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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드롭 1-09

맨발의 리스, 맨발의 좐 리스


2년 전 여름, 사흘간 지속된 폭우로 지반이 약해지면서 마을 뒤편 산비탈 일부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 적이 있다.
만반의 대비를 한 탓에 산사태로 다친 사람은 없었다. 가옥이 파손되지도 않았다. 그래도 웅성거림은 그치지 않았다. 다량의 토사가 빗물에 휩쓸려 떠내려가자 산 중턱에 감춰져 있던 인공 구조물이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사람 한 두 명은 너끈히 지나가고도 남을 구멍도 뚫렸다.
이튿날 날씨가 맑게 개자 카터의 지휘 아래 몇 명의 관계자들이 밧줄을 타고 구조물 안으로 내려갔다. 내부는 높이 약 3미터에 좌우 너비 약 15미터 크기였고, 눈에 띄는 에너지 반응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을 위해 중무장을 한 시멘스키와 카터가 내부를 샅샅이 살폈다. 그들은 10분 정도 안으로 걸어 들어갔고, 이후로는 두꺼운 벽에 가로막혀 어디로도 갈 수 없었다.
「노아가 설계한 전형적인 구조물로 보여요. 롭은 안에 없는 듯합니다. 통로가 어디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겠어요. 여기서부터 저 산자락까지 S자로 휘어져 있는데 앞으로 격벽 차단이 되어 있어요. 밀봉 조처는 무척 오래 전에 이루어진 눈치입니다. 제어장치로 보이는 패널은 진작에 뜯겨져 나갔어요. 누가 그랬는지는 짐작도 안 갑니다. 이 안의 비상 조명도 전부 꺼졌고요.」
카터는 재빨리 표준 절차를 밟았다. 다시 말해 구멍을 통해 터널 안쪽으로 초속경몰탈을 왕창 들이붓고, 그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아 토사를 두껍게 덮었다는 얘기다.

핀치는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근육이 말썽을 부린 탓에 목보다는 눈동자가 더 많이 돌아갔지만, 아무튼.
보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인위적인 풍경이 들어왔다. 막연히 자원 채굴을 위한 갱도를 상상했던 그는 충격을 받았다. 바닥은 고르고 벽면은 평평하다. 외관은 카터가 시멘트로 덮어버렸던 예의 장소와 많이 닮았다. 시멘스키가 말했던, 그러니까 격벽이 내려져 있었다는 곳으로부터 더 안쪽이거나 바깥쪽일 것이다.
하지만 규모가 전혀 달랐다. 도대체 어디까지 뻗어나가는 것일까. 경이롭기까지 한 수직의 통로와 미로처럼 뻗은 땅속 터널들 - 방대한 전체 규모를 상상하면 아찔해진다.

맨발의 남자는 핀치의 반응을 다른 방향으로 이해한 듯하다. 핀치의 목 움직임을 따라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그가 말했다.
『이 위쪽으로 유사시 가동되는 강제배기댐퍼 장치가 있습니다. 작동은 되지 않아요. 오래 전부터 이곳은 사용 승인이 중지된 탓에 폐쇄되어 있었거든요.』
그런게 갑자기 왜 움직인 건지 이유를 모르겠다며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로그-오프 상태의 제어 시스템이 일시적으로 되살아나 오작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공기배출구가 활짝 열렸다가 도로 닫혔어요. 어쨌든 당신은 운이 좋았어요.』
『운이 좋다? 저렇게나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요.』
『중량을 가진 물체의 추락 움직임을 감지한 시스템이 곧바로 중력 왜곡 비상 조처를 취했습니다. 무거운 바위가 그대로 곤두박질하면 하부 구조물에 큰 손상이 발생하니까요. 그런 직후 시스템이 정지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은 죽었어요.』
『.......... 그런 일이 자주 생깁니까.』
『천만에요. 공기배출구가 저절로 열릴 까닭도 없거니와 설령 그랬다고 해도 그곳을 통해 지상의 바위나 모래가 이 안까지 쓸려 들어오는 일은 없습니다. 말 그대로 공기배출구입니다. 3중의 안전장치가 이물질의 통과를 차단하지요. 저곳을 통해 사슴 같이 큰 동물이나 사람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어요. 그런 일이 벌어질 확률은 아마 백만분의 일 정도가 될 겁니다. 야생 원숭이가 막대기를 휘둘렀는데 우연히 apple 글자가 땅바닥에 적혀진 것과 같지요.』

마침내 부축을 받고 몸을 일으킨 핀치는 쓰게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야생 원숭이가 땅바닥에 과일 이름만 적은게 아니다. 정교한 비행기도 조립했다. 그것이 바로 백만분의 일의 확률이라는 거다. 핀치는 우연이라는 걸 결코 믿지 않는다. 그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여기는 뭐 하는 곳이지요?』
『말했잖습니까. 오래 전에 버려진 곳입니다.』
『오래 전에 버려졌다면서 이런 곳에 혼자 있는 겁니까?』
『글쎄요.』
남자는 손가락 하나를 턱에 가져가곤 머쓱한 태도로「나도 알고 싶은 부분이에요」말했다.
『뭐라고요?』
『기억이 확실하지 않아요. 기능 정지 상태로 상당히 오래 있었거든요.』
그렇게 말한 남자가 자신의 맨발을 내려다보았다. 핀치 또한 그의 발을 쳐다보았다. 신발이 없다는 점이 이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핀치는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날짜나 년도는 기억합니까.』
『어디보자. 시설의 폐쇄 명령은 MSD-25년 7월 13일에 내려졌습니다.』
대답을 들은 핀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당신은 굉장히 이상한 셈을 하는군요. 25년? 도대체 그 기준이 뭡니까?』
『최상위 통합 MOTHER-시스템 출범일이오. 당신은 모릅니까? 이상하군. 이를 성진력으로 고치면 5379년이 됩니다. 성진력은 설마 모르지 않겠죠?』
『보다 더 이상한 셈이 나왔군. 혹시 그 성진력이라는 건 아크(방주)의 대기권 진입을 초기년으로 계산하는 그건가요.』
남자의 이마로 주름이 졌다. 올 해가 몇 년이냐를 두고 이런 식의 선문답을 하고 있다니.
『요즘은 다른 기준을 따로 가지고 있는 겁니까?』
사실 그렇다. 오늘날에는 통합정부 수립일이 기년이다. 노아로부터 배척받았던 드롭인들이 중앙을 재건한 날로부터 이제 겨우 58년 지났다. 대학살로부터는 77년 후이다. 오늘은 센터-58년 9월 28일이며, 성진력으로 고치면 5597년이 된다.

통제가 어려운 두통이 몰려왔다.
「대략적인 그림은 보이는군. 그런데 이건 말이 되질 않아. 무려 200년이나 차이가 나잖아. 그럼 이 남자는 희귀 엔틱이라서 후대를 위해 보존 중이었나?」
그러나 이런 말은 때려 죽이겠다 협박해도 입 밖으로 낼 수 없다.
핀치는 예의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의 몸을 부축하고 있는 남자의 팔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순간 남자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정교하게 만들어 붙인 것 같은 인위적인 얼굴 근육 위로 인간미가 넘치는 진짜 감정이 드러났다. 공교롭게도 그 감정은「짜증」이었다.
여기서 신경질을 부리다니. 그리고 그런 점이 그를 인간으로 보이게 만들다니.
핀치는 인내심 있게 웃어주었다.

남자의 콧구멍이 다소 벌어졌다.
『그래요. 당신은 걱정스럽겠죠. 하지만 시설 폐쇄는 다른 까닭 때문입니다. 당신이 만약 바이러스 오염을 걱정하고 있는 거라면...』
『네? 무슨 바이러스요?』
핀치가 어리둥절해 하자 남자는 고개를 슬그머니 돌리고 쳇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이내 딴 짓을 했다.
『오늘이 몇 월 며칠이죠?』
『9월 28일입니다.』
『제 이름은 리스입니다. 존 리스. 그쪽은요?』
『핀치라고 부르세요.』
화제 전환은 성공적이었다. 핀치는「바이러스요? 무슨 바이러스?」라고 되물을 타이밍을 놓쳤다. 남자는 이때다 하고 질문을 계속했고, 당연한 얘기지만 그것은 의도된 행동이었다.

Posted by 미야

2012/08/28 20:24 2012/08/2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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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드롭 1-08

진행은 빠르지 않습니다. 오리지널 성향입니다.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개구리처럼 납작 엎드린 자세를 취한 무색투명한 남자가 핀치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해롤드, 정신 차려.》
그래도 움직임이 없자 안절부절 한다.
《눈을 떠, 이 친구야. 이대로 포기할 거야?》
핀치는 겨우 한쪽 눈만 치켜뜨고 끙끙 앓는 소리만 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선 바닥에서 뺨을 떼어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아프다는 통증을 인식하기 이전에 쇼크로 죽을 것 같다. 정확한 깊이는 알 수 없지만 20미터 족히 1톤 부피의 흙더미와 같이 하여 수직으로 떨어졌다. 그 정도 높이면 10층 건물 옥상에서 추락했다고 봐야 한다. 충격을 완화해줄 무언가의 도움이 없다면 대다수가 즉사한다.
-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런 곳에 매트리스나 쿠션 따위가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앓는 소리가 더 커졌다. 엉치뼈가 아무래도 박살난 모양이다. 어쩌면 하반신 전부가 가루가 되어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존재감이 희미해 유령임이 분명한 남자는 근심이 한 가득이었다.
《엉치뼈 박살 안 났어. 자네 몸은 민들레 홀씨처럼 부드럽게 떨어졌다고. 그러니까 빨리 안 일어나면 노래 부른다? 하나, 둘, 셋, 넷. 쨔라쨔라 쨘쨘. 블랙위카 마을의 술주정뱅이 어부는~♪ 어허어허, 허허~♬》
귓구멍을 강력 시멘트로 틀어막고 싶어졌다. 블랙위카 마을의 술주정뱅이 어부?! 원래 그 노래에 등장하는 술주정뱅이의 직업은 어부가 아니고 벌목꾼이다. 어부는 바다, 벌목꾼은 산! 게다가 누굴 고문해서 죽이려고! 박자고 음정이고 하나도 안 맞는다. 핀치는 제발 닥치라는 의미를 담아 끙끙거렸다.

《제발... 우린 이보다 더 어려운 일도 견뎌냈잖아.》
어르고 재촉해도 못 하는 일은 못 한다.
핀치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만 편안해지고 싶을 뿐이다. 아픈 것도 싫고, 힘들게 고생하는 것도 보람 없다. 매번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자신에게 신물이 나고,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다. 차라리 이대로 숨이 끊어진다면 - 순간 유령이 슬픈 얼굴로 그러면 안 된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란 놈에겐 소원을 빌 자격조차 없단 말인가... 네이슨?

팔자 눈썹을 한 친우의 얼굴은 모래 크기의 작은 알갱이가 되어 서서히 흩어졌다.
《다른 소원을 빌게. 망자 앞에서 죽고 싶다는 말은 하지 말고.》
그리고 다시 사방이 캄캄해졌다.

한참만에 의식이 다시 돌아왔을 적에 이번에 그의 시야 가득 들어온 것은 신발을 신지 않은, 건강한 사람의 맨발이었다.
『...』
이걸 어떻게 해석을 하면 좋을까. 핀치의 시선은 발가락을 따라 가지런한 발톱으로, 다시 뼈가 도드라진 발등을 따라 천천히 이동했다. 맨발? 이 상황에서? 재미없는 환각을 보고 있는 중이라고 확신한 핀치는 눈꺼풀을 여러 번 깜빡였다. 하지만 사람의 발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고, 대신 머리 높은 곳으로부터 사람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와드릴까요.』
얼씨구나, 환각에 이어 환청까지.
차마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핀치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창백한 피부로 덮힌 발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따라서 대답도 할 수 없다. 모든게 질이 좋지 않은 도깨비 장난 같았다. 그렇고말고. 이것은 사람을 홀려 물에 빠지게 만드는 여우호롱불이다.

머리 위에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는 대단히 차분했고, 사적인 감정이 배제되어 있었다.
『당신의 움직임을 계속 지켜봤습니다. 방금 의식이 돌아왔지요? 움직일 수는 있습니까. 움직일 수 없다면 억지로 움직이지는 마십시오. 그럼 이제 당신을 돕기 위해 허리 아래로 제 팔을 집어넣겠습니다.』
여우호롱불이 몸 아래로 손을 넣는다고?! 얼굴색이 변한 핀치는 빠르게 외쳤다.
『그러지 마십시오.』
『스스로 움직일 수 있으십니까.』
『자신은 없지만 혼자 해보겠습니다. 저에게 몸을 추스릴 시간을 더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하지만 10분이 지나면 이쪽에서 맘대로 조처하겠습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쉽게 수긍하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정확히 한 발자국이었다. 이쪽에서 기침만 해도 그는 다시 두 걸음 이상 다가올 것이고, 그 즉시 핀치를 아기처럼 안아 올릴 것이다.
모르는 존재가 몸을 만지는 건 질색이다.
「마냥 꾸물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겠군.」
쓰게 웃으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생판 모르는 자의 눈이 그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불편한 시선이었다.「꼭 그렇게 쳐다봐야 합니까」항의하고 싶었지만 꾹꾹 눌러 참았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이라면 파도 물결 따라 흔들리는 미역줄기처럼 허우적거렸음에도 결코 웃지 않았다는 거였다. 그는 끈질기게 - 어떤 면에선 매우 집요하게 - 핀치가 꾸물거리며 팔다리를 버둥거리는 모습을 객관적으로 지켜보았다.

콧잔등이 땀으로 범벅이다. 배에 힘을 줘서 그런지 숨소리가 더 커졌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등을 바닥에 대고 똑바로 눕는데까진 성공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기진맥진이었다.
『7분 지났습니다.』
『맙소사, 시계로 시간을 재고 있는 겁니까.』
『발끈하고 화를 내는 걸 보니 마음이 놓이는군요. 심각한 부상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되겠어요. 그래도 스스로 일어설 힘은 없는 듯하니 제 팔을 붙잡으세요.』
핀치는 단칼에 거절했다.
『싫습니다.』
호의를 거절한 그는 무릎을 세운 자세에서 다시 아랫배로 힘을 주었다. 덕분에 만삭의 산모가 아기를 출산하는 현장이 되고 말았다. 으으으, 이러고 괴상한 소리가 입밖으로 흘러나왔다. 다시 한 번 더. 으으으. 진작에 망가진 허리와 다리가 물고기처럼 퍼덕거리며 경련을 일으켰다.

한 단어 상황 요약.
꼴사납다.

『헤치려는게 아닙니다.』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광경이었나 보다. 한쪽 무릎을 굽히고 곁에 앉아 남자가 설득을 개시했다.
『나는 악당이 아닙니다. 내 인상이 그렇게 험상궂어요?』
반대다. 이 남자는 상당히 잘 생겼다. 그리고 착실하고 정직한 인상이다. 안경을 쓰고 보면 다르게 보이려나. 어쨌거나 핀치의 경계심이 살짝 누그러졌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당신의 식별 코드를 무작정 삭제하거나 임의대로 수정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자, 그러니 긴장을 풀고 손을 이리 주세요.』

그렇게 말하는 존재는 결단코 인간이 아니지.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 팔뚝으로 소름이 돋았다. 핀치는 이빨이 딱딱 부딪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Posted by 미야

2012/08/27 20:32 2012/08/27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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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드롭 1-07

슬슬 가게 문을 닫고 화덕에서 불을 뺄 시간이었다.
엉클 밥 주점의 주인 로버트 소워스키는 언제나처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입고 입던 펑퍼짐한 앞치마를 벗었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낼 수 있었음에 짧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종교라는 것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이다. 그래도 요즘 같이 어려운 시대엔 기도라는 행위가 절실히 필요하다.
『삼촌.』
심부름 갔던 애덤이 돌아왔다. 호르몬이 날뛰는 것도 아닌데 소워스키는 조카를 끌어안고 뺨에 키스를 퍼붓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물론 아직 망령은 나지 않았기에 그러지는 않았다. 조카는 스물 셋의 청년이었고, 냄새나고 늙은 삼촌의 키스를 받기엔 너무 잘 생겼다.
『어서 오렴. 핀치 씨에게 타박상에 특효라던 연고를 잘 건네주고 왔니?』
활짝 웃고 있던 소워스키와는 대조적으로 애덤의 표정은 그늘지고 어두웠다.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저런. 많이 아프다고 하든? 설마, 단순히 멍이 든게 아니고 그 양반 종아리 뼈에 금이 간 것 같다거나... 의사에게 보여야 할 정도야?』
『아뇨. 그런게 아니고요.』

핀치는 집에 없었다.
늦은 시각이었다. 애덤은 손가락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상대가 바람둥이 벤튼이었다면 치마 입은 여자를 꼬시러 외출했구나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거다. 하지만 상대는 벤튼이 아닌 핀치다. 그는 겁이 많은 사내다. 건강도 썩 좋지 않다. 데이트 보다는 빈둥거리며 침대에 눕는 편을 선호한다. 그런 핀치가 여자를 만나기 위해 집을 비웠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그렇게 꼼꼼한 성격의 사내가 무슨 까닭에서인지 현관문도 활짝 열어두고...
『문이 활짝 열려져 있었다고.』
애덤은 차분하게 상황을 삼촌에게 설명했다.
『문이 열려져 있길래 고개를 길게 빼고 안을 들여다보았죠. 함부로 들어가진 않았고요. 슬쩍 봐선 물건이 좀 어질러져 있었지만 도둑이 든 것 같진 않았어요. 책장 서랍도 잘 닫겨져 있었고요. 그래서 10분 정도 밖에서 서성이며 핀치 씨의 이름을 불러봤는데요...』
『그런데 대답이 없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부근을 한 바퀴 돌았어요. 그리고 여기, 핀치 씨의 안경을 찾아냈습니다.』
『알았다.』
소워스키는 식료품을 넣어두는 찬장 쪽으로 다가가 하부장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위쪽 선반에는 양파가 담긴 바구니며 흙 묻은 감자가 가득했지만 아래쪽에는 어른 팔 길이 정도의 장총이 한 자루 들어가 있었다. 그 옆에는 탄약 상자도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소워스키는 비장한 표정으로 장총을 집어들었고, 공룡이라도 잡으러 간다는 투로 두 다리를 벌렸다.

『워, 워! 쏘지 마십쇼! 접니다, 저. 경비병 시멘스키!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고요.』
탄약을 장전하는 소리를 들은 시멘스키가 양손을 머리 위로 번쩍 올렸다.
『늦은 시간이야. 실수로 총에 맞아도 불평할 순 없을 걸, 시멘스키.』
인기척이 들린 입구 쪽을 곁눈질하며 소워스키가 말했다.
『영업은 방금 전에 끝냈네.』
『아이고, 아저씨. 제가 야식용 샌드위치를 사러 왔을 것 같습니까. 후스코가 안 보여요.』
『어.』
『애 아빠가 아들이 집에 아직 안 돌아왔다면서 이성을 잃었어요. 혹시 후스코 찡이 오늘 저녁 이후로 군것질을 하러 여기에 들린 적은 없습니까.』
『애덤 말로는 핀치도 안 보인다고 하네, 시멘스키. 그리고 핀치가 안경을 잃어버렸어.』
『젠장.』
움무다. 십중팔구 움무의 짓이다. 시멘스키와 소워스키는 욕설을 퍼붓고 주점 문을 박차고 나왔다.

깜빡깜빡 잠이 들었다. 정신이 돌아온다 싶었다가 도로 졸음이 쏟아졌다.
몸을 웅크리고 흙바닥에 누운 상태에서 핀치는 두 팔로 몸을 감쌌다. 물기를 흡수하는 재질로 만들어진 겉옷으로는 아래서 올라오는 냉기를 충분히 막을 수 없다. 몸을 문질러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 어금니가 딱딱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 경고 : 체온 저하
망막에 깨알처럼 작은 글씨들이 나타났다. 글자가 벌레처럼 느껴져 순간 짜증이 치솟았다.
- 외부로의 자동 구조 신호 발신
핀치는 귓속에 들어간 물기를 털어내는 요령으로 머리를 탁탁 쳤다.
- 사용자 권한에 따른 구조 요청 취소, 명령 정상 처리
그는 실소했다. 이런 건 정말이지 도움이 안 된다.

마지막 남은 기운을 전부 쥐어짜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모르겠다. 여전히 집 주변인 듯하다. 여러 번 뒹굴고 넘어지면서까지 달렸지만 그렇게 먼 거리까지 벗어난 것 같진 않다. 글쎄다... 노력은 했다. 결과까진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는 예상 외로 선전하여 상당히 깊은 숲속까지 들어왔을 수도 있다.
것보다 몇 시나 되었을까. 마지막으로 넘어지고 나서 30분 정도 기절한 모양이다. 당연한 애기지만 그보다 더 긴 시간동안 의식을 잃었던 것일 수도 있다. 새카맣게 어두워진 숲속에선 판단이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아는 지식이 월등히 많다고 해도 지금으로선 어디가 산이고 어디가 계곡인지 짐작이 안 갔다.
가지고 있는 손전등을 켜서 앞을 비춰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러나 미친 짓이다. 어둠 속에서 불을 켜면「나는 여기에 있으니 어서 날 잡아가쇼」광고를 하는 거와 마찬가지다. 이성이 욕구를 앞질렀다. 휴대용 손전등을 포기한 핀치는 대신 하늘을 빼곡이 채운 영광된 빛들을 쳐다보았다.

별들은 속삭였다.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핀치는 사큰거리는 통증을 호소하는 무릎을 손바닥으로 쥐었다.
「후스코가 어른들에게 알렸다면 마을 사람들이 날 찾으러 나설 거야.」
여러 상황을 가정하고 적절하게 판단하라. 차근차근 사실을 나열하며 생각을 정리해봤다.
「그런데 후스코가 겁에 질려 입을 다물었다면? 가능성 높아. 그 아인 맹꽁하니까.」
것보다 더 두려운 가설이 있다.
「움무 상인이 그 아이를 죽이기라도 했다면...」
평균 수명이 형편없이 줄어들고 인구수는 급감하고 있다. 이런 마당에 어린아이는 이제 잘 태어나지 않는다. 몇 세기에 걸쳐 기계의 도움을 받아가며 임신과 분만을 태만히 한 탓에 인간의 육체는「생육과 번성」면에서 퇴화했다. 쉽게 말해 성욕은 그대로인데 불임률이 높다.
「어린아이가 귀하다는 건 누구라도 알아. 악당이라고 해도 함부로 죽일 수 없어.」
그런데 문제의 움무 상인이 보통의 악당이었던가.
「첫째, 글자를 안다. 둘째, 내가 하는 거짓말을 쉽게 알아차렸다. 셋째, 중앙 관료들이 손에 칩을 이식한다는 걸 안다... 넷째, 다섯째... 귀찮기도 하거니와 끔찍스러워서 이런 건 더 이상 생각하기 싫군.」
머리를 뒤로 젖혀 나무 기둥으로 쿵쿵 소리가 나게끔 박아댔다.

「하지만 내 집으로 들어온 건 움무들이 아니라 대머리 움무 한 명이었어. 그건 좋은 소식이지.」
대머리 움무만의 독자 행동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 움무들이 그를 데리고 이미 먼 곳으로 떠났을 거야」
원래 거래가 종료되면 움무들은 서둘러 다른 장소로 이동해야 한다.
「마을 사람들과 서로 무기를 들고 죽기 살기로 싸우기 싫다면 말이지.」
게다가 대머리 사내는 마을의 어린 소년에게 손찌검을 했다. 어쩌면 살해했을 수도 있다.
「날 잡겠다고 숲속을 뒤지고 있을 때가 아니지. 재빨리 도망가야 할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움무들이 숲속을 머물며 떠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나에게서 관료의 칩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했다면 한 번 해보자 이랬을 수도. 내 손을 잘라가기 전까지 포기하지 않을 수도 있겠군. 이런.」

칠흑과도 같은 어둠 속에선 코앞으로 손바닥을 가져가도 그 모양마저 알아보기 힘들었다.
핀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이가 없군. 나 같은 인간이 중앙의 관료 노릇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칩 같은게 어딨다고...』
다시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위험하다.
의식이 가물가물 흐려지는 가운데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그러고보니 안경은 어디로 갔을까. 진짜지 한숨 쉴 일만 가득이다.

- 경고 : 외부 신호 포착
망막에 글자가 다시 나타났다. 핀치는 귀찮아하며 다시 손바닥으로 머리를 탁탁 쳤다.
- 승인되지 않은 경로로 구조 요청에 대한 응답
이건 또 뭐여, 잠시 생각했다.
- 시그널 차단 실패. 위치 노출. 미확인 구조자가 구조 작업 전개
동시에 엉덩이 아래가 푹 꺼지면서 몸이 흙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핀치는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Posted by 미야

2012/08/24 12:58 2012/08/24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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