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신이 아니구나! 변방국 출신이라고 하나 엄연히 신분 높은 귀족의 자제인데 거세를 하고 자신을 보좌하는 내관이 되라 했다고?!』
화를 내며 거세를 거-거-거-거-거세로 발음했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하다 할 수 없고.
나는 지긋이 실눈을 뜨고 공책의 한 부분을 지적했다.
『린청, 그 단어는 태양이지 캐양이 아니야. 틀리게 적었어. 그 옆의 문장은「산골짝의 다람쥐 아기 다람쥐, 도토리 점심가지고 소풍을 간다」이고. 아니, 것보다 교과지문이 왜 이따위야.』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니. 거절은 확실하게 잘 했고?』
요즘 린청은 내가 머무는 창고로 와서 숙제를 곧잘 했다. 일단 손을 봐주겠다며 줄줄 서서 덤벼드는 귀찮은 녀석들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좋았고, 그리고 동대륙 표준어를 전혀 모른다는 점에서 내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뼈대 굵은 무가(武家)에서 자라난 소년은 아무래도 외국 문물에 대한 공부엔 소홀했던지 어머니, 아버지, 산과 바다 따위의 기본적인 단어조차 모르는 실정이었다. 그보다 실전에 써먹을 수 있는 병법을 공부했으면 하는 바람이 커서 가본 적도 없는 남의 나라 말을 배우는데 왜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지에 대한 불만 자체가 컸다.
『바다를 건너갈 것도 아닌데. 젠장.』
뾰로통한 표정으로「캐」라고 적은 부분에 가위표를 그리고 다시 태양이라고 제대로 고쳐서 적었다.
『하긴... 린청은 멀미를 심하게 하니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건 무리.』
『누가 멀미를 한다는 거야! 련 가의 장남인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멀미를 한 적이 없어.』
『하지만 예전에 내가 봤을 적엔...』
『그건 소화불량.』
강하게 주장하며 이번엔 사과가 그려진 그림조각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젠장맞을, 사과를 사과라 부르지도 못하고... 이걸 동대륙 사람들은 뭐라고 하지?』
항해술이 놀랍도록 발달하면서 대륙간 교역이 점진적으로 활발해지고 있는 중이다. 무역에 눈을 뜨면서 상인들은 일찌감치 동대륙 언어를 배웠고, 세금을 걷어야 하는 입장에서 그 다음 순서로 세관원들이 동대륙 언어를 배워야 했다. 지금은 귀족들도 앞 다투어 외국어를 공부하고 있는데 린청 입장에선 초급 동대륙 언어 강좌가 선택이 아닌 필수과목이라서 그저 난감할 뿐이었다.
악마가 떨어뜨린 더러운 발톱이라도 되는 양 사과 그림을 움켜쥐고 그는 분통을 터뜨렸다.
『심지어 교양을 위해 악기도 배워야 한다는 거야. 차라리 활쏘기를 배우라고 할 것이지.』
『그렇군.』
『어이. 남의 집에서 불났다는 투로 시큰둥하게 말할 때가 아니라고?』
나는 난처함을 감추고자 목덜미를 문질렀다. 린청과 달리 나는 악기 연주에 그다지 두려움이 없는 쪽이다. 예전에도 다섯줄 아현을 곧잘 연주했으니 조금만 연습하면 예전과 비슷한 실력 정도는 나올 거라 생각한다. 다만 곤란한 건 수중에 없는 악기를 장에 나가 돈을 주고 사야 한다는 건데... 마침 내가 쓴 협박편지가 본국에 도착할 즈음이라 조만간 그 문제도 해결될 수 있을 거다.
가만히 속으로 셈을 해보았다. 속달로 가면 이십일 정도. 왕복으로 한 달 열흘.
펄펄 뛰며 마당으로 벼루를 집어던질 아버지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좋은 소리를 낼 악기를 상상했다. 아현을 얻으면 제일 먼저 린청 앞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을 연주해볼 작정이다. 악보가 없어도 음률은 여지껏 외우고 있으니 손가락만 풀어지면 그럭저럭 괜찮은 연주를 해보일 수 있을 터다.
『듣고 있어? 사내인데 악기를 배워야 한다니까?』
『괜찮사옵니다. 그야 저는 린청 님과 다르게 교양이 샘솟는 종자라서요. 거기 단어 또 틀렸다.』
소년은 이를 갈아대며 다위라고 쓴 걸 바위라고 고쳐 적었다.
공책에 코를 박은 상태에서 린청이 다시 말했다.
『그런데 너, 내가 아까부터 물어보잖아. 거절은 확실하게 했어?』
『응? 무슨 거절.』
『거세를 하고 내관이 되라는 제안을 들었다며.』
이번에는 거-거-거-거-거세로 발음하지 않고 깔끔하게 딱딱 끊어 거세라고 말했다.
어쨌거나 나는 어깨를 으쓱일 수밖에 없었다. 여자로 태어난 내가 있지도 않은 고환을 떼어내고 내관이 되는 건 애초부터 무리여서 이쪽에서 승낙을 하고 자시고 이전에 불가능한 이야기다.
『불가능하다고 대답했어.』
린청은 고럼 고렇지, 이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했어. 그럴수록 딱 잘라서 거절해야 한다니까.』
모르겠다. 평민의 아이였다면 귀가 솔깃한 제안이었을지도. 허나 여관이 되어 궁궐에 들어간다고 해도 그다지 근무조건이 좋을 것 같지는 않다. 월급은 그럭저럭 받겠으나... 대신 휴가가 일절 없다. 말 그대로 죽을 때가 되어야만 퇴직을 허락받고 들 것에 실려 밖으로 나올 수 있는데 난 그런 건 딱 질색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장례를 치르러 나갈 수가 없다며 몰래 울던 지밀상궁을 봐서 안다. 평생을 안에 갇혀서... 아이고, 끔찍스러워라.
빌린 교과서를 다른 종이에 베껴 쓰기 위해 탁상에 필기구를 펼치고 먹을 가는데 린청이 또 질문했다.
『저... 있잖아. 그런데 제안을 거절하니까 상대방 반응은 어떻든?』
제정신이 아니라는 둥,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분명하다는 둥, 욕을 하긴 했어도 상대가 상대인 만큼 내심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개인적인 경험을 떠올렸던지 그의 표정이 퍽이나 좋지 않았다. 사실 신분 높은 자가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하는 일은 의외로 흔하고, 그걸 단칼에 거절하는 일은 솔직히 쉽지 않은 일이다. 설령 웃는 낯으로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마쳤음에도 나중에 화근이 미치기도 한다. 외동딸을 첩으로 달라고 하여 부드럽게 거절했더니 모반을 꾸몄다 모함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했다는 이야기는 제법 흔하다.
『그 자손이라는 남자, 성격도 보통은 넘는 것 같던데.』
『분명 보통 성격이 아니지. 그래도 일단 화를 내지는 않았고...』
대신 뜬금없게 이상한 질문을 던지고는 거기에 대한 답을 강요했다.
질문. 길도 변변찮은 외진 곳으로 다 쓰러져가는 사당이 하나 있는데 주변으로는 인가도 없어 낮이나 밤이나 그 주변에서 사람을 구경할 수가 없었다. 을씨년스러운 곳이라 대낮에도 귀신이 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인데 여름 더위를 피하고자「나는」해가 질 무렵 사당으로 가보기로 하였다.
힘들게 걸어 도착을 하고보니 노을이 질 무렵이었고, 바람 하나 없어 오히려 땀이 흘렀다.
괜한 헛걸음을 하였구나 실망하여 사당 앞에서 바로 돌아 나오려는데 갑자기 뒤쪽에서 바스락 기척이 들리면서 목덜미로 바람이 닿았다. 소스라치게 놀라 돌아보니「이것」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일까.
소년은 고민하며 자신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음... 그건... 아마도 들개겠지.』
『사람 목덜미에 바람이 닿았는데? 나타난게 개라면 높이가 안 맞지.』
『그럼 강도인가.』
『주변에 인가 자체가 없는데 노상강도짓을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유령?』
사실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없다. 그냥 장면을 연상하고 생각나는 대로 즉석에서 답하면 되는 문제다.
『들개도 아니고, 강도도 아니며, 귀신도 아닐 거다? 그래서 넌 뭐라고 했는데, 안즈.』
『착각.』
『응?』
『어떤 사실이나 사물을 실제와 다르게 느끼거나 자각함. 착각.』
『에이, 그게 뭐야... 진짜로 그렇게 말했어?』
여기서 중요한 건 내 대답이 아니다.
손가락을 가볍게 튕겨 내 콧잔등을 때리며 자손은 이리 말했다.
틀려, 꼬맹아. 흐흐흐. 네 뒤에 서있을 그건 바로 나야.
린청의 안색이 변했다.
『그거... 어쩐지... 자기 제안을 거절했다고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가? 내가 봤을 적엔 웃느라 정신없던데.』
어쨌든 떼어낼 불알 같은 건 내 몸에 안 달렸다.
먹을 다 간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빌린 책을 베껴 적기를 시작했다.
대륙 공론의회란, 제의와 그 심의를 위한 회의체로 그 목적과 권한은 독립적이다. 이사실에서는 종교기구라기 보다는 정치기구에 더 가까운데 왜냐하면 황제와 그 권속들이 적룡신의 강력한 치세를 받기 때문으로... 권력의 공백이 발생한 상황에서 다수의 귀족들과 제후들이 연합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공화(共和)와는 다른 것으로... 붓은 빠르게 움직이며 빈 공간을 채워나갔다.
『당신은 어느 나라에서 오셨습니까.』
『유아 어 뤼스이 일라브리즈 캄?』
『같이 저녁 식사를 하시죠.』
『바란 데 이스 플르 디너.』
『짜증나.』
『강데 잇.』
『아니, 내가 짜증난다고. 어우, 모조리 다 때려치고 싶다.』
옆에서 린청이 뒷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