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인들은 정해진 시간에 출근을 하고 정해진 시간에 퇴근을 한다. 세탁소 방문이나 마트 방문 또한 비교적 정기적이다. 하루의 일정, 일주일의 일정, 그리고 한 달의 일정은 대동소이하다. 정해진 요일에 쓰레기를 배출하고, 정해진 장소에 차를 주차하고, 정해진 날짜에 신용카드 대금을 지불한다. 어쩌다 달라지는 것은 금요일 밤에 목구멍으로 처넣는 종류가 버본이냐 데킬라냐 하는 정도, 그리고 원 나잇 스탠딩의 상대가 검정색 속옷을 입었느냐 흰색 속옷을 입었느냐 정도의 차이밖엔 없다.
하지만 리스의 삶은 규칙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에게는 정해진 출근 시간이라는 것이 없었고, 퇴근 시간이라는 것 역시 없었다. 심지어 그가「임무」에 임하는 날조차 들쑥날쑥이었다. 핀치가 만들었다는 기계는 하루가 멀다하고 숫자를 뱉어내기도 했고, 지금처럼 일주일 가까이 침묵을 지키고 경우도 허다했다.
『기계의 현 소유자인 미국 정부가 정기 점검이랍시고 파워 버튼을 내렸겠습니까. 염려 마세요. 오히려 세상이 조금이라도 평화로워졌다고 생각하면 기쁜 일이죠, 미스터 리스. 』
핀치는 집중하고 있던 모니터에서 잠시 얼굴을 들고 아무런 할 일도 없이 방치된 채 빈둥거리고 있는 리스를 흘깃 쳐다보았다.
『리~~스?』
글쎄올시다. 그는 아까부터 책상에 놓여진 낡은 정장본 책을 별 의미 없이 들었다 놓았다 하는 중이었다.
빅토르 위고는 분명 그가 좋아할만한 분야가 아니다. 핀치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전문 딜러를 통해 15,200 유로화(한화 약 2천2백만원)를 주고 구입한 그 책은 어디까지나 뇌를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지 팔 근육을 단련하라고 만들어진게 아니다.
그렇다고 신경질적으로 대응하는 건 나쁘다. 통제력은 권력과 마찬가지.
핀치는 말하기에 앞서 가만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만하면 사무적으로 들리겠지. 그럼 시작.
『앞서 언젠가 말씀드렸던 것 같지만, 미스터 리스. 번호가 도착하면 제가 신속히 연락을 드릴 거에요. 일이 없을 적엔 굳이 이곳으로 나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침내 빅토르 위고로부터 흥미를 잃어버린 리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저런. 제가 여기에 그냥 한가하게 놀러온 거라고 짐작하셨습니까? 이봐요 핀치...』
『네?』
『시간이 날 적에 이곳에 숨겨놓은 무기고를 정리하라고 요구한 건 그쪽입니다. 쓸데없이 빈둥거리고 있는 거냐는 식의 책망을 들은 것 같아 슬프군요.』
『오우.』
『물론 제 관심사의 전부가 무기인 건 아니니 그렇게 인상 찌푸릴 건 없습니다. 150시간 가까이 얼굴을 보지 못한 핀치 씨의 안부가 궁금하기도 했었고요...』
탁 소리를 내며「노틀담의 꼽추」커버가 덮였다.
『아무튼 그 갈색 곱슬머리 여자의 시건방진 말은 신경 쓰지 말아요, 핀치.』
어째서 이야기의 끝이 그리로 튀는 건데? 핀치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뭐요? 곱슬머리?』
『당신더러 절름발이라고 욕한 그 말라깽이 여자요. 카트를 밀면서 손에는 커다란 기름 걸레를 쥐고...』
『지금 달튼 양을 말하는 거예요?!』
『그 미화원의 이름까지는 모르겠군요, 핀치.』
리스는 능슥하게 시치미를 떼었고, 핀치는 더욱 초조해졌다.
『리스 씨. 진지하게 질문 드리는건데 제가 달튼 양과 싸우는 걸 봤어요?!』
『싸움? 아뇨. 일방적으로 핀치 씨가 야단을 맞고 있는 걸 봤죠. 바닥에 물기가 흐른 건 핀치 씨 잘못이 아닌데도요. 달튼 양은 백합과 난꽃으로 장식한 꽃바구니를 배달하면서 부주의하게 움직이던 남자를 혼내켰어야 해요. 제 말이 틀린가요.』
이제 핀치의 눈은 반대로 가늘어졌다.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면서 대신 당혹감이 자리를 대신했다.
『뭐예요. 절 쫓아다닌 거예요?! 이봐요, 존!』
핀치는 비밀스러운 남자다. CIA 국장보다 더 비밀스럽다. 그는 사생활이 외부로 공개되는 걸 원치 않는다. 공개된 약간의 사생활이라는 것이 진짜가 아니라 정교하게 꾸며진 위장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따라서 핀치의 자제심은 살짝 망가졌다. 다시 말해 씩씩거렸다는 얘기다.
『제발... 정중히 부탁드리는데, 제 사생활을 존중해 주셨으면 고맙겠군요. 그리고 리스? 지금 눈웃음 치면서 제가 좋아하는 색이 뭐냐 질문하려는 것도 그만두세요.』
『어... 파랑 아닌가요?』
『아니예욧!』
한 호흡 건너뛰고.
핀치는 작성 중이던 보안 코드 작업으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자판을 두둘기는 속도가 한층 빨라졌다.
* * * 오랜만의 글쓰기 작업입니다. 즐겁네요. 그치만 퍼오인 팬질은 어려워서 못 하겠습니다. 제 취향은 귀신을 잡는 거지, 강도나 마피아가 아니니까효. ^^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