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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드롭 1-12

뾰족하게 튀어나온 길죽한 코가 미세하게 떠도는 화약 냄새를 맡았다. 귀로는 뱀이 나지막이 휘파람을 부는 식의 기분 나쁜 소리가 들을 수 있었다.
붐붐탄이다.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이 붐붐탄을 쏘아대고 있다.
『역시나 카터... 과연. 대응이 빨라.』
붐붐탄은 원시적인 형태의 대인공격용 무기다. 압축공기와 약간의 화약을 사용해 쇠구슬이 아닌 돌조각을 날린다. 유효거리는 비교적 짧은 편에 속하며, 부상을 입히는게 주목적이라 그다지 위력적인 무기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린애가 팔매질한 돌에 맞아도 피가 나는 법이라서 여럿이서 단체로 붐붐탄을 쏘아대면 얻어맞는 입장에선 천재지변이 따로 없다. 게다가 적당한 크기의 돌조각은 사방에 널려 있다. 그냥 아무렇게나 주워 적들을 향해 날리면 되기에 전투 중 실탄이 떨어지는 일은 안 생긴다.
『놈들을 몰아놓고 위협하고 있군.』
수풀에서 고개를 길게 내밀자 환하게 켜진 마을이 불빛이 한눈에 들어왔다. 밤을 꼬박 지새운 채 모두가 등롱을 든 기세다. 절약이 미덕인 시대에 새벽이 다 되도록 불을 밝히는 까닭이야 뻔하다. 그들은 분노하고 있었고, 잘못된 일을 바로잡으려 노력 중이었다.

뛰어오느라 숨이 턱까지 차오른 남자가 관리사문관을 급히 찾았다.
『카터, 저놈들이 후스코를 인질로 잡고 있어요. 무사히 나가게 해주지 않으면 아이를 해칠 지도 몰라요. 일단 차단한 길목을 풀어주는게 어떻겠습니까. 너무 조이는 건 안 좋아요.』
『썩을 것들!』
『놈들이 협상을 원해요.』
『핀치는? 그의 모습은 아직도 안 보이나요.』
『그게 문젭니다. 어디서 까무러치기라도 했는지 코빼기도 보이질 않아요. 녀석들 말로는 핀치 씨를 내놓지 않으면 후스코를 돌려주지 않겠다고 합니다. 맞교환 하자는 거죠.』
『진짜지 가지가지 하네.』
한 여름의 먹구름처럼 두통이 몰려왔다. 동시에 위가 쓰리고 아팠다. 격심한 스트레스 탓이다. 시멘스키를 포함하여 많은 눈이 그녀의 행동거지를 하나하나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 눈빛에는 무한을 닮은 신뢰가 깃들어 있었다.
올바른 결정을 내려 모두를 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기를 - 그 믿음에 언제까지 보답할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녀는 성녀가 아니며, 부족함 많은 인간은 언젠가 반드시 실수하게 되어 있다. 그녀로서는 지금이 그 실수를 저지르는 날이 아니기 간절히 바랄 뿐이다.
「판단을 잘못하면 후스코를 영영 잃어버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이를 앙 다문 표정이 되어 시멘스키에게 손짓했다.
눈치가 빠른 경비병은 횃불의 불빛이 닿지 않는 으슥한 곳까지 카터를 따라왔다.
그는 카터가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들 중 하나다.
『모두 제압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어떻다고 보나요, 시멘스키.』
『글쎄요, 카터. 그들도 나름대로 필사적입니다. 하지만 제가 봤을 적엔 제법 당황하는 모습이기도 했어요. 후스코를 납치한 건 사전에 계획했던게 아니고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거였나 봅니다. 엉뚱한 애를 왜 데려왔느냐며 자기네들끼리 언성을 높여 싸우는 걸 봤어요. 하지만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주의라서 지금은 아이를 방패처럼 쥐고 있죠. 덕분에 우리쪽 사람이 근거리에서 총을 쏠 수 없어요. 잘못하면 후스코 찡이 다쳐요.』
건조해진 입술 딱지를 손톱으로 잡아 뜯다 말고 카터가 다시 질문했다.
『그럼 스리-파인스 산비탈 아래로 길이 끝나는 부분까지 대치 상태로 가는 건 어때요. 그리고 그곳에서 아이를 넘겨주면 우리도 그들을 얌전히 보내주겠다고 하는 겁니다.』
『제 생각에도 그게 최선책이긴 한데 말이죠...』
『무슨 문제라도?』
『그 목소리 크다는 대머리 자식이 완강하게 굴어요. 성격도 그지 같구요. 핀치를 빨리 내놓지 않음 후스코에게 몹쓸 짓을 하고도 남아요.』
카터의 목소리가 으스스하게 변했다.
『아이를 죽이면 녀석이 천하에 둘도 없는 노아라고 해도 살려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걱정이에요. 그 정도로 핀치 씨를 원하는구나 생각하면 뒷골이 아파요.』
『제트-트랜스 전지 사기 건이 핀치 때문에 발각났다는 걸 녀석들이 알아차린 거예요.』
그 점이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라며 시멘스키가 지적했다.
『발각이 나면 또 어때요. 그럼 다른 마을로 가서 사기를 치면 되는데. 그리고 우린 쓰레기 전지를 사들이고 옥수수를 다섯 푸대나 줬어요. 우리가 손해를 봤지 저들은 아무런 손해를 보지 않았다고요. 그들이 이 소동을 벌여가며 핀치 씨를 원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핀치는 이 마을 태생이 아니다.
기록에 의하면 15년 전 마지막으로 롭이 날뛰었을 적에 그 여파로 가족을 전부 잃고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난민 중 한 명이다. 출생지는 캐트리나. 올해 쉰 아홉이다. 네 살 터울의 형과 미인인 약혼자가 있었다고 했다. 롭의 난동으로 그들이 비참하게 죽자 이후 핀치는 결혼도 하지 않고 쭉 혼자 살았다. 심지어 여성과 교제하는 일도 없었다. 원래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었고, 가족이 죽었을 적에 정신적 데미지를 많이 입은 눈치다.
마을에서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건강한 체질이 아니어서 육체노동은 잘 못했다. 폭풍에 날아간 기와를 손질하기 위해 지붕 위로 올라가는 일도 힘들어했다. 대신 숫자 계산엔 밝아 상인들의 장부 정리를 돕거나 망가진 기계를 수선하는 일을 했다. 잡식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시멘스키가 워워 소리를 내며 사소한 부분을 따졌다.
『과거형으로 말하지 마요, 불길하다고요.』
『아는게 많은 사람이다. 이제 됐나요? 시멘스키.』

전체적인 인상이 흐릿하다. 숨기는게 있다. 행동은 예의발랐으나 꺼려지는 부분이 있다.
카터는 핀치의 의견을 존중하는 편이었으나 전폭적으로 믿지는 않았다.
『헤- 그거 의외인 걸. 카터는 소문을 믿었던 쪽이었군요.』
시멘스키의 눈이 살짝 벌어졌다.
그러니까 살해당한 여자가 핀치의 약혼녀가 아니고 실은 형수가 될 여자였다는 소문이 있었다. 형제끼리 한 여자를 두고 다퉜는데 모양새가 좋지 않게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는...
『핀치가 원래 중앙의 고위 간부였다는 얘기도 좀 돌았죠. 그 양반 분위기가 묘하게 우리 같은 일반인과는 괴리감이 있잖아요. 그래서 섹스 스캔들을 일으켜 추방된 관료라는 설에 무게를 두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죠.』
『술좌석 잡담꺼리죠. 중앙의 권력자들은 여자와 얽힌 추문 정도로는 추방되지 않아요.』
『그야 모르는 일이죠.』
『중앙으로부터 꼬박꼬박 월급을 받는 주제에 그곳이 어떤 곳인지 감도 못 잡고 있구먼. 거긴 사람 탈을 뒤집어 쓴 아귀들 소굴입니다, 시멘스키.』
『그래서 섹스 스캔들이 아니라고요?』
『고민할 것도 없이 평소의 핀치를 떠올려봐요. 시멘스키는 그 허약체질 사내가 여자와 같이 침대에 누워 잠자리 행위를 하는게 상상이 갑니까.』
『그야... 음. 상상을 하려니 낯뜨겁네요. 하지만 핀치 씨도 15년 전에는 가능했을지도 모르잖아요.』

고의로 엿들은 건 아니지만 핀치는 두 귀를 축 늘어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없는 사람을 두고 별 이야기를 다 하시네요, 카터 관리사문관님.』
화들짝 놀란 카터는 반사적으로 무기를 들고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조준했다.
그곳으로 까지고, 벗겨지고, 멍든 핀치가 - 두 사람으로부터 불능 취급을 받은 그가 서글프게 울상을 짓고 있었다.

Posted by 미야

2012/09/03 14:51 2012/09/03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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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드롭 1-11

내용이 엉망이라 죄송합니다. 슬럼픕니다.
아울러 고정 방문 갓파님들께 알림. 심즈3 수퍼내츄럴 확장팩 출시일은 9월 4일입니다.
괜찮습니다. 심즈 게임에서 강종이 아무렇지도 않게 찾아오는 것처럼, 우물통에서는 연중이 아무렇지도 않게 찾아오지요. 헐헐헐. (도망간다)


분해 결정은 완곡한 표현이다.
허나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기에 모두들 같은 질문을 던져왔다.
「도대체 무슨 죄를 저질러서?」
그때마다 리스는 1) 멸종위기에 처한 희귀종 새를 모르고 잡아먹었다 농담을 한다거나, 2)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딴청을 부린다거나, 3)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썼다 한 편의 드라마를 지어내는 건 어떨까 여러 가지 경우를 생각해보곤 했다.
하지만 늘 싱거운 공상으로 끝났다.
「제1급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 저는 피터 아덴트라는 자를 맨손으로 살해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접한 자들의 반응은 엇비슷했다. 다수가 강한 혐오를 보였고, 그 즉시 리스로부터 얼굴을 돌렸다. 미친 괴물과 같은 공간에 있기를 거부하고 아예 문밖으로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호기심 비슷한 걸 드러내는 경우도 있었지만 반드시 다섯 걸음 이상 떨어져 그와 대면했다. 여차하면 비상 단추를 누를 채비를 단단히 하고서 말이다.
어쩌면 그에겐 일종의 자학 증상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흉하게 일그러지는 사람들의 표정을 볼 적마다 정작 상처를 받는 건 자기 자신이었음에도 곧이곧대로 말해버리는 걸 봐선 자학하는게 맞았다.
하지만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의 행위를 부정하려 들지 않았다.
- 왜냐하면,
과거 저지른 행동에 대해 오늘에 이르러서도 후회라는 걸 눈꼽만큼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주먹으로 피터 아덴트의 얼굴을 후려칠 때의 감각은 여전히 선명하다. 그의 이가 부러져 나가고, 안구가 터지고, 코뼈가 주저앉는 걸 보며 희열을 느꼈다. 목구멍으로 하나 가득 피가 흘러넘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던 피터는 살려 달라 애원조차 하지 못했다.
리스는 일부러 도구를 사용하지 않았다. 오로지 주먹만을 이용해 그의 숨통을 끊었다. 피터 아덴트가「아내 제시카를 죽인 건 바로 접니다.」자백을 하고 나서 25분만에 벌어진 일이다. 그리고「하지만 그건 실수였습니다.」변명을 하고부터는 24분 후의 일이기도 하다. 깨어진 유리조각만 사용했어도 30초면 끝날 일이었다. 덕분에 그의 목적과 의도와는 별개로 사건 현장은 지나치게 사악해 보였다.

아까부터 핀치의 말수가 눈에 띄게 줄어든게 신경이 쓰였다. 튀어나온 두 가닥의 전선을 하나로 묶는 건 싱거운 일이었지만 뒷통수에 달린 눈으로 상대방의 표정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어 일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단순히 지쳐서 저러는 걸까? 하긴 그들은 1시간 가까이 걷고, 문을 열고, 수직으로 놓여진 사다리를 밟았다. 핀치는 피로감을 쉽게 느끼는 타입인 듯했고, 아무리 점수를 후하게 준다고 해도 그다지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
『많이 피곤합니까. 좀 쉴까요.』
『아뇨.』
어깨 너머에서 핀치가 재빨리, 그리고 태도를 바로잡으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순간 처치 곤란한 자학 심리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제는「이게 뭐고 저건 뭐냐」물어보질 않네요. 궁금한게 더 이상 없는 건가요?』
그가 흠칫해서 몸을 사렸다. 하지만 잘못 봤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리고는 입술을 위로 끌어당겨 미소 비슷한 모양새를 억지로 꾸며냈다.
『사실... 음. 아뇨. 원리가 뭔지 알 것 같습니다, 미스터 리스. 마이너스와 플러스 전극을 바꿔 서로 잡아당기는 힘을 서로 미는 것으로 바꾸는 거죠. 그럼 단단히 맞물려 있던게 떨어져 나갈 것이고, 그것으로 자물쇠가 풀리는 거죠.』
영리한 사내다. 어디 한 번 밟아보라고 미끼를 던졌음에도 교묘히 피해가는 걸 보니「분해 결정이라뇨. 옛날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무슨 까닭으로 분해 결정이 내려진 건데요.」식의 질문이 나올 일은 앞으로도 없겠다.
충분히 이해한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이 복잡한 미로를 뚫고 지상으로 올라가야만 했고, 이 상황에서 의존할 수 있는 지푸라기는 리스 하나밖에 없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 지푸라기를 훨훨 타오르는 불쏘시개로 만들고 싶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쪽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속된 말로 아양을 떠는 중이었다.

「그래봤자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은데.」
예전에는 진짜 미소와 꾸며진 미소의 차이점을 구분 못했다. 그래서 실수했다.
그녀는 잘 웃었다. 그래서 제시카 아덴트 박사는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착각했다. 손목의 타박상은 어쩌다보니 생긴 거였고, 목에 두른 실크 스카프는 여인들이 멋을 내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 돌이켜 보면 박사는 뭔가를 감추는 일엔 명수였다. 가까운 주변 사람들은 아무에게도 말 못할 불편한 진실에 대해 전혀 눈치를 못 챘다. 박사의 결혼 생활은 나이트메어 그 자체였는데도 모두 그녀의 남편 피터를 칭찬하느라 바빴다. 피터는 유복한 집안의 둘째 아들이었고, 아덴트 가는 권위 있는 명문가였다. 하얗게 칠해진 동화 속 궁전이 속까지 썩어가도 어쨌든 외관은 지극히 화려했다.
「나는 정말 괜찮아요, 존.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그리하여 박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결국「나는 괜찮아요」가 되었다.

가슴이 쓰리다. 이 상실감은 유감이라는 단어로는 결코 표현이 되지 않는다.
그때 그녀가 지은 미소가 진짜가 아니었다는 것만 알아차렸어도 좋았을 것을.

『있잖아요. 웃고 싶지 않을 적엔 웃지 않아도 됩니다. 그럴 필요가 없어요.』
이 말은 경고 따위가 아니었는데도 핀치는 눈에 띄게 숨을 들이마셨다.
뭐, 이제는 상관없지 않을까. 리스는 떫게 웃었다. 이제 곧 출구다. 미닫이 식으로 된 덧문을 열자 수직의 좁은 통로가 나타났다. 어두운 탓에 맨 꼭대기 부분까진 보이진 않았지만 손잡이를 붙잡고 조금만 올라가면 저 위로 해치가 있다. 리스는 위쪽을 한 번 쳐다본 후, 핀치의 등을 가볍게 떠밀었다. 지금부터는 혼자 가라는 의미였다.

『당신은요.』
『해치를 열려면 이쪽에서 조작을 해야 합니다.』
잘 가라 의미로 손을 흔들려면 아마 지금이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이제 작별이에요.』
『리스 씨.』
『거기에 발을 올려요, 잘 하고 있어요. 아래는 쳐다보지 말아요. 현기증이 생기니까.』

시키는대로 손잡이에 매달렸다. 꾸물거리는 동작으로 세 칸을 올라갔다.
그리고 핀치는 비로소 내려다볼 수 있게 된 키 큰 사내를 향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별 말씀을.』
『그리고... 이렇게 하는 절 용서하세요.』
핀치의 손가락이 리스의 이마 한 가운데 닿았다.

《CAC 권한으로 명령을 수행 : AI를 전부 초기화 하시겠습니까 - YES》

경악에 찬 리스의 표정을 보지 않으려 후다닥 몸을 돌려 사다리만 탔다. 올라가는 내내 단 한 번도 멈추어 서지 않았다. 해치는 이쪽에서도 조정할 수 있다. 리스가 입력했던 임시 식별 코드는 진작에 외워뒀으니 언제든지 써먹을 수 있다. 스스로가 밉고 환멸스러웠지만 핀치는 울지 않으려 노력했다.
서두르다 발판에서 오른 다리가 미끌어졌다.
심장이 벌렁거려 죽을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매달렸다.
해치 손잡이를 돌렸다.
철컹 소리가 나면서 밤하늘의 별이 보였다.
돌아왔다. 이곳은 그가 속한 속죄의 지옥이다.

Posted by 미야

2012/08/31 14:12 2012/08/31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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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드롭 1-10

오리지널 성향입니다. POI 설정과 맞지 않습니다.
업무량이 증가하는 월말이 다가오고 있어 진행에 차질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남자의 목소리 주파수는 대단히 듣기 좋아서 끌려가지 말아야지 주의를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매혹당했다.
취조를 닮은 질문이 이어졌어도 핀치는 간간히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심지어 그와 시선을 맞추기도 했다. 뜬금없지만 핀치는 그가 책을 소리 내어 읽으면 멋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읽다보면 지루해서 미칠 것 같다던 A. 엘리더스 박사의「소립자 표준모형 이론」도 분명 꿀처럼 달콤하게 들릴 것이다.
『어디 출신인가요. 뉴스턱?』
『들어본 적 없는 지명입니다.』
『뉴스턱은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입니다. 흐음... 진짜 모르는 곳인가요?』
핀치는 지식으로 막연하게 알고 있던 몇 도시의 이름을 주워댔다.
『베버스라던가 세인트로나는 들어봤습니다. 가본 적은 없고요.』
『베버스! 그곳은 대단히 시끄러운 곳이죠. 당신도 거긴 가지 말아요. 도박장에 나이트클럽에 술주정뱅이 천국입니다. 5분도 지나지 않아 비명을 지르고 싶어질 겁니다.』
글쎄다. 베버스는 진작에 멸망해서 무너진 건물 잔해 틈새로 유해한 방사능이 유출되고 있다. 밤새 요란한 파티를 벌이던 사람들은 백골로 돌아갔다. 잔치는 끝났다.
『무슨 일을 합니까? 핀치. 여기까진 어떻게 오게 되었나요?』
『입구가 열린 공기배출구를 통해서요.』
『오, 그걸 묻는게 아니었어요, 핀치. 것보다 다리가 많이 아픕니까?』
『괜찮습니다. 제가 다리를 끄는 건 오래전에 다친 상처가 완전히 낫지 않아 그런 겁니다. 방금 전에 발목을 접질러 그런게 아니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것보다... 우리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세이렌의 노래에 홀려 있던 어부는 좌초 직전에야 퍼득 정신을 차렸다.
『지상으로 나가는 출구는 어디입니까?』
그렇다. 미로와도 같은 이곳을 벗어나 마을로 돌아가는게 먼저다.

리스는 돌연 멍한 표정이 되었다. 이 양반이 갑자기 왜 이러나 핀치가 걱정할 즈음, 리스는 귓속에 들어간 물기를 털어내는 요령으로 자기 머리를 두어 번 탁탁 쳤다.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안다. 가끔씩 그도 그렇게 하니까. 핀치는 초조해하며 손톱을 쉬지 않고 튕겼다. 보나마나 그들은 큰 문제에 봉착했다.
『제어 시스템이 완벽하게 정지했어요. 건물 도면을 조회하려 했는데 안 되네요.』
역시나.
『그럼 우리는 길을 잃어버린 건가요.』
『그렇진 않아요. 이곳은 그리 많이 변하지 않았어요. 제 기억이 맞다면 우리는 G구역 끝부분에 있습니다. 일단 K-7구역으로 넘어가 EPS까지 가는게 좋을 것 같네요. 그곳에서 수동 조작을 통해 일부 구획 판넬을 열 수 있을 겁니다. 지하 3층까지 올라가야 해요. 거기까지 가면 예전 작업자들이 탈출용으로 설계한 비상 쉬프트가 있을 거예요.』
G구역이고 K구역이고 200년 이상 묵힌 낡은 기억이다. 그동안 다른 작업자가 시설 변경을 지휘했다면? 핀치는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문득 오래된 소설의 줄거리가 떠올랐다. 주인공은 수수께끼와도 같은 복잡한 미로에 갇힌다. 죽을 고생을 해가며 탈출을 시도하지만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흘러도 입구를 찾지 못한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 바퀴 빙 돌아 원래의 출발 지점으로 되돌아왔다. 작가는 그렇게 인생의 무상함을 비꼬았지만 이게 현실이 되면 한 편의 공포 드라마다.

따지며 추궁하는 기색을 보인 건 아마도 그 공포 탓일 터.
『출구가 있기는 있는 겁니까. 당신도 출구를 모르니까 이곳을 못 떠나고 있는 거잖아요. 내 말이 맞죠?! 맙소사! 빨리 깨달았어야 했는데. 꼼짝 없이 갇힌 거야. 앞으로 어쩌지. 에밀리 루이스에게 잡화점 장부를 돌려주지도 않았는데. 그럼 틀린 세제 가격은 누가 고쳐주지! 옥수수 다섯 푸대! 안 돼. 카터라면 죽을 때까지 원한을 품을 거야. 나는 이제 망했어.』
리스는 진정하라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출구는 있어요.』
『그, 하지, 어!』
『패닉에 빠지면 안 되요. 숨 쉬어요. 괜찮으니까 참착해요! 표현이 엉망이지만 당신이 묻고 싶은게 뭔지 알겠어요. 나는 자의로 떠나지 않은 겁니다. 어디로 가면 나갈 수 있는지 알고 있어요. 다만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출구는 있고, 당신은 무사히 밖으로 나갈 수 있어요.』
핀치는 주먹을 가슴에 모은 상태에서 쭈삣쭈삣 옷자락을 쥐었다 놓았다 했다.
『자의로 머무른 거라고요?』
『네.』
『어째서요?』
『궁금하면 물어봐요.』
리스는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미소를 지으며 이쪽으로 가야 한다며 왼편을 가리켰다.
핀치는 결정을 못 내리겠다는 투로 왼쪽 통로와 리스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개의치 않고 리스가 먼저 출발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다지 좋지 않은 일들이 있었죠.』
『대답이 그게 뭐예요. 궁금하면 물어보라면서요, 미스터 리스.』
『상세하게 대답하겠다고는 안 했잖습니까.』
눈높이 부근에 위치한 조작 패널에는 J-3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손가락 힘만으로 뚜껑을 힘들지 않게 벗겨낸 리스는 몇 개의 스위치를 올렸다. 어딘가에서 펑 소리라도 들리지 않을까 긴장한 핀치는 본인도 모르게 리스에게로 바짝 붙어 섰다. 그렇다고 해도 달라진 건 없었다. 리스는 뻣뻣해진 핀치의 얼굴을 흘깃 쳐다본 뒤, 위로 올렸던 스위치 두 개를 도로 원위치로 돌려놓았다. 그리고는 숫자 키보드를 8135-162-5583-9919 순서로 눌러 노란색 단추에 불이 들어오게 만들었다.

이번에도 역시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주변은 고요했다. 핀치는 당혹스러웠다.
『그게 끝입니까.』
『소리가 나면 곤란에 처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방금 보안 장치를 수동으로 해제했습니다. 임시 식별 코드를 입력했어요. 이것으로 이제 K구역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둘러야 해요. 정확히 15분 뒤에 입력한 코드는 무효가 됩니다.』
『오.』
『그럼 계속 걷도록 하죠. 여기서부터는 다소 복잡합니다. 이 앞으로 계단이 있으니 주의하세요. 당신이 보란 듯이 넘어지는 걸 전 바라지 않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리스가 앞장섰다.
핀치는 K라고 적힌 구역 구분 표지를 보았다.
설명은 일절 생략되고, 영어 대문자가 적혀진 내용의 전부인 심플한 표지판이었다.

『상당히 잘 알고 있네요, 미스터 리스. 혹시 예전에 이곳에서 직원으로 일했나요?』
『아니오.』
체중을 실어 힘들게 문을 밀던 리스가 잠시 숨을 골랐다. 어깨를 대고 세게 밀었음에도 오랫동안 움직임이 없었던 출입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리스는 다시 한 번 더 세게 밀었다. 그러자 안쪽에서 녹이 슨 경첩이 반으로 부러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이 정도면 되겠다 싶자 이번엔 요령껏 주먹으로 모서리 부분을 쳤다. 그 충격에 미세한 알갱이들이 떨어져 내렸다.
『나는 분해되기 위해 이곳으로 보내어졌어요.』
리스가 말했다.

Posted by 미야

2012/08/29 20:23 2012/08/29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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