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로 뒤로 돌아 경찰서로 돌아가겠다는 걸 어르고 윽박질러서 순찰차에서 내리게 했다.
꼼짝하기가 싫었던지 마이클은 가위바위보를 제안했다. 이기는 사람 마음대로 하자는 거였다.
딕은 더운 여름날 귀신 장난하듯 맥라이트 손전등을 아래턱에 대고 스위치를 딸각 올렸다.
『제가 이기면 선배님을 옥상 난간에 거꾸로 매달아 놓을 겁니다. 그래도 괜찮다면 가위바위보를 하죠.』
『와아~ 너, 지금 방긋방긋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니까 꼭 사이코패스 같다.』
그렇게 가위바위보는 없던 일로 묵살되었고, 마이클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마냥 딕의 뒤를 따라갔다.

『이대로 한 바퀴를 다 돌자고?』
『돌아야죠.』
『너, 평소에 요령 없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
『사람을 말려죽일 거 같다는 얘기는 자주 듣습니다.』
『그건 칭찬이 아니야, 리처드 2호! 지금처럼 코를 으쓱이면서 자랑스럽다는 투로 할 대사가 아니라고!』

출입금지 표지판 옆으로 커다란 자물통이 달려 있었다.
일반 철물점에서는 취급조차 하지 않을 정도의 크기였다. 부수려면 절단기가 필요할 정도로 쇠가 굵었는데 과장을 양념처럼 조금 보태자면 잘 익은 코끼리 음경 크기였다.
손전등으로 비춰보자 금속의 광택이 번쩍였다.
어쩐지 든든하고 흡족한 기분이 들어 위아래 방향으로 잡아 당겼는데 -
『어라.』
잘 맞물려 있던 주둥이가 거짓말처럼 쩍 벌어졌다.
튼튼한 건 외견뿐이고 실상은 개좇이다? 열쇠를 꽂아 돌린 것도 아니고 그저 살짝 잡고 흔든 것 정도로 스륵 풀려버리다니. 당황한 나머지 두 손을 연꽃받침으로 만들어 자물쇠를 감싸 쥐었다.

『누군가 자물쇠를 망가뜨렸군요.』
『아냐. 내 생각엔 그게 아니라 처음부터 불량품이었던 것 같아. 그래서 제대로 걸리지 않은 거야.』
인위적인 개입 따윈 없었다고 마이클은 우겼다.
그래서 손전등의 강렬한 불빛이 자물쇠가 아닌 그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망가진 게 자물쇠인지, 아님 인간성인지... 자세히 봐요. 선배.』
음료 캔을 잘라서 만든 것이 거의 확실한 조그마한 알루미늄 조각이 자물통 구멍 속에 말려있었다. 그것으로 안쪽 핀을 눌러 자물쇠를 열었던 것 같다. 비싼 자물쇠에는 이런 식의 장난을 방지하기 위해 특별하게 고안된 풀림 방지 장치를 삽입하는데 이 제품에는 그런 게 없었다. 크기만 컸지 99센트 스토어에서 파는 싸구려였다?

『철조망 안으로 들어가 더 살펴봐야겠어요.』
딕은 손전등을 어깨 높이로 들었다. 허나 건전지로 작동하는 손전등의 불빛 하나만으로는 대형 쇼핑몰 너비의 폐건물을 자세히 관찰하기는 불가능했다. 듬성듬성 위치하여 불빛을 내뿜고 있는 보안등이 보우하사 완전한 암흑 상태는 아니었어도 20미터 앞에 세워진 파란색 드럼통이 검정색으로 보일 정도다.
쯧, 하고 혀를 물었다. 자경단 일을 하고 있을 적에는 광원을 자동으로 조정해주는 특수 렌즈를 통해 사물을 보았기에 답답함을 느낄 일이 없다시피 했는데 맨눈인 지금은 드럼통 개수를 세는 것도 불가능했다. 센서를 조작하듯 손가락으로 눈가를 꾹꾹 눌렀지만 까만 시야가 밝아질 일은 없었다.
「이럴 적엔 슈퍼맨의 능력이 부럽다니까.」
일단은 출입구로 보이는 곳을 비춰봤다. 두꺼운 나무판을 덧대어 못질을 했고, 창문도 상태가 엇비슷했다.
깨진 유리조각 탓인지 건물 주변이 바닷가 모래밭처럼 반짝거렸다.

『가까이 가보죠.』
『에이. 그럴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가며 마이클이 말했다.
밖으로 새어나오는 불빛 없음. 들리는 수상한 소리 없음. 코를 자극하는 냄새 안 남. 느껴지는 진동 없음.
그러니 돌아가서 별 이상 없었다고 보고해도 된다.
그렇지 아니한가.

『이상이 없긴 뭐가 없어요. 누군가 자물쇠를 손상시켰잖아요.』
딕 그레이슨의 얼굴에서 영업용 미소가 지워졌다. 아니, 정색했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더 이상 시간낭비 하지 말죠. 저는 왼쪽으로 한 바퀴 돌아볼게요, 선배님은 오른쪽으로 돌아보세요. 수상하다 싶은 곳이 있어도 단독으로 움직이지 마시고요. 최대한 빠르게 한 바퀴를 전부 돈 뒤에 이곳 출발점에서 다시 만나도록 하죠.』
『답답하게 뭐 하러 그래. 뭔 일 있으면 그냥 소리를 질러 널 부를게. 됐지?』
『아뇨. 그렇게 해선 정찰이 되지 않아요.』
『뭔 소리여. 그럼 시한폭탄을 발견해도 입 다문 채 가만히 있으라는 거니?』
『비슷해요. 어차피 고함을 지르는 것으로는 폭탄이 해체되지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출발점으로 돌아와 제가 오길 기다려 주세요. 이해되었나요?』
리더도 아니면서 지시 아닌 지시를 내린 딕은 하고 싶은 말이 엄청 많아 보이는 마이클을 무시한 채 오른손을 자유롭게 만들기 위해 쥐고 있던 손전등을 왼손으로 바꿨다.

「너 말이야, 배트맨이 그렇게 안 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행동들을 언제부터인가 고스란히 따라 하고 있다는 거 알고 있니? 욕하면서 닮는다고 너도 꽤 독선적이야.」
환청처럼 들려온, 악다구니에 찬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재수 없는 녀석.」

들러붙은 비난을 털어내기 위해 가볍게 목을 좌우로 꺽은 뒤, 시계 반대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오른손이 권총집을 덮은 자세여야 했다. 하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받은 주입식 교육 탓에 총기류 사용이 거북했다. 그래서 매뉴얼대로의 자세가 아니라 여차하면 휘두를 각오로 곤봉을 옆구리에 단단히 끼고 있었다.
흘끔 뒤를 돌아보니 대놓고 툴툴거렸던 것과는 달리 마이클도 그럭저럭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긴장감이라고는 요~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느긋한 태도라는 문제가 있기는 있었지만 - 그 정도는 괜찮겠거니 생각한 딕은 다시 앞을 주시했다.

이렇다 할 수상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안도감이 든 것도 잠시, 반 바퀴 정도 돌았을 무렵 딕은 이유를 모르게 굉장히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뭐랄까. 꼭 속고 있는 듯한... 알면서 속아주는 듯한?
정확하게는 다른 식구들이 모두 외출한 집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마침내 한 바퀴를 전부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 그는 흠, 소리를 내며 곤봉으로 어깨를 두드렸다.
설마, 그건 아닐 거야. 단지 선배의 걸음이 느려서 그런 거야.

5분을 더 기다렸다.
시계 초침의 움직임을 확인한 딕은 인내심을 발휘해서 3분 더 같은 자리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그렇게 3분이 흐르자 그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이 썩어빠진 인간 같으니!』
바닷가 모래를 차는 팟, 팟 소리를 내가며 순찰차가 있는 곳으로 빠르게 돌아갔다.
꽉 다물린 어금니에서 화난 짐승이 내는 으르렁 소리가 새어나왔다.
「한 바퀴 돌기는 뭘 돌아. 일찌감치 순찰차로 돌아가서 지금쯤 시트에 등을 기댄 편안한 자세로 꾸벅꾸벅 졸고 있겠지. 내가 못 살아!」
차 바퀴를 향해 발길질을 하려던 걸 가까스로 참고 운전석을 향해 불빛을 조준했다.
『선배! 마이클 윈저! 당장 이리 나와서...... 어라.』
그런데 예상했던 것과 달리 순찰차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깨달음이 해일처럼 밀려오자 갑자기 얼굴에 난 솜털 전부가 쭈삣 일어섰다.

Posted by 미야

2016/07/04 15:54 2016/07/04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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