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드롭 1-10

오리지널 성향입니다. POI 설정과 맞지 않습니다.
업무량이 증가하는 월말이 다가오고 있어 진행에 차질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남자의 목소리 주파수는 대단히 듣기 좋아서 끌려가지 말아야지 주의를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매혹당했다.
취조를 닮은 질문이 이어졌어도 핀치는 간간히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심지어 그와 시선을 맞추기도 했다. 뜬금없지만 핀치는 그가 책을 소리 내어 읽으면 멋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읽다보면 지루해서 미칠 것 같다던 A. 엘리더스 박사의「소립자 표준모형 이론」도 분명 꿀처럼 달콤하게 들릴 것이다.
『어디 출신인가요. 뉴스턱?』
『들어본 적 없는 지명입니다.』
『뉴스턱은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입니다. 흐음... 진짜 모르는 곳인가요?』
핀치는 지식으로 막연하게 알고 있던 몇 도시의 이름을 주워댔다.
『베버스라던가 세인트로나는 들어봤습니다. 가본 적은 없고요.』
『베버스! 그곳은 대단히 시끄러운 곳이죠. 당신도 거긴 가지 말아요. 도박장에 나이트클럽에 술주정뱅이 천국입니다. 5분도 지나지 않아 비명을 지르고 싶어질 겁니다.』
글쎄다. 베버스는 진작에 멸망해서 무너진 건물 잔해 틈새로 유해한 방사능이 유출되고 있다. 밤새 요란한 파티를 벌이던 사람들은 백골로 돌아갔다. 잔치는 끝났다.
『무슨 일을 합니까? 핀치. 여기까진 어떻게 오게 되었나요?』
『입구가 열린 공기배출구를 통해서요.』
『오, 그걸 묻는게 아니었어요, 핀치. 것보다 다리가 많이 아픕니까?』
『괜찮습니다. 제가 다리를 끄는 건 오래전에 다친 상처가 완전히 낫지 않아 그런 겁니다. 방금 전에 발목을 접질러 그런게 아니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것보다... 우리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세이렌의 노래에 홀려 있던 어부는 좌초 직전에야 퍼득 정신을 차렸다.
『지상으로 나가는 출구는 어디입니까?』
그렇다. 미로와도 같은 이곳을 벗어나 마을로 돌아가는게 먼저다.

리스는 돌연 멍한 표정이 되었다. 이 양반이 갑자기 왜 이러나 핀치가 걱정할 즈음, 리스는 귓속에 들어간 물기를 털어내는 요령으로 자기 머리를 두어 번 탁탁 쳤다.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안다. 가끔씩 그도 그렇게 하니까. 핀치는 초조해하며 손톱을 쉬지 않고 튕겼다. 보나마나 그들은 큰 문제에 봉착했다.
『제어 시스템이 완벽하게 정지했어요. 건물 도면을 조회하려 했는데 안 되네요.』
역시나.
『그럼 우리는 길을 잃어버린 건가요.』
『그렇진 않아요. 이곳은 그리 많이 변하지 않았어요. 제 기억이 맞다면 우리는 G구역 끝부분에 있습니다. 일단 K-7구역으로 넘어가 EPS까지 가는게 좋을 것 같네요. 그곳에서 수동 조작을 통해 일부 구획 판넬을 열 수 있을 겁니다. 지하 3층까지 올라가야 해요. 거기까지 가면 예전 작업자들이 탈출용으로 설계한 비상 쉬프트가 있을 거예요.』
G구역이고 K구역이고 200년 이상 묵힌 낡은 기억이다. 그동안 다른 작업자가 시설 변경을 지휘했다면? 핀치는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문득 오래된 소설의 줄거리가 떠올랐다. 주인공은 수수께끼와도 같은 복잡한 미로에 갇힌다. 죽을 고생을 해가며 탈출을 시도하지만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흘러도 입구를 찾지 못한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 바퀴 빙 돌아 원래의 출발 지점으로 되돌아왔다. 작가는 그렇게 인생의 무상함을 비꼬았지만 이게 현실이 되면 한 편의 공포 드라마다.

따지며 추궁하는 기색을 보인 건 아마도 그 공포 탓일 터.
『출구가 있기는 있는 겁니까. 당신도 출구를 모르니까 이곳을 못 떠나고 있는 거잖아요. 내 말이 맞죠?! 맙소사! 빨리 깨달았어야 했는데. 꼼짝 없이 갇힌 거야. 앞으로 어쩌지. 에밀리 루이스에게 잡화점 장부를 돌려주지도 않았는데. 그럼 틀린 세제 가격은 누가 고쳐주지! 옥수수 다섯 푸대! 안 돼. 카터라면 죽을 때까지 원한을 품을 거야. 나는 이제 망했어.』
리스는 진정하라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출구는 있어요.』
『그, 하지, 어!』
『패닉에 빠지면 안 되요. 숨 쉬어요. 괜찮으니까 참착해요! 표현이 엉망이지만 당신이 묻고 싶은게 뭔지 알겠어요. 나는 자의로 떠나지 않은 겁니다. 어디로 가면 나갈 수 있는지 알고 있어요. 다만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출구는 있고, 당신은 무사히 밖으로 나갈 수 있어요.』
핀치는 주먹을 가슴에 모은 상태에서 쭈삣쭈삣 옷자락을 쥐었다 놓았다 했다.
『자의로 머무른 거라고요?』
『네.』
『어째서요?』
『궁금하면 물어봐요.』
리스는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미소를 지으며 이쪽으로 가야 한다며 왼편을 가리켰다.
핀치는 결정을 못 내리겠다는 투로 왼쪽 통로와 리스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개의치 않고 리스가 먼저 출발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다지 좋지 않은 일들이 있었죠.』
『대답이 그게 뭐예요. 궁금하면 물어보라면서요, 미스터 리스.』
『상세하게 대답하겠다고는 안 했잖습니까.』
눈높이 부근에 위치한 조작 패널에는 J-3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손가락 힘만으로 뚜껑을 힘들지 않게 벗겨낸 리스는 몇 개의 스위치를 올렸다. 어딘가에서 펑 소리라도 들리지 않을까 긴장한 핀치는 본인도 모르게 리스에게로 바짝 붙어 섰다. 그렇다고 해도 달라진 건 없었다. 리스는 뻣뻣해진 핀치의 얼굴을 흘깃 쳐다본 뒤, 위로 올렸던 스위치 두 개를 도로 원위치로 돌려놓았다. 그리고는 숫자 키보드를 8135-162-5583-9919 순서로 눌러 노란색 단추에 불이 들어오게 만들었다.

이번에도 역시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주변은 고요했다. 핀치는 당혹스러웠다.
『그게 끝입니까.』
『소리가 나면 곤란에 처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방금 보안 장치를 수동으로 해제했습니다. 임시 식별 코드를 입력했어요. 이것으로 이제 K구역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둘러야 해요. 정확히 15분 뒤에 입력한 코드는 무효가 됩니다.』
『오.』
『그럼 계속 걷도록 하죠. 여기서부터는 다소 복잡합니다. 이 앞으로 계단이 있으니 주의하세요. 당신이 보란 듯이 넘어지는 걸 전 바라지 않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리스가 앞장섰다.
핀치는 K라고 적힌 구역 구분 표지를 보았다.
설명은 일절 생략되고, 영어 대문자가 적혀진 내용의 전부인 심플한 표지판이었다.

『상당히 잘 알고 있네요, 미스터 리스. 혹시 예전에 이곳에서 직원으로 일했나요?』
『아니오.』
체중을 실어 힘들게 문을 밀던 리스가 잠시 숨을 골랐다. 어깨를 대고 세게 밀었음에도 오랫동안 움직임이 없었던 출입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리스는 다시 한 번 더 세게 밀었다. 그러자 안쪽에서 녹이 슨 경첩이 반으로 부러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이 정도면 되겠다 싶자 이번엔 요령껏 주먹으로 모서리 부분을 쳤다. 그 충격에 미세한 알갱이들이 떨어져 내렸다.
『나는 분해되기 위해 이곳으로 보내어졌어요.』
리스가 말했다.

Posted by 미야

2012/08/29 20:23 2012/08/29 20:23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1608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 584 : 585 : 586 : 587 : 588 : 589 : 590 : 591 : 592 : ... 1974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992126
Today:
161
Yesterday:
319

Calendar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