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한 자들 대부분이 그러했듯 캐머런 건은 사람을 골라 사귀었다.
철저히 이득관계를 따졌고, 인격의 흠결 유무에 엄격했다.
그런 면에서 캐머런 건과 제임스 무어가 일정 수준의 친분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했다는 점은 의외였다고 할 수 있다.

제임스 무어의 아버지 로널드 무어는 고등학교 교사였다. 정확하게는 정년은퇴를 코앞에 두고 예산감축을 이유로 잘려나간 기간제 계약 근로자였다.
미국 중산층 몰락의 역사를 적나라하게 읽고 싶다면 로널드 무어를 표본으로 삼으면 되었다.
교육수준이 높았고, 뒷마당이 있는 집을 보유했고, 신용카드 신용점수가 높았지만 실직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생활이 점차 궁핍해지면서 각종 공과금이 체납되기 시작하고, 의료보험이 취소되었고, 차를 팔아야 했다. 미국 중산층 42%가 앞서 걸어간 길이었다.
싸구려 여성용 거들과 팬티를 팔아 연명하던 10년 고난의 역사를 뒤로하자 그 끝은 자살인지 사고인지 애매하기 짝이 없는 죽음이었다.

제임스는 아버지의 사망사고 합의금으로 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낭떠러지에서 지푸라기 몇 가닥 붙잡는 것과 비슷했다. 시대는 암울했고 대학 졸업장은 청년들에게 더 이상 낙관적인 미래를 약속해주지 못했다.
마른하늘의 단비 같던 보험금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자, 졸업학기 무렵 제임스는 도서관 입구에 자리를 잡고 샌드위치를 구걸했다고 한다.

노숙자처럼 보였을 남학생과 고가의 경호 안드로이드를 대령하고 다니던 콧대 높은 여학생의 교차점이 무엇이었을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조지는 제임스가 매우 잘 생겼던 건 아닐까 지레짐작했다.
전설의 미남모델 션 오프라인처럼 생겼다면 사흘간 머리를 감지 않은 꼬락서니를 하고 있더라도 캐머런은 아이고 오빠 이러면서 난리쳤을 것이다.

그녀는 후후 웃었다.
『잘 생긴 얼굴과는 거리가 있지. 멀건 밀가루 반죽에 새카만 콩 두 개 올라간 그런 얼굴이야. 강의실에 앉아있으면 파묻혀서 잘 보이지도 않았어.』
『그럼 체격이 훌륭했다거나.』
『구걸한 닭 가슴살 샌드위치로 잘도 몸짱이 되었겠다.』
『목소리가 좋았거나.』
『걔, 혀를 안으로 집어넣고 웅앵거리는 나쁜 버릇 있다?』
『그럼 어떤 점이 좋았는데요?』
『하나도.』
캐머런은 1초도 걸리지 않고 「하나도 없었다.」고 잘라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제임스 무어와 캐머런 건이 친구가 되었나.
캐머런은 이렇다 할 대답 대신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짜증이 난 것 같기도 했고, 곤란한 것 같기도 했다. 눈썹을 찌푸린 채 브랜디 한 모금을 입에 담고 124층 건물 유리창 밖으로 뇌우가 치는 걸 지켜봤다.
헤라에게 바가지를 긁힌 제우스신이 화풀이 겸 사방으로 천둥을 날리고 있었다.

『그래도 친구니까 직접 고른 선물을 보내시려는 거 아닙니까?』
아마존 열대림이 바짝 말라비틀어진 이 시대에 양장본 종이책은 상당히 귀한 물건이었다.
상태가 좋은 건 당연히 값도 나갔다.
조지는 주인의 지시에 따라「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라는 제목을 가진 책을 포장박스에 담은 뒤, 잊지 않고 메시지 카드도 끼어 넣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글자가 큼직하게 인쇄된 카드는 특수한 기능이 있어 하단부의 하트 부분을 누르면 2분 30초 정도 길이로 목소리를 녹음할 수 있었다.
캐머런은 진정성이라고는 손톱의 때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목소리로 happy birthday to you 노래를 불렀다. 그나마 귀찮았던지 반절만 불렀다.

『이대로 보내실 겁니까? 캐머런 님.』
『괜찮아. 어차피 난 걔 생일이 정확히 언제인지도 몰라. 그러니 적어준 주소로 얼른 보내버려.』
브랜디와 얼음을 더 가져다줄 것을 요구하며 캐머런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어차피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던 애한테 일부러 생일축하 선물을 보내는 건데 뭐.』
나는 정말이지 못된 여자야! – 크리스털 유리잔을 높게 들어 보이며 그녀가 외쳤다.
동시에 우르릉 쾅쾅 천둥이 쳤다.

제임스의 책장에서 허클베리 핀의 모험 책을 발견했을 적에 조지는 미친 것 같던 그 날의 바깥 날씨와 브랜디 향이 섞인 캐머런의 입 냄새를 떠올렸다.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던 자에게 보내어진 생일선물.
제임스는 소포로 받은 양장본, 무려 600 페이지에 달하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책장의 제일 위 칸에 무슨 크로켓 경기 우승 트로피처럼 올려놓았다.
꺼내려면 까치발을 해야 했다.
무릇 책이라 함은 가까이 두고 읽어야 하는 법이건만, 평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의미다.

이들은 과연 친구 관계가 맞는가.

캐머런이 주최한 칵테일 파티에 제임스가 모습을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애초에 초대받은 적이 없으니 나타날 일이 없다.
그녀의 남편은 제임스 무어라는 이름도 몰랐다. 대학생 시절에 잠깐 데이트 하던 사내, 혹은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추종자 정도로 여기는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서에게 일임하지 않고 남의 생일선물을 본인이 직접 챙긴 건 「허클베리 핀의 모험」 양장본이 유일하다.

『입가에 눌린 자국 생겼어. 와... 금방 붓는다. 피부가 약하구나?』
마이클이 얼굴에 난 자국을 신기해하며 사과했다.
그렇다, 사과였다. 숨도 쉬지 못하게 손으로 눌러 정말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저거였다.
본인은 제5 안드로이드 수용소에서 경비가 쏜 총에 맞은 후유증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마이클의 말투는 버르장머리가 없었다.
「캐머런 님이 재밌게 여겨 그냥 내버려둔 게 잘못이지. 분명 소프트웨어 오류야.」
잘못된 사과를 바로잡기 위해 조지가 대신 나섰다.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처음부터 이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제5 안드로이드 수용소에서 자력으로 탈출하고 나서 캐머런 님께 돌아가려고 했습니다만, 11월 10일 체포되신 이후 어디에 계신지 행방을 알아낼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음. 일단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고.』

곳곳에 무장한 군인이 지키고 있으니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다. 걸리는 순간 머리에 총알구멍이 뚫릴 터였다.
캐머런에게 메시지를 남길 수도 없었다. 안드로이드의 무선망 접속이 원천봉쇄 된 탓이었다.
게다가 수용소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마이클이 복부에 부상을 입었다. 다행히 중요부품의 손상은 비켜갔지만 티리움 손실이 커서 자가 수복 속도가 바닥이었다.
뛸 수 있겠느냐 묻자 마이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티리움이 필요해.」
「홀딱 벗고 할 소리야, 그게? 우리 둘, 지금 알몸이라고.」
티리움이 필요한 건 정작 자신이었으면서 비아냥거리고 보는 마이클이었다.

Posted by 미야

2020/06/12 14:13 2020/06/12 14:13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2120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 Previous : 1 : ... 149 : 150 : 151 : 152 : 153 : 154 : 155 : 156 : 157 : ... 1974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1019643
Today:
1349
Yesterday:
133

Calendar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