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여인이 그 얼굴에 화장을 하고 보석으로 치장하는 건 왜일까.
지위 높은 자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호랑이 모피로 몸을 두르는 건 왜일까.
「그야... 보석이나 호랑이 모피로 자신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기 위함이겠지.」
자신의 것이면서 동시의 자신의 것이 아닌 목소리가 대답했다. 이십대 중반임에도 어울리지 않은 고음이었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여인이 보석 목걸이를 걸지 않으면 덜 아름다워지는 걸까. 댁은 어떻게 생각하우?」
질문을 던진 자의 목소리는 소름 돋을 정도의 중저음이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 또한 이십대 후반으로 젊은 편에 속했다.
「보석 목걸이를 걸어야만 아름다워 보이는 여인이라는 건 이상한데, 오남. 어쩐지 가정 자체가 잘못된 것 같아. 음... 하지만 화장이 지워지니까 꽝으로 돌변하는 건 봤어.」
「호오. 지금 그건 엘시엔테스 이야긴가. 하긴, 그 여자의 화장기술은 변신마법 수준이지. 아, 잠깐. 그런데 언제 화장 지운 그녀의 맨 얼굴을 봤다는 거지? 설마.., 이 호색한!」
「뭘 상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죄다 틀렸어.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 여자 가슴 크다고 무지 좋아했잖여!」
어쨌든 과거 시우라는 이름을 가졌던 자가 오남 - 다섯 번째 아들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상인과 나눴던 이 대화는 가장 이상적이다 할 수 있는 여성의 가슴 크기를 논하다 아슬아슬하게 방향을 틀어 결국「테뮬라르 대공전하가 특상의 호랑이 모피 옷을 주문한 건 그의 권위가 추락했기 때문이다」라고 끝을 맺는다.
다시 말해 아름다운 여인은 보석 목걸이가 없어도 아름다운 것이고, 권력자는 왕관과 홀을 구태여 들지 않아도 그 자체로 권위가 있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자꾸 더하고자 한다면 아름다움이든 권위든, 그 알맹이는 이미 손상되기 시작했다고 추측해야 한다 - 진귀한 비단옷과 장신구를 파는 상인이었던 오남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물건을 사가는 왕족과 귀족들 간의 미묘한 권력 흐름을 저울질했다.
「최신식 드레스와 보석을 무조건 많이 주문하는 자가 실세 아닌가?」
「결코 그렇지가 않다네, 시우. 1인자는 물건을 사지 않아. 그들은 남이 산 고급품을 뇌물 선물로 받지.」
그런 까닭으로 오남 상회에서의 랭킹 1위 단골 거래처는 황제 아키테 3세가 아니라 젱키스 백작이었다.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인위적으로 결계를 덧그린다는 건 결계지속력이 약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다지 좋은 소식이라 할 수 없다.
「결계가 부실해졌다는 건 곧 적룡신의 힘이 약해졌다는 말과 동의어라 할 수 있지.」
아랫입술을 가만히 빨아들였다.
「서대륙 최강이라던 용신이...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결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제국 이사실로 오는 도중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예전에는 사람이 지나갈 수 없을 지경으로 요괴가 득실거렸지만 적룡님의 은총을 받는 땅이 되고부터는 가고한에도 제법 인가가 들어섰습니다. 숯을 굽는 마을이 여럿 생겼죠. 다만 치안은 여전히 좋지가 않아요.」

이건 반대로 적룡신의 위세가 커졌음을 의미한다. 아까의 가정과는 정 반대 현상이다.
오른쪽 주먹을 들었다가 다시 왼쪽 주먹을 들어 보이며 생각에 잠겼다. 상반되는 까닭으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동시에 벌어질 수도 있을까? 비가 내리지 않아 밭이 가물었는데 개울물이 벌컥 넘치는 것이다.
「그런게 가능해?」
왼쪽 주먹을 응시하다가 얌전히 무릎 위로 내려놓았다. 이제 나는 오른쪽 주먹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이라벽치는 내가 이상한 동작을 하고 있다며 의아해했지만 딴 생각에 사로잡힌 나는 그 시선을 눈치 채지 못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았더라면.
그렇게 혼자만의 생각에 넋 놓고 빠져있지는 않았을 텐데.

무슨 까닭에선지 내가 머물던 창고 건물에서 린청이 나왔다.
녀석은 내 거처와도 같은 창고를 자신의 공붓방, 내지는 휴게실, 아니면 비밀의 장소로 삼은 것 같다. 뻔질나게 들락거리는 건 그렇다 치고 주인이 없는 장소를 당연하게 차지하고 앉았다가 먼지를 털고 밖으로 나오는 모양새가「나에게도 이 장소를 이용할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장도리에 맞아 박살난 창틀의 수리가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권리 운운하기엔 지나치지 않은가. 어디까지나 저 창고에서 머리를 뉘여도 되는 자는 지리가 안즈, 단 한 명밖에... 없.
『너어어어~~!!』
그런데 녀석이 내재원으로 돌아온 나를 보자마자 노성을 질렀다.
이라벽치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돈 떼먹고 도망간 사기꾼에게도 저렇게 소리를 지르진 않는다. 내가 그렇게 죽을죄를 잔뜩 지었던가. 속으로 지은 죄의 목록을 하나씩 헤아려보다 발끈하던 걸 그 즉시 멈췄다. 마, 많다...
『네 녀석이 감히~~!!』
그런데 어랍쇼. 소년이 분노를 퍼붓는 대상은 알고 보니 내가 아니었다. 린청은 천장을 쿡쿡 찌르기 위해 내가 구석으로 놔뒀던 막대기를 두 손으로 움켜쥐곤 그걸 목검처럼 휘둘러 이라벽치의 두꺼운 목을 부러뜨리려 했다.

바보 같은 짓이다. 전속력으로 간격 안으로 뛰어들며 발검과 동시에 적의 목을 치는 기술은 어지간하지 않는 이상 쓰지 않는게 좋다. 순수하게 사람을 죽이기 위해 존재하는 이 기술엔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공격 직후 자신을 보호할 방법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적의 머리만을 노린다는 건 검의 위치가 높아짐을 의미하고, 무게 중심점 역시 위로 이동하게 된다. 무게 중심이 높아지면 자세가 불안정해지는 법, 그만큼 공격이 실패했을 시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드는 노력은 곱절이 되고, 어지간한 고수가 아닌 한 그 회피 동작을 완료하지 못한다. 상대를 반드시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죽게 된다. 저 검법은 그런 기술이다.
『!!』
빈틈을 통해 곧바로 반격을 당하고, 그 결과 지금의 린청처럼 역으로 메다 꽂히게 되는 것이다.

애초부터 검을 손에 잡은 시간이 30년 이상 차이가 벌어지는데 처음부터 목을 노리다니.
퉁, 하고 큰 소리가 났다.
무기 - 사실은 애처로울 정도로 하찮은 막대기를 가루로 만든 이라벽치는 가볍게 호흡하며 두 팔을 안으로 높게 접었다. 격투술의 기본으로 일명 창과 방패 자세라고 하는 것이다. 그대로 주먹을 뻗어 때리기도 쉽고, 반대로 얼굴을 가려 방어하기도 쉽다. 벽화 같은 종류에서 싸우는 사람들을 묘사하면서 자주 그려 넣는 모습이다.
어린애를 상대로 너무 진지하게 나오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그 어린애가 다른 곳도 아닌 목을 노렸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지도. 이라벽치는 반격당해 바닥에 쓰러진 린청의 움직임을 계속하여 주시하며 자세를 낮췄다. 린청이 계속 싸우겠다고 하면 이쪽에서도 그에 합당한 반격을 시도하겠다는 무언의 압박이다.
『일어서지 마라.』
이라벽치는 차분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하지만 그는 린청이 고집불통이라는 걸 몰랐다. 메다 꽂힌 소년은 꿈틀거리며 상체를 반쯤 일으켜 세웠다.
『두 번 반복하여 말하게 만들지 마.』
나는 이라벽치를 말려야할지, 아니면 린청을 말려야할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경고했다. 거기서 일어서면 손목이든 발목이든 뼈를 부러뜨리겠다.』
뼈를 부러뜨린다는 말을 듣고 오히려 오기가 생겼던 것 같다. 부들부들 떨면서 어떻게든 두 다리로 일어서려고 기를 쓰더니 결국 무릎 하나를 세우는데 성공했다.
안 되겠다. 저 녀석을 말리자. 단호하게 결정을 내린 나는 이라벽치에게 등을 보인 채 린청을 향해 뛰어갔다.

『이 바보야, 그냥 엎어져 있어! 도대체 왜 이래.』
『하, 하지만 저 인간이 널 욕보였는데! 어떻게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읭? 누가 누구를 욕보여.
영문을 몰라 멀뚱거리고 있자니 린청이 분노를 터뜨리며 내 손목을 붙잡았다.
『아무리 힘이 없다고 해도... 저놈이... 네 명예를 짓밟을 수는 없는 거다. 제기랄... 제길!』
이를 갈며 눈물을 글썽이는 소년 앞에서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먼 이국땅에서 적룡군 병사에게 몹쓸 짓을 당했다 - 얼굴에는 맞은 흔적이 있고, 본 적이 없는 새 옷을 입은데다 몸에서는 희미하게 향유 냄새도 난다 - 린청 또한 누구처럼 역사책 두께에 버금가는 장대한 두루마리 이야기를 상상했다. 그리고 자기가 써내려간 이야기의 줄거리가 너무나 속상하고 슬픈 나머지 내 손목을 잡고 울려 하고 있었다. 그럼 나는 여기서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나. 아이고 머리야.

Posted by 미야

2015/08/05 22:45 2015/08/05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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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immie 2015/08/06 04:07 # M/D Reply Permalink

    실례일지 모르겠지만, 오랫만에 글 남겨보네요. '갓파는 건드리지 말고, 조용히 돗자리 지참해서 놀다 가기'를 꾸준히 실천하던 한 사람입니다. 슬레 팬으로서, 암시장이 비활성화 되기 직전에 입문해 미야님의 글을 알게 되었지요. 죄반을 비롯해 미야님의 많은 글들을 읽으며 행복했던 기억이 많습니다. 오남 이야기를 읽으면서, 제가 단순히 슬레 팬픽이어서가 아니라 미야님의 필력에 반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네요. 소재는 다르더라도, 글 쓰는 걸 멈추지 않아 주셔서 감사하고, 앞으로도 쭉 건필하시길 빕니다.

    1. 미야 2015/08/07 15:00 # M/D Permalink

      실례 아니에요. *^^* 우물통 방문 감사드리고, 부족한 재주에도 불구하고 글을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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