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진 종이들을 정리하다 말고 린청이 가만 물어왔다.
『혹시 들었어? 보름 정도 뒤에 무슨 큰 행사가 있나 보던데.』
들은 바가 없었지만 속으로 가만 날짜를 계산하고 납득했다.
바뀐 환경에 그럭저럭 적응을 마치면 그때부터 슬슬 향수병이 생기기 시작한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학부생들은 가족이 그립다고 몸서리치고, 식욕저하와 불면증을 호소하게 된다. 기름진 진수성찬도 집에서 먹던 마른반찬에 비하면 형편없게 느껴지고, 나이든 유모가 안전을 기원하며 손수 꿰매준 호신부에 눈물자국이 번지는 거다.
그래서 침체된 분위기를 바꾸고 여러 흥을 돋구기 위하여 이 무렵이면 일종의 문화제를 여는게 이사실의 관습.
일명, 사무월 축제다.
『단체로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른데. 자기네들끼리 모여 안무를 연습한다며 시끄럽게 굴더라고.』
그래봤자 그런 방면으로 흥미가 전혀 없는 린청은 번잡하고 성가시다며 불평했다.
다행히 칠배례 의식과 달리 강제성은 없는지라 일찌감치 나는 빼달라고 하고 빠져나온 눈치다.
것보다 쓸데없는 선민의식을 가진 그들이 사친으로 온 우리 같은 변방인에게 노래를 불러봐라, 나와서 춤을 춰봐라 이럴 리가 없으니 우리는 그냥 편하게 뒤에서 구경이나 하고 박수나 치면 된다.
소년은 환한 보름달을 구경하는 듯한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고향에서도 비슷한 걸 하기는 했는데. 해가 지면 어른들이 코가 비뚫어지게 술을 마시곤 했지.』
『술? 그건 아닐텐데.』
나는 빙긋 웃으며 린청을 따라 필기구를 정리하며 어질러진 탁상을 치웠다.
『사무월 축제는 원래 아름다운 소년이나 천하제일의 미소녀를 뽑는 행사야. 매년 했던게 아니라 8년에 한 번 열려서 8년 축제라고도 했지. 일등으로 뽑히면 머리에 화관이 씌워져 모두에게 인사를 받으며 마을 한 바퀴를 돌게 되. 마을 주변을 따라 빙 돈다는 행위에는 요괴나 악령의 침입을 방지한다는 주술적 의미도 함께 있는 거야. 결계를 새로 그리는 중요한 행사를 하면서, 그것도 8년에 한 번 있는 의식인데, 흥청망청 코가 비뚫어지게 술을 마시겠냐. 뭐, 원래의 그 의도와 목적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다면야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만...』
따지고 보면 이사실도 그렇다. 여기선 거대 도시 주변을 빙 돈다는게 사실상 무리라서 온갖 꽃으로 치장한 몸으로 황제 앞에서 인사를 드리는 걸로 끝이 난다. 마을을「제대로 죽지 못한 것」으로부터 방어한다는 원래의 의도는 사라지고 미동을 내세워 재주와 미를 겨룬다는 겉핡기만 남았다.
『천하제일의 미소녀를 뽑는 행사라고? 쳇. 어쩐지 팔뚝이 간지러워지는군... 언젠가 사촌누이가 뽑힌 적이 있지.』
『휘사 님이?』
나는 경사가 진 자갈투성이 산길에서 엄청나게 굽이 높은 신을 신고 발랄하게 움직이던 소녀를 떠올렸다. 어떻게 저렇게 복잡한 방식으로 땋을 수 있을까 감탄했던 색 밝은 머리카락도 생각났다. 화려한 색의 나비를 연상시키는 사람이었다.
가만히 회상에 젖고 있는데 녀석이 불만을 표현했다.
『나는 린청이고, 녀석은 높여 불러 휘사 님이냐. 그거 기분 나빠!』
『그래도...』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구두 굽으로 찍어 남의 뒷통수에 구멍을 내고도 남을 분이라서 - 라는 말은 생략되었지만 우리 둘은 동시에 거의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 주변머리로는 그녀를 감히 휘사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그거 아냐? 여인들 숙사에 방이 하나 남았는데 서로 옷방으로 쓰겠다며 은밀히 다툼이 있었다고 하더군.』
린청 님, 그 방은 원래 제가 쓸 방이었사옵니다.
다리가 푹푹 빠지는 진흙뻘밭이 되어버린 내 심정도 모르고 그는 목소리를 높여가며 계속 얘기했다.
『희망자 중 신분이 가장 높은 사람이 그 방을 쓰도록 하자고 결정했다가 항의가 나왔나봐. 그래서 다시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사람이 방을 차지하자고 의견을 모았는데 내 사촌누이가 벌떡 손을 들고 나서서 운이 아닌 실력으로 승부를 보자고 건의를 한 거야. 그리고는 뭘 하자고 했는지 알아? 꽃꽂이나 수예실력을 겨뤄보자 했음 내가 이렇게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오르지도 않지.』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나조차 그 소문을 들었다. 휘사 님이 제안한 건 정좌 자세로 오래 버티기였다.
그 정도야 별 거 아니잖아 쉽게 생각하기 쉽지만.
앞에 잔칫상을 차려놓고. 그것도 상다리 뽀샤지게 차려놓고. 튀긴 닭과 염소젓탕, 구은 도미, 송이버섯과 어란과 같은 산해진미를 잔뜩 올려두고. 군침을 꼴딱꼴딱 삼켜가며 - 그것도 나중에 귀부인이 될 여자애들이 - 누가 오래 식탐을 참을 수 있을지를 겨루자고 했단다.
그림을 상상하자 나는 그 즉시 뿜었다.
『으이그, 이기기라도 했음 화도 안 나지.』
휘사 님은 3등을 차지했고, 결국 옷방 쟁취에 실패했다. 진짜지 여자애들은 무섭다. 아, 나도 여자애지만.
『그런 녀석이 천하제일의 미녀라고? 흥! 다들 눈이 어떻게 된 게지.』
『하지만 휘사 님은 분명 눈에 띄는 미인이고...』
『믿었던 너마저 눈이 삐었냐.』
『그게 아니라 네 평가가 야박한 거야, 린청. 만약 휘사 님이 미인대회에 나가면 분명...』
여기까지 말하는데 린청이 갑자기 내 입에 손가락을 대며 급히 쉿, 소리를 냈다.
『왜?』
신이 나서 잡담을 떠들던 여운이 남아 나는 계속해서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린청은 헷갈린다며 가만히 천장을 가리켰다. 그리고 목소리를 가만 낮추었다.
『있잖아, 해가 이미 저물었는데 지붕 위로 새가 날아다닐까?』
『올빼미라면 가능하겠지. 무슨 수상한 소리라도 들었어?』
『꼭 그런 건 아닌데... 모르겠어. 어쩐지 몸무게가 엄청 가벼운 사람이 저 위를 빠르게 걷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가만히 일어나 구석에서 기다랗게 생긴 도구를 가져와 천장을 두 번 쿵쿵 찍었다.
『사람이 저 위를 왜 돌아다니겠어. 그럴 리 없잖아, 린청.』
내 주장에 화답하듯 지붕에서 푸드득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소년의 굳었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뭐야, 저 위로 새둥지라도 있는 거야?』
『직접 보진 않았지만 뭐, 그와 비슷한 거겠지.』
실은 전혀 비슷하지도 않았다.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들은 순번을 바꿔가며 내가 사는 창고 지붕 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아마도 잃어버렸던 내 왼쪽 신발을 가져와준「그것」과 주기적으로 교대라도 하는 눈치였다. 녀석들은 숨도 쉬지 않았고, 일절 기척이라는 걸 내지 않았다. 냄새도, 체온도, 심지어 형체조차 없는 주제에 존재감은 의외로 뚜렷해서 나는 창고로 돌아올 적마다 지붕 위를 쳐다보고 싶다는 충동을 강하게 느껴야 했다. 어디 그뿐인가. 날 이대로 내버려둬, 소리도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늘 올려다보고 싶은 걸 꾹 참아가며 문손잡이를 돌리곤 했다. 내가 그것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걸 표현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쳐다보면 더 소란스러워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어느 정도 날짜가 흐르자 나는 견디다 못해 그것을「쥐」라고 여기기로 결심했고, 밖에서 봉처럼 생긴 긴 막대를 가져와 쥐를 쫓듯 천장을 툭툭 건드리기 시작했다.
「오늘처럼 대놓고 왔다갔다 걷는 일은 아예 없었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람.」
아무래도 오늘은 이곳에 나 말고 다른 이가 있어 거기에 반응하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린청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약을 놓아야 하는 거 아냐?』
『그래야할지도. 여러모로 불편한 동거 중이라네.』
나는 호들갑스러운 동작으로 막대기를 들었다 놓았다 해보이며 연극조로 허리를 구부려 절을 했다.
숙소로 돌아가고자 건물 밖을 나서면서 소년은 가만히 고개를 들어 지붕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당연히 눈으로 보이는 건 없었지만 의아심이 들었는지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뭔가를 느낀 걸까, 아니면 감이 좋은 것일까, 작은 자갈을 주워들더니 성가신 까마귀를 내쫓는 요령으로 그걸 지붕 위로 던졌다.
하지 말라는 의미로 린청의 소매를 끌어당겼지만 그는 다시 적당한 돌을 골라 주워 손에 쥐었다.
『안즈, 네 눈에는 보이는게 없어?』
『없어. 저 위에는 아무것도 없어. 절대로 없어.』
제법 단호하게 - 그것도 세 번이나 반복하여 없다 말했지만 듣지 않고 돌을 던졌다.
더 강하게 말려야 했던 걸지도.
숙소로 돌아가는 소년의 등 뒤로 기분 나쁜 검은 아지랑이가 따라붙었다.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