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osted at 2012/09/06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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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 존 리스. 그럼 이제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보세요.』 기록부에 인적사항을 기록하는 요령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부근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다. 키는 187cm 이상, 체격은 마른 편이고, 눈썹이 살짝 아래로 처졌다. 눈동자 색은 어두워서 파악 불가. 회색의 새치가 드문드문 보이는 머리카락은 짧게 다듬었다. 부랑자는 아니다. 영양상태가 좋지 않은 부랑자는 입가에 부스럼이 생긴다. 리스의 피부는 상당히 깨끗한 편에 속했다. - 물론 흙먼지를 다량 뒤집어쓰긴 했다. 옷차림은 생소했다. 몰개성의 셔츠에다 허리를 밴드로 처리한 편안한 바지를 입었는데 상하의 모두 미묘한 광택이 있는 재질로 만들어졌다. 비단은 아니다. 중앙에서 값비싼 비단으로 몸을 휘감은 여성들을 본 적이 있는 카터는 재질의 차이점을 구분할 수 있었다. 비단이 보다 호화롭다. 그가 입은 옷은 인공적이면서도 대량 생산된 싸구려라는 느낌이 강했다. 그리고.......... 그리고 어째서인지 맨발. 양말도 안 신고 맨발. 영광의 아베베 비킬라. 늑대인간 어쩌고 줄거리가 스멀스멀 그녀의 머릿속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카터가 그의 발을 물끄러미 쳐다본다는 걸 알았다. 리스는 입맛을 쩍쩍 다셨다. 『어. 제 이름은 이미 말씀드렸고요, 저는... 음. 이걸 뭐라고 하면 좋을지.』 『늑대인간?』 『설마!』 지금 농담하냐며 리스의 한쪽 눈썹이 활처럼 구부러졌다. 『오늘밤에 보름달이 뜬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런게 아니고 실은.』 그렇게 적당한 단어를 고르기 위해 그가 잠시 숨을 고르던 찰나, 『우와악~!! 카터! 내가 막을게요! 어떻게든 할 테니까 어서 달아나요!』 엉금엉금 네 다리로 기어온 핀치가 리스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그보다는 옷자락을 잡아당겨 바지를 아래로 끌어내렸다고 보는게 훨씬 더 정확한 묘사겠지만, 아무튼. 생각지도 못한 기습에 당황한 리스는 재빨리 허리춤을 붙들었고, 카터는 외간 남자의 살색이 드러나는 걸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카터! 도망쳐요! 빨리!』 내가 왜? 거기서 더 잡아당기면 엉덩이 굴곡까지 공짜로 전부 구경할 수 있겠구먼. 『왜 가만히 서있는 거예요! 이 남자가 당신을 헤치기 전에 어서 피해요!』
그의 얼굴색이 울그락불그락 난리가 났다. 씩씩거리는 소리가 카터가 서있는 곳까지 들려왔다. 머리꼭대기까지 짜증이 치솟았다. 폭발을 언제 하느냐만 짐작하면 되겠다. 3초, 2초, 1초,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암, 그 기분을 충분히 이해하다마다. 콧구멍이 두 배로 벌어진 리스가 핀치의 이마를 또다시 찰싹찰싹 두드리기 시작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이불빨래에 경악한 엄마가 오줌싸개 말썽꾸러기를 마구 혼내주는 모양새다. 말리고 싶은 생각은 그래서 요만큼도 들지 않았다. 대신 팔짱을 끼고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관망했다.
『그만! 그만해요! 아파! 아프다고!』 『에잇, 더 맞아라. 더 맞아! 이 정도로 울먹거리긴. 흥! 이봐요, 해롤드. 어째서 아까부터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고 있는 겁니까! 지금 이 순간 여기서 제가 죽이고 싶다 간절하게 생각하고 있는 대상은 오직 당신밖에 없다고요. 그걸 아셔야지.』 『어.』 『진짜라니까. 전 지금 당신 모가지를 비틀고 싶어 안달이 났어요.』 『그.』 『뭐요? 안 들리니까 더 크게 말 해봐요. 충동? 무슨 충동. 내가 무슨 충동을 느낀다고?』 『우?』 『말도 안 돼! 제가 이성을 잃고 저 여성을 덮치기라도 할까봐 그러는 거예요?! 제가 그렇게 파렴치한 인상인가요?! 그러냐고요!』 『아.』 『깨달았으면 제 바지는 그만 잡아당기세요! 절 발가벗기고 싶은게 아니라면 말이죠.』 「발가벗기려 한다」라는 말에 핀치는 황급히 그에게서 손을 떼었다. 매 맞아 벌겋게 달아오른 이마 말고도 뺨과 목덜미 역시 홍조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무엇인지 깨닫자 입이 헤 벌어졌다. 리스의 바지는 이미 허벅지까지 내려온 상태였다. 『잘못했습니다.』 『사과는 필요 없고. 우리, 조용한 곳으로 가서 대화 좀 하죠.』 까딱하면 혼내주겠다는 경고의 의미를 담아 리스가 손가락 하나를 세워보였다. 핀치는 꼼짝 못하고 혼이 전부 빠져나간 모습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바지를 추스르는 모습은 둘째고 사람을 쏘아보며 화내는 리스는 엄청 무서웠다.
『그나저나 붕대를 이상하게 감아놨군요. 누가 이랬답니까? 이래서는 피가 통하지 않을 겁니다. 팔을 이리 내요. 제가 다시 제대로 처치를 해볼게요.』 전의를 상실한 채 얌전해진 핀치의 모습에 감정이 한층 누그러진 모습이 된 리스는 제일 먼저 핀치의 오른팔을 칭칭 감은 헝겊조각에 관심을 보였다. 한눈에 봐도 완전히 비상식적인 처치다. 상처를 낫게 하기는커녕 썩게 만들 거다. 얼마나 꽉 묶어뒀던지 혈색을 잃은 손톱이 청색이다. 콧잔등에 가로주름을 만든 그는 몸을 뒤로 빼는 핀치의 동작에도 아랑곳없이 강압적인 태도로 매듭을 풀어내려 했다. 『안 되요.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 있습니다, 미스터 리스.』 어렵게 묶은 매듭을 풀지 말라며 핀치가 애원했다. 『아이가 인질로 잡혀 있어요. 그래서 인질범들에게 제 오른손을 잘라주기로 했습니다.』 『네? 고양이가 말가죽 뒤집어쓰고 강물에서 헤엄치며 노는 것도 아닌데 그게 무슨 소립니까.』
설명은 결코 쉽지 않았다. 리스는 움무가 뭔지 모른다. 중앙이 어떤 곳인지도 모른다. 컴퓨터 칩에 대해선 잘 알고 있겠지만 사람의 피부 아래로 이식하는 칩이라는 건 생소할 거다. 당연한 얘기다. 그가 살았던 시대와 지금은 약 200년의 간격이 벌어져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2세기면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그리고 그동안 형용하기 힘든 많은 일들이 있었다. 정말로 많은 일들이.
『특이하군. 요즘 인질범들은 돈을 내놓으라고는 안 하는 모양이죠?』 요점만 간단히 정리해서 짧게 말해주었더니 역시 이해를 못 했다. 『그래서 용의자는 모두 몇 명입니까, 핀치.』 허리를 접고 앉아 핀치의 신발 두 짝을 모두 벗겨내다 말고 리스가 질문했다. 『일곱 명이오. 그런데 뜬금없이 내 신발은 왜 벗기는 겁니까.』 『빌리려고요.』 그리고 카터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미스, 괜찮다면 그쪽에게선 무기를 좀 빌렸으면 합니다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Posted by 미야
2012/09/06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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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at 2012/09/05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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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걸린 갓파가 우물통 아래서 정좌하고 써내려가는 이상한 이야기. 오리지널 성향으로 POI 설정과는 맞지 않습니다.
못 생긴 손이다. 손톱은 뭉툭하고 피부엔 주름이 졌다. 노화 탓에 검버섯도 생겼다. 노동을 한 손은 아니다. 손바닥은 부드러운 편이고 굳은살은 어디에도 박히지 않았다. 다만 중지손가락 관절부위가 유난히 딱딱하긴 하다. 펜을 쥐고 글자를 많이 적는 사람에게 생기는 흔적이다. 아직까지 아무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지만 핀치는 지루한 줄거리의 자전적 장편소설과 일기를 빙자한 수기들을 몰래 써왔다. 자필로 쓴 원고는 다락 으슥한 곳에 숨겨져 있다. 아마 문학적으로는 가치가 없을 거다. 그래도 먼 훗날, 옛날에는 이런 일들이 있었구나 이러고 나중 사람들이 역사 자료로 참고삼아 줬으면 하는 소소한 바람이 있다. 「감상에 젖지 마, 해롤드. 왼손으로도 글은 적을 수 있을 거야. 연습하면 되겠지.」 핀치는 각오를 다지며 깊게 심호흡했다.
『할 수 있겠어요?』 카터가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눈동자 빛깔도 진흙처럼 새카맸다. 『경고하자면 말이죠. 익히지 않은 날 생선을 다듬어봤다면 짐작이 갈 겁니다. 지금 당신이 하려는 행위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매우 힘든 일입니다. 사람의 뼈와 근육은 그렇게 쉽게 잘리지 않아요.』 「당신은 못 할 거예요」라며 그녀가 핀치로부터 흉기를 빼앗았다. 『차라리 제가 하죠.』 핀치는 만류했다. 『당신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싶지 않습니다, 카터.』 그녀는 앞으로 더 먼 곳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추측하건대 그녀가 걸어가야 할 그 길은 대단히 험하고 굴곡져 있을 것이다. 업보라는 이름의 짐을 하나 가득 짊어지고, 벼랑을 닮은 그곳을 어떻게든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업보의 무게는 하나 둘 더해갈 것이다. 결국 언젠가「최후의 때」가 오면 산더미처럼 쌓인 짐 더미는 이 대단한 여장부를 삽시간에 깔아뭉갤 것이다. 핀치는 할 수만 있다면 그 최후의 때를 조금이라도 더 늦추고 싶었다. 『언젠가 쓰러지는 날이 오더라도... 당신은 보다 더 오래 버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가 책임을 져야 할 무게를 줄여줘야 한다. 핀치는 카터의 손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힘이 달려서 잘 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러니 도와주세요. 하지만 처음부터 당신이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강조하지만 이건 제가 나서서 한 결정이고, 나는 당신이 어떠한 죄책감도 가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카터에게 그로부터 조금 떨어져 달라 부탁했다. 『힘을 주어 세 번 손목을 긋겠습니다. 그 정도면 근육까지는 잘리겠지요. 모양새가 다소 보기 흉할 겁니다. 그래서 그 과정을 보이고 싶지 않군요.』 『핀치.』 『제가 쓰러지면 재빨리 다가와 뼈를 끊어주세요.』 『핀치!』 『이제 뒤로 열 발자국 이상 물러서주셨음 합니다. 자, 어서.』
별 거 아니다. 주문을 외웠다. 별 거 아니다. 이보다 더 한 고통도 겪어봤다. 그때마다 흐느껴 울었고, 뒹굴었고, 비명을 질러댔다. 통증은 혓바닥 위로 올려진 불타는 석탄과도 같았다. 그걸 목구멍으로 꿀꺽 삼키고 살아왔다. 예전에도 그랬으니 지금도 그렇게 하면 된다. 그러니 다시 주문을 외우자. 「산다는 건 노력이 필요한 어려운 일이지.」 칼날을 손목으로 가져갔다. 숨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거의 동시였다. 『이 개 같은 자식! 멋대로 뒤통수를 치고 말이지... 음? 나, 아주 제대로 열 받았다고.』 멋지게 발길질 당했다.
『삐약!』 악, 이 소리도 아니었다. 억, 이 소리도 아니었다. 병아리 울음 소리를 낸 핀치는 옆으로 벌렁 넘어갔다. 간절한 부탁에 멀찍이 떨어져 있던 카터는 깜짝 놀랐다. 인기척을 전혀 내지 않고 날아왔다. 지금은 행정 업무를 처리하고 있지만 그녀는 원래 군인이었다. 매복과 기습에 익숙하다. 발자국 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다가와도 대부분 눈치를 챈다. 전속력으로 뛰어온다? 이런 경우 못 알아차린다는게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건 뭐란 말인가. 그녀가 만약 어린 소녀였다면 말로만 듣던 늑대인간을 목격한 거라고 믿었을 거다.
당혹감을 뒤로 한 채 일단은 무기를 들어 수풀에서 날아온 남자를 겨누었다. 『멈춰! 움직이면 쏜다.』 개의치 않고 남자는 핀치를 손가락으로 마구 찔러댔다. 성을 내며 욕을 퍼부었다. 『아이고 이걸 그냥 확! 어떻게 혼쭐을 내면 좋을지!』 그러더니 손바닥으로 핀치의 이마를 찰싹찰싹 때린다. 『움직이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봐!』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이마 위로 앉은 파리를 때려잡는 동작이 다소 느슨해졌다. 남자가 천천히 이쪽들 돌아보았다. 그런데 어쩐지 놀란 표정이다. 핀치 말고 다른 사람이 더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는 식이다. 늑대인간이 나타났다며 놀라게 한 쪽이 누구인데. 카터는 총구를 신중하게 움직여「내 행동은 위협 따위가 아니다」임을 강조했다. 『그에게서 떨어져!』 『어... 저기.』 『떨어져!』 강한 어조에 남자는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꽤나 원시적인 무기군요. 그래도 그것으로 제 머리를 겨누는 건 그만하면 안 될까요. 그것보다 사고 예방을 위한 안전수칙은 모두 학습하셨는지요, 미스.』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닥치고 신분을 밝혀요!』 『제 이름은 존 리스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남자는 카터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상체를 살짝 비틀었다. 그게 또 의외였는데 카터가 보기에 그 행동은 혹시라도 잘못 발사된 총알이 핀치의 몸뚱이를 맞추는 일 없게끔 하기 위해 그러는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두 팔을 벌린 것도 항복의 의미라기 보다는 다른 뜻이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예를 들면 카터의 시야로부터 핀치를 가리고자 하는 의도로... 남자는 천천히 다시 움직였고, 이번에는 보다 분명해졌다.
나중에 그녀는「잠옷, 혹은 잠옷과 흡사하게 생긴 옷을 입은」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아무튼 카터의 판단에 의하자면 회색의 잠옷 차림새를 한 남자는 비록 핀치를 향해 멋들어지게 발길질을 했어도 그를 해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미면 그녀 역시 스커트 자락을 위로 들어 올린 채 핀치를 발로 밟아대고 그러지 않았던가. 그거랑 비슷한 거다. 계기판 바늘이 한 단계 딸깍 내려갔다. 총구를 내리지는 않았지만 카터는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떼어냈다.
Posted by 미야
2012/09/05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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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at 2012/09/04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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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귀 뀐 놈이 성을 낸다는 속담대로 괜한 사람을 고자로 만든 카터가 야단스럽게 외쳤다. 『맙소사, 핀치! 어디에 처박혔다가 지금에야 꾸물거리고 기어나왔...』 뒷말은 깨끗하게 잘려나갔다. 그녀는 해태가 아니었고, 눈으로 본 핀치의 몰골 하나만으로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추측하기는 너무나 쉬었다. 그의 얼굴은 흙과, 땀과, 말라붙은 피로 뒤덮여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의복은 넝마 꼴이다. 구멍이 뚫린 곳으로 무릎이 드러났다. 저 남자는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하여 자신을 붙잡으려는 자들로부터 도망치고, 또 도망친 것이다. 「엄청 노력했어. 그리고 보란 듯이 굴렀구나.」 측은한 마음에 손수건을 내밀어 최소한 눈구멍 주위라도 닦으라고 제안했다. 핀치는 그 와중에도 감사하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하지만 거의 앞을 보지 못하는 눈치다. 사람 민망하게 엉뚱한 방향으로 손을 내밀어 깨끗한 손수건을 잡으려 했다. 그 산만하고 갈팡질팡하는 동작에 카터는 그가 잃어버렸다던 안경을 기억해냈다. 『당신이 길에다 흘린 안경은 애덤이 찾아내어 보관 중입니다.』 『그거 다행이군요.』 『그 정도로 다행이라고 말하기는 일러요, 핀치. 후스코가 움무들에게 납치되었어요. 그리고 망할 움무들이 인질로 잡은 후스코를 당신과 교환하자고 했고요.』
『우...』 탈진 상태였던 핀치는 똑바로 서있는 것조차 힘들다며 나무기둥에 기대어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시멘스키는 그가 곧 훌쩍거리며 울 거라는 걸 알았다. 웅크리고 앉은 그의 몸은 매우 왜소해 보였고, 장대비에 녹아내린 풀떼기처럼 연약한 느낌이었다. 안쓰럽다. 그로서는 매우 견디기 힘든 험난한 하루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최악의 하루는 사실상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핀치가 코를 들이마시는 소리를 냈다. 눈물이 비후강을 타고 콧구멍 쪽으로 흘러내리는 모양이다. 평소 남자가 우는 걸 매우 꼴사납다 여겼던 시멘스키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로 치기로 했다.
『울지만 말고 얘기를 해봐요.』 『그러니까, 그게... 집으로 돌아가니 거실 한 가운데로 움무 상인이 도깨비처럼 서있더군요. 덕분에 심장 마비에 걸릴 뻔했죠. 그 자의 말로는 우리 집이 어딘지 알아내기 위해 후스코에게 겁을 좀 줬다고 했어요. 하지만 아이 엉덩이를 때려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했는데...』 『움무들은 밥 먹듯이 거짓말을 하죠.』 『하아. 이걸 기뻐해야할지, 아님 슬퍼해야할지 감이 잡히질 않네요. 솔직히 전 움무들이 후스코를 이미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했었거든요. 아이가 무사히 살아있다고 하니 기쁜데, 저 대신 잡혀갔다고 하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카터와 시멘스키는 여러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카터는 핵심을 꼬집어 질문했다. 『그들이 무엇을 요구합디까, 핀치.』 『가지고 있었다면 주었을 겁니다. 정말입니다. 하지만 나에겐 없는 물건이었어요.』 『핀치... 그들이 요구한 물건이 무엇이었습니까.』 한 박자 쉬고 카터가 재차 물었다. 핀치는 후후, 이러고 거칠게 숨을 불어대며 힘들게 대답했다. 『컴퓨터 칩이오. 중앙 정부에서 고위 관료에게 제공하는 칩을 원했습니다.』 거기까지 말하고 여성용 손수건에 대고 얼굴을 파묻었다. 산발적으로 그의 어깨가 흔들렸다.
카터는 똑바로 서서 어둠을 노려보았다. 시멘스키는 알았다. 그녀는 거의 폭발 일보직전이었고, 부뚜막 아래로 벼락을 내리꽂는 악귀처럼 머리카락을 전부 세웠다. 그녀가 마음속으로 외쳐대고 있는 외침이 무슨 내용일지도 짐작이 갔다. 타인에게로 향하는 흉폭한 저주, 그리고 부메랑으로 돌아와 그녀의 몸뚱이를 후려치는 분노의 외마디 외침들이었다. 호랑이를 닮은 눈동자가 흉흉하게 빛났다. 그리고 곧바로 붉어졌다. 『핀치.』 『네, 관리사문관님.』 『미안합니다. 나는 열 다섯 살의 소년이 외지인들의 손에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핀치가 손수건에서 짐짓 얼굴을 들었다. 그 역시 눈가가 붉었다. 『이해합니다.』 『이해한다고요?』 반박하는 카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아뇨, 당신은 날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핀치. 나 자신도 이해를 못 하겠는데요. 이 사람의 목숨이 더 소중하다거나, 저 사람의 목숨은 덜 소중하다고 말해서는 안 돼요. 생명의 가치는 수치로 계산되지 않지요. 하지만 지금의 나를 봐요. 난 방금 후스코를 위해 당신을 희생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렇게 할 거라고 결정까지 했는걸요.』 핀치가 손수건에 대고 리얼하게 코를 풀었다. 『그렇게 결정할 수밖에 없었던 당신의 처지를 이해합니다, 관리사문관님.』 그리고 콧물로 흥건해진 손수건을 둥글게 말아 손아귀에 쥐었다. 『당신은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어요. 저라도 그렇게 결정했을 테니까요.』
군인의 얼굴을 한 시멘스키는 내부규정 제5조2항에 의거, 일단 카터의 결정에 반발하고 보았다. 인질극에 대응하는 방식으로는 최악이다. 『체념하기는 일러요. 더 생각을 해보자고요. 핀치를 넘겨주자고요? 그러면 핀치 씨가 죽을 텐데요.』 『다른 좋은 아이디어라도 있습니까, 시멘스키.』 『어... 그게.』 당황하여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그를 대신하여 핀치가 조용히 말했다. 『실은 있습니다.』
관료의 칩은 오른손에 이식된다. 이쪽에서 그런 건 없다 아무리 주장해도 믿어주지 않을 터이니 차라리 직접 찾아보라며 손을 잘라주면 깔끔하게 해결된다. 『뭐욧?! 손을 잘라서 주자고?!』 카터와 시멘스키가 동시에 펄쩍 뛰며 외쳤다. 핀치는 풀 죽은 표정으로 조곤조곤 설명했다. 『과격하다는 건 압니다. 그래도 처치만 제대로 하면 괜찮을 겁니다. 어차피 인질 교환을 하면 전 죽은 목숨입니다. 그럴 바엔 제 손을 잘라서 그들에게 던져주고 후스코를 데려오는 편이 낫습니다.』 『그건... 음. 하지만...』 『결정했으면 빨리 해치웁시다. 일단 피가 통하지 않도록 팔을 단단히 묶어야겠죠. 날이 잘 드는 칼을 주시겠습니까. 아니면 도끼도 괜찮습니다.』 『핀치!』 『그런 얼굴로 절 보지 마세요, 카터 관리사문관님. 살해당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절 움무들에게 넘기겠다 하신 분이 제 손모가지 자르는 결정에 흔들려서야 되겠습니까.』 이미 마음을 굳힌 듯했다. 걸레가 된 외투를 벗어 곱게 개켜놓은 그는 셔츠를 잘게 찢어 그것으로 오른팔을 어깨 부위부터 꼼꼼하게 동여매기 시작했다. 손가락에 힘이 없어 묶는 매듭이 영 신통치 않았다. 핀치는 답답해 미치겠다며 혀를 찼다. 『시멘스키, 가만히 서있지만 말고 묶는 걸 도와주세요. 그리고 카터.』 빨리 칼을 가져오라고 했다.
Posted by 미야
2012/09/04 16:33
2012/09/04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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