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LED 링의 존재를 깨닫는 것과 동시에 무리 중 한 명이 숨 넘어 가는 소리를 냈다. 손전등을 들고 있는 쪽이었다.
『빌어먹을, 저놈이 나한테 깨진 유리를 던졌어!』
팔목에 유리파편이 박혔으니 유혈사태다. 피가 철철 흐르는 부위를 부여잡고 악을 쓰고 있는데 시커먼 게 빠르게 지나갔다. 어, 하는 사이에 춤추는 시늉하던 놈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튕겨나갔다. 속도 더하기 체중을 실어 팔꿈치로 밀었으니 충격이 상당했을 거다.

『안드로이드다! 안드로이드야!』
판단이 빠르게 내린 우두머리가 총을 들어 쏘았다. 아군과 적의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근거리에서 쏘아댄 탓에 비명이 더 커졌지만, 아무튼. 조지는 방패막이로 쥐고 있던 자를 무리를 향해 밀었다.
『잡아! 저 새끼 잡아!』

제임스는 진작부터 뒤도 안 돌아보며 뛰고 있었다. 그래봤자 체력이 저질이라 그리 많이 못 갔지만... 꼬리 밟혀 화난 말티즈에게 쫓겼을 적에도 한숨 나올 지경의 달리기 속도를 보여주던 그다. 누구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기적과도 같은 몸 움직임이 가능하게 된다던데, 거짓말이다. 믿지 마라. 만성적 운동부족은 생명의 위협이고 뭐고 사람을 흐느적거리는 오징어로 만들 뿐이다.

『산책 나왔어요? 달려요!』
뒤따라 도망치던 조지가 더 빨리 움직이라고 재촉했지만 호흡곤란이 와서 대꾸도 못했다.
뒤쪽에서 탕, 소리가 났다. 감히 돌아볼 엄두도 안 났다. 동네 양아치가 홧김에 쏘아댄다고 표적을 맞출 리는 없겠지만 만의 하나라는 게 있다. 기겁을 한 제임스는 몸을 틀어서 대로변을 벗어나 골목길로 방향을 틀었다. 쌓인 눈 덕분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지만 손바닥에 발바닥, 혓바닥까지 동원해서 볼썽사납게 나뒹군다는 최악의 선택지를 벗어났다.

『하필이면! 이 앞은 철조망으로 막혔다고요!』
안드로이드 시력은 어둠을 개의치 않고 물체를 선명하게 식별해낼 수 있는 듯했다.
막혔다고? 짐작도 가지 않는 덩어리에 발이 걸리면서 – 무게와 크기로 봐선 방치하고 내버려둔 화분 같았다 – 아픔 이전에 두려움을 느꼈다. 허우적거리자 이번에는 기분 나쁘게 물컹거리는 게 닿았다. 최악이다. 그럼 돌아서 다시 나가야 하나? 한쪽 발로 깽깽이를 하며 울음을 삼키고 있는데 조지가 그의 팔뚝을 덥석 끌어안았다.
직진이다. 고민하지 말고 계속 간다.

『철조망 위로 올라가세요, 제임스.』
『무리입니다! 그런 게 가능할 거 같습니까?!』
『확실히 가능할 거 같진 않군요. 그럼 쉽게 갑시다. 위로 던져줄게요.』
『멱살 잡지 마시고요!』
『눈만 감고 잠시만 있으면 됩니다. 금방 저편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 저편은, 그 저편이 아니지! 댁이 지금 말하는 저편은 저승이잖아!』

밀가루포대 던지기를 시도하려는 조지에게 항의하며 완강하게 저항했다. 두 다리가 번쩍 들렸을 적엔 짤막하게 비명도 터져 나왔다.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며 조지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지만 그 길이가 너무 짧았던 탓에 손아귀에서 금방 빠져나갔다. 어차피 그 머리카락도 나노분자로 만들어진 가짜라서 두피에 단단하게 붙어있는 종류도 아니었다.
마음이 급해진 제임스는 불가피한 선택으로 목을 잡았다.
그런데 도대체 내구도가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 조지의 목이 덜컥거렸다.

아아악.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이들 뒤를 쫓아온 사내들은 그래서 헷갈렸다.
움직이면 뒈지게 해주겠다는 의미로 허공을 향해 총을 쏘았다. 철조망을 넘으려던 것들이 총성을 듣고 비명을 질렀다. 그게 아니라 총알이 발사되기 전부터 이미 비명을 지르고 있던 것도 같다. 그래서 뭐, 지금 그게 중요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따져봤자 골치만 아프다. 아무튼 그들은 저 빌어먹을 것들을 따라잡았고, 이제 한바탕 혼꾸멍을 내줄 시간이었다.

제일 열 받았던 순서대로인지 유리파편에 손목이 찍혔던 남자가 총구를 겨누며 선두로 달려 나왔다. 피를 봤으면 끝장을 봐야 하는 법이었고, 무릇 불알 달린 사내는 복수를 행함에 있어 시간을 허비해선 안 되는 거였다. 왼편의 가방을 멘 놈을 지나쳐 훌륭한 과녁 역할을 해주고 있는 빛나는 LED 링을 조준했다. 안전장치는 진즉에 풀린 상태이고,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문제는 손가락에 힘을 주기도 전에 손가락뼈가 아작 났다는 거였다. 그것도 복합골절이었다.
총구를 잡아 고정한 채 총신 자체를 큰 각도로 비틀면 사람의 손은 도구를 따라 회전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고, 그 회전 각도를 미처 못 따라가면 - 부목이 필요해진다.
뇌리로 번개가 쳤다. 아픔은 그 다음이다. 검지손가락이 이해 불가능한 각도로 꺾였다. 피부를 뚫고 튀어나온 게 뼈가 아니었음 하고 간절히 빌었다. 아니, 그 이전에 고통을 느끼지 못하도록 누군가 자신을 기절시켜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조지는 바닥에 떨어진 권총을 구석으로 걷어찼다. 동시에 두 번째 상대를 향해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원, 투, 쓰리. 뇌가 흔들리면 시야가 일그러지고 구토가 치솟는 법이다. 잔뜩 마신 술을 게워내려는 것처럼 머리를 숙이자 이때다 하고 냅다 팔꿈치로 찍어버렸다.

바짝 독이 오른 무리가 다시 총을 쐈다.
컥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데 아뿔싸, 손가락 부러진 놈이 드디어 소원을 이루고 기절했다.
『똑바로 안 해?! 어딜 쏜 거야!』
『제길, 손이 떨려서... 죽은 건 아니겠지? 살짝 스친 거겠지? 그치?』
『끌어내! 끌어내라고!』
이제 개싸움할 일밖에 안 남았다고 판단한 조지는 가만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한 놈만 걸려라. 엄지를 눈구멍으로 찔러 넣어 눈알을 파버릴 작정이었다.

『아오, 썩을 것들... 니들은 학교를 안 다녀서 통행금지라는 말의 뜻이 뭔지 모르지?』
짜증 섞인 목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온 건 그때였다.
『디트로이트 경찰이다. 무기 가진 놈들 전부 동작 그만.』
코트 차림새의 나이 많은 사복경관이 배지를 무적 방패처럼 들어 보이며 욕을 퍼부어댔다.
『어! 일요일 새벽에 총질하며 돌아다니라고 그렇게 배웠어?! 똥구멍 같은 놈들! 니들은 잠도 없냐? 어! 어디서 싸움질이야!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새끼들. 심심해 뒤질 거 같음 술이나 처마실 것이지... 이 새끼도 총질, 저 새끼도 총질, 애들 장난도 아닌데 총질... 씨부럴.』
경찰 입담이야 원래 쌍소리 많기로 유명하지만 이 양반은 압도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술 냄새도 좀 났다.

『뭐해! 내 말이 장난 같아?! 전부 다 꺼지라고! 꺼져!』
그리고는 미란다 원칙 고지, 당신을 체포하겠습니다, 이런 거 없이 발로 뻥뻥 차기 시작했다.
『아얏!』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짐작이 갔다. 방금 저 사복경관, 실수로 화분을 찼다. 제임스 발에 걸렸던 바로 그 버려진 화분 말이다. 그리고 제임스가 그랬던 것처럼 노인네도 깽깽이발로 뛰었다.

이때다 하고 다들 골목을 빠져나가 우르르 도망쳤다.
『담에 두고 보자.』
도망가는 마당에 전형적인 악당의 발언을 왜 입에 담는 건지 모르겠다.

뒤따라 도망갈 생각은 않고 조지가 질문했다.
『저 사람들, 그냥 내버려둘 겁니까?』
『그럼 어쩌라고. 체포하라고? 내가 보기엔 일방적으로 맞고 있는 거 같던데 왜.』
멍이 들었을 게 분명한 정강이를 어루만지던 노인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체포를 해야 할 건 이 망할 화분이야. 아니 왜 이딴 장소에 이따위 게 굴러다니는 거야!』
그리고는 성질을 못 이기고 화분을 또 걷어찼다.

『......커흑!』
술이 원수다.
불붙는 통증을 호소하는 발가락에 사복경관은 다시 깽깽이발로 뛰었다.

Posted by 미야

2020/06/23 15:35 2020/06/23 15:35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2125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 Previous : 1 : ... 144 : 145 : 146 : 147 : 148 : 149 : 150 : 151 : 152 : ... 1974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1020033
Today:
1739
Yesterday:
133

Calendar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