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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조사] 풀피리 07

제2장 혼백, 망령, 그리고 엉망진창

※ 오리캐×설양(아님!) BL 호러물입니다.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게임 오버 화면을 보는 느낌이었다. 주위는 그저 검고, 까맣고, 시커멓고, 어두웠다.
죽음에 이른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 여전히 당혹감에 빠져 어찌할 바 몰라 했다.
영화나 소설을 보면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빛의 사다리가 내려온다던가, 좁고 어두운 동굴을 지나 사바나 초원이 펼쳐진다던가, 아니면 저승사자가 나타나 수첩을 펼치고 주민등록번호를 물어본다던데 내게는 해당 없는 일이었다.
주먹을 쥐락펴락하다 ‘아무나 계십니까?’ 크게 외쳐봤다.
목구멍 밖으로 나온 외침은 물 먹은 느낌이었고 별 반응이 없었다.
크게 낙담하며 제자리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남들도 그런 거야, 아님 나만 이런 거야. 다음은 드레곤이 돌아다니고, 영주가 있고, 이름이 알렉스나 카일이 되는 영어권 세계로 떨어지는 거 아냐? 아... 진짜 다음번엔 언어패치 제대로 해줘야 하는데.’
쓸데없는 희망사항을 중얼거리며 가슴팍을 더듬거렸다.
피가 흐르지는 않았지만 검에 찔린 자리는 적자색의 상흔으로 남아있었다. 날이 날카로웠던 탓에 뼈를 가르고 상처는 가슴에서 거의 등까지 닿아 있었다.
순간 열이 확 올라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땅을 다시 쳐다봤다.
지학(※15세)의 나이도 되지 않은 어린애를, 여자 손목도 붙잡아보지 않은 애를 이렇게 죽이면 과잉살상 아니냐고.
바람구멍이 난 옷깃을 단정히 여미며 쓰게 웃었다. 전생 시절 할머니 말씀으로는 사람이 큰 상처를 입고 죽으면 환생해도 그 자리에 좋지 않은 큰 반점이 생긴다고 했다. 사람은 곱게 죽어야 한다,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목에 있는 붉은 반점을 보여주시곤 했다. 이제 앞으로 내가 그 말을 하게 생겼다. 다시 태어나면 분명 가슴에 큰 흉이 있을 테니.
‘설양, 이 개새끼. 이럴 줄 알았으면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걷어 차주는 건데.’
비통하다는 감정 이전에 약이 바짝 올랐다.
‘아 진짜. 그 새끼 딱 한 번만 때려봤음 좋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난 죽었는데. 숨이 끊어지기까지 고통이 짧았다는 점에 위로를 얻는 수밖에.

그만하면 충분히 쉬었다는 판단을 하고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넋 놓고 있다 그대로 먼지가 되어버리면 곤란하니 여기서 나갈 길을 찾아보는 것이 좋을 듯했다.
그래서 길을 잃었을 적에 써먹기 좋은 대처법 – 손바닥에 침을 뱉곤 손가락으로 튕겼다.
동서남북도 확실하지 않은 장소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기도 했으나, 저승에서 조난당할 수는 없는 일이다. 침방울이 날아간 방향을 확인하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저기요... 여기 누구 없어요?!”
저승사자가 파업 중인가.
아니면 그간 이름 없이 살아온 여파인가.
평소 내 이름으로 불리던 ‘걸람’은 거지를 먹 냄새 나도록 부른 것에 불과해서 저승사자 명부에 오류가 생겼을 수도 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저기요? 여보세요?’ 마구 외쳤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오류를 바로잡는 업데이트가 계속 지연되고 있는 건지 저승사자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눈앞에 나타난 건 흰옷 차림새의 망자였다.

가슴이 먹먹했다.
‘비명소리가 심상치 않더니, 선사도 나와 같이 죽었구나.’
하얀 옷엔 핏자국이 낭자했고 올려 묶은 머리는 풀어헤쳐져 산발이었다.
엎드린 자세였기에 내 쪽에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는데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먹 쥔 모양과 몸을 떠는 모습만으로도 품고 있는 분노와 좌절감이 충분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더하여 고통도 심해보였다. 신음하며 오른손을 뻗어 바닥을 세게 긁었는데 손등으로 검게 변한 핏줄이 도드라지게 솟아나온 게 보였다. 부풀어 오른 혈관은 금방에라도 터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터지면 새빨간 선혈이 아닌 먹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게다가 손만 저런 상태인 게 아닌 것 같아.’
숙이고 있는 목덜미에도 나무뿌리가 지나간 것 같은 검은 선이 보였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내 기척을 알아차린 건지 선사가 아, 아, 이러며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내었다.
나는 가만히 도망갈 태세를 취했다. 아무래도 선사는 죽어 악령이 된 듯했다.
지금이다.
하지만 걸음아 나 살려라 달아나는 내 동작보다 선사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그녀의 두 팔이 몸체에서 뚝 떨어져 나오더니 무슨 로켓처럼 날아와 도망치던 내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잠깐만! 잠깐만요! 선사님, 살살! 제발 살살!!”
어깨가 어떻게 되는 줄 알았다. 애걸에도 아랑곳없이 몸통에서 떨어져 나온 팔은 날 어디론가 끌고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한참을 끌려가 어딘가에 내동댕이쳐졌을 적에 나는 거의 반 기절 상태였다.
산 사람도 아니고 망자였는데도 정신이 반쯤 날아갈 정도니 심각하게 빠른 속도였다.
환상통처럼 멀미가 났고 엎드려 구역질했다.
귀신이 된 주제에 이게 다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 한참을 웩웩거렸고 초항성 워프를 마친 엔터프라이즈호 선원이라도 된 느낌을 원 없이 만끽했다. 두통에 어지럼증은 부록처럼 따라붙었다.

“택무군! 사령입니다! 사령이 여기까지!”
“조용히 하거라. 운심부지처에선 소란 금지다.”
“하지만 사령이!!”

웅성거리는 분위기에 천천히 고개를 들자 오래된 큰 절간 같은 곳으로 장소가 달라져 있었다.
열린 창밖으로는 푸른 나무가 빼곡했고 편백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를 머금은 공기는 서늘했다.
눈꺼풀을 깜빡이며 사방을 두리번거리자 시야가 약간 더 밝아졌다.
건물 안쪽 문방사구를 놓은 서안 앞으로 꽤 젊어 보이는 청년이 앉아있었는데 용모가 따뜻하고 우아했다. 평소에도 예의바르고 점잖을 것 같은 사내였는데 나의 갑작스런 등장에 감정적으로 동요를 한 탓인지 눈매가 살짝 치켜 올라가 있었다.
입구에는 개개인의 구분이 잘 가지 않는 비슷한 흰옷을 차려입은 소년들이 서너 명 모여 내가 있는 방향을 향해 일제히 손가락질하는 중이었는데 호들갑에도 불구하고 소년들의 준수한 외모로 인해 그 삼감 없는 태도가 무례하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역시 사람은 잘 생기고 볼 일이다.

그나저나 어쩐다. 어쩌다보니 대치 상황이 되어버렸다.
밖으로 나가려니 입구에 선 소년들이 쉽게 길을 내어줄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다.
남의 집안까지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날아들었지만 내가 의도한 것도 아니고... 천천히 서책이 가득한 책장이 있는 쪽으로 물러섰다. 여차하면 책을 들어 던질 작정이었다.
간소하게 꾸민 방안에선 던질만한 물건이라곤 책밖에 없었다.
구석에 자리한 네발 향로는 크기나 무게로나 무기로 써먹기에 적합했지만 부숴먹기엔 고가품이었다.
양심이 있지, 정교하게 조각된 향로는 박물관에서 볼 법한 물건이었다.

“이럴 수가. 결계를 깨고 사령이 여기까지 들어오다니!”
“사령이 움직입니다!”
“택무군! 어떻게 하죠?! 공격할까요?”
애들이 더 난리가 났다.
그리고 나도 덩달아 난리가 났다. 금방 죽어 영체가 된 몸인데 책을 집어들 수 있을 리가.

“숙부님은 어디에 계시지. 명당에 누가 있느냐.”
서안에 앉아있던 자가 침착하게 운을 떼며 책에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나를 향해 강하게 시선을 주었다. 나는 귀신인데 매우 잘 보이는 눈치다. 더듬거리며 책의 표지를 만졌을 적에 표정이 매우 나빴고, 손을 떼자 올라갔던 눈썹이 도로 내려온 걸 봐선 보이는 게 맞았다.
“저 사령은 초혼으로 불려나온 것이 아닙니다. 명당에는 지금 아무도 없습니다, 택무군. 선생님은 운심부지처 밖으로 외출 중이세요.”
그리고 바로 그때 낮은 탁자에 놓여있던 고금이 디링, 딩 소리를 내며 저절로 울렸다.

자리에 있던 사람과 귀신이 모두 놀랐다.
소년들에게 택무군이라고 불리운 사내가 내 쪽을 향해 다시 시선을 주었다. 마치 ‘자네가 그런 건가.’ 묻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그런 게 절대 아니었다. 전생에서도 그랬고, 걸람도 그러했고, 나는 악기를 다루는 일에 매우 서툴렀다. 유일하게 잘 썼던 악기가 탬버린이니 말 다했다. 그나마 박자감이 떨어져 노래방에서 신나게 탬버린을 흔들다보면 부장님이 ‘곱게 말할 적에 내려놔!’ 호통을 치곤했다. 그런 내가 금을 뜯었겠냐고.

“방금 전, 그 소리! 문령이었나요?!”
소년 중 하나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그렇다.”
심각한 표정을 한 택무군이 금에서 난 소리가 문령이 맞다고 확인해줬다.
“뭐라고 하던가요.”
“그게 ‘사부님’ 이라고...”

그리고 나는 보았다.
그때까지도 내 어깨를 잡아당기고 있던 여인의 하얀 팔이, 투명하게 빛나던 선사의 조각난 몸이, 고운 고루가 되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걸 보았다.
스스로 혼백을 두 동강 내어 ‘사부님’ 이라 단 한 마디만 겨우 외치고.
더 이상의 힘은 남아있지 않다며 거품처럼 공기 중에 녹아내렸다.

Posted by 미야

2021/10/25 16:01 2021/10/25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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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조사] 풀피리 06

제1장 좀비인데 좀비는 아니라고 하더군요

※ 오리캐×설양(아님!) 호러물입니다.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소설을 먼저 읽고 드라마 진정령 정주행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시간대 설정이 충돌합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검은색 깃발은 비를 잔뜩 맞은 잎사귀처럼 무겁게 축 늘어져 있었다.
손가락 끝으로 깃발 모서리를 잡고 잡아 올리자 모피 코트에 버금가는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수상한 건 절대 만지지 말라는 옛 어른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표면을 문질러봤다.
소산에서 접하기엔 천의 재질이 매우 고급스러웠다. 촘촘하고 매끄러운 질감이 느껴졌다.
그 비싼 천에 마찬가지로 값비싼 붉은 염료로 그림을 그려... 잠깐.
깃발을 눈앞으로 가까이 가져갔다. 그림이 아니고 글씨다. 한 획으로 끊어짐 없이 구불거리며 내려온 선의 모양새는 글자 ‘마(魔)’ 다. 중간 중간 기호를 덧붙이고 꼬리털을 붙였지만 분명히 글자였다.
코를 킁킁거리자 천에서 오래된 절간 냄새가 났다. 초피나무 추출물에 소금과 약재를 섞은 방부향이다.

“보아하니 부적이 맞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커. 크면 클수록 영험한 건가?”
선동요 사람들이 마물의 침입을 막으려고 부적을 잔뜩 써서 붙여놓았다더니 이쪽은 물량공세 대신 크기로 밀어붙이려는 듯했다. 깃발의 크기는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 청룡기 정도 되었다. 우승고교 교장선생님이 눈물을 글썽이며 폐막식에서 흔들어대는 그 우승기 말이다.

혹시라도 구김이 간 부분은 없는지 확인하고 – 섣불리 만져 효력이 떨어졌다는 오해를 받는 건 사절이다 – 조용히 뒷걸음질을 쳐 깃발로부터 멀어졌다.
그렇게 일곱 여덟 걸음 떨어졌을 적에 등 뒤로 단단한 나무가 닿았다.
돌아서자 단단한 나무는 어느새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억!”
소스라치게 놀라 반사적으로 눈앞의 몸뚱이를 밀었다.
하지만 사내는 바위처럼 단단해서 꼼짝하지 않았고, 꼴사납게 그 반작용으로 내가 자빠졌다.
별이 뜨지 않은 시각임에도 눈앞에서 하얀색 점이 왔다갔다 움직였다.

하지만 끙끙 앓는 소리를 낼 때가 아니었다.
나무처럼 단단한 가슴이 설양이라는 걸 깨닫자마자 벌렁 누웠던 모양을 무릎으로 기는 자세로 바꿨다.
그는 자신의 몸에 누가 손을 대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이몽룡의 하인 방자가 되어 비굴하게 마주 모은 두 손을 정신없이 흔들어댔다. 꼬리가 달렸다면 흔들었을 것이고, 없어도 흔들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싸구려처럼 보이는 미소를 짓는 게 아니라 서리처럼 차가운 낯을 했다.
시선은 오른쪽을 향해 있었고, 그 방향 끝자락에는 상복처럼 하얀 옷을 입은 인영이 있었다.
거리가 제법 멀어 오감을 수양하지 않은 내게는 상대방의 눈코입이 안 보였다.
그래도 한 점 때 묻지 않은 눈부신 하얀 색만으로도 나는 그 사람이 누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고소 남씨의 문하생이었다.

“따라올 거라 짐작했다.”
“아니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사가 물 흐르는 고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그래. 어중이떠중이는 아니라는 거구나. 그거 참 다행이네.”

나는 가끔 천하의 무뢰배인 설양이 무공을 수련한 사람이라는 걸 종종 잊어먹곤 했다.
아무래도 중학생도 아닌 조폭 두목이 버스요금 시비 붙는 건 이상하다. 객잔에서 소란을 피우며 밥그릇을 깨고 대나무 광주리를 뒤엎는 사내가 몸속에 금단을 맺어 검을 사용한다? 그건 설정 오류다.
하지만 설양은 말단 조직원 같은 행동거지에도 불구하고 진짜로 패검을 쓰는 자다.
그가 가진 검의 이름은 강재. 재앙을 내린다는 의미다.

쨍, 하고 맑은 소리가 들렸다.
갑갑한 검집을 탈출한 금속이 환호성을 내지르자 공기가 푸르게 떨렸다.
뒤를 따라 쨍, 소리가 더 들려왔다. 설영이 검을 뽑자 흰옷의 선사도 따라서 발검했다.
여인이 쓰기엔 검신의 길이도 길고 무게도 제법 있어 보였다. 하지만 커다란 검을 쥔 팔은 올곧았고 떨림이 없었다.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닌데 검기가 실려 이마를 묶은 띠가 나풀나풀 솟구쳤다.

선사가 태세를 취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깃발은 마를 쫓는 부적이 아니에요. 그것은 흑풍기입니다. 일정 범위 안의 음령과 원혼을 불러들이고 사령을 한 지점으로 몰려들게 만들죠. 당장 없애지 않음 사악한 것들이 마을로 몰려가 사람을 공격할 겁니다.”
“알아. 그러라고 꽂은 건데 뭐.”
“지금 뭐라고 했죠.”
“짜증나게... 아줌마는 귀가 어떻게 되었어? 그러라고 꽂았다고.”
말을 마친 설영은 왼손으로 쥔 검집으로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겁니까. 공자.”
“재밌는 일.”
“장난치지 마세요! 배추를 운반하는 저 아이만 해도 그렇습니다. 당신은 제게 저 아이가 사악한 술법으로 만들어진 활시니 마을의 안전을 위해 서둘러 없애야 한다고 했습니다. 빨리 죽이자 여러 번 종용했죠. 하지만 저 아이는 활시가 아니었어요. 동자(※성관계 경험이 없는)이면서 이상하게 양기가 아닌 음기가 서린 몸이지만... 그렇다고 공자의 주장대로 죽여 없애야 할 존재는 아닙니다.”
“아줌마는 흑풍기 기척에 사로잡혀 길에서 벗어나는 아이가 정상이라고 생각해?”
“공자가 일부러 저 아이의 몸에 음기를 불어넣었을 수도 있죠.”
“아냐, 아냐. 그건 절대 아님. 못 믿겠음 맹세라도 할까?”
“장난치지 마십시오, 공자.”
잠시 말을 끊은 수사가 눈을 부릅뜨고 서슬 퍼런 검을 똑바로 들어 설양을 조준했다.
“난릉 금씨의 객원이라 하여 나이는 어려도 산하의 명사일 거라 여겼건만! 마를 물리친다는 깃발은 흑풍기이고, 사술의 증거라던 동자는 증거가 아니구나! 어이하여 내게 거짓을 알린 거냐! 목적이 무어냐!”
“목적 같은 건 없어. 그냥 하고 싶으니까 하는 거고, 하고 싶지 않으니 하지 않는 것일 뿐.”

설렁설렁 대꾸한 설양은 검에 영력을 실었다. 그리고 그걸로 내 배를 푹 찔렀다.

아니, 이보세요. 선사님과 싸우는 거 아니었어? 갑자기 나를 왜 찔러?!!!

고통이 얼마나 극심하던지 머리에 타는 숯불이라도 올라가 있는 줄 알았다.
그럼 재깍 기절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정신 줄 놓는 일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좌우 시야가 확 넓어졌다. 어깨 뒤의 풍경도 보이는 것 같았다. 이게 왜 이런가 곱씹어보니 참호 안에서 포탄 맞은 병사처럼 아드레날린 과다분비 중이었다.
밭은 숨이 쉬어졌다. 헐떡거리며 배에 꽂힌 검날을 내려다보았다. 찰나와도 같은 시간에 끊임없이 생각이 이어졌다. 어쩌지? 이걸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다. 하지만 뽑으면 바로 사망 각이다. 중요 혈관을 건드린 상태라면 복부에 박힌 검날이 마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봐야 했다. 뽑는 순간 과다출혈로 이어져 1분 만에 의식을 잃는다. 그리고 다신 깨어나지 못한다.
어금니가 갈리며 까드득 소리가 났다. 뭐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숨을 들이마시는 것도 어려웠다.
뭐야 이거, 이대로라면 앞으로 3분 남았다. 폐가 수축과 이완을 못하고 있다.

“공자! 지금 무슨 짓입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흑흑! 악독한 년 같으니. 도를 닦은 몸으로 어린애의 몸에 검을 꽂다니!”
“뭐라고?!”
“이 아이는 활시가 아니란 말이다! 그냥 배추가게 머슴이라고! 너에겐 측은지심도 없는가!”
설양이 서럽게 우는 소리를 내며 눈가를 닦는 시늉을 했다. 그러더니 우리 아걸 불쌍해서 어쩌노, 이러고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미, 미쳤어?! 그대가 찔렀잖아!”
“내가? 내가 얠 찔렀다고? 누가 그래? 증인 데려와봐.”

자기가 안 그랬다고 입으로 잡아떼던 설양이 내 배에 꽂힌 자신의 패검 강재를 뽑아냈다.
순간 잔뜩 잡아당겨진 줄이 명료하게 튕기는 ‘텅’ 소리가 머리 안쪽에서 울렸다.
‘끝났군.’
살아남는 건 가망 없는 일이긴 했다만 맥이 탁 풀렸다.

인생의 주마등 그런 건 안 보였다. 꽃밭에서 날 반기며 손 흔드는 조상님, 이런 것도 없었다.
죽음이 임박하자 시야가 급격히 어두워졌고 온몸이 납덩어리처럼 무거워졌다.
챙, 채앵, 굉음을 내며 설영의 검과 선사의 검이 충돌하며 폭발해도 그 소리가 아득히 멀었다. 파도치며 멀어졌다가 일직선으로 달려오는 검의 궤적이 흐려지는 눈에 약간의 잔상을 남겼다. 빛나고 있다 – 검광은 낮에도 저리도 화사하게 빛이 나는 거였던가.
심장이 마지막 기력을 다 해 뛰었고, 한줌의 생명력이 눈꺼풀을 절반쯤 감게 만들었다.

“아아악!”
선사가 비명을 질렀다.
짐작컨대 저쪽도 끝을 본 모양이었다.
설양이 킬킬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내 작고도 여린 심장이 움직임을 완전히 멈추었다.


제1장 좀비인데 좀비는 아니라고 하더군요, 끝.

Posted by 미야

2021/10/22 17:03 2021/10/22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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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조사] 풀피리 05

제1장 좀비인데 좀비는 아니라고 하더군요

※ 오리캐×설양(아닐 걸?) 호러물입니다.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소설만 읽은 상황이며 이해부족으로 원작 설정이 미세하게 뒤틀릴 수 있습니다. 드라마 진정령 보기 시작했는데 소설과 설정이 틀려! 주요 커플링은 원작자의 요청에 따라 건드리지 않습니다.


“아걸. 아무리 생각해봐도 너는 구제불능의 천치인 것 같아.”
아껴먹으려고 남겨뒀던 밀과를 덥석 깨물어 삼키는 설양을 짠 눈으로 쳐다보았다.
나더러 바보 아니냐고? 남들 다 아는 이야길 새삼스럽게.
거짓말 보태지 않고 두 번 우물거리자 설양의 목울대가 꿀꺽 움직였다. 나는 일곱 번 씹었는데 저 새낀 그냥 초고속 광선 랜이었다.
아무튼 밀과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나는 어깨를 으쓱여 애써 아무렇지도 않다는 티를 냈다.
화내지 말자. 나는 어른이다.

“안 들리는 척하냐. 바보라고, 너.”
안다니까 그러네.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빙의자에게 언어패치 정도는 해주던데 말이지.
일개 회사원이던 내가 전염병으로 죽고 한 어린아이 몸에 빙의되었을 적에 귀에 들려오는 건 혀 꼬부라지는 중국어였다. 할 줄 알았던 중국어는 워아이니 이게 전부인데 예고도 없이 실전 중국어 상황으로 떨어진 거다. 몸은 아프고 기운도 없는데 주변 사람이 하는 말은 중국어...
소산 사람들이 내가 귀머거리에 벙어리라고 착각한 까닭이 이거다.
갑골문자 닮은 희한한 한자를 쓰는 건 지금까지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 판국이고, 말을 지금과 같이 유창하게 구사하기까지는 무려 3년이 걸렸다.
이세계로 떨어진 주인공은 한 달이면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높으신 분들과 친분이 생기며, 상단 일을 배워 큰돈을 벌어들인다던데 그와 비교하면 매 맞는 배추가게 머슴이 된 나는 확실히 바보 맞았다.
 
“저 태평스런 낯가죽 하며. 쯧쯧. 이렇게 머리가 나빠서야. 심지어 눈치도 없고.”
채소가게 기둥에 기대어 선 설양은 느른하게 팔짱을 꼈다.
“너, 고소 남씨 수행자가 굳이 너 하나를 찍어 따로 보자고 한 까닭이 뭔지 알고는 있어?”
글쎄다. 선사는 이 주변으로 사기가 충만하고 주시가 목격되고 있어 알아보는 중이라고 했다. 나를 콕 찍어 보자고 한 건 내가 옆 마을까지 배달을 나간 당사자라서 그런 거고. 목격자 조사 이런 거지.

짐짓 눈을 감고 있던 설양이 한쪽 눈만 슬며시 치켜떴다.
“사기가 짙어 원인을 알아보고자 한다? 그럼 밖으로 나가 주시부터 찾아봤겠지. 그런데 그 인간은 마을 밖으로 나가지 않고 대신 널 찾았잖아. 거기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들어?”
지금 현장 확인을 빼먹었다고 그러는 건가. 그런데 그게 꼭 순서가 정해져 있는 건 아니잖아. 목격자 탐문을 먼저 하고 현장 확인을 하러 나갔을 수도 있는 거고.
나는 뺨을 긁적거렸다.
“딱히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드는데요.”
“거 봐라. 눈치가 발바닥이다.”

뒷짐을 지고 자세를 바로잡은 설양은 거드름을 피우며 가게 안으로 세 걸음 들어왔다.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없이 우리 둘을 보고만 있던 송씨 셋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대들보 무너진 사당을 봤다는 식으로 손도 떨었다.
설양의 따라붙는 시선에 얼른 손을 감추었지만 셋째가 떠는 모습은 나도 봤다.
“재밌어... 당사자인 아걸 빼고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아는 듯한데.”
패션쇼 워킹 모델처럼 제자리에서 휙 돌아선 설양은 아직은 가게 지붕을 무너뜨릴 때가 아니라며 세 걸음 후퇴해 가게 밖으로 나갔다.

“아걸. 활시가 뭔지 알아?”
“활어는 알아도 활시는 모르는데요. 설 공자.”
“그럼 오늘이 가기 전에 활시가 뭔지 알아놔. 과제야.”

나는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라서 하라는 대로 했다.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달려가 활시가 무엇인지 아느냐 물었다.
의미가 좋은 건 아닌 듯했다. 보지나 잠지 같은 천박한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열에 아홉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내 몸을 밀쳤다. 한 명은 아무 것도 안 들려요 무시하고 저 가던 길을 갔다.

가게로 돌아와 미친 척하고 송씨 부인에게 활시가 뭔지 아느냐 물었다.
그 즉시 솥뚜껑 손바닥이 날아와 내 머리를 후려쳤다.
“그동안 먹여주고 입혀준 은혜도 모르고! 감히 내 앞에서 그따위 단어를 입에 담아?! 활시라니. 그럼 내 남편이 사술을 부리는 이릉노조라도 된다는 거야?! 자기 손으로 밤 껍질도 못 까는 사람이 의장에서 숨이 끊어진 죽은 널 꺼내와 사술을 부렸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애고 아파. 이릉노조는 또 뭔데요.”
“닥쳐! 어디서 이상한 소문이나 주워 먹고 들어와 입에 올리지 말아야 할 걸 담는구나!”
“소문은 먹는 게 아닌데요, 부인.”
“어디서 말꼬리를 잡고 늘어져! 그럼 말해보렴. 네가 활시니? 활시냐고!”

눈에 핏발을 비치며 노성을 터뜨리는 송씨 부인과는 전혀 대화가 되지 않았다.
결국 내가 궁금해 하는 걸 알려준 이는 거름을 운반하는 지게꾼 노인 진수였다.
노인은 하루도 쉬지 않고 거름을 밭에 뿌리는 일을 했기에 몸에서 풍기는 악취가 참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했다. 그 탓에 소산에서 나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진수 노인이 유일했다.

“숨을 쉬고 살아 있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체인 걸 활시라고 한단다.”
“에엑? 말도 안 돼. 세상에 그런 게 다 있단 말예요?”
“어찌하여 놀라느냐. 마을 사람들 말로는 네가 활시라던데. 활시가 활시더러 세상에 어찌 존재하느냐 놀라워하다니.”
시커먼 색의 국물을 흙에 쏟아 부으면서 노인이 껄껄 웃었다.

“제가 진짜로 활시에요?”
내 질문에 노인이 웃음기를 싹 지우고 ‘어랍쇼?’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 바보 멍청이가 뚱딴지같은 말을... 당연히 넌 활시가 아니지. 그냥 소문이 그렇다고.”
“무슨 소문인데요.”
“그냥 뭣 같은 소문이야. 배추가게 셋째가 어린 비렁뱅이 거지를 죽여 관을 보관하는 의장에 몰래 숨겼는데 일이 들통 날 걸 두려워한 아비가 비렁뱅이의 시체를 꺼내와 활시로 만들었다고 하더구나.
처음에는 숨만 쉬고 꼼짝을 못했는데 어느 날부터인지 점차 말을 하고 무거운 짐도 번쩍번쩍 들기 시작했다고... 활시라서 밥도 안 먹고 일만 한다며 채소가게 부부가 아주 좋아했다는 거야.
한 가지 문제라면 활시의 몸으로 음기가 잔뜩 모여들어서... 그래서 부근에 시변하는 자가 늘었다지.”
화가 나 실소가 절로 나왔다. 이건 박수를 절로 쳐주고 싶은 개소리가 아닌가.
“인석아! 갑자기 벌떡 일어나지 마. 똥물이 튀잖니.”

진수 노인의 말에 따르면 소문은 보름 전부터 돌기 시작해 지금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내 손목을 잡고 진맥을 보던 선사도 분명 소문을 들었을 거다.
“어쩐지 웃는 모습이 가식적이었어... 예뻤지만 눈이 안 웃었어.”
필시 사람인지 활시인지 확인하려던 거였겠지.
밀과를 줘서 먹게 한 것도, 팔을 접었다 폈다 해가며 힘줄과 근육을 살폈던 것도, 다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함이었을 거다. 정말로 활시라면 음식을 삼키지 못했을 거고, 몸도 굳어있었을 테니.
“캬아, 배반 돋네. 배반 돋아. 세상에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더니 신선이 되고자 수선을 하는 자가 나 같은 순진한 애를 가지고 놀았네.”

저번처럼 배추 250근을 짊어지고 길을 걸으며 쉴 새 없이 투덜거렸다.
말로 서운함과 억울함을 내쏟아도 분이 쉽게 풀리지 않아 일부러 나뭇가지를 치고 풀을 당겨 뽑았다.
그리고 뽑은 풀을 머리카락 틈새에 빈틈없이 꽂아 분노로 머리카락이 위로 솟구친 모습을 만들고자 했다. 반 시진 뒤에는 이마저 도로 다 뽑아버렸지만... 부러진 나뭇가지를 무슨 채찍인양 좌우로 흔들며 걸음을 빠르게 했다.

진수 노인은 소문일 뿐이라고 일갈했다. 내버려두면 자연히 가라앉는다는 말도 했다.
‘하지만 생각을 하면 생각할수록 마치 내가 재앙의 원흉인 것처럼 몰아가는 분위기잖아.’
활시를 없애야 마을에 평안이 올 거라며 선동하는 사람이라도 나오면?
발주 신청에 실수를 했던 건 과장님인데 업체로 확인전화를 하지 않았다며 말단 대리를 꼽주는 분위기라는 거, 아주 익숙하다. 여기서 분위기가 더 나빠지면 채소가게 송씨는 나를 멍석말이해서 내쫓으려 할 거다.
멀쩡한 몸으로 내쫓기만 하면 다행이다. 중세시대 마녀사냥처럼 장작불에 태워 죽이려 할 수도 있으니까. 엄한 사람 잡아 화형에 처하는 일은 결코 없을 거라 장담할 수도 없고...

고뿔에 걸려 열이 나는 것도 아닌데 몸이 오싹오싹했다.
하늘을 올려보니 태양이 구름에 가려진 것도 아니고 날씨가 청명했다.
그래서 더 불길했다. 서늘바람이 불지 않는데 왜 털이 곤두서느냔 말이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걸으며 큰길에서 벗어났다.
지나가던 사람이 나를 손가락질하며 ‘활시다!’ 외치기라도 하는 날엔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자 두고 볼 것도 없이 샛길로 방향을 틀었다. 소위 말해 멧돼지 길이라고 하는 곳이다. 걷기 힘들어 일부러 이런 길을 찾아다닐 사람은 없을 테니 남의 시선을 피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당나귀 목에 맨 방울이 딸랑이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아 안쪽으로 더 깊게 들어갔다.

무명적삼 옷깃을 바짝 당겨 여미며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장대에 매달린 웬 검은 깃발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Posted by 미야

2021/10/20 12:54 2021/10/20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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