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가 차서 입김이 나왔다. 귀를 덮는 모자가 있었으면 좋았을 걸 생각하며 방향을 가늠했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장소는 강 건너편의 캐나다 윈저, 그리고 크랜브룩 대피소이다.
문제는 지도를 바닥에 내려놓고 큰 직선을 그렸을 적에 윈저와 크랜브룩은 각각의 끝점에 위치한다는 점이다.
수중에 동전이 있었다면 앞면과 뒷면을 골라 결정을 내렸겠지만 개똥도 약에 쓰려고 하면 없는 법이라고 가진 건 지폐 몇 장이었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손바닥에 침을 뱉은 뒤, 검지와 중지로 이를 튀어 방향을 점치는 고전 방식도 있다.
그리스의 게오르기네스 장군이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진격하면서 이 방법으로 적병의 매복을 점쳤다. 장군은 직진하는 길이 아닌 우회하는 길을 선택했고...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병사들은 산중턱으로부터 쏟아져 내리는 주먹돌에 얻어맞으면서 게오르기네스 장군의 침이 주술사의 농간으로 오염된 게 분명하다며 화를 냈다.
손바닥에 침을 뱉으려다 관두고 오른쪽 신발을 벗었다.
어릴 적에도 지저분하다 여겨 하지 않던 짓을 구태여 나이 먹어 할 필요는 없다.
신발을 수직으로 던진 후, 바닥에 떨어진 신발코가 향하는 방향으로 가 보기로 결정을 봤다.
『제임스!』
영험한 수작을 부린 신발을 도로 주섬주섬 신고 있는데 조지가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제임스는 말간 얼굴을 들어 조지를 쳐다봤다. 정확하게는 주름진 그의 이마를 보았다.
안드로이드는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명령을 받는 존재로 설계되었다. 스스로 판단하여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을 내릴 수는 있지만 이에 따른 극심한 프로그램 과부하가 생긴다. 생산된 지 오래된 저성능 모델일수록 눈에 띄게 긴장 상태에 빠진다고 들었다. 스트레스는 다시 프로그램 과부하를 일으키고, 안정성 저하는 다시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악순환이다.
『정 뭐하면 3층으로 올라가 있으세요. 거긴 오랫동안 빈집이었습니다. 수도가 끊겼고 난방도 되지 않지만 안드로이드 둘이 지내는데 불편함은 없을 겁니다. 인기척이 나면 창문을 통해 2층인 제 집으로 내려가 몸을 피하세요. 벽을 타고 올라왔으니 벽을 타고 내려가는 건 어렵지 않겠죠.』
안드로이드를 빼앗기지 않겠다며 공갈 산탄총까지 쥐었다던 캐머런이 저 둘을 본체만체할 리 없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저들을 찾고 있을 터이고, 그동안 조지와 마이클은 안전한 장소에 숨어 기다리고 있기만 하면 되었다. 시간만 주어진다면 어렵지 않게 그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그게 아니라 방금 전 단말기요. 텍스트 채팅을 하던.』
일반적으로 사람은 자기보호 개념으로 타인과 일정한 거리를 둔다. 보통 큰 보폭으로 발걸음을 두 번 떼는 정도의 거리이고, 서로에게 팔을 내밀면 악수를 나누기 알맞다.
조지는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그 거리를 일방적으로 무시한 채 제임스에게로 훅 접근해왔다.
『네트워크에 접속이 된 거 맞죠? 그걸 저희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내용은 요청이지만 표정이나 몸짓은 강압에 가까웠다.
『어려운 부탁도 아니잖습니까.』
얼굴이 지나치게 가깝다고 느낀 제임스가 짐짓 피하자 작정하고 더 들이댔다.
『그 단말기를 꼭 써봐야겠습니다.』
이 안드로이드는 으쓱한 골목길에서 어깨에 힘 줘가며 애들 푼돈 떼먹은 경험이 매우 풍부한 것 같았다. 최소한 제임스가 판단하기에는 그러했다.
소용없을 텐데 작게 혼잣말하며 가방을 열어 텍스트 단말기를 꺼냈다.
기대감을 가지고 쳐다보기에 검지로 화면을 밀어 전원이 켜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제3자가 만지는 순간 화면은 다시 검게 변하고 그 어떤 명령에도 응답하지 않는다. 동영상 재생이라던가, 영상통화, 캐주얼 게임 같은 기능은 일절 없고 오로지 텍스트 채팅을 위해 만들어진 구닥다리 물건임에도 탑재된 생체인식 보안기능은 요즘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보안만큼은 훨씬 더 뛰어난 것 같기도 하다. 닉네임 스타스키와허치의 말로는 실리콘으로 엄지손가락 본을 떠서 보안인식을 뚫어보려 한 적이 있었는데 전혀 통하지 않았다고 했다.
지문을 뜰 생각을 했다는 것도 의외였지만 실리콘 가짜로 인식이 되지 않았다는 부분은 더 의외였다. 진짜 지문과 가짜 지문을 정확하게 구분해낼 정도가 되려면 상당히 높은 수준의 판독 기술이 필요하다. 10년 전인 2028년에도 이미 그러한 기술이 구현되어 있기는 했으나... 웨인주립대학교 의문의 재학생이 심심풀이로 만들었다던 텍스트 단말기였다. 방수기능도 없는 전자 손목시계에 뜬금없이 나사의 우주공학 계산기가 달려있는 셈이라서 그 괴리감에 다들 어리둥절해한 기억이 있다.
조지의 손이 닿자 역시나 화면이 검게 변했다.
제임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도와달라고 해도 설정 변경 이런 건 할 줄 모른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조지는 간단한 턱짓만으로 양해를 구한 뒤, 중앙처리장치가 있을법한 부위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티리움으로 구현한 피부색이 서서히 지워지는 걸 보고 제임스는 그동안 몰랐던 소소한 점 한 가지를 깨달았다.
안드로이드 손가락에는 손톱이 없었다.
조지가 가만히 눈을 감자 순간 텍스트 단말기 화면으로 무지개 색 노이즈가 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날카로운 바늘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소스라치며 단말기에서 손을 뗐고, 그 즉시 화면에서 무지개 색 노이즈가 사라졌다. 조지는 놀라서 자신의 손가락 끝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손을 쥐었다. 그것의 방호벽을 건드렸을 때, 그가 느꼈던 건 분명히 따끔거림이었다. 통각을 모르는 신체가 반응했다.
『거부당했습니다.』
『원래 그런 물건입니다. 그것과 똑같은 걸 캐머런도 가지고 있을 텐데요.』
『그렇기는 한데.』
침실 협탁 아래서 두 번째 서랍이 정해진 자리였다. 캐머런이 그걸 소파 테이블에 올려둔 채 방치해두면 잊지 않고 제자리에 돌려놓는 것이 조지의 할 일 중 하나였다. 다시 말해 하루에도 여러 번 만져봤다는 얘기다. 물론 중앙처리장치에 지금처럼 강제 접근한 적은 없지만.
조지는 여전히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엔니나르(eninaR) 라는 로고를 봤습니다.』
『그게 이름입니다.』
『이름도 있습니까?』
문단속이나 할 줄 아는 지능형 홈 네트워크에도 애칭을 붙이는 마당에 엉뚱한 소리였다.
『말레이폴리네시아어로 엔니나는 여섯을 의미합니다.』
『예?』
『다만 뒤에 대문자 R을 붙인 건 무슨 까닭에서인지 거기에 대하여 들은 내용이 없습니다.』
지금껏 대문자 R의 의미를 궁금하다 여긴 적 없다.
다만, 말레이폴리네시아어로 엔니나가 여섯을 의미한다는 얘기를 해주면서 노먼 조교수는 풋내기 대학생 제임스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대문자 R을 썼다.
간질간질한 그 촉감을 간직하기 위해 제임스는 오랫동안 손을 씻지 않았다.
식중독에 걸려 뒤질 작정이냐 꾸지람을 들었지만, 원래 호르몬 과잉으로 고통 받는 20대의 남자애는 아무렇지도 않게 미친 짓을 저지르는 법이다. 자위한 손으로 밥을 먹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막판에 이르러 기숙사 룸메이트 릭 도슨이 투덜거렸다.
단말기를 돌려받은 제임스는 배낭을 고쳐 메고 큰 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잠시 옥신각신하느라 원래 신발코가 가리켰던 방향이 아닌 엉뚱한 쪽으로 걷게 되었다는 건 지금의 그에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리스의 장군 게오르기네스도 진짜가 아니라 가상의 인물이었고, 제임스를 인도하는 진짜 길잡이는 충동이었으니까.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