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osted at 2012/09/13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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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후스코가 죽지 않고 돌아왔다 큰소리로 알려왔다. 다행이다, 안도감이 물밀 듯이 차오르는 것과 같이 해서 전원 스위치가 자동으로 내려갔다. 핀치가 까무룩 의식을 잃고 맨바닥에 드러눕자 당황한 사람들이 주변을 에워쌌다. 『맙소사. 방금 이 양반, 기절한 거야?』 『잠든 것 같은데.』 『눈꺼풀을 뒤집어봐. 눈동자가 뒤로 돌아갔음 기절한 거고, 아니면 잠든 거야.』 『그게 진짜야?』 『모르지. 난들 아나. 나는 잡화점 판매원이지 의사가 아니거든.』 『그러면서 눈꺼풀을 뒤집어보라는 소리는 왜 해!』 임시방편으로 그를 작은 손수레에 실었다. 그랬다가 좁은 산길에서 수레가 뒤집어엎어질 것을 염려, 도중에 포기하고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이 그를 등에 업었다. 마지막엔 그것도 여의치 않자 거꾸로 둘러메고 갔다. 무거운 마대자루 취급이었지만 그래봤자 핀치는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의 의식은 전혀 다른 차원, 그리고 별개의 시간 속을 어지럽게 방황하는 중이었기에.
43번 구역의 전망대는 온도 조절 장치가 자주 말썽을 부리는 탓에 굉장히 춥다. 하얗게 입김이 나올 정도다. 그래서 진작부터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겼다. 시끄럽고 번잡한 걸 싫어하는 그는 이 사실을 알고부터는 습관처럼 이곳을 찾아오곤 했다. 창밖으로 생명이 넘치는 푸른 구슬이 떠오른다. 무척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질리도록 보게 되는 만큼 썩 대단한 구경거리라고 하기는 그렇다. 그래도 그는 투명한「온실」너머로 달구경 하는 걸 은근히 좋아했다. 보고만 있어도 애잔한 기분이 되어버린다. 어디에고 존재할 리 없는 영원의 안식처가 저곳에 있다.
『향수병인가요, 해롤드.』 작업용 키트 상자를 든 젊은 여성이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그에게로 다가왔다. 여성을 과시하는 과장된 동작에 눈살을 찌푸릴 법도 한데 음탕하기는커녕 귀엽게 느껴진다. 해롤드는 동료를 향해 가볍게 눈인사를 건네며 그녀의 이름이 뭐였는지를 잠시 생각했다. 그레이스이거나 크리스틴 비슷할 거다. 어쩌면 둘 다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해롤드는 사람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빠른 시일 내로 처리할 일들이 산더미라 사람 관계는 필연적으로 소원해졌다. 그래도 미술 취미가 있는 그녀가「모천회귀」라는 제목으로 물고기 그림을 잔뜩 그리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것도 캔버스에 붓으로 물감을 하나하나 찍어서! 요즘 같은 하이퍼-테크놀로지 시대에!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천연 안료를 구하기 위해 그녀가 천문학적인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는 소문은 그 역시 들은 바 있다.
이름이 그레이스인지 크리스틴인지, 아무튼 그녀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손에는 작업용 장갑을 끼고 있었다. 가지고 온 도구도 그렇고 말썽을 부리는 회로를 손 볼 참인 듯하다. 『오늘도 여기서 고향을 보고 있군요. 차라리 도서관에 가보지 그래요? 여긴 춥잖아요.』 『견딜만 해요.』 『그러다 감기에 걸려도 몰라요.』 『괜찮아요, 이 정도는.』 『코가 빨개요. 콧물도 훌쩍이고 있었잖아요. 꼭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니까요.』 『하하하... 괜찮다니까. 것보다 이렇게 온실에서 이렇게 올려다보니 아득하네요. 아세요? 여기서 우리 집과의 거리는 무려 38만 4,000킬로미터 이상입니다. 그래도 세금청구서는 꼬박꼬박 날아들고 있죠.』 온통 유리로 덮힌 돔을 - 그것도 크게는 수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구조물을 화초나 키우는 온실이라고 부르는 건 솔직히 악취미적인 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레이스 - 혹은 크리스틴의 눈썹이 꿈틀거리고 움직였다. 『온실?』 『실례.』 자부심이 대단한 건설자들은 온실이 어쩌고 하는 커피 타임 수다에 늘 과민 반응을 하곤 했다. 그녀도 마찬가지다. 『온실이 아닙니다, 해롤드.「스카라베」라고, 정식 이름이 있잖아요.』 『제 생각엔 풍뎅이라 부르는게 더 이상할 것 같은데요.』 『왕쇠똥구리입니다. 스카라베는 태양의 원반을 굴리는 우주의 왕쇠똥구리죠. 그리고 대단히 반짝반짝 빛나는, 우리의 자랑거리입니다.』 진공 상태에서, 그리고 규산염의 분자 결합을 방해할 수분이 없는 곳에서 만들어진 유리는 강철보다 몇 곱절 강하다. 여기에 특수 코팅을 더해 고속으로 퍼붓는 유성우도 간단히 튕겨보낸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리는 빛을 굴절시켜 아름답게 빛난다. 하여 이곳 스카라베는 바벨의 둘도 없는 자랑거리다. 그걸 가리켜 온실이라니. 『다시는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주의하겠습니다, 그레이스... 아니면 크리스틴?』 『어멋! 제 이름은 안드레아에요!』 토라진게 분명한 안드레아가 팔꿈치로 그의 등을 툭 쳤다. 보기와 달리 힘이 좋은 여자인가 보다. 살짝 친 것 같았는데 불붙는 통증이 덮쳤다.
『조심해라, 애덤. 그래가지고는 핀치 씨를 침대에 눕히는게 아니라 던지는 거잖니. 그 양반, 원래 허리가 부실해. 더 조심해야 할 거야.』 『삼촌. 지금 이 시점에선 잔소리보다 직접적인 도움이 필요해요.』 의식을 잃은 사람은 평소보다 갑절은 무거워진다. 혼자서는 어떻게 제대로 할 방법이 없었다. 애덤은 나름 노력했지만 핀치의 몸을 험하게 굴린다는 점은 변함이 없었다. 『오셔서 손을 빌려주심 안 돼요?』 『불가능하다, 얘야. 내 오른손엔 토마토비프-스튜가 올라가 있거든.』 『왼손은요.』 『왼손도 바쁘다. 토마토비프-스튜를 든 오른손을 거들고 있지.』 애덤은 그게 무슨 소리냐며 화를 냈다.
한편, 안드레아는 십자형 드라이버로 나사를 풀다 말고 생각난게 하나 있다며 핀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참. 이번 제세성절에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신청하셨던가요?』 『신청했습니다.』 공고가 올라오자 그는 1번으로 신청서를 제출했다. 『친한 친구가 곧 약혼식을 할 겁니다. 참석하겠다고 약속했지요.』 『저런. 그거 유감이네요.』 약혼식인데 유감?! 순간 날카로운 침에 심장을 찔린 기분이 들었다.
곧바로 안드레아가 실수를 깨닫고 허푸덕거렸다. 『어머나, 나 좀 봐. 약혼식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고요... 이런, 이런. 항상 덤벙거린다니까. 박사님 친구분께 약혼식에 참석 못하게 되었다 빨리 연락을 하셔야 할 겁니다. 모든 일정은 취소되었어요. 모르셨어요?』 들은 적 없는 이야기였다. 『모든 일정이 취소... 언제요?! 왜요?! 무슨 까닭으로요?!』 『지상으로 신종 인풀루엔자가 확산되고 있다더군요. 위원회에서 신경질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걸 봐선 심각한가봐요. 그게 이름이 뭐라더라... 앗! 따가워! 전기가 흐르고 있잖아!』
그는 친구의 약혼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스카라베에서 나가는 것도, 들어오는 것도 금지되었다. 위원회에 제발 부탁한다, 평생 소원이다, 하라는 대로 전부 할테니 이번만 봐달라 호소했음에도 방법이 없었다. 별 수 없이 일이 이렇게 되어 정말 미안하다며 장문의 편지를 써서 보냈다. 하지만 약혼식도 없었다. 네이슨은 병에 걸렸다. 그리고 위독해졌다. 우주로 인류가 진출한 마당에. 그까짓 빌어먹을 독감이 진짜지 뭐라고.
Posted by 미야
2012/09/13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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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at 2012/09/11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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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의 움무들이 저마다 싸울 태세를 갖췄다. 스틸스는 신호를 하면 일제히 공격하라는 눈짓을 보내고 인질로 잡은 소년의 목으로 칼날을 가까이 가져갔다. 방금 전까지 숫돌에 날을 갈고 있었던 터라 필요 이상으로 쩍 하고 피부가 베어졌다. 순식간에 목깃이 붉게 물들었다. 따끔거리고 아파서라기보다는 아마 무서워서 그랬을 거다. 후스코가 눈물을 찔끔거렸다. 『제발 그러지 마세요. 그러지 마요.』 그래도 눈치는 있어 소리 내어 엉엉 울지는 않았다. 비명을 지르면 움무들이 흥분한다. 흥분하면 난폭해진다. 위험이 닥쳤을 적엔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좋다 - 사전에 배운 지식은 없었어도 자기보호 본능은 후스코의 행동을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통제했다. 소란을 피우며 큰 소리를 내지 말 것. 반항적으로 움직이지 말 것. 계속해서 여리고 약하다는 인상을 줄 것. 그래서 스틸스가 비싼 물건을 구매자 앞에서 전시하듯 그를 한 가운데로 몰아세웠을 적에 소년은 어떠한 반발도 없이, 밀면 밀리고 당기면 당겨지며 순순히 끌려갔다.
『잘 보이는 곳으로 나와라. 허튼 짓을 하면 아이의 목을 베겠다.』 『충고하자면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는게 좋을 거야.』 『충고를 할 입장이 아닐텐데? 그만 떠들고 나와.』 남자는 스틸스의 요구에 응하며 보다 가까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오른손에 개조한 장총을 한 자루 쥐고 있었는데 조준하여 방아쇠를 당길 태세는 아니고 말 그대로 들고만 있었다. 마치「난 이게 뭐 하는 물건인지 전혀 모르거든」이러고 주장하는 것 같아 꽤나 기묘한 인상이었다. 『어쩌지. 그냥 쏴 버릴까? 두목.』 당혹스러워하며 몇 명의 움무가 스틸스의 눈치를 살폈다. 스틸스는 아직 그들 무리에게 이렇다 할 신호를 보내지 않고 있었다.
『마을 놈이 아니군. 분위기가 틀려.』 그게 질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리스는 자신의 할 말을 천연덕스럽게 읊었다. 『너희들은 지금 미성년자 유괴 행위를 저질렀다. 무장을 해제하고 순순히 인질을 석방하기를 권고한다. 그렇게 한다면 제1급 처벌 대상의 범죄 내역을 무시하고 중립지역으로 벗어날 수 있도록 눈감아 주겠다. 만약 제안을 거부한다면 안전은 보장할 수 없어.』 하는 짓도 그렇지만 말투도 이상하다. 세익스피어 연극처럼 고색창연하다고나 할까. 무리 중 보다 젊은 측에 속하는 움무가 손가락을 머리에 대고 빙글빙글 돌리는 시늉을 했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완전히 돌은 놈이잖아.』 『아자렐로, 입 다물어.』 『그치만 스틸스.』 『입 다물어!』 스틸스의 표정은 험악했다. 스프레이로 뿌려진 고춧가루와 겨자 액 탓에 피부로 붉은 발진이 돋아 가뜩이나 야차 같은 인상인데 눈을 크게 부릅뜨고 노려보기까지 하자 감히 대적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자렐로는 입에다 지퍼를 채우는 동작을 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래도 불만을 표시하며 땅바닥에 침을 뱉는 건 잊지 않았다.
숫자적으로 우세한데 이상하게 신경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다. 『넌 정체가 뭐냐. 혹시 중앙의 개냐.』 『아니.』 남자는 짤막하게 대꾸했다. 『..........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보다 거슬리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저놈은 이 상황에서도 긴장이라는 걸 할 줄 모르는 눈치잖아.」 그렇게 생각하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다. 그것과는 다르게... 순간 소름이 돋았다. 사람은 규칙적으로 호흡을 한다. 심장이 뛴다. 근육은 요동치고, 눈꺼풀을 깜빡인다. 그러니까 자기 딴엔 가만히 있는 거라지만 살상은 쉬지 않고 미세하게 움직이게 된다. 그런데 저 햄릿 말투의 남자에겐 그런 인간적이고도 자연스런 부분이 부족했다. 주변이 어둡다는 점은 별개로 치고... 스틸스가 보기에 남자의 모습은 마치 정지된 화면과도 같았던 것이다. 「저놈, 숨은 쉬고 있는 거 맞아?!」 땀구멍이 조여지며 닫기는 감각이다. 동시에 밑바닥으로부터 아우성치며 올라오는 무언가가 등줄기를 성가시게 긁어댔다. 일이 상당히 잘못되고 있다.
땀으로 미끄러지고 있는 칼자루를 고쳐 쥐는 것과 동시였다. 입맛을 다시던 아자렐로가 제멋대로 나서며 남자를 총으로 한 방 갈기려 했다. 『아직 쏘지...』 경고하려던 찰나 귀청이 떠나가는 쾅 소리가 났다. 그런데 이쪽이 아니고 저쪽에서 났다. 장총을 쓸모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막대기처럼 취급하던 남자가 제대로 사격 자세를 갖추지도 않은 채 빠르게 방아쇠를 당겼다. 아니, 언뜻 보기엔 그냥 아무렇게나 흔들어댄 것처럼 보였다. 어디를 쏘면 좋을지 판단조차 하지 않고 내키는대로 총을 들었다 놓은 것 같았다. 그런데도 아자렐로는 무릎을 움켜쥐고 처절하게 비명을 질러댔다. 『아아악! 내 다리! 내 무릎!! 으아악!』 여기서 더 무서운 건 남자는 다시 예의 긴장감 제로의 차렷 자세로 돌아갔다는 거다.
스틸스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너~!!』 『사전에 경고했잖아. 그래도 머리를 겨누진 않았어.』 잘못을 나무라는 말투 또한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머지는 이제 넷.
『인질을 그만 놓아줘. 그럼 여기서 걸어나갈 수 있어.』 『웃기지 마!』 『내 말이 웃겼나? 이상하군. 원래 나는 농담을 잘 못하는 편이야.』 『적당히 으스대는게 좋을 거야, 친구. 내 장담하지. 여기서 널 죽일 거야. 그리고 이 아이도 죽일 거다. 멈추지 않고 마을로 내려가겠다. 집에다 불을 지르고, 여자들을 욕보일 거다. 남자들은 눈을 뽑아 장님으로 만들고, 들개에게 먹이로 던져버릴 거다.』 『어떻게?』 리스가 재빠르게 팔을 움직였다. 이번에도 제대로 조준하고 쏘는 동작이 아니었다. 시선은 똑바로 스틸스에게 고정되어 있기는 했다. 그렇다고 해도 총을 눈높이로 들어 올리는 것과 동시에 방아쇠를 당겨선 목표물을 명중시킬 수 없다. 게다가 스틸스는 방패처럼 소년을 붙들고 있었다. 목이 졸린 모습으로 방패 역할을 하고 있는 후스코는 또래와 달리 마른 체격도 아니다. 음식에 대한 탐심이 강해 살집이 있는 아이다. 그런 상태에서... 완전히 미쳤다. 『스틸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움무 상인의 머리로 커다랗게 구멍이 뚫렸다. 아이는? 후스코는 확 뿜겨져 나온 살점과 피를 고스란히 뒤집어쓴 채 비틀거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정신이 나간 눈치다. 그러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그 상태로 할 수 있음 어디 해봐.』 리스는 차갑게 내뱉듯이 말하며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장총을 도로 내렸다.
Posted by 미야
2012/09/11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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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at 2012/09/10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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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이 이야긴 주인공이 죽으면서 끝나는 새드엔딩이었습니다. 괜찮아요. 현 상황에선 엔딩 못 봅니다? 응?
『잠깐만요. 무기를 빌려 뭘 어쩌려고요.』 걱정을 산더미같이 끌어안은 핀치가 허푸덕거렸다. 『어쩌긴요. 당연한 거잖아요. 15세라면 자기 앞가림은 충분히 할 수 있는 나이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미성년이니 내버려둘 수 없죠. 가서 데려오겠습니다. 그러려면 도구가 필요해요.』
목젖이 까딱까딱 위아래로 움직였다. 안 돼! 카터, 주지 말아요. 그 남자의 정체는 로봇이에요. 최상위 통합 MOTHER-시스템으로부터 잔존 거주자를 학살하라는 명령을 수신 받았을 겁니다. 롭에게 무기를 줘선 안 돼.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 사실을 카터에게 말할 수 있겠어? 그렇게는 하지 못하지. 왜냐하면 너는 겁쟁이거든. - 저 남자의 정체만 폭로하겠다고? 그 전에 먼저 네 정체부터 폭로해보시지. - 속으로 환호하고 있지? 넌 결국 오른손을 자르는게 싫었던 거야. - 그게 아니라고? 그럼 카터에게 말해. 저 남자는 로봇이라고. - 못하겠어? 이거 왜 이래? 고개를 푹 숙이고 있지만 말고 말해봐. - 뭐? 목소리가 안 나와? 핑계 좋다. 역시 넌 뼛속까지 비겁자야.
「위선자.」
마지막으로 들려온 외침은 이미 죽고 없는 친우의 목소리를 많이 닮았다. 그럴 리가. 핀치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친절하고 상냥했던 네이슨은 그에게 결코 상처가 될 말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옛날을 돌이켜보면 애매하게 말꼬리를 흐리던 친구의 작은 몸짓 하나하나가 그에게로 향하던 비난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차마 입을 열어 말하지 못했던, 지옥 언저리 부근으로 생매장시켜버린 불편한 진실...
카터는 가까이 오라는 투로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여 보였다. 『첫째, 두 번 다시 나를 미스라고 부르지 마세요.』 그리고는 가지고 있던 무기를 리스에게 흔쾌히 건네주었다. 『낡았다고 해도 10년 전에 만들어진 물건입니다. 그렇게 원시적인 건 아니라고요.』 두 사람의 신장 차이만큼 신발 사이즈 역시 차이가 났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구두 뒤축을 꺾어 억지로 넘쳐나는 발가락을 구겨 넣은 리스는 겅중거리며 카터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고맙다, 감사하다, 신세를 지게 되었다 식의 인사는 일절 생략, 건네받은 연발식 총을 신중한 태도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약실을 당기고, 다시 집어넣고. 탄창을 제거했다가 부드럽게 손바닥으로 밀어 넣었다. 탁, 소리가 나도록 올려치지는 않았다. 다음으로는 총신을 똑바로 세운 후 그 무거운 걸 어렵지 않게 한 바퀴 빙글 돌려 무기가 주는 중량감을 몸에 붙게 했다. 『대략 알 것 같아요. 당신 손의 크기와 몸집에 맞게 손잡이를 개조했군요. 공이 밑의 몸체 끝으로 반동을 흡수시키도록 했어요. 다만 눈으로 봐선 탄환을 발사했을 시, 오류각이 어느 정도 나오는지 모르겠군. 한 발 쏘고 테스트를 해봤으면 좋겠지만 지금 이 상황에선 무리겠죠. 이거, 소음이 꽤 상당하죠?』 오른쪽 어깨를 개머리판에 바짝 붙인 자세에서 가상의 표적을 조준해봤다. 예전에도 다루어본 적이 있다는 식으로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지켜보던 카터는 짐작가는게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수동식이군요.』 메뚜기를 콩과 같이 삶아먹는 이상한 소리를 한다며 카터가 눈썹을 찌푸렸다. 『당연히 수동식이죠. 델타에서 사용하는 무기엔 자동식이라는게 있나보죠?』 이번에는 리스가 콧잔등을 찌푸렸다. 『델타라는 건 뭡니까, 미스?』 델타는 중앙에서 비밀리에 운영하는 특수 부대의 별칭이다. 실체는 구경이 어렵고 그림자만 있는 존재다. 중앙으로 롭이 진격하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맡고 있다. 롭과 동등한 위치에서 교전을 벌인 것으로 여러 전설적인 무용담을 남겼다. 뭐, 얘기만 그럴싸할 뿐이고, 정작 그 정체는 고위 관료들의 호위 부대라며 평가 자체를 제멋대로 깎아내리는 사람들도 없진 않다. 그래도 지난 반세기동안 중앙이 괴멸당하지 않은 건 그들이 흘린 피 값이 있어 가능했다고 봐야 한다.
카터는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했다. 『델타가 뭔지 모른다고요?』 『모르면 곤란한 종류입니까.』 『이럴 줄 알았다니까. 됐어요. 더 이상 묻지 않을게요. 델타 출신이냐 물으면 다들 당신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델타가 뭐냐, 구워서 먹는 거냐, 이러고 발뺌하더군요. 하지만!』 『아. 그렇지. 미스라고 부르지 않을게요, 진짜로요.』 리스는 자신의 실수를 용서해 달라며 빌었다.
리스의 정중한 사과와는 상관없이 그녀는 수분을 섭취한 화초처럼 보다 싱싱해졌다. 늑대인간으로 착각할 정도로 기척을 죽일 줄 아는 자다. 저 남자가 돕겠다고 하면 뒤로 돌아가 움무 무리를 충분히 기습할 수 있다. 『좋아요. 그럼 작전을 새롭게 짜야겠군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기습 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 정면 돌파를 할 겁니다.』 『뭐요?』 말도 안 된다며 옆에서 카터가 펄쩍 뛰었다. 『무장을 한 상대가 모두 일곱 명이라고요!』 리스는 갸우뚱했다. 겨우 일곱 명 정도로 그녀는 왜 저러는 걸까. 아, 그렇군. 인질의 안전! 『아이가 안 다치게 주의하겠습니다. 약속하죠.』 『그런게 아니라! 젠장... 핀치! 거기서 가만히 있지만 말고 뭐라고 말 좀 해줘요!』 핀치는 비스듬히 고개를 돌린 채 꿀 먹은 벙어리 흉내만 낼 뿐이었다. 이제 와서 뭐라고 말을 하라고? 할 말이 없다. 굳이 하자면... 잘 다녀오세요? 그녀는 전혀 모르고 있다. 핀치의 마음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리스가 그러겠다 마음만 먹는다면 반각도 지나지 않아 도시 하나가 초토화된다. 그까짓 일곱 명의 움무, 머리가 척추에서 분리되지만 않아도 다행이다. 그런 핀치의 복잡한 심정도 모르고 곧바로 카터가 악을 쓰기 시작했다. 『핀치! 그 남자가 안 보여요! 빌어먹을! 그새 어디로 사라졌지?! 썩을! 우라질!』
뛰어서 가고 있다 표현하기에는 평소 알고 있던 상식이 방해했다. 한쪽 다리를 땅에 딛었다고 생각한 찰나 5미터 이상 가볍게 가로질러 간 상태다. 뒤돌아보면 어느새 작아진 뒤통수만 보인다. 체중이 있는 존재라고 여겨지지도 않는다. 착지한 순간보다 공중에 떠있는 순간이 갑절 이상 더 길다. 뿐만 아니라 무시무시한 속도를 유지한 채 늘어진 나뭇가지를 피해 자유자재로 달린다. 검은 장막처럼 드리워진 어둠을 상관하지도 않는다. 빛이 사라진 깊은 숲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장애물을 제치고 건너뛴다. 『저 앞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데.』 『무슨 소리?』 『몰라. 파도 소리 비슷한 것도 같고.』 『파도?! 여긴 산이야, 이 미친놈아. 바다따윈 부근에 없다고.』 『그러니까 비슷하다는 말을 썼잖아! 누가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고 했어?! 파도 같다고!』 그 정체는 빽빽하게 자라난 나뭇가지들이 큰 바람에 휩쓸려 자기들끼리 몸을 비벼대면서 나는 소리였다. 움무는 반사적으로 하늘을 보았다. 어쩌면 큰 바람을 동반한 소낙비가 다가오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구름 사이로 별이 반짝거린다는 점은 별도로 하고, 맑은 날에도 가끔씩 정신 나간 비가 내리곤 한다. 실제로 쏟아져 내린 것은 짐작도 못했던 거였지만, 아무튼. 움무는 몸이 젖는 걸 염려하며 옷깃을 바짝 여몄다. 그리고 그게 그가 기억하는 내용의 마지막 끄트머리였다. 강한 힘으로 머리를 얻어맞았다. 아프다는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뇌와 연결된 신호들이 전부 끊겼다. 차라리 그게 다행이었다. 몸이 붕 떠서 3미터 가까이 날려갔는데 의식이 있었다면 무척 고통스러웠을 거다. 땅바닥에 내팽겨 쳐지면서 팔이 비정상적인 이상한 각도로 돌아가 버렸다. 『뭐야! 누구야! 어떤 놈이야?!』 산속에서 파도 어쩌고 떠든다고 흉을 보던 자가 반사적으로 방아쇠로 손가락을 걸었다. 판단을 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동료의 몸이 뭔가에 떠밀려 튕겨나갔다. 그는 곰을 떠올렸다. 엄청나게 굶주린, 배가 고픈 살인 곰 비슷한 거 말이다. 그래서 여기다 싶은 곳으로 일단 한 발 쏘았다. 짐승은 총 소리를 두려워한다. 그렇지 않던가? 『아아악!!』 어둠 가운데서 돌연 잘 만들어진 사람 모습의 가면이 떠올랐다. 놀라서 탕, 탕, 두 발을 더 쏘았다. 이 정도의 거리라면 명중했어야 옳은데 사람의 얼굴은 쉬지 않고 빠르게 움직였다.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은 눈치다. 『제발 다가오지 마! 가까이 오지 마! 귀신아, 저리 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과 동시였다. 매우 딱딱한 물건이 명치를 정확히 가격했다. 자신의 배를 때린 물건이 장총을 닮았다는 건 훨씬 시간이 흐르고 나서 나중에야 기억해냈다.
『뭔가 왔다.』 보초를 서고 있던 두 명이 쓰러지자 나머지 움무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이프를 꺼내든 스틸스는 하도 울어 눈자위가 퉁퉁 분 소년을 재빨리 끌어당겼다. 그리고 후스코의 목 한 가운데로 날이 바짝 선 흉기를 들이대었다.
Posted by 미야
2012/09/10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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