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게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다 - 딘의 마음은 희망으로 가득찼다. 오랜만에 배를 채우고 나자 샘의 안색은 눈에 띄게 좋아져 영양제를 처방받고 분갈이를 마친 화초처럼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날아갈 것 같은데 6월의 햇살은 따스하고 기분 좋았다. 완벽하게 정비된 임팔라의 엔진은 시동을 걸자마자 건강한 소리를 냈다. 라디오 채널에서 흘러나오는 건 블랙 사바스, 거기다 운좋게 일거리다 싶은 것도 건져냈다. 『캘리포니아에 세입자 세 명이 연달아 자살한 아파트가 있대, 샘.』 사람이 죽었다는데 기쁜 듯이 말해 그거 하나는 유감이다. 그러나 본심은 캐스터네츠라도 두드리며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입에다 장미꽃 한 송이를 물고 탱고 박자에 맞춰 허리를 뒤로 꺾을 의향도 있다. 단, 운전 중에 그런 짓을 했다간 대형 사고는 필연인 관계로 거위처럼 목을 앞뒤로 뒤뚱거리는 걸로 타협을 봤다.
세 명의 천사들이 마리화나를 피운다. 세 명의 천사들이 사기 포커를 친다. 완벽한 삼위일체, 야이야이호~♪ 토니 아이오미가 뿜어내는 전자 기타의 현란한 오르내림을 만끽하며 자동차 속도를 올렸다. 『어때, 동생아. 우리가 그 문제의 아파트로 가서 네 번째 세입자가 되는 건?』 조수석에 앉은 샘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딘의 제의에 보일락말락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치명상이라고 여겼던 상처로 분홍색 새 살이 올라온다. 그깟 딱지와 흉터가 다 뭐라냐. 아파트 입주금이 수중에 없다는 문제는 나중이다. 유리창을 열고 신선한 바깥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기다려라, 캘리포니아! 휘파람을 불며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당장 캘리포니아로 가는 거 아니었어?』 그렇게 엉덩이를 들썩거렸으면 최소한 국도를 타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현실은 지극히 엉뚱해서 딘은 피자와 도넛, 콜라와 같은 불건전 음식을 잔뜩 챙겨선 상다리가 휘어지게 진열을 했다. 소화도 참 잘 되는 인간이다. 점심 먹은게 언제라고. 토기가 올라올 정도의 진한 양념 냄새에 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그랬음 좋겠는데 그곳 아파트 관리인이 지금 부재 중이야. 전화를 걸어 언제나 올 수 있느냐고 물어봤더니 빨라도 이틀 뒤에나 가능할 것 같다고 대답하지 뭐니.』 그래봤자 핑계다. 예전 같으면 관리인의 사정 같은 건 개의치 않고 무작정 현관을 따고 들어갔다. 실제로 필라델피아의 한 아파트에서 금발의 여자애가 감쪽같이 사라졌을 적엔 EMF 미터기를 들고 건축물 안전진단과 공무원인양 온 건물을 들쑤셨다. 출발을 미루고 지금처럼 미적거리는 건 단순히 딘이「그렇게 하고 싶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다.
손바닥을 싹싹 비벼가며 아이스크림과 맥주도 꺼내놓았다. 안주로 삼을 짭짤한 맛의 과자도 샀다. 가게에서 몇 개의 DVD를 빌려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봉투 속의 내용물을 하나하나 체크하던 샘은「고질라」타이틀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것도 역대 최악이라 평가받은 1998년도 헐리우드 리메이크다. 저놈이 드디어 미쳤나 - 형을 쳐다보는 시선이 지극히 불손해졌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거라면 그나마 속는 셈치고 들춰보겠지만 영화는 지역 케이블 방송에서 지겹게도 틀어대는 블록버스터 오락물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돈이 썩었다. 『뭐부터 시작할까. 킹콩을 볼까? 아님 헐크부터 볼까.』 『진심이야, 형? 차라리 람보를 보겠어.』 『미안, 새미. 그건 안 빌려왔는데. 미리 귀띔을 해줄 것이지. 이 형이 눈치가 없었다. 언제는 톰 크루즈가 최고라더니 언제부터 네 취향이 실베스타 스텔론으로 바뀌었냐?』 『누가 내 취향이야! 둘 다 싫다는 얘기야!』 기가 막혔던 것도 같다. 어느새 샘은 엉덩이에 뿔난 강아지를 야단치는 엄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DVD는 그렇다 치자. 딘이 사가지고 온 음식의 전부가 불량 식품을 닮아 있었는데다 둘이서 먹어치우기엔 터무니없이 양이 많았다. 핫도그 먹기 대회 최강자인 고바야시 다케루를 개인적으로 초대한 거라면야 또 모른다. 드럼통을 닮은 아이스크림 포장 용기만 봐도 질리려 했다. 4인 가족이 여름 내내 숟가락을 빨아대도 바닥이 안 드러날 정도의 어마어마한 양이다. 어느 정신 나간 시의원이 계곡을 채워 산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관보에 게시했다. 40일 뒤에 엄청난 홍수가 날테니 시 예산으로 방주를 만들어야 한다고도 했다. 세금을 착실히 내는 일반인은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일이다. 죽일 놈의 시의원, 망할 탄핵소추, 얼어죽을 홍수.
『제정신이야?』 『아우움야우?』 타락의 로마는 영원하다. 입에는 도넛, 양손으로는 리모컨과 쿠션을 꿰찬 딘은「뭐가 잘못됐어?」라며 반문했다. 인간의 탈을 쓴 돼지 - 샘은 평균적 위장 크기와 올바른 식습관에 대한 설교를 포기한 채 맥주 뚜껑을 땄다. 상호는 아이다, 고맙게도 샘이 제일 좋아하는 종류다. 딘은 그거 하나는 동생을 위해 배려했다.
『그런데, 형. 아까 말한 신문은 어디에 뒀어? 사람 잡는 아파트 어쩌고 말이야.』 고질라가 미끼로 놓여진 물고기를 우적거리며 먹어치웠다. 그리고 그 고질라를 빼닮은 누군가 씨는 휴지를 들어 기름 투성이로 변한 입가를 허겁지겁 닦아냈다. 『와... 벌써 조사야? 이봐, 샘. 출발은 내일이라고. 좀 느긋해져라.』 『나는 지금도 느긋하거든?』 『참으로 그러십니다.』 모처럼 멍석을 깔았음에도 같이 어울려주지 않는 동생을 향해 눈을 야렸다. 그런다고 주눅들 샘이 아니다. 최신 유행식의, 사람을 깔보려면 이렇게 하라, 마이애미 과학수사대 반장이 범인을 쏘아볼 적의 스타일로 허리에 양손을 얹었다. 턱을 치켜올렸다. 그래, 노력 많이 해서 호레이쇼 케인* 닮았다. 다음부턴 제스로 깁스* 흉내라도 내보시지? 딘은 지겹다는 투로 피자 아래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으이그!』 존은 일기장에 이거다 싶은 정보를 꾸역꾸역 적어놓곤 했다. 신문에서 오려낸 기사를 문구용 풀로 빽빽이 붙여놓기도 했다. 단, 그게 정리와는 담을 쌓은 방식이라 헌팅이라는 가족 사업을 물려받은 아들들은 그걸 해독하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웬디고에 대한 장황한 설명 옆으로 편하고 튼튼한 아웃도어 신발을 파는 가게 전화번호가 적혀져 있는 식이다. 그리고 수십 페이지 뒤로 다시 식인과 금지된 산테리아 종교의식에 관한 내용이 뜬금없이 튀어나왔다. 더하여 웬디고를 묘사한 그림은 원시인의 동굴 벽화 수준이었다. 두 개의 작대기가 머리와 몸뚱아리를 묘사하고 곧장 상황 종료. 그 정신사나움에 딘은 진작부터 진절머리를 냈다.
「아빠를 정말로 사랑하지만 이건 진짜지 아니라고 봐.」
말은 그렇게 했지만 팔자 편하게 남의 흉을 볼 처지가 아니다! 자료인 신문을 피자판 아래로 깔아놨다고라. 샘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기름기를 잘도 흡수한 종이는 반투명한 해초처럼 변해있었고, 서로 철썩 들러붙어 분리가 불가능해 보였다. 여러장이 겹쳐져 인쇄된 글씨는 당연히 읽을 수 없었다. 『딘!』 악에 받쳐 외쳐봤자 그의 형은 헤롱거리는 표정으로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내가 못 살아!』 나는 동생일 뿐인데 어째서 바가지를 긁는 마누라가 된 기분이 들어야 하는 거지 - 울컥하는 마음에 딘의 뒷통수를 찰싹 때렸다. 『왜 이래!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따로 잘 챙겨둔 거란 말이야!』 『그게 피자 상자 밑이야?』 『맙소사, 샘. 그럼 그걸 금고 속에라도 넣어둬야 했다는 거니?』 평화주의자 마하트마 간디 씨는 잠시 눈 감고 계십시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서 당연히 발끈했다. 복수랍시고 샘의 엉덩이를 힘주어 꼬집었다. 『아욱!』 아파서라기보단 당황해서 지른 비명이었다. 아기도 아닌 성인 남자의 엉덩이를 꼬집다니, 손바닥으로 얼얼한 살을 문지르던 샘은 머리 혈관이 끊어진 표정을 지었다. 『지금 했지.』 『했다. 어쩔래.』 『후회할 거야.』 『겍~ 지금 나에게 으름장 놓는 거야? 오, 새미... 분위기 잡아봤자 절대적으로 안 어울려.』 『흥! 어울리는지 안 어울리는지는 두고 보자고.』 두 팔을 걷어부치고 옆으로 털썩 앉았다. 『어쭈?』 리모컨부터 빼앗아 멀직히 집어던졌다. 다리를 들어 작정하고 딘의 허벅지 위에 걸쳤다. 『야! 무거워!』 그러든 말든「덤벼라!」표정을 지은 샘은 압도적인 신장의 차이를 이용해서 교묘하게 괴롭혔다. 이제 딘은 소파에서 일어날 수도 없고, 허리를 굽혀 땅바닥에 떨어진 리모컨을 주을 수도 없었다. 온몸으로 기대어오는 체중은 점점 더 무거워졌고, 샘은 천적을 만난 무당벌레처럼 팔다리를 활짝 벌린 채 벌렁 누웠다.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이 여전히 주먹만한 크기의 작은 새끼라고 생각한 대형견 말라뮤트가 어리광을 부린답시고 앞발을 들고 주인에게 덤벼든 꼬락서니였다. 『치워!』 『숨막혀!』 『화면이 하나도 안 보이잖아!』 『샘!』 나 죽는다 야단에 샘이 장난스럽게 분홍색 혀를 쏙 내밀었다.
여기까지는 큰 문제 없었다. 으스스한 표정을 한 배심원들을 향해 딘 윈체스터는 더듬거리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잘난 척하는 모습이 하도 밉꼴맞아서 마, 말입니다. 옆구리를 간질이려고 했던 겁니다.」 떠민다고 움직일 녀석이 아니었다. 궁리 끝에 손가락이 셔츠 위를 부지런히 달렸고, 샘은 잔뜩 화난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지 말라는 의미에서 팔꿈치가 휘둘러졌다. 하지만 헌터 생활 20년에 그까짓 공격을 피하는 건 어린애 수준의 장난이었다. 딘의 손은 다시 보기 좋은 근육으로 덮힌 샘의 허리를 더듬었고, 가엾게도 동생은 목이 쉬어버릴 지경으로 깔깔거렸다. 『어떠냐! 이렇게! 이렇게!』 『으하하하! 제발!』 거기서 그만뒀어야 했다. 그랬어야 했다. 늘씬한 신체가 막 뭍으로 올라온 물고기처럼 퍼득거리기 시작했다. 딘은 손바닥을 위로 더 찔러 넣었다. 셔츠 안쪽에서 벌어지는 부드러운 학대 행위에 동생은 눈물까지 질질 흘리며 몸을 좌우로 마구 뒤틀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부터 초록색 피부의 괴물 헐크가 갑자기 슈렉으로 정체를 바꿨다. 저만치 떨어진 꽃밭에서 피오나 공주가 환영의 의미로 팔을 흔들었다. 딘은 부근에서 장화를 신은 고양이도 봤다는 기분이 들었다. 『으응...』 어쨌거나 상관 없다. 장화를 신은게 고양이가 아니라 하마라고 해도 상황은 변치 않는다. 『샘...』 헐떡거리며 그 몸을 구속했다. 눈물로 인해 짠 맛이 나는 뺨 위로 입술을 눌렀다. 샘의 생각으론 틀린 위치였다. 즉각적으로 터져나온 건 불만의 신음 소리, 알고 있다. 더 정확한 지점을 찾아 고개를 움직이자 그제야 안심이라며 샘의 눈이 스륵 감겼다. 그 입술을 내밀고 - 부끄러움에 목덜미를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Posted by 미야
2008/03/01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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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다는 뱀이 웃는 낯으로 손짓했다. 악의를 띈 노란 눈동자가 신경에 거슬렸지만 샘은 착한 아이처럼 다가가 뱀이 건네는 과일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피처럼 새빨갛고, 어쩐지 죄악을 닮아 달콤하기 그지없는 향이 나는 열매였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그를 향해 뱀은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 먹으라고 시늉했다. 그렇게 하면 타는 목마름은 비로소 종지부를 찍을 것이라, 삼켜라. 그리고 만져라 - 방문 판매원의 속 보이는 거짓말을 닮은 그 권유에 한참을 머뭇거렸다. 잘 익은 과실은 사람의 가슴을 둘로 쪼개고 끄집어낸 심장처럼 보였다. 혀를 가만히 대자 그 표면은 불처럼 뜨거웠으며, 과즙은 독처럼 진했다. 끈적거리는 액이 떨어진 땅으로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자라났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마라, 불칼을 든 신은 진작에 경고했다. 하지만 과일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너무나 탐스러웠고, 풍요로웠다. 그래서 샘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열매를 둘로 쪼개어 그의 형과 사이좋게 나누어 먹으리라 결심하고....
『어이, 지금 눈 뜨고 졸고 있냐? 멍청하게 있지 말고 얼른 주문해야지.』 팔꿈치로 툭 치며 딘이 신호했다. 샘은 그제서야 백일몽에서 깨어나 멍한 시선을 메뉴판으로 돌렸다. 그래봤자 숫자의 나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고, 그림들은 전부 울긋불긋했다. 무료한 표정으로 주문을 기다리던 종업원이 그의 시력 나쁨을 의심하며 돗수 높은 안경의 부재에 혀를 찬 건 당연한 거였다. 눈앞의 젊은이는 입맛 당기는 치즈버거 그림을 무슨「중고 자전거 팝니다」전단지처럼 받아들이고 있었고, 치즈의 노란색은 안장, 토마토의 빨간색은 손잡이라고 짐작하는 듯했다. 흥미도 없을뿐더러 그걸 왜 들여다봐야 하는지조차 모르겠다는 눈치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고통스러워 할 늦은 점심 시간이라는 걸 염두에 두자면 그런 샘의 반응은 남들로 하여금 충분히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도 남았다.
『샘?』 『모르겠어.』 『모르긴 뭘 몰라. 스페셜 미트와 에그롤 2인분, 그리고 커피 둘이오.』 동생을 대신해 주문하고 메모지에 받아쓰기를 하는 종업원을 향해 웃어주었다. 우린 수상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연필로 수첩의 모퉁이를 꾹꾹 찍던 종업원은「커피 둘이오」라는 딘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했다. 그러다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들의 행색을 살폈다. 머릿속으로 수배범 전단지를 떠올리기라도 했는지 글씨를 적는 손에 필요 이상으로 힘이 들어갔다. 세 블록 떨어진 꽃집으로 망할 도둑이 들어 겁에 질린 주인을 몽둥이로 때린게 겨우 일주일 전이다. 딘은 눈치껏 다시 웃었다. 얘가 좀 아프거든요. 요즘 감기는 정말 지독하죠? 삭막하게 달아오는 눈자위는 딘의 말대로 감기 바이러스로 설명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녀는 새벽녘에 금전 출납기를 털로 온 강도들이 지금의 샘과 매우 흡사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걸 마음에 두고 있었다. 정말로 감기인가. 주방 쪽을 향해 걸어가다 말고 뒷편을 흘깃거리는 건 의심이 덜 풀려서이다.
테이블 아래서 다리를 움직여 동생의 신발을 무슨 스위치라도 되는 양 밟았다. 『저 아줌마는 네가 권총을 끄집어들고「모두 바닥에 엎드려~!」소리를 지를까봐 조마조마한 모양이다. 샘? 얼굴 좀 풀어. 그렇게 찡그린 채로 밥 먹으면 체한다고.』 『알게 뭐야. 어차피 입맛이 없어 못 먹어.』 『어제 저녁도 먹는둥 마는둥 했잖아. 이 형은 네가 제대로 먹은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 『그럴 수밖에. 형은 기억력이 형편 없으니까.』 시큰둥한 대답에 신발코를 누르는 힘이 더 세졌다. 머리가 나쁘다는 비아냥에 화가 나서가 아니다. 딘은 진실로 걱정이었다. 옷을 여러 겹 입어 몸을 감췄지만 한 눈에 척 보기에도 7파운드가 빠졌다. 접히는 군살과 늘어지는 뱃살에 고민하는 팔자였다면 만세를 불렀겠지만 샘은 옛날부터 휘청거리며 걷는 녀석이었다. 여기서 동생의 체중이 더 내려가면 앞으로 무덤을 파는 건 온전히 그의 몫이 되어버린다. 누구는 힘들게 삽질하고, 누구는 편하게 서서 손전등으로 불빛이나 비추고 - 동생더러 망이나 보고 있으라고 지시한게 당사자라는 건 까마득히 잊어먹은 딘은 불공평한 현실에 푸념했다. 뚝 소리가 날 것만 같은 가냘픈 손목이 다 뭐라냐. 아닌게 아니라 쫓아오는 언데드를 피해 달아나다 쓰러져 뼈를 분지른 적도 있다. 겨우 넘어진 것 정도로... 이래선 한심해서 야단도 못 친다.
『형. 국제 조난 신고는 그만 보내.』 아파서라기 보단 짜증이 나서 이마를 찌푸렸다. 서로의 발을 툭툭 건들이며 모르스 부호를 날리는 건 진작에 졸업했다. 정확하게는 형의 발이라 착각하고 존의 구두를 꽉 밟았던 날부터다. 듣기 민망한 쌍욕을 달고 사는 장남에게조차 너그러웠던 존이지만 장난으로 신발을 밟히는 건 달랐다. 그는 격분했고, 버르장머리가 그게 뭐냐며 혼쭐을 냈다. 이후로 막내는 남의 발을 밟으며 장난치는 걸 관뒀다. 대신 딘의 감독 하에 식탁에 올라간 소금통을 갖고 놀았다.
『내 신발은 장난감 부저가 아니야, 딘. 애처럼 굴지 말라고.』 『너야말로 애처럼 굴지 마시지.』 쓸데없이 소금통을 만지작대는 동생에게 눈을 흘기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물에다 소금을 타서 먹을 것도 아니면서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건 정신 사납다고. 누가 보면 소금이 너무 좋은 나머지 환장한 사람이라 착각할라.』 『여기서 누가 날 본다는 거야. 아무도 안 봐.』 『다른 사람이 문제야? 내가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건 안 보여? 이리 내, 소금통!』 『뭐야. 소금에 환장한 건 내가 아니라 형이잖아. 물에 소금을 타서 마시고 싶어?』 『그래, 새미! 내가 전생에 인어 왕자라서 소금물이 막 땡긴다.』 『인어 왕자가 아니라 붕어였겠지.』 『하! 멍청아, 붕어는 민물 고기야.』 『고래더러 물고기라고 당당히 주장하는 형에게 그런 지적은 듣고 싶지 않아.』
기가 막혀 입만 뻥끗거리는 딘을 무시하고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차피 식욕은 없다. 노트북을 갖고 나오지 않은 이상, 딘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지나가는 자동차와 행인들을 구경할 작정이었다. 어중간한 시간이라 거리엔 인적이 드물긴 해도 사람 관찰은 늘 흥미로웠다. 머리를 레게 스타일로 꾸민 청년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지나갔다. 한쪽 신발만 유독 닳은게 눈길을 끌었다. 아마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게 취미인가 보다. 외발로 지면을 밀면 저렇게 된다. 반대편으로 걸어오는 뚱뚱한 중년의 사내는 닥스훈트 종의 개와 같이 산책 중이다. 표정은 썩 좋지가 않다. 이마에 땀이 났고 피곤해 보인다. 다리가 짧은 외모와는 달리 개는 의외로 걸음이 민첩했고, 만성적 운동부족에 허덕이는 주인은 그 속도를 맞추느라 초죽음이었다. 제발 천천히 가자, 주인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개는 오소리라도 사냥할 기세로 도로를 누볐다. 2차선 도로 위로 파란색 자동차가 지나갔고... 그 뒤를 우유 배달 차량이 바짝 붙어 갔다. 샘은 우유와 알래스카의 침엽수 그림이 무슨 상관인지를 잠시 고민했다. 그만큼 신선하다는 의미인가. 하지만 숲은 파랗기만 하지 신선하지는 않다. 광고는 한참 잘못되었다.
접시와 접시가 부딪치는 딸각 소리가 들렸다. 샘은 현실로 돌아왔다. 『샘. 네가 식사를 하지 않으면 이 형도 먹지 않을테다.』 『그건 내가 일곱 살 시절에 이미 써먹었던 거잖아. 지금은 안 통해.』 죽어도 럭키 참스만 먹겠다고 우기는 동생의 버릇을 고쳐놓기 위해 딘은「네가 럭키 참스를 먹으면 나는 온종일 굶을테다」라고 선언했다. 샘은 형의 말을 안 믿었다. 구석에 숨어 나 모르게 우유라도 먹겠지 - 샘은 식탁에 미리 준비된 럭키 참스를 보란 듯이 먹어치웠다. 결론만 말하자면 꽤나 안일한 판단이었다. 딘에겐 식탐만 있는게 아니었다. 독한 구석도 있었다.
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지금은 안 통한다는 거지?』 『그때는 형도 꽤 순진했거든. 하지만 지금은 교활하고 약아빠졌지. 그때처럼 배가 고파 운동장에 주저앉는 일은 없을 거야. 대신 현기증이 난다며 세면대 아래로 드러눕겠지. 잔뜩 먹어 배가 통통한데도 말이야. 결국 난 안 속을 거라는 말씀.』 『기대를 저버려 미안하지만... 그때도 난 네 생각처럼 순진하진 않았어.』 『뭣? 그럼 운동장에 나 보란 듯이 쓰러졌던 건 가짜였어?!』 『당연하지! 제대로 밥을 먹지 않아 쓰러졌다면 아동 학대로 신고가 들어갈게 뻔하잖아. 애를 굶겼다고 의심이 들면 의사는 의무적으로 당국에 신고를 하게 되어 있어. 아빠가 고발당하면 어떻게 해. 네가 위탁 가정으로 보내지면? 나는 바보가 아니야. 그런 위험한 짓은 하지 않아.』 예기치 않은 진실에 샘의 입이 벌어졌다. 그러든 말든 딘은 접시를 동생 쪽으로 들이밀었다. 『그치만 지금은 사정이 틀려 아동 보호국 직원이 들이닥치진 않을까 염려하지 않아도 되지. 따라서 난 그때처럼 연극은 하지 않을 거다. 자!』 고기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랐다. 그걸 포크로 집어 샘에게 먹이려 했다. 『아, 하고 입 벌려.』 연인끼리 먹여주는 것도 낯간지럽다. 하물며 성인 남자 둘이서 대낮에 참 잘 하는 짓이다. 샘은 기겁을 하고 상체를 뒤로 뺐다. 『미쳤어?!』 『안 미쳤어.』 『정색하고 말하는게 바로 비정상이라는 증거야!』 『좋아. 비정상이라고 하자. 그래도 난 상관 안 해. 그러니까 새미? 아, 하고 입 벌려.』 건너편 좌석에 앉은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커피를 서빙하던 종업원이 동전을 떨어뜨렸다. 그래도 딘은 오로지 샘만을 쳐다보았다.
이래서 딘이다. 동생을 위해서라면 남들이 흉을 보든, 손가락질을 하든 말든, 염두에 두질 않는다. 그의 세계는 온전히 샘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샘이 괜찮으면 나머지는 상관이 없다. 샘이 괜찮지가 않으면 세계는 파국이다. 그가 인식한 유일한 정의이자, 잘난 머리로 납득한 유일한 선이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살인마저도 불사한다. 닭살의 게이 커플로 오해받는 것쯤은 우습다. 킥킥대며 웃는 사람들의 비아냥따윈 별 거 아니다. 과보호에 팔불출인 그의 형은 어리고 연약한 새끼에게 모이를 먹이려는 자신의 행동이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그만큼 떳떳했고, 그렇기에 충실했다.
「뭐든지 할 수 있어.」 어쩐지 소리내어 울고 싶어졌다. 샘은 코앞으로 다가온 한 점의 고기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는 뭐든지 다 할 거야.」 목이 메이려 했다. 억지로 참으며 육즙이 흐르는 고기를 받아 먹었다. 딘은 긴장이 풀린 표정을 지으며 헤실거렸다. 『맛있지? 거봐, 새미. 뒤로 뺄 까닭이 없다니까. 자, 내친 김에 조금 더 먹자.』 『그만해. 나 혼자서도 먹을 수 있어.』 『정말?』 『고개 갸웃거리며 묻지 마. 유치원생이 내 형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해져.』
참으로 우습다. 먹기만 해도 기뻐하는 그의 형은 샘이 간절히 원하는 단 한 가지만큼은 절대로 해주지 않는다. 붉디 붉은 과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뭐든지 다 해주겠다 말했으면서 그는 그것에 대해선 단호하게 거절한다.
Posted by 미야
2008/02/20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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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각의 이야기는 큰 줄거리를 가지고 서로 연결됩니다만, 순서대로 진행이 안 되고 있습니다. 옛날 버릇이 고스란히 튀어나와 정말 죄송합니다. 이게 먼저인가, 저게 나중인가는 나중에 고민합시다. 개인의 취향과 시각에 따라 대단히 불쾌한 내용일 수 있습니다. 이게 아니다 싶으면 마우스 버튼을 재빨리 눌러 윈도우 화면을 닫아주세요. ※
샘은 뜨거운 주전자를 잘못 만지고 실수로 손을 데인 사람처럼 마구 뛰었다. 『싱크대에 썩은 양말 올려놓지 말라고 내가 누누이 강조했잖아, 형!』 침대에 걸터앉아 신발끈을 X자로 교차하여 매듭을 묶던 딘은 동생의 고함에 벙벙한 눈을 했다. 그러든 말든 샘의 목소리는 옥타브 더 올라갔다. 완전히 오페라 카르멘이다. 담배 공장으로 호위를 나온 호세는 방금 전에 카르멘의 등으로 칼을 찔러넣었다. 『바퀴벌레와 친구 하자고 하면 인생이 즐거워? 즐겁냐고!』
그런데 여기서의 문제는 바로 이거다. 샘은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양말 때문에 화를 내고 있는게 아니다. 냉장고 안에서 영구 결빙된 바퀴벌레가 발견된 것도 아니고, 씻겨 내려가지 못한 똥이 화장실 변기 구석으로 역겨운 얼룩을 남긴 것도 아니었다. 두 사람은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지금의 이 말다툼은 제과점 진열대에 올라간 초코렛 케이크 위로 딸기 장식이 있느냐 없느냐를 두고 논쟁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쉽게 말해 쓸데없다는 얘기다. 그깟 딸기, 있으면 어떻고, 또 없으면 어떠랴. 어차피 타이틀은 딸기 케이크가 아니라 초코렛 케이크다. 엉뚱한데서 딸기를 찾는다며 제과점 주인에게 머리를 파리채로 맞아도 할 말이 없다.
딘은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짧게 다듬어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마구 빗질했다. 요컨대 샘이 유원지에서 코를 빨갛게 칠한 살인 광대와 정면으로 마주치기라도 한 것처럼 구는 까닭은 전혀 다른 곳에 있다. 『다음부턴 주의할게, 새미.』 『새미가 아니라 샘이야!』 『알았다고, 동생아.』 『알긴 뭘 알아! 맨날 입만 살아서...』 『잘못했다고. 이제 됐지?』
틀에 박힌 가짜 웃음을 흘리며 허겁지겁 화장실로 도피했다. 그리고 나서야 샘이 분노한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망할 bitch.』 밤까지도 없었던 보라색 멍울이 목덜미에 생겼다. 어제 만났던 전갈좌의 여자가 심하게 빨아댄 탓이다. 작심하고 덤벼들지 말라고 싫은 표정을 했어도 여자는 발정기의 살쾡이마냥 뜨거웠고, 그 결과 그들의 하룻밤 잠자리는 엎치락 뒤치락 난리통이 되어버렸다. 변태 기질이 농후한 - 팬티 스타킹 하나만 입은 채 기마 자세로 엎드려 서스럼 없이 펠라치오를 해준 그녀는 끝까지 잠자리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딘은 짐짐한 기분으로 여자의 요구대로 애널에 삽입까지 했다. 화끈하면서도 뒷맛이 안 좋은 섹스였다.
기본적으로 딘은 잠자리 테크닉에 탐닉하지 않는 편이다. 섹스 중독자도 아닌데 처방전도 없는 짝퉁 비아그라를 입안에 털어넣곤 동네방네 낯간지럽게 앗앗 소리를 질러대는 건 사절이다. 간밤의 여자가 수상한 알약을 권하며 눈빛을 반짝였을 적에도 단호히「No!」라고 거절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적당히 엉덩이를 붙잡고, 찔러박고, 흔들다가, 배출하면 끝. 브레이크 고장난 자동차처럼 막무가내로 질주해봤자 새벽이 고달프다.
거울에 비친 초췌한 안색의 남자가 콧방귀를 뀌었다. 말은 잘 한다. 꽤나 담백한 섹스를 즐기신다 이거냐? 하지만 그걸 누가 믿어주냐. 하루도 안 빼놓고 밤놀이에 열중하는 주제에. 남들이 들으면 웃다가 틀니 튀어나올라. 찬물을 틀어 세수부터 했다. 쥐어짜도 정액이 안 나올 지경으로 아무렇게 몸을 굴려댔다. 혹사당한 성기가 얼얼했다. 이 마당에 밋밋한 섹스 어쩌고 떠들면 지나가는 개가 웃는다. 세면대 아래로 탁한 비눗물이 흘러갔다. 입안을 물로 헹구고 수도꼭지를 힘주어 잠궜다.
『아침부터 소리를 질러 미안해, 형.』 샘은 차분한 표정으로 되돌아가 사과를 했다. 과연, 카르멘이 꽥 소리를 지르며 쓰러지자 호세는 정신이 번쩍 들었나 보다. 『몰아붙인 건 잘못했어.』 『어, 그러냐.』
평소라면 딘은 그깟 양말에 사람을 잡으려 했다며 호들갑을 떨었을 것이다. 형에게 잔소리를 퍼붓는 건 착한 동생이 할 짓이 결코 아니라는 둥, 신경질을 부리는 걸 보니 생리할 때가 되었다는 둥, 말 나온 김에 가게에 가서 탐폰을 사오겠다는 둥, 시덥잖은 말들을 주워대며 샘을 약올렸다. 아니면 신고 있던 양말을 공처럼 말아 보란듯이 싱크대에 던지고는「워쩔겨~ 새미? 내가 또 어질렀다?」이러고 도발했다. 어중간하게 어, 그러냐 대꾸하며 머리를 긁어대는 건「막내가 짜증을 부릴 적엔 이렇게 하세요」장남 매뉴얼에는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치만 정말이지 이번에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딘은 초조했고, 좀처럼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샘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고, 냉장고에서 상한 치즈를 발견했을 적의 난감함도 있다. 무자비한 햇살 아래로 구멍난 속옷이 빨랫대에 걸린 기분이고, 늑대 인간이라 오해하고 털 많은 사람을 엉뚱하게 잡은 것도 같다. 샘이 먼저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했으니 이쪽에서도 뭐라고 한 마디 해야 하는데「사과는 애플, 오렌지는 맛있어, 뉴욕의 심볼은 자유의 여신상」이러고 말도 안되는 문장이 입안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혼란스럽다. 그리고 부끄럽다.
후, 하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에라, 모르겠다. 아예 주제를 바꿔 달나라로 워프하자. 공격의 빌미가 된 검정색 양말을 쓰레기통에 집어넣으며 딘은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내었다. 『있잖아, 새미. 여기서 체크 아웃하고 바비 아저씨에게로 가자. 어때? 브록스턴즈에서의 일 이후로 연락도 제대로 못 드렸잖아. (* MLR : 본편 미진행) 아저씨도 우리가 보고 싶으실 거야. 가서 형이랑 같이 바비네 냉장고를 털자. 어쩌면 우리가 관심 가질만한 일에 대해 괜찮은 정보를 알려주실지도 몰라. 요즘 우리들, 지나치게 한가했잖냐.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빈둥거릴 수는 없지. 사냥을 한지 오래되다 보니 몸에 녹이 슬 것만 같아. 손목을 돌리면 관절에서 막 삐그덕 소리가 난다고.』
샘은 회의적이었다. 『그것도 좋겠지, 딘. 바비 아저씨에겐 신세를 졌으니 제대로 인사해야 할 거야. 하지만 형과 나는 사냥을 다시 시작하기에 앞서 우리들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만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즉시 딘은 우호적이기도 하고, 비굴하기도 한 미소를 지으며 샘의 발을 가리켰다. 『어... 내 발등엔 불 안 떨어졌는데. 네 발엔 성냥이라도 떨어졌냐? 저런, 조심 했어야지!』 언제나 그랬듯이 딘은 농담으로 화제의 핵심을 슬그머니 비켜갔다. 윤곽이 희미한 유령처럼 바닥으로부터 스멀스멀 냉기가 올라왔지만 짐짓 모르는 척했다. 나는 벤치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는 거다. 야구를 하며 웃고 떠들고 있는 어린 소년들을 곁눈질로 훔쳐보고 있는 거 아니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학부모들이 성추행범으로 의심되는 수상한 사내에게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고 따지고 들면 날짜가 지난 신문을 가리키며「댁은 눈도 없소? 공원을 산책 중이오」라고 대꾸한다지, 아마.
동생은 목소리를 낮추어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봤자 나는 당신이 아이들 무릎을 훔쳐보고 있다는 걸 잘 알아요. 『우린 키스했었어, 형.』 댁이 읽고 있는 신문이 일주일 전에 발간된 거라는 걸 지적하고 싶군요. 『언제까지 이럴 거야. 그 문제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해야만 해.』 그래서 말인데요. 난 여기로 당장 경찰을 부를 작정이예요, 이 찢어 죽일 양반아. 『없었던 일로 하기엔 난 무척 심각하단 말이야.』
샘은 제대로 숙면을 취한지가 언젯적 일인가를 곰곰이 따져보았다. 뜬눈으로 천장을 쳐다보다 기진맥진하여 기절하듯 잠시 눈을 붙이는 나날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째깍거리는 소리가 벽에서 들려왔고, 온 세상의 자동차들이 클랙슨을 울려댔다. 샘은 누군가 자신에게 몹쓸 저주를 걸었다고 믿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처음 이틀 동안은 책에서 본 내용을 참고로 부적을 만들기도 했다. 소금과 약간의 약초, 카모밀라, 그리고 이국의 향료를 섞어서 작은 주머니에 넣었다. 냄새가 향긋해서 베개 밑에 숨겨두니 기분이 좋았다. 결과만 말하자면 기.분.만. 좋았다. 아흐레 뒤에 샘은 부적 주머니를 변기에 집어넣고 망설임 없이 물을 내렸다. 눈꺼풀은 여전히 깔깔했고, 커피를 서른 여섯 잔이나 마신 것처럼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안절부절해하며 다리를 흔들면 의자까지 덩달아 덜컹덜컹 움직였다. 모든게 일그러지기 시작한 건 그 무렵부터였다. 샘은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소시지를 마흔 조각으로 잘라서 먹었다. 아니, 먹었다는 말엔 어폐가 있다. 죽어라 난도질만 했을 뿐, 입안에 넣고 삼키지는 않았으니까. 잠이라는 녀석이 가출을 해버리자 덩달아 식욕이라는 녀석도 가방을 싸들고 도망을 쳤다. 그 두 가지는 다시는 샘에게로 돌아오지 않을 속셈인 듯 싶었다. 밖으로 나가 짤막한 엽서 한 장 없는 걸 봐선 의중은 분명했다.
갑자기 목이 메여왔다. 입술을 깨물며 샘은 하소연했다. 『난 지쳤어, 딘.』 흐리멍텅한 상태에서 고개를 돌리면 텅 빈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서늘한 기운에 흠칫하여 그때마다 이불을 어깨 위까지 끌어올리곤 했다. 그러나 발버둥쳐도 몸은 따뜻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마음이 너무나 추웠기 때문에 히터는 무용지물이었다. 놀이를 마친 딘이 열쇠를 따고 방으로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 눈 내리는 벌판에서처럼 하얗게 입김이 나왔다. 얼어 죽지 않으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이러지 말아.』 원망하며 형을 쳐다보았다. 『형은 나에게 이러면 안돼.』
딘은 지치고 낙담했다는 투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나는 너에게 그러면 안돼. 그러니까... 음, 키스 말이야.』 순간 동생이 철렁 내려앉는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미처 눈치채지 못한 딘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나도 인정해. 그러니까 그건... 뭐랄까, 오믈렛에 넣어진 고추냉이 같은 거였어. 설탕인지 알았는데 소금이었고, 전자렌지용 그릇이라 생각했던게 일회용 플라스틱이었어. 비유가 엉망이지만...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게 이해가 가니? 샘.』 그리고 더듬거렸다. 『하, 하지만 나는 그걸 바로잡을 거야. 진짜야. 약속해. 그리고 곧 그걸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어. 나에게 약간의 시간만 허락해준다면... 그래, 새미. 형은 그 문제를 바로잡을 수 있어. 그리고 조만간 우리는 무슨 국경일이라도 된 것처럼 잔치를 하게 될 거야. 날 믿어!』
샘은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대신 상처받은 눈빛을 하고 무릎 사이로 깍지 낀 손을 꾸셔넣었다.
Posted by 미야
2008/02/17 23:30
2008/02/17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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