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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관을 타고 느리게 피가 돌았다. 플로어에 흐르는 음악 역시 느리다.
거 뭐시다냐... 손톱으로 테이블을 톡톡 건드렸다.
REO-스피드웨건의 Can't fight this feeling 이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낮설지만 아름다운 세계, 그녀가 나를 이끌어 주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곳으로 가볼 수 있어요, 몇몇 취객들이 귀에 익은 부드러운 음율에 맞춰 상체를 좌우로 흔들었다. 푸른 빛이 어우러진 실내 조명 때문일까, 청명한 바다 아래서 수초들이 물살에 반응하여 아름답게 율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헤엄치는 물고기들의 지느러미는 반대편이 훤히 비춰보이도록 투명하다. 사랑하는 마음은 감출 수도 없는 것, 참을 수도 없는 것 - 모래 깊숙이 달빛이 침투하면 조개는 산란을 시작하고, 그 명랑한 바다 거품 속에서 사랑의 여신은 태어난다. 이 느낌을 참을 수 없어요. 구석으로 앉은 여자가 숨 죽여 낮게 웃었다. 물론 딘을 향해서가 아니고, 동석한 애인을 향해서였다.

『멍청한 닭들 같으니. 꼬꼬댁 하고 닭장에서 울기나 할 것이지.』
팔뚝이 가려워 미칠 지경이다. 저 밑바닥에서부터 반항심이 솟구쳤다. 사랑, 사랑, 사랑, 사랑... 그게 밥 먹여주듸.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분홍빛 하트를 향해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렁댔다.
당연히 동생은 넌더리를 냈다.
『언제는 운전하다 말고 신나게 따라 부르기도 했으면서.』
『뭐? 내가? 난 안 미쳤어!』
『정색하지 마. 옆에 앉은 내가 다 창피해. 됐으니까 그냥 긴장이나 풀어. 그렇게 뻣뻣하게 있으면 사람들이 그런 형을 보고 은행 강도에게 위협받고 있는 배 나온 지점장이라 착각할 거야.』
『누가 배 나온 지점장이라는 거냣!』
『왜 화를 내? 머리가 벗거진 것보단 배가 나온게 차라리 낫지 않아?』
『틀린 소리를 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나는 배도 안 나왔고, 머리도 안 벗겨졌어!』
『맞아. 그리고 형은 은행 지점장도 아니지.』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샘은 작은 크기의 감자를 입에 넣었다.

요리의 이름도 생소하다. 빠숑 어쩌고 했던 것도 같고, 아니면 빵드레, 내지는 줼레 어쩌고 했던 것도 같다. 물론 셋 다 아닐 수 있다. 아무튼 샘이 주문한 건 수분이 많은 요리로 크고 오목한 접시에 옥수수 스콘과 같이 담겨 나왔다.
그 맛이 어떻냐고? 알게 뭐람. 딘의 눈에는 코흘리개 애들이나 먹으면 딱인 죽사발로 보였다. 야채는 너무 익혀서 물렁거렸고, 양념이 덜 발려져 허멀갰다.
그래도 샘은 해물의 냄새가 진하게 나는 줼레 우짜고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섭식 장애를 가진게 아닌가 의심받던 과거를 내던지고 호록호록 소리를 내가며 스푼으로 뜨거운 덩어리를 건져 먹는데 그때마다 눈매가 발정난 고양이처럼 가느다랗게 변했다.

딘의 눈도 (샘과는 달리 나쁜 의미로) 가느다랗게 변했다.
『맛있냐, 새미.』
『맛있어.』
그런가 보지.
무시하고 무설탕 음료를 마셨다.

『그건 그렇고, 우린 캘리포니아로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아, 형.』
『무슨 캘리포니아?』
영문을 몰라 벙벙한 표정을 하고 있는 딘을 향해 샘이 읍, 하고 입술을 안으로 오무렸다.
의미는 다음과 같다.「이 병신아.」
그치만 샘은 대학 교과 과정을 밟다 만 인텔리라서 네 살 연상의 피붙이에게 그 따위의 폭언은 퍼붓지 않는다. 그냥... 그러니까 그냥 어깨를 으쓱이며 표정만으로 사람을 병신 취급한다.
『사람 셋이 연달아 자살한 아파트... 뭐야. 아직도 기억이 나질 않아?』
기억 났다. 딘은 무설탕 음료가 목게 걸려 산다는 것 자체가 괴로웠다.

『첫 번째 세입자는 자살한게 맞아. 이름은 로라 래리건이고 나이는 마흔 일곱이야. 아니, 일곱이었어. 사인은 약물 과다이고,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었지.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정황으로 보자면 명백한 자살이야. 5년간 사귀던 남자친구와 헤어졌고, 키우던 금붕어가 죽었고, 폐경했거든.』
『뭐어?! 폐경~?!!』
쓸데없이 목소리를 크게 하고 있는 딘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 샘은 얼른 그의 발잔등을 밟았다. 그래봤자 신경질적인 얼굴을 한 여자가 그들을 잡아먹을 기세로 노려보았다. 설명하는 샘의 목소리는 덕분에 한 곱절 작아졌다.
『조용히 해, 딘. 공공장소에서 떠들만한 단어가 아니라고?』
『그, 그치만... 어이가 없어서. 사람이 겨우 그런 까닭으로도 죽냐? 거, 거... 폐경.』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로라는 아기를 끔찍하게 가지고 싶어했어. 그런데 폐경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임신을 할 수가 없잖아.』
『맙소사. 아기를 원한다면 입양하면 되잖아. 뭐가 문제야?』
『이 바보. 종족을 보존하고 싶어하는 욕구는 남의 자식을 키우고 싶어하는 것과 같지 않아.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지. 예민한 성격의 암컷 둥지에 다른 새가 낳은 알을 넣어두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다음 날 아침에 맛있는 계란 후라이 하나를 먹을 수 있게 돼. 알겠어? 이 여잔 심지어 고양이나 개도 키우지 않았다고. 그녀가 기껏 애완용으로 키우던 건...』
『금붕어.』
『그래. 금붕어야. 로라 래리건은 남의 아기를 자신의 품에 안아 키울 사람이 아니었던 거지.』

소중한 아기를 키워낼 주머니는 낡아버렸다. 남자친구는 떠나갔다. 시합 종료를 알리는 공이 울렸다. 시계는 멈췄다. 그녀는 절망했고, 살 의욕 자체를 잃어버렸다.
『결국 로라가 선택한 건 수면제를 잔뜩 먹고 따뜻한 물을 받은 욕조에 들어가는 거였어.』
경찰은 퉁퉁 불어 분해 직전까지 간 로라의 시체를 물에서 건져냈다. 사망한지 사흘이 지난 시점이어서 냄새가 무척 고약했을 것이다. 누가 봐도 욕지기 나는 일이었음은 분명하다.
『있잖아? 도시 괴담의 시작은 모양새가 대충 비슷한 것 같아.』
샘은 다소 슬픈 어조로 말했다.

아파트는 그 이후로 한동안 비어 있었다 - 당연하지 않겠느냐며 샘이 눈살을 찌푸렸다.
『카펫과 벽지를 모두 바꾸고, 욕실은 통째로 들어냈어. 그런데도 세입자가 나타나질 않자 시세에 비해 이건 공짜다 싶은 싼 임대료를 내걸었던 것 같아. 그게 화근이었지. 1년 반이나 지나서야 두 번째 임자가 이사를 오긴 했는데 그게 하필이면 내부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껴안고 있는 사람이어서 경찰이 수시로 들락거렸다는 거야.』
『으이그... 짐작이 간다.』
『맞아. 총성이 들렸으니 수화기를 들고 911을 눌러야지.』
『자살이 아니라 살해 사건이었던 거냐?』
『아니. 상해 사건이야, 딘. 두 번째 세입자 에릭 가드너는 다리에 총을 한 방 맞았어도 죽진 않았거든. 그래서 경찰은「소파에서 나온 그 마약은 내 것이 아니오」라는 말을 그에게서 직접 들었을 것이고, 구두 상자에서 나온 거액의 현금 다발이 죽은 이모로부터 받은 유산이라는 말도 들었을 것이고, 일련번호가 지워진 38구경이 쓰레기통에 어쩌다 줏은 습득물이라는 말도 들었을 것이고... 블라블라.』

샘의 설명으로는 거실이 피투성이었다고 한다.
입주민에겐 상당히 강렬한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귀신이 붙어 사람이 죽어나가는 아파트. 욕실에서 한 명, 거실에서 한 명.
밤새도록 샤워기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느니, 누군가 다친 다리를 질질 끌고 걸어다닌다는 식의 소문이 돌았음은 불을 보듯 뻔했다.

『좋아, 좋아. 이참에 끝까지 가자고. 그럼 세 번째는?』
『나이 일흔 여덟의 노파가 침대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어. 그래서 아파트 사람들은...』
『윽! 아무 말도 하지 마, 새미.』
『노친네가 귀신을 보고 놀라서 그런 거라고 하더라고.』
『아무 말 말라니까.』
샘이 큭큭 소리를 내며 웃음 소리를 삼켰다.
『심.장.마.비.』
『아악~!!』

딘은 완전히 풀이 죽었다. 얼어죽을 타블로이드. 귀신이 붙긴 뭐가 붙어.
『그래도 우리가 직접 가서 조사해볼 수는 있어, 딘. 만의 하나라는게 있으니까.』
『됐다. 그만 웃고 밥이나 마저 먹어라.』
『왜? 정말로 할머니가 로라의 유령을 봤을 수도 있잖아?』
『관둬. 다리에 총 맞은 마약 떨거지 놈이 잊은 물건을 찾으러 머리에 스타킹 쓰고 아파트로 들어갔다가 겁쟁이 노파를 기절시켰다는데 1달러를 건다. 도시 괴담이라는게 다 그렇지, 뭐.』
의자 등받이로 몸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잘못되고 성난 영혼이 없다는 말에 만세 삼창을 해야 옳을 터인데 이건 뭐 불난 곳이 없어 심심해 죽겠다 불평하는 소방관이라도 된 기분이고... 샘에게 고개를 돌리며 명랑하게 물었다.

『그나저나 굉장하네, 샘. 언제 조사를 다 한 거냐? 난 네가 노트북을 켜는 것도 몰랐어.』
『형이 화장실에 들어가 내 이름 부르면서 마스터베이션을 할 때 짬짬이 알아본 것뿐이야.』
『워-』
『뭐, 경찰 데이터 베이스에 슬쩍 들어가 기록을 뒤져보는 건 늘 하던 거고...』
『잠깐잠깐잠깐! 그게 아니라!』
『웃겨. 아침마다 깔끔하게 면도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욕실에서 한참동안 죽치고 있는데, 이쪽에서「가엾게도, 변비구나」생각할 거라 여겼어?』
『워-』
『그리고 늘 생각했던 건데... 형은 그거 할 적에 소리가 크다고.』

앰뷸런스와 방송국 차량이 몰려들었다. 정복의 경찰관들과 카메라를 든 취재진이 서로 엉켜 난리법썩이다. 인터뷰에 응하지 않고는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딘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웃어야 하나? 찡그려야 하나? 아님 마구 화를 내야 할까? 기자 네 명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몸싸움을 벌렸다. 고가의 마이크 장비가 코앞으로 날아들었다.

《샘 윈체스터 씨가 마침내 폭탄 발언을 하고 말았는데요!》
《거기에 대해 하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그거를 할 적에 소리가 매우 크다고 하던데요.》
《의도적인 거였습니까, 아님 원래 그렇습니까?》
《정말로 마스터베이션을 할 적에 동생의 이름을 부르나요?》
왜 그런 걸 나에게 물어 - 회반죽을 엷게 바른 듯한 엉망진창의 낯빛을 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은 피를 빨기 위해 달겨드는 각다귀 같았다.
《딘 윈체스터 씨!》
기다렸다는 투로 경찰관들이 차갑게 빛나는 수갑을 들어보였다.
세상의 모든 눈동자들이 그를 책망하며 쳐다보고 있는게 아닌가 싶었다.

딘은 크게 숨을 삼켰다.
망할. 전기 충격기로 머리를 지지면 혹시 정상이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자위하는 기분을 네 놈들이 알 턱이 있냐.
음료수 잔을 쥔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Posted by 미야

2008/05/18 19:22 2008/05/18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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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나기 2008/05/18 22:32 # M/D Reply Permalink

    굉장히 시니컬해진 샘과 건강하게 살아있는 딘을 보니 눈물만 솟구칩니다.ㅠ.ㅠ
    크허헉.ㅠ.ㅠ

  2. 아이렌드 2008/05/18 22:52 # M/D Reply Permalink

    정말로 샘희가 딴놈하고 바람이라도 나야 덜컥 정신이 들까요? 그러게 다 들통날걸 왜 자꾸 튕기냐고....

  3. 레인 2008/05/19 08:42 # M/D Reply Permalink

    딘을 자꾸 당황시키는 샘이 왜이렇게 좋은거지요? ㅡ,.ㅡ

  4. 로렐라이 2008/05/19 21:36 # M/D Reply Permalink

    올려주신 소설에 덩실덩실 좋아하다가 소나기님 덧글 보고 가슴 속에서 씁쓸함이 올라왔어요 ㅠㅠ 건강하게 살아있는 딘....아놔orz 정말, 미야님 소설에서라도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있는 딘 보니까 좋기도 하고 아련하기도 하고 ㅠㅠ 대체 이놈의 드라마가 뭔데 이렇게 감정을 뒤흔드나요ㅠㅠ 아아 덧글이 삼천포로 빠졌네요! 딘은 언제까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른 채로 버틸 수 있을까요~!

  5. 미야 2008/05/21 08:54 # M/D Reply Permalink

    건강하게 살아있는 <- 이 부분에서 저는 지하 3,000미터 암반 아래로 추락했어요. 슬퍼서 샘이랑 딘이 얼굴도 못 보겠어요. T^T 엉엉, 크립퀴 대마왕. 빨리 내 새끼 살려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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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의「스톱워치 신드롬」이라는 걸 인터넷으로 검색하셔도 그런 건 자료로 안 나와요.


언제나처럼 TV를 켜고 환해진 화면을 응시했다.
『얼레.』
그러다 리모컨을 쥔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살색은 살색인데 털투성이 살색이다.

신체 건강한 남자 둘이서 으샤으샤를 하는 건 어디까지나 딘의 취향이 아니다. C컵의 풍만한 가슴, 군살이라고는 구경도 할 수 없는 잘록한 허리, 그리고 빨갛게 립스틱을 바른 입술이 아니라면 흥미가 돋질 않는다. 카메라를 바짝 들이대고 발기한 좇을 보여줘봤자 시큰둥한 콧소리만 나올 뿐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화장실에서 맨날 보는 걸 가지고 좋다, 싫다 감상을 늘어놓는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
큼, 하고 목에 힘을 준 뒤에 모텔에서 제공한 채널 편성표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 닳은 인쇄물로 올라간 제목은「로즈비키 쇼」이다. 비키는 빨강 머리의, 데뷔한지 5년이 흘러 어느새 삭아버린, 젖통 성형을 무려 다섯 번이나 한, 레즈비언 포르노 스타다. 딘은 가만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나긋나긋한 언니들끼리 고양이처럼 서로의 몸을 비벼대고 있어야 정상일 터,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눈에 밟히는 건 알통이 불딱불딱한 형님들이시다.

이것들이 미친나.
오늘날의 미국에선 성적인 견해가 다르다고 사람을 차별해선 안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노아의 홍수 때 왜 지랄 같은 호모들이 큰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았을까를 궁금해 하는게 또 미국인이다.
『재수 없어.』
뾰족한 여자 젖꼭지 나와라, 여자 젖꼭지... 손님들에게 제공된 유료 성인 채널은 모두 세 개다. 하나가 꽝이라면 다른 두 개가 있다. 서부의 총잡이처럼 리모컨을 들어 빨간색으로 점등되는 부분을 조준했다. 입술에 침을 발랐다. 그리고 5분이 흘렀다.
『...』
화면은 아까와 변함이 없어 여전히 털투성이 살색.

『형, 이거 게이 포르노인데.』
『응?』
『엄청 싫어하지 않았어? 이런 거... 저어, 딘?』
리모콘을 가슴에 꼭 쥔 채 숨을 죽이고 있던 딘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동생의 목소리에 반응, 그제서야 현실로 돌아왔다. 아니, 딱 절반만 돌아왔다. 나머지 절반은 여전히 실종 상태다. 눈빛은 계속해서 멍했고 피부는 젖은 신문지처럼 창백하다. 상한 음식을 잘못 집어먹고 당장에라도 토할 듯한 기세다.

『딘?』
피카츄라는 제목의 애니메이션을 시청한 아동들이 집단 발작을 일으켰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있다. 아, 틀렸다. 피카츄가 아니라 포켓 몬스터다. 그리고 뉴스에서 봤던게 아니고 스텐포드 재학 시절에 기숙사 동기생이 작성하던 레포트에서였다. 1997년 12월 16일,《전뇌전사 폴리곤》에피소드에서 약 3초 가량 강렬한 빛이 화면을 뒤덮었고, 이를 즐겁게 보고 있던 어린아이들이 어지럼증과 두통, 현기증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그런 큰 소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피카츄는 1999년에 타임즈지 선정 올해의 인물로 등극했을 정도로 미국에서조차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당연히 어린 자녀를 둔 학부모들은「충분히 우려할만한」이란 수식어를 헬륨 풍선에 매달아두고 싫어하는 표정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계속해서 피카츄를 사달라고 졸라댔고, 인형과 비디오 게임기가 시장에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고, 그것들은 메이드 인 제팬이거나 차이나, 내지는 홍콩...
『이야기가 어디로 튀는 거냐.』
『그걸 나한테 따지기 전에 일단 앉지 그래.』
샘은 달지도, 짜지도 않은 밋밋한 목소리로 훈계했다.

다시 5분이 흘렀다.
계속해서 살색. 덧붙여 약간의 털.

형제들은 자신들의 침대에 각각 걸터앉은 채로 화면을 주시했다.
기쁜 부활절을 맞이하여 교황 성하께옵서 친히 미사를 집전하고 계시다. 희망과 화해, 치유의 메시지를 경청하는 시골뜨기 사제는 두 손을 가지런히 무릎에 내려놓았다. 우리 사회에 각종 문제와 불안과 고통이 존재하는 만큼, 믿는 자들의 형제의 사랑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습니다 - 네, 사랑이고 말고요. 딘은 이제 병든 닭처럼도 보이고 있다.

『콜라 마실래?』
뜨끔한 딘은 동생의 권유가 세상에서 제일 불건전한 거라도 되는 양 한참을 쳐다보았다.
옆면으로 빛을 받아 곱절로 투명해진 딘을 향해 샘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무설탕인데.』
말이 나왔으니까 그렇지 다이어트 콜라는 적그리스도가 아니다. 오히려 TV 화면에 나오고 있는 장면이 불량함의 집결체다. 악마다. 사탄이다.

머리를 짧게 자른 사내가 파트너의 하얀 허벅지를 위로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거기에 얼굴을 박고 - 혀를 길게 내밀어 항문을 핥작이고는 - 침이 흥건히 묻은 입구를 검지손가락으로 지긋이 눌러 압박했다. 츄웁츄웁 소리를 내며 음란하게 빨아들였다. 다시 핥고,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혀로 간질였다. 자극을 받아 피부가 붉게 물들어갔다. 안쪽으로 살이 꿈틀대고 움직였다. 그 반응에 어쩐지 기쁜 듯한 표정으로 사내가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순식간에 두 마디가 사라졌다.
터져나오는 교성.

저것은 어디까지나 애정 행위가 아니다. 사랑이 아니다. 코앞에서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 최소한 다섯 명 이상의 바보들이 바빌로니아 음녀의 금화가 짤랑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조명과 마이크를 들이밀고 있을 것이다. 철저하게 계산적이고, 그만큼 속물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트너를 애무하는 손길은 너무나도 부드럽고 조심스러워서「나는 이 사람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얇은 피부가 오르락내리락 움직일적마다 감정이 북받쳐오른다. 가슴을 문지르는 투박한 손은 영원에 대고 맹세하는 동작을 많이 닮았다.
딘의 눈이 휘둥그래 떠졌다.
짧은 머리카락의 사내가 고개를 숙여 상대에게 키스했다.
온몸을 떨며 그의 키스를 반갑게 받아들이는 남자는 누구처럼 곱슬머리였다.

『왜. 부러워?』
난리법썩의 장면을 같이 봤음에도 샘은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저거 해보고 싶어?』
거스름 돈은 필요 없다는 식의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하게 해줄게.』
그게 아니라면 단순히 그렇게 위장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님 내가 해줄까?』
이건 알렉산드로 볼타의 본명이 스쯔므르스쯜린 카라즈나카우쉬키 어쩌고라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어이가 없다.
참을 수가 없어져 딘은 얇은 면 재질의 겉옷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로 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샘도 굳이 묻지 않았다. 다만 호주머니로 손을 집어넣은 채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가며 어둠에 젖은 도로를 천천히 걸어갔다. 어차피 행선지는 정해두지 않았다.
이제 곧 여름 (* 드라마와는 별개로 배경은 2007년입니다) - 머지 않아 곧 닥칠 찌는 듯한 더위를 벌써부터 반색하며 날벌레들이 울부짖었다. 그것들은 불켜진 건물 유리창을 향해 나이 든 노파처럼 부들부들 떨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카미카제식으로 돌진하곤 했다. 완전히 미친 짓이었다. 살겠다는 의지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행위였다. 머리가 깨져 죽은 벌레들의 사체가 가로등 주변으로 낙엽처럼 널렸다. 딘은 심기가 불편해졌다. 강하고 텁텁한 바람이 불어와 그것들을 주차된 차량 아래로 아무렇게나 쓸어넣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바닥에 붙박힌 몇 마리의 벌레 껍질이 발에 밟혔다. 느낌은 바싹 구워진 땅콩 껍질 같았다.
이제 그들은 두 블록을 걸었다.

『더워.』
목이 마르다고 생각했는데 튀어나온 말은 약간 엉뚱했다. 하긴, 더우니까 목이 마른 것이리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딘은 입고 있는 셔츠의 목깃을 헐렁하게 잡아당겼다.
『비는 안 오려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눈을 길가 가로등에 똑바로 고정시켰다.
어느새 걷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돌진, 돌진, 돌진... 제어할 수 없는 에너지. 카미카제.

샘은 여태껏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보폭을 일정하게 하고 얌전히 따라오는 것이 전부이다.
덕분에 약간은 소름끼쳤다. 야근을 끝마치고 늦게 귀가하는 아가씨들을 노리는 치한처럼, 아니면 도깨비처럼 - 그렇다면 겁에 질려 핸드백을 움켜쥔 여자는 누구라는 건가 - 착실하게 딘의 그림자를 밟았다. 이게 만약 영화였다면 스산한 음악이 배경으로 깔리면서 뒤편을 부지런히 힐끔대는 여자의 눈동자가 크게 클로즈업 되었을 거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탓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남자는 좌우를 두리번 거리지도 않는다. 오로지 눈앞의 표적에게만 집중한다. 짐승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는 이미 그 시선으로 여자를 발가벗겼다. 단추를 푸는 그런게 아니라 찢어발기는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마지막은 역시 그건가.「누가 나 좀 살려주세요~!!」라는 비명?
신고 있던 하이힐을 벗고 냅다 맨발로 달려야 하는가를 고민하며 주먹으로 눈두덩이를 눌렀다.

『샘.』
『응.』
『부탁할게. 그만둬.』
샘은 제자리에 우뚝 멈추어섰다.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딘.』
그리고 천하의 딘 윈체스터를 충분히 겁 먹게 만들고도 남을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직은.』

그럼 나중에는 뭔 짓을 저지르겠다는 얘기밖에 되지 않잖아!
온몸의 살과 뼈가 제멋대로 튕겨올랐다. 발목이 아스팔트 밑으로 파묻혀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샘은 경직되어 있는 형을 천천히 지나쳐 한창 성업중인 주점으로 눈길을 주었다. 때맞춰 조잡한 오렌지색으로 칠해진 문이 열리면서 적당히 술에 취한 남녀가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고 튀어나왔다. 감자와 조개가 같이 조리되는 맛있는 냄새가 그 틈새로 풍겨나왔다.
텅 비어버린 휴지통 같은 얼굴을 한 샘이 서로에게 반해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는 연인을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엉뚱하게도 배가 고프다는 투로 코를 킁킁거렸다.

Posted by 미야

2008/05/12 15:51 2008/05/12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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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펜펜 2008/05/12 18:12 # M/D Reply Permalink

    안녕하세요! 갑작스레 죄송합니다. 소설을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마침 올라왔길래 냉큼 달려들었어요. 역시 형제 둘이 나오면 그저 마냥 좋네요. 뜬금없이 튀어나왔지만, 언제나 잘 보고 있습니다.

  2. 로렐라이 2008/05/12 18:15 # M/D Reply Permalink

    아이고 세상에나!
    덩실덩실덩실덩실 풍악을 울려라 얼쑤 ㅠㅠ 그렇게나 기다리던 미야님의 스톱워치 신드롬이 올라오니 밀려오는 기쁨의 홍수속에서 그저 행복해하고 있어요!
    곧 터질것만 같은 열기와 분노를 꾹꾹 눌러담은채로 으스스하게 뭔가를 노리는듯한 샘의 모습을 보니 제 가슴이 다 서늘해지네요orz 푸왁 터져나오는 분노보다도 이렇게 행동하는 샘의 모습이 곱절 무섭구요. 슈내 315에서 형이 곧 지옥간다는 생각때문에 좀비로 만들 생각까지 했던 샘의 모습이 언뜻 겹치면서 왠지 안타까워요orz
    아슬아슬한 분위기 속에서 앞으로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너무 궁금합니다! 잘 보고 다음편 목빠지게 기다리고 있을게효! (아아 스톱워치 신드롬 제목 보고 씨익 미소짓다 밑에 이어지는 미야님의 짧은 코멘 보고 큰 웃음 터졌네요 푸하핳 ) 감사합니다!

  3. 레인 2008/05/13 15:29 # M/D Reply Permalink

    흐억.. 요즘 형제 소설을 찾고있다가 이렇게 미야님 사이트를 알게되어서
    참으로 기쁘네요(응?) ㅠ.ㅠ
    정말 훈훈한 픽 잘보고 갑니다. ㅡ,.ㅡ(아놔 코피!)
    그리고 다음편을 목말라하고 있어요

  4. vishu 2008/05/14 21:12 # M/D Reply Permalink

    정말 샘딘?그렇다면 그저 감사드릴뿐..ㅡㅜ
    미야님 글 정말 잘 보고있어요.
    딘샘을 절대 피하던 제가 감사히 볼 정도로..
    그런데 미야님 '스톱워치 신드롬'이 안되면 'stopwatch syndrome'은요??(퍽)

  5. 미야 2008/05/14 21:16 # M/D Reply Permalink

    어... 왜 샘딘이라고 생각을...? ^^;;

  6. 비밀방문자 2008/08/27 23:59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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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뭥미~ 하실 분들이 많을 거예효. 그치만 단편은 단편이 아니고, 이야기의 끝도 아니죠. ※


샘은 신중한 아이다.
원래부터 생겨먹길 그렇기도 했거니와「어쨌든 진격! 그런데 이 망할 캠코더의 야간 모드는 어떻게 작동시키는 거지?」인 아버지와「어라, 소금인줄 알았는데 후추였네. 엣취!」인 형이 가족으로 있는 이상 그것은 샘이 짊어져야 할 숙명이었다. 하나가 부족하면 다른 하나가 그것을 대신 채운다 - 세상의 이치는 그렇게 돌아갔고, 나이 어린 샘은 침착하고 고요한 얼굴로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사용한 물건은 제자리에, 음식은 열 번씩 꼭꼭 씹어서, 걸고리는 꼭 잠궈 문단속을 철저히.
덕분에 새로 사귄 여자 친구를 만나러 몰래 창문을 뛰어넘고 하던 딘은 새벽마다 봉변을 당하기 일수였다. 차가운 이슬에 젖어 오들오들 떨었던게 모두 몇 번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융통성 끝장인 막내는 누가 부탁을 한 것도 아닌데도 딘이 반쯤 조작해둔 뒷문의 열쇠까지 강제로 돌려놓곤 했던 것이다.
그랬던 샘이... 그딴 건 내 알바 아니라는 식으로 구는 건 생각하기 힘들다.

『문이 그냥 열려져 있더구나.』
기세가 한 풀 꺾인 딘은 계면쩍은 표정으로 출입구 쪽을 흘깃거렸다.
문짝을 발로 걷어차며 제7기병대를 습격하는 인디언인양 한바탕 이야이야호를 계획했던 그가 곤두선 눈썹을 도로 내린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손잡이를 돌리자 거짓말처럼 문이 스륵 열려버린 것이다.
빗장이 풀린 성문 앞에서 적의 요새를 함락하라 고함을 지른 장군님은 얼굴이 벌개졌다. 성루 높은 곳에선 제갈량이 한가롭게 금을 뜯었다. 튼튼한 사다리를 준비하고 성벽을 기어올라갈 준비를 마친 부하들은 저마다 멍한 표정을 지었다. 부주의하게 잠금 장치를 눌러놓는 걸 잊다니, 어이가 없다. 아니, 사실 어이가 없는 건 다른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좀도둑 환영이라고 아예 푯말이라도 써서 붙여놓지 그래.』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쓴 샘은 대답을 하기에 앞서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를 내는 건 의외로 까다로워서 삼류 코미디 배우가 교과서를 읽는 어투로 대사를 읊는 것만큼이나 어색했다. 그리고 코맹맹이 소리는 노력한다고 빠르게 감춰지지도 않았다.
『어차피 훔쳐갈 것도 없혀. 가방엔 양말밖에 안 들었혀.』
『그러냐. 척 보기에도 그런 것 같긴 하다.』
『갖고 싶다면 와서 가져가라고 그래. 멍청한 도둑 같은 거, 내가 알게 뭐햐.』

뻣뻣한 통나무 동작으로「우리 마을」이란 제목의 무대에 올랐던 동생이다. 그래서 저 아래 객석에선 킥킥 웃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더랬다. 딘은 아랫배에 잔뜩 힘을 주고 억지로 참았지만 당혹스러워 하는 동생과 눈이 마주쳤을 적엔 설사가 터지는 것처럼 해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샘의 장래 희망이 배우가 아니라서 천만다행이었다. 애가 셋이나 딸린 삼류 프로레슬링 선수가 되겠다고 해도 기꺼이 응원해줄 작정이었지만 배우가 되겠다고 하면 그때는 얘기가 달랐다. 천둥과 번개 사이를 달려나가는 슬프고 아름다운 공주의 이야기를 유니콘이 거억 트림하는 이야기로 바꿔놓는게 바로 샘 윈체스터였으니까.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계속 실수하는 저 아이, 참 귀엽네」웃던 아줌마의 옆 얼굴이 빠른 속도로 딘의 마음을 헤집었다. 십 수년이 흐른 오늘에 이르러 다시금 뱃가죽에 힘을 주었다. 연기가 그게 뭐냐 야유하는 건 어디까지나 나중이다.
『너, 혹시 내가 와서 데리고 가주길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거냐?』
멍청하다 싶도록 똑바로 날아온 직구에 샘은 곧바로 몸을 경직시켰다.
『아냐!』
『그래?』
『미쳤혀?! 내가 형을 왜 기다혀!』
『흐음. 그렇구나.』
딘은 평범한 인간이라 구름이 낮게 깔린 하늘에서 징조를 보고, 바닥에 떨어진 자갈에서 신의 메시지를 읽어내는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도 그는 크게 한숨부터 내쉬었다. 사실 이건 그다지 고차원적인 것도 아니다. 카드에 적힌 숫자가 3이면 눈으로 보고「3」이라고 소리내어 읽기만 하면 되었다. 바람에 섞여 비릿한 냄새가 나니까 오후 늦을 무렵부터 비가 올 것 같다고 말한다. 구태여 예레미야가 가진 놀라운 능력따윈 필요치 않았다. 지팡이를 쥐고 푸른 연기가 피어오른 산등성이로 올라가라. 그곳에 인가가 있다. 아무렴 야생 곰이 밥 짓겠다고 장작불을 지피겠는가.

『그럼 전화번호부 책자에 제일 먼저 등재된 모텔로 짐 락포드라는 이름으로 투숙은 왜 했어.』
샘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치다. 사과 파이에 사과가 왜 들어가느냐고 질문하면 할 말이 궁진해진다. 너무도 당연한 걸 묻다니? 이마에 가는 주름이 잡혔다. 이래선 열 세 번째 종소리를 내는 괘종시계를 찾아 전국을 쏘다니는 괴짜 수집가의 이야기가 훨씬 자연스럽다.
『무슨 소리야, 딘? 그게 우리끼리의 약속이잖아. 떨어졌을 때 서로를 찾는 방법... 아!』
짧게 외마디 소리와 같이 해서 얼굴이 확 하고 달아올랐다.
그랬다. 그런 거였다. 사전에 약속된 짐 락포드의 가명을 사용한 건 결국「날 찾아주세요」라는 의미밖에 되지 않는다. 자신도 몰랐던 걸 한 번 깨닫고나자 피가 머리로 몰렸다.

『모, 몰라!』
『야! 이불 속으로 도로 숨지 마!』
『시끄럿! 난 자는 중이야!』
죽을 힘을 다해 이불 끝자락을 움켜쥐었다. 얄팍한 자존심이 푸쉭 소리를 내고 주저앉은 마당에 벌겋게 달아오른 뺨까지 들키는 건 꼴불견이다. 팔꿈치로 등 한가운데를 꾹꾹 찔러대도 안 되는 건 안 된다. 걸죽한 녹색으로 가득찬 단지가 스푼으로 마구 휘저어지는 걸 상상하며 모로 돌아누웠다. 순간 마녀의 요술 솥단지를 닮은 그릇 속에서 쿨렁 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하게는 낡은 침대 스프링이 체중에 못 이기는 소리였지만, 아무튼 샘은 고슴도치처럼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난 몰라. 하나도 몰라. 그렇게 개구리 뒷다리를 잘게 썰어놓은 것에 쓴 맛이 나는 잡초를 버무려 아무도 입에 대지 않을 죽을 쑤었다.

화덕에서 냄새 고약한 연기가 피어오르자 딘은 제대로 짜증이 났다.
『샘!』
『다 필요 없어. 날 그냥 내버려둬.』
『고집은 그만 부리고 돌아가자.』
『어디로?』
집이라고 할 장소가 그들에겐 없다. 따스한 불빛이 스며나오는 곳, 매일 밤 돌아가 지친 머리를 뉘일 수 있는 곳... 한줌의 안식이 허락된 장소... 샘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어디로 돌아가자는 거야? 딘.』
냉소적으로 쏘아붙이며 주먹을 쥐었다.
『형의 임팔라가 주차된 모텔? 웃기지 말아.』
희미한 전등불 아래서 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비뚫어진 즐거움이 독버섯처럼 자라났다.
『거긴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 아니야. 깔깔한 소금이 사방에 그득그득하고, 베개춤에 칼이 숨겨져 있고, 서랍속엔 권총이 들어가 있고... 단지 그뿐이잖아. 지긋지긋한 그딴 것들, 내가 알게 뭐람!』
등유를 입에 가득 머금고 있는 것처럼 해서 혀가 굴러갔다. 입속에서 냉기가 흘러나왔다.
『아님 형은 싸구려 계집들이랑 뒹굴 동안 짐을 안전하게 지켜줄 사람이 필요한 거야? 하! 그거 참 미안하네. 내가 이렇게 나와버렸으니 더러운 병균 투성이 여자들과 재미를 못 봤겠군.』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지금 웃고 있는가. 아님 찡그리고 있는가.
『도대체 딘은 나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 거야? 형이 밤새도록 창녀들과 놀아날 적에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모텔방에서 죽치고 있을지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있어? 음? 그쪽이 네 다섯 병의 맥주를 마시는 동안 나는 손톱의 반을 먹어치우지. 딘이 샹들리에 귀걸이와 배꼽 피어싱에 눈길을 돌릴 적에 나는 벽장이나 노려보고 있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딘은 지금 웃고 있는가. 아님 찡그리고 있는가.
『다 알고 있으면서!』
모든게 엉망진창.
『돌아가! 내 옆에 다정하게 누워줄 것이 아니라면 당장 꺼져버려!』
덧붙이는 말은 완전히 정 반대.
『혼자는 싫단 말이야!』
아마도 머리가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샘은 낄낄거리고 미친 사람처럼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온 딘은 발버둥치려던 샘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안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건 샘이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흔들면서 뿌리치려 했다.
『만지지 마! 꺼져!』
『알았어. 갈게.』
『아냐! 가지 마. 가지 말아줘! 여기에! 여기 있어!』
막내가 이랬다 저랬다 변덕을 부리는 건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다. 딘은 눈을 감았다.

『있잖아, 새미.』
부드러운 머릿결을 반복하여 쓰다듬으며 딘이 말했다.
『듣자하니 스톱워치 신드롬이라는 것이 있다드라. 그러니까... 거 뭐시다냐. 너무 붙어 있으면 인질이고 범인이고 하나가 되어버린다는 거야. 나와는 달리 머리가 좋으니까 넌 그게 뭔지 이미 알고 있겠지?』
『재미 없어. 지금 스톡홀름 신드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그거였나. 아무튼 지나치게 가까이 있으면 서로 머리가 돌아버린대.』
『뭐? 그러니까 딘이 테러리스트고 내가 인질이라고?』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그리고 왜 내가 범인이야! 네가 범인일 수도 있잖아.』
『눈 흘기고 그래도 어림 없어. 난 죽어도 범인 안 해.』
『그려. 내가 악당 할란다. 알았으니 네가 인질 해.』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잖아, 하고 딘이 불평했다.

『들어봐, 새미. 형도 그동안 많이 고민해봤는데 말이지... 우리가 지금 그 상태가 아닐까 싶어. 있잖아... 때로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해. 총을 전자렌지에 데워 먹어버려야 한다고 믿어버리거나... 모듬 발로 껑충껑충 뛰어서 기찻길을 건너는게 옳다고 하거나... 그게 의무이자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을 하지. 그리고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을 향해 되묻는 거야. 뭐가 잘못되었나요. 나는 정상이랍니다. 그런 눈초리로 쳐다보지 마세요...』
『딘?』
『스트레스 때문이야.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63번 고속도로를 타고 계속해서 달린 다음, 불 켜진 술집에 들러 데킬라를 마시고, 고주망태가 되어버려선 아침까지 쭉 뻗어버리면 돼.』
『딘...』
『착각이야.』
강한 어조로 반복해서 말했다.
『이 혼란스런 감정들은 그저 착각에 불과해.』

노란 스탠드 조명 아래서 딘의 얼굴은 유령처럼 떠다녔다. 목소리도 유령 같았다.
『여자를 안아, 샘. 그럼 알 수 있어.』
『나더러... 여자를 안으라고?』
『개나 소나 아무나 안으라는 건 아니야. 좋은 사람을 찾아. 네 마음에 드는... 괜찮은 사람을.』
못이 박힌 손바닥이 샘의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럼 지금의 이 모든 소동이 우스꽝스럽게 여겨질 거다. 지나고 나면... 웃기기만 할 걸. 맥주를 마시면서 농담조로 지껄일 이야기 꺼리가 될 거라고.』

샘은 물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딘은「날 믿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샘은 혼잣말을 했다.

그의 얼굴이 가라앉았다.
굳이 비유하자면 뭐랄까, 표백제로 깔끔하게 지워진 하얀 담벼락 비슷했다. 이것은 좋지 않았다.
안색을 살피며 그 눈을 머뭇머뭇 응시했다.
『샘?』

동생은 가게에서 양파를 뺀 햄버거라도 주문하는 투로 명랑하게 대꾸했다.
『죽여버릴 거야.』

Posted by 미야

2008/05/04 22:25 2008/05/04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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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렐라이 2008/05/05 15:27 # M/D Reply Permalink

    야호~ 덩실덩실 ㅠㅠ 드디어 파로 막편이 올라왔네요!
    아..전 이번 단편에서 내심 둘의 마음이 통하기를, 딘이 샘의 간절함을 받아들이고 그만 인정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역시 끝까지 스톱워치(잠시 웃겠습니다 으하하핳!)가 아닌 스톡홀름 신드롬 이야기를 꺼내며 여자를 안으라고 샘에게 말하네요 ㅠ 아아 안타까워요..ㅠㅠ 둘이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고싶은데 말이죠.
    이제 파로가 끝났는데 여기에 이어지는 단편내용을 더 쓰실 생각인지 아니면 본편 진도를 나가실건지 매우 궁금합니다! 전 어떤쪽을 택하시던지 둘다 좋지만요~ 아무튼 많이 기다렸던 것 만큼 재밌게 잘 읽고 갑니다! ㅠㅠ

  2. 아이렌드 2008/05/06 09:45 # M/D Reply Permalink

    아~ 이제 피튀기는 혈투가 시작되는 겁니까? SN 첫회에서 이 둘이 어둠속에서 툭닥거리는 장면(자체해석은 안돼요~)은 정말 좋았지요. ㅋㅋㅋ 누님들은 이 혈투 말고 다른 쪽 혈투를 간절히 바랬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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