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편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환생물에 괴기물, BL 요소까지 양념으로 팍팍 뿌려댄 자급자족용 습작입니다. 미려의 색의 배경이 서대륙이라면, 이쪽의 배경은 동대륙입니다. 뒤집혀진 세계라서 이 세계에선 남극대륙이 북쪽에 위치합니다. 설정은 구멍 투성이니 간혹 내용이 어긋나도 무어라 하지 말 것. ※


『진정하시죠. 마을 안에서 검을 뽑는 건 경범죄가 아니라 중죄에 해당합니다. 그러니 검집에서 지금 당장 손을 떼었으면 합니다. 듣고 있습니까, 외지인 분?』
교대 시간까지 이제 2시간밖에 남지 않았는데 여전히 사건 사고의 연속이다. 이러면 근무지로 돌아가 업무보고서를 작성할 시간적 여유가 없게 된다.
비타아른 공왕국의 푸른색 제복을 입은 사내가 그새 소동을 인지했는지 피곤함을 감추지도 않은 채 골목에서 달려 나왔다.
쪽으로 물을 들인 제복만큼이나 안색이 퍼렇다. 그 또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것 같았다. 피부가 거칠었고 입술 부위엔 마른버짐이 피었다. 그리고 지급된 제복이 체격에 맞지 않아 헐렁했다. 왕성에서 물품 지급을 대충 했을 리는 없으니 다시 말해 최근 들어 급속히 살이 빠졌음을 의미한다.

『여어, 고생이 많으십니다.』
남의 일처럼 얘기하며 오남은 고개를 끄덕였다. 꿈나라에서 티켓을 끊어 귀환하기엔 제법 이른 시각인데다 어딘가에 있을 푹신한 침대를 꿈꾸고 있어 아무래도 판단력이 엉망이었다.
『넋 놓고 있지 말고 당신도 어서 뭔가를 입으십시오.』
제복을 입은 자가 훤히 드러난 남정네의 굵은 허벅지를 보더니 고슴도치처럼 짜증을 냈다.
『어, 그게.』
『시종이면 시종답게 굴어요. 가방보다는 당신이 모시는 도련님이 우선 아닙니까. 제대로 옷을 갖춰 입고 모시는 도련님을 진정시키도록 해요.』
그러면서 길바닥에 떨어진 검정색의 바지를 주워 오남에게로 아무렇게나 던졌다.

아무래도 김가의 태영이 검을 가졌으니 그쪽이 윗사람이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아니, 것보다는 텐의 외모 탓일지도 모른다. 좇밥에 씨발 타령이 입버릇이라는 단점이 있지만 입을 얌전히 다물고 있는 소년은 대단히 곱상한 외모의 소유자다. 게다가 동대륙에서는 흔치 않은 검정색의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는 매우 신비스럽게 보인다. 여기다 목 바로 아래까지 단추를 전부 채우는 강박증까지 더해져 그 첫인상은 상류층 교육을 받은 먼 이국의 왕자처럼 보인다. 더 자세하게 얘기하자면 불손한 자의 목을 당장 베겠다 고함을 지르며 검집으로 손을 내린 화난 왕자님처럼 보인다.
이와 비교하여 잔뜩 삐친 더벅머리인데다, 하의실종인 아저씨인 오남은 영 궁색하기 그지없다.

『텐.』
『태영이다. 남의 이름을 멋대로 뜯어 고치지 말라고.』
『발음하기 힘들어서.』
『혓바닥에 기름 발라. 그럼 나불거리기 한층 쉬워질 거다.』
『어쨌거나, 텐.』
『아아, 씨발! 정신 사납게 왜 자꾸 그래! 그것도 틀린 이름으로 부르고!』
『시내 한 복판에서 무기를 꺼내면 경범죄가 아니라 중죄래. 경비원 아저씨가 지금 널 사납게 노려보고 있다.』
벌게진 태영의 눈이 옆으로 휙 돌아갔다.
『중죄는 내가 아니라 저놈들이 저질렀지. 사흘 치 요금을 선불로 냈는데 다음날 아침에 얼굴색 싹 바꾸고 내쫓는다는게 말이 돼?! 완전히 사기꾼들이야. 저질이야! 미사일로 날려버려야 할 악의 축이야!』
『미사일?』
『넌 몰라도 돼. 넘어가.』

항의하며 목청을 돋구어봤자 이미 아무도 듣고 있지 않다.
8년마다 돌아오는 성대한 축제를 앞두고 바가지 상술은 이미 만성화가 되어버렸다. 이 정도쯤은 애교 아닐까 - 늘어져라 하품을 하며 오남은 손등으로 눈가를 비볐다. 짐을 빼앗긴 것도 아니고, 주먹으로 얻어맞지도 않았다. 약속 받은 아침 식사 풀 서비스가 공수표로 끝난 부분이 마음에 걸렸으나 아침 식사 요금은 후불이니 따지고 보면 손해를 본 것도 아니다. 그래서 입맛을 쩝쩝 다신 그는 사기꾼을 너그럽게 용서하기로 결정했다.

죄를 사한다는 의미로 허공에 손가락으로 무한의 여덟 팔 자를 그리자 태영이 발끈했다.
『네가 인산토리아의 사제라도 되냐?! 뭘 네 맘대로 용서를 하고 자시고 지랄이야.』
『그럼 어쩔건데. 문을 부수고 한바탕 난동을 피우겠다고?』
『환불은 제대로 받아야 할 거 아냐.』
따지고 묻겠다며 팔뚝을 걷어붙인다.
『대화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기꺼이 폭력으로 설득하겠어.』
그래서 오남은 경비원에게 느릿느릿 눈을 돌렸다.
그게 도움을 구하는 시선이 아니라서 경비원 루안은 그 점이 이상하다 여겼다.
『들으셨죠? 폭력으로 설득한다는데요.』
『음...』
『그러니 체포하시죠.』
『지금 뭐라고?』
『텐을 체포하시라고요. 체구가 작다고 안심하면 안 됩니다. 보기에는 저래도 제법 위험한 녀석입니다. 한다고 하면 반드시 해요. 포기라는 걸 모르고 적당히 라는 것 역시 모르는 사내입니다. 그러니 여관집 주인의 멱살이 쥐어뜯기기 전에 녀석을 체포하도록 해요. 지금 안 말리면 칼부림이 날 수도 있어요.』
졸음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사내가 주장했다.
『칼부림은 안 좋잖아요, 그렇죠? 그러니 잡아가요.』
경비원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너, 너, 너... 는 나를 그딴 식으로... 팔아 먹냐~!! 이 망할 장사꾼아!』
대신 이국의 왕자처럼 생긴 자가 망연자실하여 울부짖었다.

루안은 이제 위장병을 확신했다. 전날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속이 쓰리고 아팠다. 찌릿거리는 부위를 손으로 압박하여 누르자 신물이 올라왔다. 망할 놈의 8년 축제 같으니. 속으로 있는 말, 없는 말 저주를 퍼부으며 자청하여 체포당한 두 사람을 시린 눈으로 관찰했다.
첫 인상은 축제를 즐기러 온 부잣집 도련님과 거기에 따라붙은 얼뜨기 시종처럼 보였다. 허나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 듣고 있자니 이미지가 뒤틀렸다. 처음에 그가 시종이라 생각한 서른 초반의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게 반말을 썼다. 아직 십대인 것이 분명한 소년 역시 반말을 썼다. 도련님과 시종이 서로 반말을 주고받을 리 없으니 처음 세웠던 가설은 포기다. 하지만 둘이 친구인 것도 아니다. 단순히 동료라고 하기엔 분위기가 묘하다.
책상 위로 일지를 탁 소리 나게끔 내려놓으며 루안은 골똘히 생각했다.
제법 벌어지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동등하게 대화 - 욕설 포함 - 를 할 수 있는 관계라는 건 뭘까.
『......』
하긴, 유치장 철창 안에 들어가 있으면 모두가 평등하다. 거지와 대지주 나리도 모두 사이좋게 철컹철컹.

『이 씨발 놈아. 너 때문에 갇혔잖아.』
검은머리의 총각이 분노했다.
『진정해, 텐. 지금도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고. 혈압 오르면 위험하지 않아?』
『여기서 진정을 어떻게 할 수가 있어! 응?!』
그리고 철장을 움켜쥐고 오로지 힘으로만 좌우로 벌리려 했다. 보고서를 쓰는 척하며 실상은 유치장 속의 그들을 관찰하고 있었던 루안은 속으로 실소를 금치 못했다. 구리처럼 무른 금속도 아닌 굵은 쇠붙이를 손으로 어째보겠다고 덤비다니. 보다 못한 술주정뱅이 하나가 끼어들어 죄가 없는(?) 쇠창살은 가만히 내버려두라고 야단했다.

휘어지지 않는 철장 사이로 얼굴을 억지로 들이밀며 소년이 야단했다.
『죄도 없는데 갇혔어! 우리를 등쳐먹은 여관 주인은 살판이 났고. 이 세상의 정의 구현은 어떻게 된 거야.』
『정의 구현은 너 님이 신경을 쓸 부분이 아니야. 네 의무는 그런게 아니라고. 어쨌든 공짜로 방이 하나 생겼으니 좋군. 분위기는 딱딱해도 생각보다 청결해.』
『너는 여기 유치장이 무슨 특급 여관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나 보지? 오남.』
『비교할 대상은 아니지만 이곳도 그리 나쁘진 않아. 보라고, 침대도 있다. 게다가 사용료는 공짜!』
『그렇게 마음에 들면 100만년동안 여기서 살앗!』
『내 수명이 100만년이나 되는 것이 아니라서 그건 무리일세. 것보다 슬슬 배가 고픈데.』
『야!』
『뭐 먹을 거 없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제멋대로인 남자다.

Posted by 미야

2015/09/15 13:15 2015/09/15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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