어들거나.
『저희들은 평복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하! 이 남자가 지금 백 살 구렁이가 미끄럼틀 타는 소리를 하나. 평복이 뭐가 어째? 갑옷만 벗어던지면 뭐하느냔 말이다. 수십 명의 젊은 남자들이 일제히 말을 달리는데 도적들이 그걸 보고 매력을 느끼면 그 날로 천지개벽이다. 산적들의 입맛에 맞으려면 연약해 보이는 귀부인, 옷차림이 훌륭한 시동, 더러는 배 나온 대머리 아저씨, 호기심을 자아내는 커다란 보따리가 필수이다. 이쪽에서 찌르면 곧장 반격할 것이 분명한 튼튼한 남자들을 뭐 하러 건드리냐. 손수건만 팔랑 흔들고 그냥 보낸다. 『산적놈 주제에 취향에 따라 골라 먹는다는 겁니까.』 당연히 골라 먹는다. 강도질에 평등 개념이 어디에 있누. 가진게 많아 보이고, 끽소리 내지 못할 약한 놈부터 턴다.
이 무능한 집단아, 아무것도 모르면서 강도 토벌이라는 걸 하겠다는 거냐.
무능이라는 단어에 반응, 후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더니만 돌돌 말았던 지도를 손수 다시 펼쳤다. 무능하다고? 누가. 내가? 『알고 있습니까? 리나양. 쫓아가는 것보다 더 쉬운 것은 따라오게끔 만드는 겁니다. 기껏 따라갔더니 죄다 도망쳤더라, 하르시폼 경의 넋두리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안 됩니다. 리나양은 도둑들을 따라가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는 소득이 없어요. 꿀단지엔 파리가, 파이 조각엔 어린애가 달라붙는 겁니다. 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여기까지 말한 레죠 그레이워즈 후작은 손가락으로 달그닥 달그닥 말 달리는 흉내를 내며 버닛사 대로를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 뿐만 아니라 검지손가락을 척 들어올리고는「히히힝-」하고 말이 앞다리 차는 모양도 냈다. 『호오- 봉화를 올리라는 건가요.』 『바로 그겁니다. 소문을 진득하게 뿌려 차라리 산적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이쪽으로 달려오게끔 하는 거죠. 그게 더 효과적입니다. 예를 들자면 인버스 남작의 영애와 그녀가 운반하는 모종의 궤짝을 보호하기 위해 그레이워즈 후작가에서 사람을 보내왔다더라~ 어떻습니까. 머리에서 불꽃이 번쩍하는 기분이 들지 않습니까.』 『그거 확실하겠는데요. 좋은 생각입니다.』 그녀는 후작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며 깊게 수긍하는 눈치였다.
뭐가 확실하고, 뭐가 좋은 생각이냐! 똥침이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다급해진 로머디스는 천식 발작을 일으킨 환자인양 기침을 터뜨렸다. 『실례하겠습니다! 주인 나리, 잠시만... 아가씨? 죄송합니다.』 로머디스는 남작의 영애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뒤, 철판을 덧댄 슬리퍼로 흠씬 두드려 맞을 것을 각오하고 후작과 함께 뒤쪽으로 물러났다. 『허억, 허억. 나으리,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그렇죠?』 당연하다. 정체가 의심스러운 궤짝 자체도 문제가 되는데 한 술 더 떠서 남작의 열 여섯 난 영애를 에스코트 하는 일에 후작가에서 수십 명의 사람을 보냈다고 해봐라. 소문 좋아하는 인간들이 그걸 두고 뭐라 상상할지는 너무나 뻔하다.
지금껏 서신 왕래조차 없던 사이면서 갑자기 웬 친한 척? 후작이 제피리아에 거금의 자본을 투자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고. 남작이 후작에게 거금의 정치 자금을 건네줄 정도로 나라에 큰 사건이 벌어질 조짐도 없고. 그렇다면 들고 가는 궤짝은 돈뭉치가 아니라 단순한 옷상자? 이래서는「아항~ 후작이 남작의 어린 딸을 첩으로 들이려고 하는구먼」으로 결론이 난다.
첩이다. 애인도 아니고, 약혼자도 아니고. 첩이다! 『소문이라는게 원래 그런 거죠. 그걸 잘 아시면서 소문을 진득하게 뿌린다고요?!』 세상에. 결혼이나 미리 하고 염문을 뿌려라, 이 빌어먹을 노총각아. 거기다 열 여섯 소녀의 앞 날을 새까맣게 망칠 일 있냐. 로머디스는 울상지었다. 『후작님! 절대로 안되요!』 『안되긴. 내가 안된다고 해도 저쪽에선 강제로라도 하겠다는 눈치구먼.』 『그러니까아~!! 재밌어 죽겠다는 식으로 허벅지를 때리면 안된다니까요!』 『허벅지는 때리지 않았습니다. 그냥 손뼉만 쳤지.』 『그게 그거잖습니까!』 즐기고 있는 거죠? 즐기고 있는 거죠?! 눈동자 굴리는 거 봐라. 로머디스는 발버둥쳤다. 『여자와 아이는 지켜줘야 합니다. 망가뜨려서는 안됩니다. 그게 기사의 정신입니다!』 『어허! 기사도 정신이야 기사들이 지켜야지요. 하지만 나는 기사가 아닙니다. 내가 어려서 한때나마 수도승 생활을 했다는 이야긴 이미 들어 알고 있겠지요? 로머디스. 나는 지금도 법사 지망생입니다.』
흥! 그렇게 나오깁니까. 그렇지만 이걸 아셔야지. 우리 슬레진 왕국 황태자의 캐치플레이즈는「악당은 물렀거라」잖소. 일이 하나라도 잘못되면 그 때는 스무 살 연하를 건드린 변태로 낙인찍혀 귀족 사회에서 영구 추방이오!
순간 그레이워즈 후작의 얼굴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스물! 맙소사. 그렇게나 벌어지나요. 우리들 나이 차이가.』 『지금 나이 차이가 얼마냐를 깨닫고 새삼 쇼크 받을 때가 아닙니다. 그리고「우리들」이라뇨? 언제부터 각하와 리나양이 우리라고 불리우는 가까운 사이가 된 겁니까?!』 『그렇군. 올해로 내 나이가 서른 여섯이군. 세월 참 빠르다.』 『각하! 이 시대엔 우주선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습니다! 안드로메다까지 가지 마시고 어여 이리로 돌아오십시오!』 『허. 그리 멀리 가지 않았으니 작은 목소리로 부르십시오, 로머디스. 귀가 아픕니다.』 『하여간 전 반대입니다, 나으리. 남작의 영애를 일에 말려들게 하지 마세요.』 『맙소사. 내가 그렇게 하라고 명령이라도 했답니까. 난 그저 의견을 제시했을 뿐이고 저쪽에서 그거 좋겠다고 맞장구를 치던데요, 뭐.』 그리고는 고개를 빼꼼 돌려 남들 다 들으라며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리나 인버스양. 제 부하가 그 작전은 위험하니 그렇게 하지 말 것을 강력히 주장하는데-』 저편에서 열 여섯의 소녀가 재빨리 대답했다. 『인생은 어차피 모험이에요. 남자가 어딜 뒤로 빼요!』 과연 그럴 줄 알았습니다. 후작은 만족스러워하며 팔을 벌렸다. 『들었습니까, 로머디스. 아가씨는 산적들을 붙잡아 정의를 구현하고 싶어합니다.』 『안된다니까요오-』
계속되는 부하의 읍소에 후작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슬슬 짜증이 치솟는데 이걸 어쩌지. 로머디스? 그대는 목이 밧줄로 졸린 뒤에 괜찮다고 할 겁니까. 아님 그냥 괜찮다고 할 겁니까.』 내가 미쳤지. 이 작자에게 뭔 잡소리를... 풀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하지만 막상 일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자 로머디스는 입이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그들을 막아야 했었다며 후회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쌍두마차다. 감청색의 최고급형 휘장이 드리워진, 여성 귀족들이 애용하는 스타일의 마차다. 진땀을 줄줄 흘려가며 마차의 문을 열었다. 안으로 금으로 치장한 궤짝이 보였다. 그리고 최고급 실크 드레스 - 그것도 결혼식을 연상시키는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어린 소녀가 등을 돌리고 앉아 궤짝의 자물쇠를 손보고 있었다. 노랑도 빨강도 아닌, 하필이면 흰색이다. 갑작스런 인기척에 소녀가 흥얼흥얼 콧노래를 멈추고 뒤를 돌아다 보려고 했다. 로머디스는 겁이 덜컥 나서 실례했습니다 인사도 잊고 마차의 문을 쾅 닫아버렸다. 정말로 하는 거야, 정말로 하는 거야... 하도 가슴이 뛰어 성호라도 긋고 싶어졌다.
『허억, 허억. 여보게, 죠르프!』 『왜 그러나, 로머디스. 발작인가, 아님 두통이 심한가. 그리 머리를 움켜쥐고.』 『두통은 무슨!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졌네. 뒷일을 부탁함세.』 『하지만 뒷 일이고 앞 일이고 우리가 나서서 할 일은 별로 없는 걸.』 죠르프의 말 그대로이다. 일은 저쪽에서 알아서 추진하고 있다. 하다못해 술값 몇 푼을 쥐어주고 소문 좋아하는 허풍쟁이들도 몇 구한 듯하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같은 말을 하고 또 하는 주당들에게야 이건 공짜로 먹는 꿩이나 마찬가지일 터, 따라서 내일이면「인버스 남작네 뒷뜰에서 공룡 알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산 다섯 개는 넘어갈 거다. 『공룡 알?』 『왜 눈을 꿈뻑거리고 그러나. 드래곤의 알 말일세.』 『진짜?』 『남의 뒤뜰에 쭈그리고 앉아 새끼를 치는 드래곤이 있다면 있는 거겠지.』
본가에서의 준비도 착착 진행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온 식구가 아침부터 부산을 떨고 있다. 일부러 과시하듯 온 집안을 뒤집어놓고 지붕 꼭대기로 인부들의 세탁한 바지를 널었다. 이삿짐을 싸서 집 팔고 제피리아를 떠난다고 해도 믿겠다. 뛰어다니는 하인들에 깨지는 접시들, 날아다니는 부지깽이들, 굴러다니는 지구방위대 및 외계인들... 이 와중에 홀로 독보적인 모양새로 사람들을 호령하고 있는 건 이 집의 첫째 딸이다. 『더 커다란 자물쇠를 가져오라니까! 됐어! 그 다음은 거기! 이걸 옮겨! 다음!』 왜들 그리 느려 터졌느냐며 언성을 높인다. 기다란 홍옥 빛깔의 머리카락을 질끈 끈으로 묶어놓고 전두지휘하고 있다. 거기다 사람 기절하게끔 남성용 바지를 입고 있다. 로머디스는 뽀얀 거품을 물었다. 바지이-?! 하얀 드레스 입고 마차 속에 들어가 있던 숙녀는 그럼 도대체 누구여?!
이쪽을 발견했다. 리나 인버스가 반색을 하고 다가왔다. 『여어, 로머디스 씨, 죠르프 씨.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걷는 모양새도, 하다못해 말투까지 이미 남자다. 『아, 아, 아가씨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날씨가 매우 좋군요.』 산전수전 다 겪은 죠르프는 패닉까지는 일으키진 않았다. 그래도 입은 떨렸다. 아첨하듯 손바닥을 부비대며 허리를 숙이는 건 그가 매우 당황했다는 의미이다.
『그나저나 이게 다?』 『당밀로 파리를 잡는다 작전입니다.』 그렇게 말한 리나는 손을 탁탁 털며 짐꾼들을 향해「그 상자는 이리로!」라고 호령했다.
Posted by 미야
2008/03/21 09:35
2008/03/21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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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뵙겠습니다, 후작님.』 아들 역할도 오케이, 딸 역할도 오케이.
이제 그들은「아들도 인버스, 딸도 인버스」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깨달았다. 한쪽 무릎을 살짝 굽혔다 일어선 그녀는 평상복에 가까운 단순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나풀거리는 레이스 장식과 갖은 꽃장식으로 치장한 귀족 처녀들과는 거리가 멀다. 색상은 단아한 감청색. 치맛단과 허리 부위로 금색의 선이 들어간 걸 제외하고는 장식이라는게 아예 붙어있질 않다. 옷차림만 봐서는 슬레진 제국에서도 손가락을 꼽는 부잣집 딸네미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소매 모양새조차 대도시 유행 스타일이 아니다. 아니, 아니. 그 이전에... 죠르프는 무의식중에 턱수염을 어루만졌다. 뭐랄까, 치마는 치마인데 치마로 안 보인다. 소녀라기 보다는 소년의 느낌이다. 작지만 무지 단단해 보인다. 선이 분명한 얼굴, 대단히 총명해 보이는 두 눈동자. 끝내준다. 그러다 퍼득 느꼈다. 여자라고? 아니다. 저건 남자다. 사랑에 울고 사랑에 죽는 연약한 온실의 꽃이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저런 식의 눈빛은 가질 수 없다. 선술집에서 술도 마셔봤고, 한량답게 계집을 껴안고 농탕질도 해본 얼굴이다. 돈 맛을 알고 권력의 맛을 안다. 자긍심으로 심장을 단단하게 하고 간계로 적들을 우롱한다. 화관으로 머리를 장식한게 아니라 튼튼한 철로 관을 만들어 썼다. 사자를 단칼에 찔러 죽이고 온 몸에 뜨거운 짐승의 피를 뒤집어 썼다. 그런데도 호적상으로 열 여섯의 소녀라는 건가. 이건 실수가 분명하다. 뭔가 잘못되었다.
후작도 비슷한 감상을 느꼈던 것 같다. 무어라 말 한마디 없이 덥썩 손부터 올리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말이다.
죠르프와 로머디스는 숨을 멈춘 채 기절했다. 잠깐만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구애도 생략한 채 가슴부터 만지깁니까?!
『이봐요!』 반응은 리나 인버스가 더 빨랐다. 가슴을 향해 올라오던 후작의 손을 찰싹 소리내어 후려쳤다. 『댁의 조카분처럼 실수하려는 거라면 진작에 정신 차리세요.』 『하?』 『정말이지 한 핏줄 아니랠까봐.「신이 정해놓은 운명을 부정하고 남자가 치마를 입어, 보는 이들을 타락의 길로 인도하며, 남의 마음을 농락하는 은밀한 즐거움에 빠져들어 스스로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건가」우짠가 식의 이상한 대사를 늘어놓는 것으로도 모자라, 정말로 여자인지 아닌지를 확인한답시고 남의 가슴을 막 주물러대는 건 이제 사절이라고요. 척 보면 몰라요? 도대체 세상의 어느 남자가 나처럼 아름답고, 우아하며, 사랑스럽냐고. 새삼 깨닫는 거지만 당신네 가문 사람들은 시력이 나빠요.』 반론의 여지가 없다. 후작은 얼얼한 통증을 호소하고 있는 손을 도로 거둬들였다. 하지만 여전히 헷갈린다. 저 연령대의 소년이라는 건 때로 소녀들보다 더 섹시한 법이다. 세이렌들은 높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바다 저 깊은 곳으로 배를 침몰시킨다. 본인은 고약한 취미라고 생각하지만 미령의 소년에게 홀려 스캔들을 일으키는 작자도 없지 않다. 뺨에 분칠을 하고, 수컷을 함락시키는 페로몬을 발산하는, 이른바 소년 꿀벌에게 당해 패가망신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무료함에 어쩔 줄 몰라하는 귀부인들의 단골 입방아 주제다. 실제로 여장을 한 유명한 남창으로는 마젠다라는 이도 있다. 슬레진 제국의 왕족 중 하나가 마젠다에게 홀려 가산을 탕진했다는 이야기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다들 쉬쉬하고 있어도 후작은 그 문제의 멍청이가 크리스토퍼 왕자의 아들 알프레드라는 걸 진작에 눈치챘다. 알프레드는 분노한 아버지에게 의절당하고 지금은 빈털터리 신세로 외국으로 쫓겨난 상태다. 『아앗?!』 그러니 최후까지 확인하는 것이다. 한 번 실패했다고 뒷짐 지고 퇴각할까보냐. 오른손이 아니면 왼손이 있다.
커다란 손으로 가슴을 덮었다. 이건가 싶자 후작의 표정이 답지 않게 살짝 흔들렸다. 『가슴이... 저런. 작군요.』 『이게 뭔 짓이야~!!』
- 찰싹.
로머디스는 깨달았다. 그네들 얼음 도련님이 뺨 맞은 사연이라는게 과연 무엇인지를. 그 숙부라는 자가 거짓말처럼 고스란히 그 실수라는 걸 반복하고 있는데야, 뭐.
『이이이이이잇~! 다시 말해두지만 지위의 높고 낮음을 떠나 그쪽이 잘못한 거예요!』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뭐예요! 잘못을 인정한다면서 왜 그놈의 손은 아직도 원위치로 돌아가지 않는 거죠.』 확실히 원위치로 안 돌아가고 있다. 손가락 끝이 아슬아슬하게 가슴섶에 닿아 있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가슴 굴곡을 스치게 된다. 아니, 이미 스치고 있다. 그 당연한 결과로 리나 인버스의 얼굴색은 불타는 석탄 비슷하게 되었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화가 치밀어 새빨간 색이다. 그런데도 얄미운 아저씨는 뭐가 그리 좋은지 희희락락. 『꽃이 피어난 곳에서 나비는 잠시 날개를 접고 쉬어가는 법이지요.』 『하지만 꽃도 징그러운 송충이는 질색할 겁니다. 자! 장난은 그만하시지요. 할 일이 산더미입니다.』
저 두 사람은 서로 제대로 된 통성명도 안 했다는 걸 알고는 있나. 뭐, 둘 다 그런 세세한 곳엔 신경을 쓰고 있지 않으니 감히 지적할 의무감을 못 느낀다. 리나는 능구렁이 표정을 짓고 있는 그레이워즈 후작을 힘 주어 노려본 뒤에 테이블 위로 지도 하나를 펼쳤다. 그리고는 정확히 한 지점을 향해 검지손가락을 찍었다.
- 제피리아
바퀴벌레라도 일시에 압사시킬 박력이었으나 그녀의 손가락 끝을 쳐다보는 남자들의 눈초리는 변함이 없다. 아무튼 그들은 통나무 군인, 더러는 그 기질이 풍부한 사람들이었다. 『이곳이 제피리아입니다.』 『그렇군요.』 이어 앙증맞은 손가락은「버닛사 대로」라고 적혀진 길다란 선을 따라 움직였다. 산 밑둥을 돌고, 나지막한 언덕을 두어 개 넘어, 다리를 세 개 지나면 저 반대편으로는 후작의 영지인 사일라그가 있다. 다만 그녀가 가져온 지도는 그렇게 큰 면적을 한 면에 담을 수 있을 정도로는 크지 않아 사일라그의 이름은 사일- 에서 썽둥 잘려나갔다. 하지만 테이블에 모인 사람들은 그리 신경을 쓰는 눈치가 아니다. 어디가 어디인지만 알아볼 수만 있으면 족하다. 거기다 지금 그들이 주목할 곳은 사일라그가 아닌, 그곳으로 이르는 길목이니까.
버닛사 대로.
『여기는 치안 상태가 괜찮아요. 최근까지 도적이 나타났다는 이야긴 듣지 못했어요.』 당연하다. 일직선의 모양을 갖춘 버닛사 대로는 그 별명이「민둥 대머리」이다. 쉽게 말해 길게 뻗어나간 길 가장자리로 몸을 숨길만한 바위라던가, 큰 나무 숲이라던가, 깊은 동굴이라던가 하는 것들이 일절 없다. 강도짓을 하려면 어딘가로 매복하고 있다가 근처로 굴러들어온 먹잇감을 공격해야 하는데 200미터 떨어진 저만치에서도 사람 머리가 뚜렷하게 잘 보여서야 원... 날씨가 화창하면 가시거리는 그 곱절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칼 들고 어험 헛기침을 하면 그걸로 장사 끝. 알아서 죄다 도망을 쳐버린다. 산적떼 입장에선 주머니 불리기엔 최악의 장소인 셈이다.
그녀는 다시금 손가락을 들어 대로에서 약간 벗어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샛길인 이곳 덤블 길은 길이 외진데다 주변이 모두 숲이라서 매복이 가능하지만...』
- 곰이 산다.
고로 패스. 살인 곰 제이슨 앞에선 산적도 그 위상을 잃는다.
리나는 귀찮게 흘러내린 옆머리를 정리하며 지도의 한 부분을 다시 지적했다. 『이쪽 위킬스로 내려가는 길은 좁아서 마차가 지나가긴 힘들죠.』 그런 연유로 마차를 즐겨 애용하는 부자들은 당연히 그 길을 기피한다. 돈줄이 기피하니 산적들도 기피한다. 위킬스로 내려가는 길은 보따리가 가벼운 농민들이나 나무꾼들, 더러는 사냥꾼들의 한가로운 산책로나 마찬가지다. 그녀는 두고 볼 것도 없다며 시선을 돌렸다. 『문제는 바로 이곳. 물레방앗간 위쪽으로 이어지는 흙외담 길입니다.』 손가락이 강조의 의미를 담아 둥글게 원을 그렸다. 『3년 전까지만 해도 산적들이 득시글거렸던 장소이죠.』 그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카타트 산맥에까지 이른다. 카타트 산맥이 어떤 곳이더냐. 모험가들의 천국, 검술 수련의 백미, 아울러 저승 사자들의 대기소다. 듣기로는 살벌한 날짐승들의 천국이랜다. 그래서 슬레진의 초대 국왕은 카타트 산맥에서 사람을 잡아먹으러 내려올 야생 동물들을 차단하고자 길고도 지루한 토담을 쌓아 국민을 보호하려 했다. 높이는 약 1미터, 길이는 측량 불가. 오늘날에 이르러 간혹 무너진 곳이 없잖아 있지만 30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문제는 토담 저 건녀편으로 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숨으면 감쪽같이 안 보인다는 것. 거기다 높이가 겨우 1미터이니 날쌘돌이들은 한 걸음에 뛰어 넘는다. 그 결과 여차하면 나타나는게 도둑놈들, 내지는 엄마 찌찌를 밝히는 치한, 더러는 강도가 되어 버렸다. 산적들은 밥그릇의 은총을 베푼 격이 되어버린 슬레진 초대 국왕에게 기쁜 마음으로 헌화했다.
『우린 그걸 진작에 헐어버렸지요, 로머디스? 그게 한 4년 전이었던가...』 『물론입니다, 후작님.』 골머리를 썩힌 일부 영주들은 문제의 토담을 곡괭이로 헐어버렸다. 그러나 그놈의 토담이라는 것이 유서 깊은 문화유적지 - 그것도 자신들의 초대 국왕이 만든 - 이고 보니 그 짓도 쉽지만은 않다. 왕실에 밉보여서 좋을 건 없다. 『음? 황태자는 내가 그걸 부셨다고 했을 때도 아무 말 안 하던데.』 『당연하죠!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닌 후작님이니까요.』 고개를 갸우뚱하는 주인을 뒤로 하고 로머디스는 땀에 젖은 수건을 비틀어 짰다.
『그래서 말인데요.』 여기서 리나 인버스가 의미하는 건 다음과 같다. 산적 토벌을 하러 나왔다면 구체적인 정보가 있을 거 아닌가. 토담길 최후 토벌의 기억은 정확히 1년 8개월 전이다. 바퀴벌레의 완벽 박멸이 사실상 불가능하듯 토벌대가 도적들을 쓸어버려도 잔당은 매번 남는다. 외눈박이 스미스 일당이 궤멸되면 다음은 다리 털은 면도기로 밀자 형제들이 주름을 잡는 식이다. 이번엔 어떤 놈들일까. 하여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로머디스를 응시했다.
그런데 어랍쇼. 꽃사슴이 뛰어갑니다 하며 로머디스가 고개를 획- 돌렸다. 리나는 다소 어리둥절해 하며 이번엔 죠르프를 바라봤다. 사내는 구두에 뭐가 묻었나보다 식으로 땅만 쳐다보았다. 이봐요들?
Posted by 미야
2008/03/20 16:39
2008/03/20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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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벌에 쏘였다며 로머디스가 펄쩍 뛰었다. 「무, 무, 무슨? 어쩌라고요?」 「말하세요.」 「뭘요.」 「아무거나 좋으니까 어서! 구정물에서 녹색 아메바가 튀어나왔다는 식의 우거지상은 치우도록 하세요. 옆에 있는 내가 다 불편합니다. 어디서 당나귀가 장송곡을 켜고 있답니까?」
이게 다 누구 덕분인데! 그래도 지적당하니 얼른 얼굴색을 바꾼다. 식탁은 밝고 건강해야 한다. 헛기침하곤 하늘에서 천사의 깃털이 내려온다며 팔을 움직였다. 평소 시인이 되었더라면 하는 로망을 품고 있는 남자다. 밤새 불을 밝히고 벌개진 눈으로 (연애) 소설을 읽는 남자답게 혓바닥이 매끄러웠다. 『이것은 기적과도 같군요. 영주님께서 실력이 보통이 아닌 좋은 요리장을 데리고 있으시니 이 몸은 견디기 어렵게 부럽습니다. 음음, 이 오리 구이는 환상이군요. 들판의 너그러운 향기가 느껴집니다. 거기다 이 부드러운 육즙은 봄철의 새싹을 연상케 하는군요. 바람을 타는 엘프가 이 음식을 혀로 맛본다면 기쁨의 시를 한 소절 읊을 것입니다.』 어이없게 장황하긴 해도 칭찬이다. 남작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부족한 요리를 훌륭하다 하시니 주방장이 기뻐할 것입니다.』 『저런, 주방장만 기뻐하면 안되지요. 주방이라 함은 애시당초 아녀자의 영역일지니, 이런 식사를 저희들에게 마련해주신 숙녀분들께도 당연히 인사를 올려야겠지요.』
그런데 여보슈. 다른 집에서야 그런 미사어구가 들어먹히겠지. 하지만 뭐 하나 깜빡했수다. 인버스 가문엔 마나님 자리가 공석이라니까. 젊어서 상처한 남작이 대놓고 슬퍼하는 거 안 보여? 안주인을 칭찬하는 당신의 노력은 지금으로선 되려 긁어 부스럼이라구. 죽은 마누라를 생각나게 하는 네 말에 분위기가 칙칙해졌잖아. 죠르프가 매서운 표정으로 친우의 발을 꽉 밟았다. 『크아악! 아, 아니! 그, 그러니까!』 다행히 인버스 남작은 상인의 재치를 발휘, 상대방의 실수를 너그러히 용서하며 구렁이 담 넘어갔다. 『딸 아이를 칭찬하시니 그 아이도 기뻐할 것입니다.』 그렇지! 이 집엔 마님 대신 여식이 있었지! 살았어, 나는 살았어! 로머디스는 죽다가 살아났다며 좋아했다. 아울러 바로 그 순간, 후작도 덩달아 좋아 죽는다 춤을 추고 있었다. 화제가 자연스럽게 남작의 자녀들로 넘어갔군요. 잘 했습니다, 로머디스.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게 보인다. 후작은 급히 포도주 한 모금을 그 입술에 머금었다. 『시장한 뱃통들을 향해 이다지도 훌륭한 구제를 행하셨으니 당연히 칭송받아야지요. 그래서 말입니다, 인버스 남작. 우리를 살려내신 숙녀분을 소개해주지 않으렵니까. 기왕이면 명철하다는 소문의 아드님과 같이 말입니다.』 이 말에 남작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아들? 나에게 아들이 어디가 있어. 그러길 한 3초, 남작은 내 귀가 요즘 영 신통치가 않아 하고 스스로 납득해버렸다. 바닷물이 들어간 것도 아닌데 귀를 탁탁 치는 걸 봐라. 『영광입니다. 내일 오전 무렵에 각하의 일행이 모두 떠나실 때 배웅하며 기쁘게 인사드릴 터이니 두 아이 모두 기대에 가득차 즐거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것입니다.』
이것 봐라? 하고 후작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내일 아침 우리들은 반드시 여기서 떠나야 한다는 걸 돌려서 강조하고 있군. 거기다 그「기쁘다」는게 우리가 떠나서 기쁘다는 거야, 아님 나랑 아이들이 인사할 수 있어 기쁘다는 거야. 당연히 전자겠지? 누가 물으면 후자라고 대답하겠지만. 내심 감탄해 마지 않았다. 역시 상인이라 그런가, 아슬아슬한 공중곡예를 잘도 타고 있다. 거기다 이쪽에서 그 말의 뉘앙스를 곱씹어 볼 짬을 주지 않기 위해 재빨리 화제를 바꾸기까지 하고 있다.
『아! 그러고보니 사냥이라 하시었는데 그래, 무얼 좀 잡으셨습니까.』 레죠 그레이워즈 후작은 내프킨으로 손가락의 얼룩을 닦아내며 다시 웃었다. 허풍은 태풍과 달라 멀쩡하던 남의 집 지붕을 무너뜨리지 않음이니 남발한다고 하느님이 무어라 하진 않으실 터이다. 『그럼요. 좀 잡았지요. 그렇죠? 로머디스, 죠르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남자가 사이좋게 얼어붙었다. 입안에 든 고기가 수직낙하 해버렸다. 그 화살이 왜 우리에게 날아오는건데? 거기다 후작은 괘씸하게도 확인사살까지 감행한다. 『제 부하들의 검술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요. 유능한 인재들입니다. 사냥 또한 당연히 최고입니다. 1년 전에는 사람을 열 다섯이나 잡아먹은 살인 늑대까지 잡았는걸요.』
로머디스는 작정하고 머리털이라도 뽑고 싶었다. 그리고 눈을 반짝거리며 극적인 모험담을 기대하는 남작에게 한 잔의 물을 권하고 싶어졌다. 사냥이 어땠느냐고 묻지 마. 죽어라 말 달린 기억밖에 없다. 참새라도 떨어뜨렸어야 뭐라고 말씀드릴 거 아뇨. 이거 돌겠네. 떨떠름한 표정으로 로머디스와 죠르프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게... 좀 잡았습니다. 그러니까... 에. 이번에도 늑대였죠.』 『요즘 날씨가 보통입니까. 이런 계절엔 그 흔한 토끼도 땅속으로 숨어버리지요.』 그리곤 엑- 했다. 이런! 박자가 안 맞았다. 누구는 잡았다고 하고, 누구는 허탕쳤다고 했다. 죠르프와 로머디스는 눈에 띄게 허둥대기 시작했다. 『마, 맞습니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늑대도 더위를 먹었는지 영 안 보이더라고요. 하하하.』 『물론 잡았죠. 그놈의 토끼들이 하나같이 땅속으로 숨어버리니까 되려 쫓지 않아 그게 더 좋더라고요. 무슨 감자더미처럼 구멍에서 쏙쏙...』 말을 마치자마자 재차 엑- 했다. 또 박자가 안 맞았다! 두 사람은 식은땀으로 죽을 끓여대며 발버둥쳤다. 『어허허허! 그래도 잡았습죠, 늑대.』 『역시 토끼들은 도망을 잘 치니까 그놈의 소득이...』 이쯤되면 엑- 소리도 안 나온다. 엇박자의 귀신 들렸다.
잠자코 경청하던 남작의 눈자위가 의심을 가득 담아 가늘어졌다. 누구는 남쪽으로 바다가 있다고 하고, 누구는 북쪽으로 있다고 한다. 이러면 두 사람이 가진 지도 모두가 십중팔구 가짜다. 정작 바다는 엉뚱한 동쪽으로 있기 쉽다. 가쉽성 신문 기사로 이런 제목이 올라간다. 집중 분석, 과연 사냥에 나서기는 한 건가. 독점 취재, 잡았다는 건가, 못 잡았다는 건가. 합계잔액시산표의 차대변 숫자가 안 맞았을 때처럼 남작이 손톱으로 테이블을 톡톡 건드렸다.
『그러니까 그게 말입니다.』 이제 사냥 설은 아무도 안 믿어주고 있다. 새로운 거짓말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음류시인으로의 전직을 이참에 심각하게 고려하며 멋진 이야기를 하나 꾸며보자. 로머디스는 지은 죄를 자복하는 죄인인양 읍소하며 고꾸라졌다. 『이쯤해서 진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군요, 남작님. 짐작하셨겠지만 사실 저희들은 부근으로 사냥을 하러 나온 것이 아닙니다. 실은...』 『실은?』 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은밀하게 도적떼들을 소탕하러 나온 겁니다.』 『하아?』 『도적들이 눈치를 채고 미리 도망가는 일 없도록 하기 위해 사냥이라 철저히 위장을 하였지요. 옷도 평상복으로 준비하고요. 늑대 잡으러 간다며 소문도 퍼뜨렸습니다. 아시겠지만 요즘 도둑들이 오죽 극성이어야 말이죠. 거기다 머리도 좋습니다. 듣자하니 아틀라스의 새로운 영주 하르시폼 경은 숨박꼭질 놀이라도 하는 듯한 도적놈들에게 되려 놀림을 당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쪽으로 출동하니 저쪽으로 달아나고, 저쪽으로 출동하니 이쪽으로 도주하고... 하여!』 주먹으로 테이블을 쳤다. 아자자자~ 클라이막스다. 『그 망할 도적떼의 뒷통수를 후려치기 위해 몰래 말을 달려 이곳까지 당도한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하여 저희들은 표면상 계속하여 사냥 중인 거지요. 비록 수중에 그 흔한 토끼 한 마리 없을지언정, 곰 발바닥과 혈투 한 번 못해봤을지언정! 꼼짝마라, 못된 도적놈들! 아아, 슬레진 제국 만세. 우리의 필립 오넬 황태자께 영원무궁토록 영광 있으라.』 왜 거기서 만세 삼창이 나오는 건지 묻지 마라. 로머디스는 로스트 치킨이 무슨 도적놈 머리통이라도 되는양 좌우로 비틀어 꺾었다.
『그런 사연이!』 남작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도적이란다, 도적! 남의 돈을 빼앗는 패륜아들! 강도놈! 충격을 받아 손가락이 하애지도록 내프킨을 움켜잡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작은 상인 출신이다. 구름 위에서만 사는 일반 귀족들과는 달리 지금과 같은 도적떼 이야기는 피부에 직접 와닿았다. 거기다 제피리아가 자급자족 시스템이 아닌 외지와의 상업으로 살림을 꾸려가는 곳이라면? 실제로 제피리아는 특산품인 포도주를 팔아 내일의 일용할 양식을 구입하고 있다. 외지인과의 거래는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으며, 때로는 거대 외국 상단이 방문하기도 한다. 이를 다르게 말해보자. 이곳에선 치안 안정이 경제의 밑거름이다. 돈 싸들고 물건을 사러 왔는데 도둑에게 죄다 털렸네~ 해서는 장사가 안 된다. 품질 좋은 포도주는 두 번째다. 장사의 기본은 첫째도 사회적 안정, 둘째도 사회적 안정이다. 강도가 창궐하는 곳으로 가난도 창궐한다.
『이, 이럴 때가 아냐. 큰 아이를 어서 불러다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도적놈들은 남쪽으로 도망간 듯 하더이다. 코빼기도 못봤지 뭡니까.』 『다, 다, 당장 토벌대를 세우지 않으면!!』 『놈들이 줄행랑을 칠 법도 하죠. 그도 그럴 것이 이분이 누구십니까. 임금님께서도 진저리를 치는... 아, 이건 좋은 표현이 아니지. 아무튼 그 유명한 후작 나으리가 아니십니...』 『거기 누구 없느냐! 당장 가서 리나를 불러와라~!!』 『저기요? 제 말을 들어보셔요. 도적놈들은 도망갔다니까요.』 라고 해도 남작은 이미 아드레날린 과다 분비 상태여서 호흡이 어려웠다.
이 마당에 훌륭한 뒷북 하나. 『맙소사, 남작! 그대는 아들의 이름을 리나라고 지었단 말입니까?! 그 많고 많은 이름 중에 하필 리나?! 폴이나 제임스, 내지는 레이몬드도 아닌! 리나?!』 돌아다보니 누구처럼 남의 이야길 한쪽 귓구멍으로 흘린 레죠 그레이워즈 후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Posted by 미야
2008/03/20 10:29
2008/03/20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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