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좀비인데 좀비는 아니라고 하더군요
※ 블로그 버전이 낮아 글쓰기 에디터가 익스플로러 11에서나 제대로 보인다는 거... 집에 있는 컴퓨터로 수정을 시도했다 식겁함. 크롬도 깨지던데 어쩌냐.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소설만 읽은 상황이며 이해부족으로 원작 설정이 미세하게 뒤틀릴 수 있음. 일부러 뒤트는 일은 원작자의 요청에 따라 하지 않습니다.
무슨 큰 일이 생겼나 싶어 서둘러 밖으로 나가보니 과장이 아니라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 전부가 우리 가게에 우르르 몰려 있었다. 표정들이 하나같이 꼭 버터 맥주에 꽂힌 호빗 같았고, 유명 연예인이 뿔테 안경 하나 쓰고 나타났다며 저마다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들 무리 한 가운데로 의복과 꾸밈이 상서로운 낯선 이가 뜬금없게 왼손으로 배추 하나를 들고 있었다. 수려한 인물과 하나가 되자 벌레 먹은 배추 잎사귀마저 하얗게 빛이 나는 듯했다. 광채가 난다, 그 말을 끝으로 아무 생각이 안 났다. 그 인물이 우리를 향해 돌아서자 송만희와 나는 얼이 빠져 아래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하얗다 못해 푸른 옷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포장되지 않은 산속 길을 걸어왔을 텐데 신발코에 진흙 튄 흔적 하나 없다니.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은 또 어떻고. 신선은 겨드랑이에서 암내가 나지 않는다는 말이 왜 나왔나 했다. 아무리 기를 써 봐도 떡이 지는 바람에 어깨에 닿는 머리카락을 전부 잘라버린 나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어쩐지 부끄러워져 얼른 손가락에 침을 묻혀 혹시라도 붙어있을 눈곱을 정리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선사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았다.
“놀라지 마십시오. 저는 고소 남씨에서 수행을 하는 문하생으로 이 근방을 지나다 음기가 강하고 좋지 않은 소문이 돌고 있어 잠시 들렸습니다. 듣자하니 부근에서 자주 주시가 나온다고 하던데, 어제 이 가게에서 묘강산 방향으로 배달을 다녀온 자와 얘기를 나눠볼 수 있을까요.”
목소리를 듣고 다시 한 번 더 놀랐다. 뺨에 분을 칠하지 않아 선이 고운 남성으로 보였던 이 젊은 선사는 실은 여성이었다. 남존여비 사상이 있을 것 같은 세상에서 여성이 도를 닦는다는 것 자체가 가능하다는 것이 놀라웠고, 그걸 나만 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주변의 반응이 또 놀라웠다. 내가 살던 세상에선 부처님도 ‘여자는 여래가 되지 못하며, 장부라야 부처가 될 수 있다.’ 라며 대놓고 차별했었는데 여기선 남자고 여자고 겨드랑이에서 냄새가 나지 않음 선인이 될 수 있는가 보다. 그런 점에서 나는 태생부터 글렀다. 내 정수리에선 엄청 고약한 냄새가 난다.
다시 부끄러워하며 침 바른 손가락으로 얼굴을 닦자 셋째가 제발 지저분한 짓 하지 말라며 내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건드렸다. 아, 왜 그래요. 나에게도 체면이라는 게 있단 말예요. 남들 보기에 내 꼬락서니가 어떠할지 상상해보자 선사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전날 땀을 그렇게 흘리고도 속옷도 안 갈아입었고, 밥을 먹고 난 뒤에 물로 입안을 헹구지도 않았다. 걸람이 걸람했네 – 뺨이 홧홧 달아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소 남씨 수행자는 노비나 마찬가지인 날 앞에 두고도 무척이나 예의바르고 정중했다. 선사는 나에게서 악취가 난다며 코를 막지도 않았고, 눈곱 떼는 모습에 헛기침도 하지 않았다. 그저 미소를 띈 채 상냥한 목소리로 ‘혹시 먹고 싶은 건 없니?’ 라고 조용히 물어왔을 뿐이다.
“당과 좋아해?” “좋아해요.” 쳐다보는 보는 눈이 많아 내가 불편해할 거라 여겼던지 선사는 나를 인기척이 없는 으슥한 골목길로 끌고... 아니, 조용한 장소로 데려갔다. 나는 여전히 몸을 꼬고 있었고, 그녀는 소매 안쪽을 뒤져 땅콩가루를 뿌린 튀긴 밀과를 꺼내 내 손에 뇌물인양 쥐어주었다. 오는 거 사양하지 않는 주의다. 꿀에 버무린 밀가루를 튀긴 밀과는 촉감이 쫀득하니 이에 달라붙었다. 오랜만에 접하는 단맛이라 어느새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고 손가락까지 핥았다. 입술에 남은 기름까지 알뜰하게 빨았다. “하나 더 줄까?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좋네.” 폭이 넓고 긴 소매 안쪽에서 종이로 싼 밀과가 하나 더 나왔다. 도라에몽 만능 주머니도 아니면서 수납력이 엄청났다. 두 손으로 공손히 밀과를 받으면서 무슨 핸드백이나 게임 인벤토리처럼 사용되는 소매의 쓸모에 감탄했다. 설마, 저 속으로 호리병이나 손수건 같은 것도 들어가 있는 건 아니겠지.
선사는 내가 밀과를 다 먹을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주고 난 뒤에야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주시가 나온다고 다들 꺼려하는 길을 여러 번 다녀왔다면서.” 뿐만 아니라 내일도 가야 합니다. “어른도 두려워하는데 주시를 보고 무섭지 않았어?” “주시는 행동이 굼뜨고 움직임이 뻣뻣해서 피하기 쉬워요. 더러 옷을 잡아당기며 살을 깨물려고 하는 것들이 있는데 요령껏 주먹으로 때리면 되고요.” “주먹으로...” “물론 때린다고 쓰러뜨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건 잘 아니까 작정하고 덤비거나 하지는 않아요.” “대단한데. 정말로 겁이 하나도 없구나.” “선사님. 진짜 무서운 건 주시가 아니라 들개 떼죠. 죽어있는 것보다 살아있는 것이 훨씬 무서워요.” 선사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기에 들개도 있어?” “예전에는 여러 마리 있었어요.” 들개에게 쫓겨 달아나는 날 보며 설양이 얼마나 비웃었던지. 물어라, 물어라, 부추기며 놈은 한참을 깔깔거리며 웃었다. 막상 물렸을 적엔 벼락같이 화를 냈지만. 애초에 그놈의 기분은 좌로 십리, 우로 십리를 왔다 갔다 했기에 화낸 이유를 크게 따질 필요는 없었다. 설양은 개의 털색이 노란색이어서 기분이 나빴다고 했고, 그래서 내 팔과 다리를 물어뜯은 개의 목을 그 자리에서 베었다.
여태껏 피비린내가 나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린 모양이다. ‘어디 아픈 곳이 있어?’ 물어보며 지그시 손목을 붙잡았다. 선사는 진맥도 보는 모양이다. 도를 닦으면 약초 보는 눈이 밝아지고 의술에도 능해진다더니 진짜였나 보다. 팔을 쭉 펴게 만들어 피부의 색과 주름까지 꼼꼼하게 살핀 뒤에 ‘어제 잠을 잘 못 잤나봐?’ 물어왔다. 뭐, 불가항력입니다. 나무판자 하나 깔고 자면 아무래도 뻣뻣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관절이 아주 굳은 건 아니고요. 팔꿈치가 딱딱한 건 때를 안 밀어서가 아니라 굳은살 때문입니다.
선사가 붓으로 그린 듯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채소가게 주인이 부모님이니?” “부모님은 제가 어릴 적에 다 돌아가셨고 송씨 부부가 길거리에서 떠도는 걸 거둬주셨습니다.” “선량한 분들이군.” 그럴 리가. 그 선량한 분들은 성장기 어린이에게 밥도 주지 않았는뎁쇼.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기 싫었던 나는 약양 상씨에게 도움을 구한 선동요 주민들 이야기를 주절주절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산 사람이 많으니 죽은 사람도 많은가 봐요. 그러니 주시도 많고.” “선동요는 이 마을보다 커?” 쓰다듬던 내 팔을 도로 내려놓으며 선사가 질문했다. “훨씬 크죠. 거긴 무늬를 찍은 비싼 기와를 올린 집도 많아요. 밤에 보면 불빛도 훤하고요, 늦은 밤 불조심, 불조심 외치면서 순찰 도는 사람까지 있답니다. 아... 물론 큰 도시를 구경해본 선사님 눈에는 별 거 아닐 수 있지만요.” “그렇지 않아. 규모가 크던 작던,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든 흥미롭지.” 말을 마친 그녀는 밝게 웃으며 두 손을 모아 보잘 것 없는 나에게 정중한 작별 인사를 해주었다.
옴마야, 나 방금 연예인 만나고 왔다. 헤벌쭉 좋아 죽으려는 나를 보고 셋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좋은 건 좋은 거지. 그 유명한 4대 선문세가 사람을 직접 본 건 오늘이 처음인데.
“문하생인데?” “응? 문하생이 어때서요.” “별 거 아니거든. 혈통도 아니고, 직속 제자도 아니고. 그 년 이마에 묶은 말액 봤어? 하얗기만 하고 아무 무늬 없었잖아. 그건 그냥 선사에서 밥이나 겨우 얻어먹는 식객이라는 의미야.” 벌레 먹은 배추 잎을 정리하다 말고 그 박한 평가에 고개를 들었다. 그놈의 년, 년 소리 듣기 싫었다. 송혜교라고. 김태희라고. 내 마음속의 별들을 향해 짬뽕 같은 소리 하지 마.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싸했다. 셋째는 오줌 마려운 표정이고 일꾼 두 명은 아예 쥐고 있던 배추를 땅에 철푸덕 떨어뜨렸다. 입만 움직여 ‘뭐야? 무슨 일인데?’ 물어봤다. 동시에 목덜미로 누군가 후, 하고 뜨거운 입김을 불었다.
“아걸.” “아이고, 설 공자!” 나는 자지러져라 뛰었다. “신났네, 우리 아걸. 내가 온 것도 모르고. 오늘 맛있는 거 얻어먹었다더니 신났어.” “예... 그게. 지나가는 선사께서 큰 은혜를 베푸시어 저에게 밀과를...” “좋았어?” “좋았고 말고요! 꿀맛이던데요.” 나중에 먹으려고 아껴둔 밀과를 꺼내 – 덕분에 잇자국이 남았다 – 부적처럼 흔들어댔다. 저거 봐라. 사탄의 눈이 가늘어졌다.
Posted by 미야
2021/10/18 15:24
2021/10/18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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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좀비인데 좀비는 아니라고 하더군요
※ 주인공 오리캐. 설양 루트(일 수가 없는데).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소설만 읽은 상황이며 이해부족으로 원작 설정이 미세하게 뒤틀릴 수 있음. 일부러 뒤트는 일은 원작자의 요청에 따라 하지 않습니다. 아 씨바 출신지며 나이며 죄다 불명이잖아. 의도치 않게 부산 사람을 대구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는 얘기임. 오리캐 말투는 아저씨라고 생각하세요. 걸람의 자아는 34세입니다.
가까스로 배달을 마치고 가게로 돌아왔을 적엔 이미 하늘이 어둑어둑해진 뒤였다. 거의 내던지듯 지게를 내려놓은 뒤, 내 몫이랍시고 남겨놓은 간장 주먹밥 두 덩이를 손에 쥔 채 그리운 ‘마이 스위트 홈’으로 향했다. 몸이고 마음이고 다 너덜거리는 상황이라 게으름 그만 피우고 빨리 좀 다니라고 야단치는 채소가게 주인 송씨의 말은 귓등으로 흘려보냈다. 땅만 쳐다보며 걸으며 대꾸를 안 하자 송씨가 화를 냈다. 무시하고 뒷간 옆에 붙은 작은 창고 문을 열었다.
원래는 장작을 말리는 용도로 쓰였다는 창고가 송씨의 은혜로 구한 내 침소다. 이모부네 계단 밑 벽장에서 살았다던 유명 판타지 소설 주인공보다 더 못한 신세라고나 할까. 모든 창고가 그러하듯 습기만 막으면 되었기에 얇은 마룻장에 지붕이랍시고 널빤지 기와를 얹은 게 전부인 누더기였다. 덕분에 얼마나 웃풍이 심하던지 새벽이면 입이 돌아갈 지경이라 틈새에 꼼꼼하게 진흙을 채워 넣어 지금은 널빤지 사이로 뜬 별을 구경하는 일은 없다. 그래봤자 아늑하다는 느낌은 일절 들지 않고 침상 하나 놓지 못할 좁은 구조여서 다리를 쭉 펴고 누울 생각도 못한 채 벽에 기대어 무릎을 세웠다.
오늘은 정말 향불 올리는 날인 줄 알았다. 아첨하며 내뱉은 말들 중 무엇이 설양의 심기를 건드린 건지는 알 재간이 없다. 쓰레기 같은 그 인간의 감정은 좌로 우로 멋대로 널뛰기를 했으니까. 아무튼 저승 갈 뻔했다는 건 확실했다. 삼도천에 발목까지 담갔다가 겨우 발을 뺐다고 보면 되었다.
‘소문으로는 선동요 사람들이 약양 상씨 세가에 도움을 요청할 거래요. 이 부근에서 요괴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약양의 상씨 세가밖에 없으니까요.’ 그때 설양의 입가가 뒤틀렸다. ‘이 부근에서 요괴를 잡을 수 있는 건 약양 상씨밖에 없다, 라...’ ‘으아앗~!!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물론 신묘하신 설 공자도 요괴를 잡을 수 있겠죠. 암요. 공자의 능력이라면 한 손으로도 충분할 겁니다. 아니. 손가락 하나로도 충분합니다. 새끼손가락만 있어도 됩지요. 그렇지만 설 공자의 호의는 매우 값진 것이지 않습니까. 바위를 가르는 칼로 닭을 잡지 마라, 그런 것이지요.’ ‘그렇다는 건 약양 상씨는 닭 잡는 칼이라는 거야?’ ‘아이고, 공자도 참. 꼭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요. 무슨 오해를 그렇게 하세요. 상씨 사람들이 들으면 제가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고 타박할 거 아닙니까. 제가 드린 말의 뜻은 공자가 바위를 가르는 칼이라는 뜻으로... 컥!’
목을 움켜쥐어 잡은 건 아니었다. 그는 단지 검지를 들어 내 목의 한 가운데, 정확하게는 목울대를 지그시 눌렀다. 먹은 것이 부실하여 2차 성징이 더디게 온 내 몸은 변성기를 겪으면서도 목젖이 그리 도드라지게 나오지 않았다. 설양은 무슨 흔적기관처럼 희미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주장하는 그 목젖 바로 아래를 눌렀다.
세게 누른 것도 아니니 장난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 목에 구멍이 뚫렸다는 느낌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손가락으로 눌렀을 뿐이라고?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이 살갗을 찢고 들어가는 느낌이 선명했다. 그리고 그 칼날은 목 안으로 깊숙이 들어와 한 바퀴 회전하며 연약한 안쪽 살을 썩둑 베어냈다.
‘이러지 마세요.’ 나는 눈빛으로 애원했다. 입술에 침을 바르는 설양은 약간 흥분한 눈치였다. 더러운 개새끼. 목 한 가운데 살갗을 손가락으로 훑고 내려오면서 놈의 눈동자 동공이 좁아졌다. 제일 더러웠던 건 설양의 사타구니 한 가운데 자리한 양물 크기가 커졌다는 점이었다.
‘몰라. 생각하지 말고 잠이나 자자.’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내쉬다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예전부터 나는 고민거리가 많으면 이불을 머리 꼭대기까지 뒤집어쓰고 잠을 청하곤 했다. 예전이 아니라 전생이라고 해야 정확하겠지만, 은행 융자금 만기가 다가온다거나. 원룸 보증금을 떼먹힐 상황이라던가. 중고거래 사기로 노트북이 아닌 벽돌을 택배로 받았다던가. 고민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만 원짜리 암막커튼을 치고 싸구려 조립 침대에 누워 잠에 빠지면 그 순간만이라도 고민거리에서 해방이었다. 사람을 죽일까 말까 망설이며, 그것도 목에 구멍을 낼까 말까 저울질하며 성적으로 흥분하는 정신이상자에게 아무래도 제대로 찍힌 거 같다고 백날을 고민해봐라. 양팔을 감싸 안은 자세로 스프링 매트리스가 아닌 한 겹 나무 바닥에 누워 숨을 골랐다. 몸이 고단했던 탓인지 눈꺼풀을 몇 번 깜빡이자 의식이 흐려졌다.
“밤새 끙끙거리더구나.” 오늘 아침은 평소보다 퍼주는 밥 양이 많았다. 주시가 나온다고 하여 발걸음이 끊긴 길로 강제로 배달을 보냈으니 내심 미안한 감정이 들었던 모양이다. 살짝 부운 눈을 꿈뻑거리자 송씨 부인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뜨신 보리밥을 한 주걱 더 올려줬다. 기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래도 반찬도 없이 밥만 올리니 그게 꼭 제사상에 공양 올리는 느낌인지라 참 뭐 했다.
눈치껏 젓가락으로 절인 무를 집어 입에 넣으면서 운을 뗐다. “저, 송 부인. 어제 말인데요.” “한 번 더 다녀 오거라.” 아이 씨! 진짜 이러기야! 주시 이야기는 꺼낼 생각도 없었어. 도중에 설영을 만났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송씨 부인은 아예 고개도 돌려버렸다. 내가 뭐라고 하던지 듣지 않겠다는 의사표현이었다. “오늘 당장 다녀오라는 건 아니다. 하루는 쉬고 내일 가거라.” 그 이상은 안 된다며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지금까지 널 보살펴준 우리 부부에게 은혜를 갚아야 할 거 아냐. 못 하겠다는 말을 주둥이에 담기만 해봐!” 송씨 부인은 예전 우리 외숙모를 닮았다. 덩치도 우람하고 팔뚝도 우람했다. 솥뚜껑 같은 손바닥이 어떤 손바닥인지 잘 알고 있는 나는 눈을 곱 뜨는 대신 시선을 무릎 아래로 깔아야 했다.
“설양을 보았다고? 어디서.” 하루는 배달 일을 쉬게 되었기에 결국 내 이야기 상대는 채소가게 셋째 송만희가 되었다. 재미 삼아 썩은 과일을 먹여 날 골로 보내려 했던 그는 어느새 장성하여 결혼도 했고 코찔찔이 아이도 낳았다. 아이의 이름은 명이었다. 제 어미에게 늘 그러듯 명이는 어부바를 해달라고 떼를 썼다. 내가 짐짓 모르는 척하자 명이는 내 정강이를 발로 찼다. 그런 아이의 난폭함을 접하고도 송만희는 아들이 참 씩씩하다며 매우 흡족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말리기는커녕 어째서 빨리 업어주지 않는 거냐고 눈총을 주는 건 덤이었다.
“쯧. 그 망할 것이 명문 세가의 객원으로 신분이 상승했다고 들어 기주로는 다신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건만.” 소산에서 그간 설양의 폭거에 데지 않은 자가 없었다. 고아인데다 채소가게 밥풀떼기인 나조차 돈을 뜯겼을 정도다. 설양은 딱 한 가지, 강간만 안 했다. 강간을 빼고 폭행, 협박, 살인, 강도, 방화, 납치, 금품강탈, 그동안 저지른 짓을 열거를 하면 리스트가 끝이 안 났다. 셋째는 머리가 아프다는 걸 숨기지 않으며 신음했다. “그래. 설양 그 자가 뭔 짓을 하더냐.” 제 목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거시기를 바짝 세웠습니다, 사실을 말하기는 뭐해서 최대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내 얼굴을 본 송만희는 지레짐작하고 다시 끌끌 혀를 찼다. “문제네, 문제야.” 설양은 그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재앙이라서 그가 소산으로 다시 활동 영역을 바꾼다면 우리로선 바짝 긴장할 필요가 있었다. “어디 맞진 않았고?” “그런 건 아니고...” “아니긴.” 예전부터 설양에게 자주 괴롭힘을 당했으니 등허리라도 한바탕 걷어차였을 거라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퍼뜩 깨달았다며 눈을 크게 떴다. 등허리가 아작난 자가 자기 아들을 업고 있었다. 송만희는 나를 배려해서가 아니라 아들을 땅에 떨어뜨릴까 두려워하며 명이를 떼어내 얼른 자기 무릎에 앉혔다.
“셋째 나리. 죄송합니다만 좀 나와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때 잔심부름을 하는 아이가 문밖에서 인기척을 내며 우리를 불렀다.
Posted by 미야
2021/10/15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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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좀비인데 좀비는 아니라고 하더군요
밤에 휘파람을 불면 뱀이 나온다던데. 어머, 풀피리를 불면 주시가 얌전해져요.
설양은 잔뜩 으스대는 표정으로 코를 세웠다. 그 유치한 모습에 속으로 투덜거렸다. 전생 34년, 빙의 10년을 더한 입장에선 그가 하는 짓이 꼭 삼촌 앞에서 포켓몬 스티커를 잔뜩 가져와 자랑하는 어린 조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묘하게 썩어가는 내 표정을 봤는지 그가 이마로 흘러내린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뒤로 쓱 넘기며 인공감미료 팍팍 버무린 후후 웃음소리를 내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배트맨 없는 세상에서 조커가 웃고 있다. 재빨리 태세를 바꿔 손바닥을 싹싹 비볐다. 구조조정 희망퇴직을 언급하던 부장님 앞에서 온갖 재롱을 떨던 내 모습이 겹쳐지는 순간이었다.
“신묘하군요. 설 공자. 선술인가요?” “별 거 아냐. 잡기지.”
말은 그렇게 해도 더 칭찬해달라는 눈빛을 한 설양은 덧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성격만 좋았으면 여인들 심장마비로 죽어나갔을 귀여운 덧니였다. 웃음을 머금은 설양은 다시 길게 찢은 잎사귀를 입에 물고 아까와는 달리 제법 날카로운 음색을 만들어냈다. 사람 아닌 것들의 귀에는 다르게 들리는 모양이었다. 그것들은 호루라기 소리를 들은 훈련병처럼 반응하며 같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전원 스위치가 꺼진 것처럼 얌전해졌다. 허옇게 변한 눈을 여전히 뜬 채였어도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뻣뻣하게 굳어버리자 이제 그것들은 걸어 다니는 송장이 아니라 할로윈 데이를 맞아 대문을 장식한 허수아비처럼 보였다. 빗자루로 턱턱 치면 뿌연 먼지가 솟구치는 구제불능의 장식품들 말이다.
도대체 이런 흉악한 것들은 어디서 튀어나오는 건지. 채소가게 송씨의 말에 따르면 원한을 품은 시신을 제대로 장례 치루지 않으면 시변을 한다 했다. 물론 절대적인 건 아니고 달의 기울기에 따른 음기의 양이라던가, 죽은 장소 등 여러 조건이 맞아야 했다. 당연히 그 조건들이 딱딱 들어맞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이곳이 아무리 판타지 세상이라도 대낮에 주시가 돌아다니는 일은 결코 흔치 않았다. 그런데 소산은 음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곳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네크로맨서가 암약하는 중이라서 그런 건지, 배달을 하러 갈 적마다 주시가 발에 걷어차였다.
‘이유가 뭐지. 요 몇 년간 작황이 좋지 않아서인가.’ 소산(小産)은 ‘산출이 적다’ 라는 뜻 그대로 농사에는 적합하지 않은 곳이다. 비가 잘 내리지 않아 물을 많이 필요로 하는 벼농사에 적합하지 않았다. 전생에 내가 살던 곳과 달라 쌀이 주식이 아닐지언정 아무튼 비가 적으면 밭농사도 꽝일 수밖에 없다. 먹을거리가 부족해지자 산 사람을 상대로 한 도둑질은 당연하고 부장품을 노린 무덤 도굴이 판을 쳤다. ‘덕분에 도굴당한 무덤에서 이것저것 튀어나오는 눈치이기는 한데...’ 풀피리에 반응하여 off 상태가 된 주시를 지긋이 쳐다봤다. 글쎄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저들의 수의가 너무 남루했다. 다듬지 않은 숭한 수염을 달고 있는 주시는 심지어 신발을 얻어다 신겼는지 좌우의 짝이 맞지 않았다. 허리띠는 무명이었다. 저들은 저승 가는 노잣돈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주인 따라 순장당한 아랫사람들이거나, 고귀한 분이 묻힌 장소는 명당일테니 좋은 기운을 얻으려고 가족들이 몰래 가묘를 쓴 시신이라는 건데... 무덤 하나에 몇 명이 들어가는 거야, 진짜.
잡생각이 너무 길었던 듯하다. 입 다물고 있는 시간이 길다고 느낀 설양이 맨질거리는 얼굴을 쑥 들이밀었다. 아이고 우리 빌런님! 반사적으로 침 바른 혀를 나불거렸다. “이런 능력을 두고 겨우 잡기라뇨. 그럴 리가요. 선사의 말씀으로 겸양도 도가 지나치면 기심이 생긴다고 하잖습니까. 결코 잡기가 아닙니다. 걸람은 이런 거 처음 봅니다. 부럽습니다. 대단한 능력이에요.” 멈추지 않고 부럽다, 멋지다, 놀랍다, 갖은 양념을 다 쳤다. 근사하다 다음으로 어떤 미사어구를 덧붙이면 좋을까 전전긍긍하는 사이, 설양이 쥐고 있던 풀잎을 툭툭 날려버렸다. 그는 내 입바른 말을 한쪽으로 듣고 한쪽으로 흘렸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아걸은 주시가 그다지 무섭지 않은가봐. 다른 년놈들은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가느라 바쁜데 용감하게도 주먹으로 머리를 후려치다니. 대단해.” “어, 뭐...” “혹시 아는 얼굴이었나?” “에? 아뇨.” “괜찮아. 난 다 이해 해. 언젠가 걸레라고 손가락질하며 널 때린 적이 있었던 거겠지. 그러니까 저 새끼 얼굴을 알아보자마자 주저하지 않고 머리부터 쳤겠지. 암, 암.”
오해다. 하지만 바로 잡기가 참 뭐했다. 저쪽 세상 좀비를 떠올리고 일부러 머리를 노렸어요, 라고 할 수는 없잖는가. 그런데 이 이야기를 빼면 냅다 머리부터 갈긴 걸 설명하기가 참 그렇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급소라고 여기는 부분을 공격하기를 회피하는 법인데 목, 머리, 심장, 사타구니처럼 민감한 부위를 주저함 없이 노렸다는 건 애초에 상대에게 큰 원한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곁눈질로 머리 망가진 주시를 훔쳐봤다. 알던 사람인가? 동네 사람이었나? 잘 모르겠다. 게다가 흙과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상태다. 여인이 붓으로 눈썹만 그려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던데 이런 조잡한 눈썰미로 나 때린 사람인지 아닌지 알아볼 것 같나. 그리고 평소 괴롭히며 밥 안 준 사람이 어디 한 둘이어야지.
“그런 거 아니에요, 설 공자. 그저 짜증이 나서... 저런 게 길을 막고 있음 배달이 늦어지잖아요.” “오, 그래?” “배달이 늦어지면 뜨신 밥 먹기 힘들단 말예요. 나 하나 때문에 일부러 국을 데워줄 사람들도 아니고. 것보다 요즘 주시가 많이 돌아다니네요. 위험하게. 설 공자님도 그렇다고 느끼죠?” 가자, 말 돌리기. 희극적인 분위기를 더하고자 일부러 목소리를 낮췄다. 과장님 컴퓨터에 음란 동영상 들어가 있어요. 무슨 대단한 비밀 이야기를 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일주일 전에도 채소를 배달하다 주시가 돌아다니는 걸 봤었거든요. 이쪽이 아니라 선동요 방향이었어요. 자세히 본 건 아니지만 비틀비틀 걷는 모습이 여느 술주정뱅이와는 달랐기에 똑똑히 기억이 나요.” “저런.” “진짜라니까요, 설 공자. 가는 길목에 누군가 큼지막하게 부적도 붙여놨더라고요. 얼마나 잔뜩 붙여놓았던지 벌레가 잔뜩 앉은 모양새였어요. 아무튼, 소문으로는 선동요 사람들이 약양 상씨 세가에 도움을 요청할 거래요. 이 부근에서 요괴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약양의 상씨 세가밖에 없으니까요.”
남들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보다 알고 있을 뿐이다. 나는 상씨 집안의 대문도 본 적도 없다. 가솔의 숫자만 무려 70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그런 대단하신 분께서는 송씨네 구멍가게에서 채소를 주문하지 않는다. 그러니 따로 배달을 갈 일도 없고, 호기심에 기웃거렸다가 얻어맞을 수도 있으니 상씨 세가 앞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 거기다 들은 얘기가 있었다. 가주의 성품이 난폭하여 자신의 눈에 거슬리는 존재가 있음 노인이고 어른이고 가리지 않고 때린다는 거였다. 뼈를 부러뜨리고 근육을 상하게 만든 뒤 사거리 한 가운데 내던진다며 객잔 주방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락랑이 말해준 적이 있다. 그게 정말이냐고 묻자 락랑은 ‘그럼 가짜겠니?!’ 라며 앙칼지게 말하고 내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아파하며 눈물을 글썽이자 ‘뚝 그치지 못해?!’ 야단치며 엿기름을 바른 누릉지를 주었다. ‘먹던지 울던지 하나만 해!’ 락랑은 내 귀도 잡아당겼다. 손맛이 매웠다.
잠시 그렇게 누릉지의 맛을 떠올리고 있는데 설양이 예고도 없이 내 머리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공자의 초록색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입안이 말라붙는 기분이다. 누릉지는 사라지고 대신 자리를 차지한 건 크립토나이트 – 초록색으로 빛나는 수퍼맨의 약점이었다.
Posted by 미야
2021/10/14 16:37
2021/10/14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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