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한 사내다. 외모도 출중하겠다, 실력도 좋겠다, 마음씨 참하겠다, 왕실에서 진작에 눈독을 들여 기사단에 들어와 일해볼 생각 없느냐 넌지시 스카웃 제시도 한 모양이다.「그러겠습니다」라는 한 마디면 팔자가 확 달라질 판이었다. 그러나 가우리란 자는 이미 정해진 자리가 있다며 그 좋은 제안을 극구 사절했다. 제가 원하는 건요, 아저씨. 끼마다 배부르게 먹고, 배꼽 친구가 손닿는 곳에 있고, 심심할 적마다 마실 수 있는 몇 통의 사과술만 있으면 되어요. 졸지에 아.저.씨.가 되어버린 왕실 대리인은 당혹감에 멀쩡한 콧수염만 꼬았다.
『호오, 그 정해진 자리라는 곳이 제피리아였나?』 『제피리아였네. 남작이 매 식사마다 배불리 먹게 해주겠다고 약조한 모양이지, 뭐.』 지난 저녁 성찬을 떠올리며 무심코 군침을 삼키고 보는 죠르프였다. 『그리고 배꼽 친구랑 같이 으라차차?』 『듣기로는.』 『으음. 신분상승의 기회조차 무시할만큼 소중하다는 배꼽 친구들이라는 것이... 저치들이야?』 뒤쪽을 향해 가만히 턱짓했다.
가우리와 같이 따라나선 두 기사의 이름은 정글스와 부르무이다. 연령대는 얼핏 보기엔 가우리보다는 약간 위로 보인다. 하지만 신상명세에 대해 자세히 아는 바가 없으니 정말로 어떠한가에 대해선 판단이 불가능하다. 혹시 또 아는가. 겉으로만 늙어보이는 것일 수도. 아니면 구렁이와 사촌이라 100살이 넘었을 수도 있다. 웨이브진 천연파마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정글스는 신경질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그냥 봐선 화가 단단히 난 사람처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성격 탓이 아니라 단순히 엉덩이가 아파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세히 보니 말을 탄 자세가 대단히 어설프다. 그리고 누가 무어라 질문하면 재빨리 사람 좋은 표정을 짓고 친절하게 말대꾸를 해주는데 돌아서면 마누라와 대판 싸우고 온 상태로 원상복구. 찡그린 눈썹을 풀면 썩 괜찮은 사람으로 보인다. 그 옆으로 껌처럼 딱 붙어가는 부르무는 매몰차다는 느낌이다. 진한 초컬릿 빛깔의 망토로 몸을 칭칭 감싸고 있는데다가 후드 아래로 드러난 차가운 얼굴 덕분에 근접이 힘들다. 덕분에 지금껏 부르무에게 말을 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부르무 본인도 이제껏 입에 담은 말이라는 건「어이, 거기 나뭇가지 조심」이 전부다. 그게 아니었다면 혹시 벙어리인가 의심했을 것이다. 이런 타입은 곤란하다 - 죠르프는 은밀히 걱정했다. 신중하고 무거운 입... 백주대낮에 대로를 질주하는 기사라기 보다는 영주로부터 내려진 은밀한 명령을 수행하는 첩자라는 느낌이 있다. 왜 있잖는가. 각도 깊은 지붕을 맨발로 달려가고, 던지는 나이프마다 백발백중에다가, 달 없는 야밤에 강물 속으로 잠수해서 사라지는, 그런 사나이.
『신경쓰이나.』 『물론일세.』 당연한 거 아니냐며 죠르프는 배꼽 친우를 향해 눈을 흘겼다. 『야밤에 표창이 슝슝 날아다니는 건 질색이란 말일세.』 하지만 정작 죠르프의 걱정스런 눈길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자! 부르무에서부터 시선을 약간만 돌려보자. 오른쪽에서 약간만 더. 그러면 보일 것이다. 붉은 머리카락의 소년 - 아니, 소녀가 말고삐를 죽자 살자 쥐고 있는게 말이다.
입으로는 괜찮다고 해도 실제로는 많이 지쳤다. 근성 하나로 기절하려는 걸 억지로 참고 있다는 걸 전투의 프로는 한 눈에 알아차렸다. 경련을 일으키는 팔뚝, 힘줄이 돋아난 이마, 핏기 가신 뺨은「당장 죽을 거 같어. 살려줘~!」를 외치고 있었다.
로머디스는 긍정했다. 『문제군.』 『문제지.』 다만 여기서의 문제는... 죽을 똥을 싸는 그녀가 아니다. 옆에서 조금만 더~! 응원의 구호를 외치는 금발의 청년 기사가 바로 문제다.
아가씨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흡사 동생에게 승마를 가르치는 착한 형님 같다. 움푹 파인 도랑이 나타나면 조심하라고 미리 경고를 해준다. 그리고 안전하게 잘 뛰어넘는지 일일이 확인한다. 때때로 마실 물도 권한다. 달리는 속도가 늦춰질 적엔 시덥잖은 농담을 건네며 기운 내라고 꼭 어깨를 친다. 그럴 적마다... 레죠 그레이워즈 후작의 눈이 야광충처럼 번들거린다는 것이 공포스럽다.
지가 뭐라고 눈에 힘주는 건데?! 주인된 자의 감정 상태가「구질구질함」정도가 아니라「거지발싸개 같음」이라는 걸 깨닫자 하늘이 노랗게 변했다. 이거, 무지 불안하다. 죠르프와 로머디스는 서로 눈짓했다. 보름 전쯤인가, 스토커처럼 따라붙던 엘리스 양이 집안 거실에다 자기 초상화를 무단으로 붙여놓고 도망갔을 때보다 분위기가 더 살벌하다. 그림을 두짝으로 분질렀을 적엔 그런가보다 넘어가기라도 하지. 행여라도 사람을 무릎팍에 올려놓곤 둘로 분지를까봐 걱정이 태산이다. 뭣 땜시? 기사가 아가씨를 섬기는게 잘못되기라도 했다는 거야, 뭐야. 마침 가브리에프가 리나를 향해 물주머니를 내밀었다. 자기가 한모금 먼저 꼴깍 먹고 아가씨를 향해 물주머니를 건냈다. 아닌게 아니라 목이 말랐던 모양이다. 그녀는 반색하며 주머니를 받아 뚜껑을 열었고, 이윽고 턱을 번쩍 들어 마음껏 원샷이라는 걸...
『기, 기다렷! 기다리십시오!』 그러니까 거기서 딴지를 거는 당신이 비정상이라니까요. 『누가 입을 대지 않은 새 물 주머니를 가지고 오십시오.』 그런게 있을 리 없잖아요.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가지고 오면 되지요!』 우길 걸 우겨요. 로머디스는 폭삭 늙어버렸다. 우리들 중에 어느 누가 번개처럼 무두질을 해서 즉석으로 가죽 물 주머니를 만들 수 있다는 겁니까요. 네? 차라리 호숫가로 내려가서 손바닥으로 물 바가지를 만들어 모두의 목을 축일 물을 길어오라고 하시지 그러슈.
죠르프가 휘익 휘파람을 불어 신호했다. 어쨌거나 핑계가 좋다. 쉬어가자.
가브리에프가 자연스럽게 리나의 말고삐를 잡았다. 달리던 말이 걸음을 멈췄다. 아, 지쳤다. 소녀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말 안장에서 뛰어내렸다. 다리가 저려서 그런지 엉거주춤한 자세다. 시험삼아 몇 걸음 떼어보지만 게다리 걸음으로 겨우 세 걸음 걷고는 좌절 삼태기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바깥으로 굽혀진 무릎이 원 위치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데 똑바로 걷는다는 건 애시당초 무리다. 벌레에게 고추를 물린 어린애처럼 두 다리를 옆으로 벌리고 엉거주춤 움직이는 것밖엔 할 수 없다.
그런 리나를 보고 기사들 중 몇이 웃음을 터뜨렸다. 자기들도 그런 꼬락서니로밖엔 걸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워낙에 그 모습이 웃기니까 웃고 봤다. 이것들이. 웃었어? 말에서 내려오지 않은 채 후작이 으르렁댔다. 로머디스가 눈알을 굴리며 어이 없어 했다. 그거 참. 답지 않은 레이디 보호 정신입니다요. 언제는 자기가 제일 먼저 웃었을 거면서.
이런 정신 사나운 분위기 속에서 리나 인버스가 서글픈 표정으로 뒤를 돌아다 보았다. 『웃기니까 웃으라고 해요. 나도 웃긴데 뭐.』 『하나도 웃기지 않습니다, 리나양. 무엇이 웃기단 말입니까. 오히려 지금까지 보여준 승마 솜씨에 관하여 마음껏 찬사를 보내고 싶은...』 『위로의 말씀은 그만하시면 됩니다, 후작님. 내가 지금 어떤 꼬락서니인지는 제가 더 잘 알고 있거든요. 으아, 정말 한심하네. 운동 부족이었나봐. 엉덩이부터 안 아픈 곳이 없네.』
여자가 대놓고「엉덩이」운운해도 괜찮은 것인지는 나중으로 미루자. 간단한 맨손 체조를 시작하면서 그녀가 뒤로 엉덩이를 쑥 뺐다. 팔을 앞으로 길게 내밀고 옆구리 구부리기, 허리 뒤로 당기기... 읏샤읏샤 기합을 넣어가며 움직였다. 마무리로는 제자리에서 깡총깡총 뛰기까지. 더 놀라운 건 제피리아에서 따라온 일행 모두가 그런 그녀의 동작을 순서에 맞춰 따라했다는 거다. 제피리아에선 모두가 이런 체조를 하고 있나? 다른 건 몰라도 음침한 사내 부르무가 깡총뛰기를 따라하는 광경은 엽기 그 자체였다. 『결린 몸을 풀어주는 체조입니다. 관절이나 근육에 좋아요.』 『정말인가요? 아가씨.』 『그렇고 말고요. 그레이워즈 후작님도 긍정하실 걸요. 그렇죠? 몸이 편해지죠?』 이런. 저편에서 후작이 체면 불구하고 깡총깡총 뛰고 있었다. 그리고 신호에 맞춰 모두가 뒤로 엉덩이를 뒤로 쭈욱...
어쨌거나 햇님의 기울어진 각도를 봐선 사람에게도 슬슬 영양보충이 필요할 때다. 말들을 쉬게하고 각자 알아서 자리를 펼쳤다. 슬프게도 솥을 걸어놓고 본격적으로 요리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육포와 말린 빵, 약간의 건포도와 과일로 주린 배를 달래야 한다. 다른 건 몰라도 배가 고프다 그거 하나는 계속 불평하던 리나 인버스는 맹물에 풍덩 담가놓은 빵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눈치다. 물에 불리기 전엔 이빨도 안 박히는 빵이었다. 킁킁 냄새를 맡아봐도 버터 냄새는커녕 밀가루라는 느낌도 안 난다. 흡사 돌덩이 같다. 『이, 이걸 먹으라고...』 하지만 허허벌판에서 제대로 된 식사가 나오길 기대하는 건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오길 기다리는 것과 비슷하다. 익히지 않은 살코기나 수분이 많은 부드러운 음식은 풀밭으로부터 올라오는 뜨거운 복사열에 금방 상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말린 빵이야말로 야외 생활에서 유일하게 맛볼 수 있는 문명의 만찬인 셈이다.
『복통으로 죽을 것인가, 아님 맛이 없어 죽을 것인가의 선택인 거지.』 『그럼 기왕 죽는 거, 복통으로 죽을래.』 『오냐, 네 소원대로 그럼 내일 아침은 썩은 스프로 하지.』 뒤집어질 일 또 하나. 제피리아는 아주 이상한 곳임이 분명하다. 기사가 영주의 딸에게 반말을 찍찍 한다. 그리고 그 영주의 딸도 기사에게 당연하다는 듯이 반말을 막 한다. 정글스는 그게 뭐 대수냐며 물을 마셨다. 리나 인버스 역시 뭐가 잘못되었느냐며 물을 마셨다. 그들 뒤에서 가우리 가브리에프는 맹렬하게 빵을 뜯어먹었다.
Posted by 미야
2008/03/29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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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후작님 장난에 놀아나면 안된다니까요. 뭐가 당밀이고 뭐가 파리입니까. 당황해하는 죠르프의 속사정도 모른 채 리나는 턱짓으로 마차를 가리켰다. 『이 정도면 황금을 싣고 간다는 기분이 들고도 남겠지요? 사실감을 내기 위해 궤짝에는 돌을 넣어두었습니다. 마차가 바람둥이 엉덩이처럼 가볍게 보여선 도적들이 의심할테니까요. 돌의 무게는 약 50kg으로 잡았습니다. 이만하면 군침을 흘리고도 남을 겁니다.』 설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차에서 하얀 드레스 차림새의 어린 소녀가 폴짝 뛰어내렸다. 뺨이 복숭아 빛깔이고, 머리카락은 땋는게 불가능할 정도로 짧은 아이였다. 『언니! 준비 완료예요~ 여기는 오케이예요~!』 『오, 수고했다, 아멜리아!』 동생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준 뒤, 리나는 죠르프와 로머디스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저쪽의 아이는 두 살 터울의 동생으로 이름은 아멜리아라고 합니다.』 사내들은 밧줄에 목이 졸린 듯한 표정으로 자매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지독한! 서, 설마, 당신은 동생까지 미끼로 사용할 작정인 겁니까아~!!
『그, 저, 에흠... 동생분께서 마차를 타고 가는 건 아니겠지요?!』 『아닙니다.』 - 다행이군. 『동생은 여기에 남아 소문을 한층 더 퍼뜨리는 역할을 맡을 겁니다. 저는 말을 타고 마차 뒤를 따라가고요.』 - 다행이라는 말 취소.
죠르프는 볼 안쪽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승마라는게 아무래도 숙녀들에게 권장되는 스포츠가 아니다보니 마음이 불안할 수밖에 없다. 전속력으로 달리다 실수로 말에서 떨어지는 날엔 척추가 부러진다. 재수가 없으면 그 즉시 황천행이다. 그렇다고 어린애가 조랑말 몰 듯 굼벵이 속도로 기어가선 한 달이 지나도록 길바닥 노숙 신세인 건 불을 보듯 뻔하고... 모세 따라 광야 생활 30년은 사절이다. 일단 소매춤 잡고 늘어지자. 『아가씨가 뭐 하러 험한 곳까지 따라오려 하십니까. 이런 일은 그냥 남자들에게 맡기시지요.』 『음?! 제가 못미더운 건가요.』 『그게 아닙니다, 숙녀님. 오해하진 마십시오. 그러니까 제가 드리고픈 말은 아녀자의 일과 남정네의 하는 일은 서로 다르다는 겁니다. 저희들이 부엌에 들어가 감히 스튜를 만들거나 빵을 굽겠다고 설치지는 않지 않습니까. 아기를 뱃속에 잉태하겠다고 벼르는 남자도 없지요. 비슷한 겁니다. 말 달려 도둑을 잡는 일은 그냥 우리들 남자에게 맡겨주시면...』
반대 의견은 엉뚱한 곳에서 등장했다. 『왜요. 저는 그녀가 이 작전에 참여하는 거 찬성인데.』 『후작님!』 정원쪽에서부터 홀연히 나타난 후작은 부하들을 향해 따가운 눈총을 던졌다. 더하여 비난의 손가락질도. 『그대들은 여성을 폄하하려는 것입니까.』 『네?』 『작위를 여성도 승계하는 세상입니다. 그런 성차별적 발언은 시대착오적입니다. 필요하면 남정네들도 부엌에 들어가 밀가루를 반죽하고 감자 껍질을 벗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어 리나와 어깨를 나란히 한 후작은 언제 그랬느냐며 아까와는 다르게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리나양. 나름대로의 각오도 있으신 듯 하오만, 말은 타실 줄 아는 거죠?』 『후작님 만큼은 탑니다.』 『그렇게 장담하고 말에서 보란 듯이 떨어지는 건 아니겠지요.』 『후작님이나 실수하여 떨어지지 마세요. 보아하니 펜은 잘 잡아도 말 고삐를 잡으신 일이 거의 없으신 듯 합니다만.』 손바닥에 거친 면이 없으니 일단 의심하고 본다. 아닌게 아니라 잘 가꿔진 여자들 손처럼 피부가 보드라웠다. 방금 전에 우윳병에서 건져낸 것 같아 심히 부럽다. 무슨 비법이라도 있나. 굳은 살을 찾겠다는 원래의 목적은 잊고 미용 크림은 어떤 종류를 사용하는지가 궁금해졌다.
후작은 어린 여자에게 덥썩 손을 잡혔다는 점에 깜짝 놀란 듯했다. 하지만 반감을 드러내며 손을 빼기는커녕 눈웃음부터 쳤다.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지금의 돌발 상황을 오히려 즐기는 것 같기도 하다. 『저런- 그쪽 손도 만만치 않다는 걸 아십니까. 작고 따스하군요. 매일 꽃만 만지는 건가요.』 『꽃은 안 만져요. 그런 건 취미가 아니라서.』 『그럼 무엇이 취미이신지?』 『장부 정리. 숫자에 자 대고 밑줄 긋기.』 『남다르십니다.』 응? 칭찬은 둘째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기분에 리나는 가만히 이마를 찌푸렸다. 그러길 3초? 어라, 외간 남자와 이렇게 친한 척 손을 잡아도 되는 건가. 놀라서 손을 확 놓았다. 『왜요? 그냥 잡고 있어도 괜찮은데.』 『시, 실례했습니다!』 『실례는 무슨. 언제든지 잡아도 좋으니까. 자아~ 아저씨랑 같이 손?』 리나는 정색하고 한 걸음 떨어졌다. 그리곤 급히 목례했다. 『그럼, 후작님! 준비가 끝나는대로 다시 뵙겠습니다.』 『아니, 손...』 『출발하기 전에 뵙죠.』 후작은 적잖게 실망한 눈치였다.
여자들이 들판으로 나올 적에 하는 말이라는 건「벌레가 많아 끔찍해, 햇빛이 너무 뜨거워, 바람이 불어 머리 스타일이 엉망이 되었어, 말똥은 질색이야, 땀에 젖어 기분이 좋지 않아」등등일 거라 생각한다. 때문에 남자들은 여간한 일이 아닌 이상 숙녀를 대동하고 여행하는 일을 반가워하지 않는다. 아무리 사랑해도 화살처럼 내리꽂는 불평불만을 들어줄만한 심적 여유라는 건 그리 많지 않음이다. 터미네이터에게 반복해서 말해보자.「벌레가 많아 끔찍해, 햇빛이 너무 뜨거워...」장담하는데 자기가 알아서 용광로로 뛰어들 거다. 이때의 대사는「I'll be back」이 아니고「다신 날 찾지 말아요」다.
그런 까닭으로 서른 다섯 명의 기사들은 예정에도 없던 리나 인버스의 동행을 반기지 않았다. 그녀가 남장을 하고 있다고 해도 그랬다. 쥐뿔도 모르는 주제에 귀찮게 굴고 있다 - 라는 것이 그들의 솔직한 생각이었다. 흘끔거리고 살피는 눈초리엔 그리하여 불편한 기색이 하나 가득이었다. 여자면 여자답게 집구석에서 수나 놓을 것이지. 더러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쓰며 혀를 차기도 했다. 그러나 저택을 떠나온지 약 2시간이 경과하자 흘끔대는 시선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놀랍게도 그녀가 지금껏 입에 올린 불평이라는 건「배고파」가 전부였다. 나무에서 진초록색의 메롱벌레가 떨어졌을 때에도 까무라치지 않고 대신 침착하게 손가락으로 그걸 집어 땅바닥에 버렸다. 다시 2시간이 경과하자 얼굴을 찌푸리며 돌아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대신 옆으로 붙어 참견질하는 인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꼬리뼈가 말안장에 닿아 얼얼할 적엔 이렇게 하는게 좋다, 멀미가 날 것 같으면 이렇게 침을 삼켜라 등등의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로부터 다시 1시간이 흐르자「누가 여자고 누가 남자냐」식으로 완전히 섞여버렸다. 말 달리자.
죠르프는 나지막히 휘파람을 불었다. 『달리는 폼이 굉장히 익숙해 보이는군. 자세도 딱 잡혔고. 그렇지 않나? 로머디스. 꼭 기사단에 막내가 들어온 것 같어.』 기사단의 막내! 그래도 여자인데 막내! 로머디스는 대답하기가 심히 민망하여 하아~! 기합을 넣고 말 궁둥이나 때렸다. 알렉산드리아의 등대가 무너진다. 저 바다 건너편에서부터 가치관이 붕괴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말 궁둥이를 한 번 더 때려보자. 이랴. 그런 로머디스에게 죠르프는 한층 더 가깝게 들러붙었다. 『이봐, 이봐. 주름살 펴라고. 이 정도면 한시름 놓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제피리아에서 따라붙은 기사들도 나름대로 아가씨를 잘 호휘하고 있고 말이지. 자네의 눈썹이 작살 맞은 갈매기가 될 까닭이 없어 보이는구먼. 응? 로머디스?』 제피리아에서 리나를 따라나선 기사는 모두 셋. 게중에서 제일 눈에 띄는 금발의 미청년은 이름이 가우리 가브리에프라고 한다. 강아지를 연상시키는 착한 눈매에 여자 뺨치는 예쁘장한 얼굴이다. 겉가죽만 봐선 벌레 한 마리 못 죽일 것 같다. 작년에 있었던 전국 검술대회에서 아깝게 2위를 차지한 남자라곤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실력은 누가 뭐래도 진짜다. 결국 무승부로 판가름난 박빙의 승부에서 동점연하승의 법칙에 따라 2위로 입상, 현 국왕대리인 피리오넬 왕자로부터 기사의 검을 선사 받았다. 단순히 상대방보다 나이가 많아 진 것이다.
『그랬대?』 『그랬네.』 『호오- 1위는 누구였는데?』 『제르가디스 도련님.』 『아이쿠.』
무명의 평민 씨가 굴지의 명문가 도련님을 제치고 우승을 한다는 건 대회 스폰서들의 감정을 긁어놓는 법이다. 슬레진 제국이 신분상 제약에 관해 꽤 너그러운 편이라고 해도 그렇다. 공주는 아름다워야 하며, 기사는 비단으로 옷을 해입어야 한다. 못생긴 공주와 누더기 옷의 기사는 예로부터 반사회적이라며 배격받아왔다. 따라서 이 자는 순전히 신분상의 까닭으로 경기에서 불이익을 받았을 확률이 높다. 그런데도 2위. 그것도 단순히 나이 때문에. 그거 참... 진짜 실력자다 이거지. 로머디스는 슬그머니 뺨을 쓸었다. 그러고보니 생각난다. 우승자의 화관을 받아왔음에도 그들의 얼음 도련님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한 술 더 떠서 도련님은 화관을 내팽개쳤다.
『에잇. 쓸데없는 추측은 그만둬. 어쨌거나 이쪽 나이가 더 어린 건 사실이니까. 작년 우리 도련님은 열 아덟, 저쪽은 스물 다섯이었다고. 그러니까 아주 조작된 승부라고도 할 수 없을 거야. 체격 차이라는 것도 있잖아? 저치는 아무리 봐도 190cm는 넘게 생겼구먼.』
여덟 다음의 숫자가 열이라고 믿는 청년이 제대로 자기 나이를 세었는지를 오늘에 이르러 캐캐미 묻지 말자. 거기다 가우리 가브리에프 본인이 승부에 별 집착을 두지 않았으니 이제 와서 왈가왈부할 까닭이 없다. 가우리는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했으며,「저기요? 돈 많이 주나요? 우리 아가씨가 돈을 무지하게 좋아하세요」라고 말해 모두를 경악시켰다. 그리고는 제법 두둑한 상금을 챙겨 웃는 낯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좋은 사내로고.』 『그렇지? 나 젊었을 적 생각이 나는구먼.』 『듣지 않은 걸로 치겠네.』 로머디스는 차갑게 대꾸했다.
Posted by 미야
2008/03/27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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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분전환용 습작입니다. ※
곧 죽을 사람의 소원 정도는 들어줄 수 있잖아 - 딘은 손을 모으고 합장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한다. 긍정하며 턱을 끄덕였다. 형을 위해서라면 사하라 사막으로 푸른 강이 흐르게 하고 싶을 정도다. 아프리카 코끼리가 두 발로 서서 춤추게 만드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그치만 그놈의 망할《마지막》소원이라는게 지금까지 수십 개가 넘었다는 것, 더하여 그 내용이 일반인들의 상식과는 철저히 담을 쌓았다는 점이 샘으로 하여금 욱하게 만들었다. 입덧하는 아내가 한밤중에 딸기를 찾으면 귀엽기라도 하지. 뜬금없이 달 뒷면에다 거대한 황금 피라미드를 건설하라는 주문엔 기가 막혔다.
『뭐? 누가 어디에 뭘 건설하라고 했다고?』 식어빠진 감자튀김을 우걱우걱 삼키던 딘은「잠깐만!」소리를 지르며 끼어들었다. 『황금 피라미드?』 『지금 그렇게 말 했잖아요, 형님.』 『내가 언제. 너, 귓속에 두꺼운 거즈 같은 거 집어넣고 있냐. 뭘 어떻게 하면 얘기가 그렇게 해석이 되지?』 딘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내가 말한 건《네가 검정색 실크 브래지어 입고 있는 걸 보고 싶어》라는 거였다고.』
그러니까 달 뒷면으로 피라미드를 건설하라고 한 거 맞잖아요. 샘은 노골적으로「이 문딩이 자식!」이라 욕하며 딘을 쏘아보았다. 세상에 어느 형님이 남동생에게 여자 속옷을 입히고 싶어하느냔 말이다. 놀려먹으려고 한 농담치곤 질이 나쁘다. 그것도 아주 나쁘다.
맞장구칠 기운도 없어 테이블에 벌려놓은 패스트푸드로 눈을 돌렸다. 눅눅한 햄버거는 냄새부터 역겨웠으나 어린애처럼 음식투정을 하기엔 현재 형제들의 지갑 사정은 매우 위태로운 상태다.「이런 쓰레기 같은 것밖에 먹이지 못하는 날 용서해」민망해하는 딘의 표정을 읽었기에 의무적으로 한 입 베어물었다. 옛 말에 배가 고프면 바퀴벌레도 날로 먹는다고 했다. 빠삐용과 비교하면 이건 양반이다. 가스렌지 위에서 위생적으로 조리가 된 고기, 그리고 빵이다. 집중하고 다시 이로 씹었다.
『주문할 적에 양파는 빼달라고 할 것이지. 내가 양파 싫어하는 거 잘 알면서.』 『이 형의 마지막 소원이야. 응? 한 번만... 응?』 『뭐야. 아직도 그 이야기야?』 샘은 이마를 찌푸리며 종이컵에 든 콜라를 마셨다. 그리고 엉뚱하게 답했다. 『그만해. 난 딘의 생각처럼 그렇게 많이 화가 나진 않았어.』 『어? 무슨 소리냐.』 고개를 갸웃거리며 모르는 척하긴. 불가항력적으로 입술이 뒤틀렸다. 『형이 부른 쌍둥이 콜걸 말이야. 덕분에 알거지가 되었지만 난 용서했다고.』 정확하게는 100만분의 1 가량만 용서가 되었지 - 그렇게 중얼거리며 씹다 만 햄버거를 꿀꺽 삼켰다.
7대 죄악을 전부 짊어지고 있는 그의 형은 뒤틀린 욕망의 소유자라서 여자 둘을 동시에 데리고 으샤으샤를 할 만큼 정신이 썩었다. 그것도 일란성 쌍둥이 자매랑 한 침대에 누워 - 토기가 올라온다 - 섹스하는게 아무렇지도 않다. 솔직히 말해보랴. 대들보에 거꾸로 매달고 엉덩이를 세게 쳤음 좋겠다. 그리고 존에게 가서 따지고 싶었다. 도대체 아들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예요, 아버지!
피클은 유통기한이 지난 것처럼 보였다. 곁눈질로만 흘깃 보곤 그 즉시 옆으로 치웠다. 『내 눈을 칼로 파버리고 싶었지만 말이야.』 다행히 애플 파이는 그럭저럭 먹을만했다. 『형이 그렇게 하고 싶다는데 내가 어떻게 말릴 수 있겠어.』 포장지를 벗겨 쓰레기통에 휙 던졌다. 『난 더 이상 무어라 할 자격도 없는 놈이야. 그러니까 형은 내 잔소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다 끝났고, 다 됐으니까 관점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려고 날 놀리지 마. 알아 들었어?』
딘은 필요 이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알아 들었어.』 하지만 바로 치고 나왔다. 『그런데 말이지, 새미.「네가 부라자 찬 거 보고 싶어」라는 소원과 그게 무슨 상관이니?』 『......』
이성의 끈이 뚝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그러니까아아~!!』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팡팡 내리치며 발끈했다. 『하이힐 신어봐, 랩댄스 춰봐, 마릴린 먼로 포즈 취해봐, 다리털 밀고 망사 스타킹 신어봐, 그딴 쪽팔리는 소원은 그만 빌라는 거얏! 이 멍청아!』 『너무해, 이 형의 마지막 소원인데... 새미는 냉정하구나.』 『냉정한게 아니라 제정신인 거닷!』 『음... 정말로 안돼?』 『안돼!』
그래봤자 딘의 손에는 이미 실크 브래지어가 쥐어져 있었다. 곧 죽을 사람의 소원 정도는 들어줄 수 있잖아 - 딘은 손을 모으고 합장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한다. 긍정하며 턱을 끄덕였다. 형을 위해서라면 남극 빙산을 모조리 녹여 아이스크림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럼 입어줄 거지? 응?』 『......』
하루라도 빨리 딘의 목숨이 1년밖에 안 남은 이 상황을 어떻게든 바로잡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의미에서) 큰일이다.
Posted by 미야
2008/03/26 14:00
2008/03/2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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