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남이 등장하지 않는 오남 이야기... ※


각이 진 벽에서 천천히 솟아오른 그것은 처음엔 회색의 안개처럼 흐릿했다.
전형적인 유령 목격담과 판박이라 속으로 이게 뭐냐 했는데 그 형태가 점차 뚜렷해지는 걸 보자니 마냥 넋 놓고 있을 수만도 없게 되었다. 안개는 점차 위아래로 당겨져 늘어났고, 간수에 닿은 두부처럼 고형화되면서, 매우 느린 속도로 사람의 형상을 취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와 몸통, 그리고 다리의 모습까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늙은 여자?』
틀렸다. 린청이 여자라고 생각한 건 두건과 흡사한 모양새의 학건이 피와 오물로 범벅이어서 감지 않아 떡진 머리처럼 보였기 때문인데 꾸밈을 중시하기에 여자는 저런 식의 귀를 덮는 학건은 착용하지 않는다. 저건 원래 수도승들이나 쓰던 종류다.
가슴까지 내려온 학건의 천은 피로 젖어 원래의 색이 무엇이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몸은 새카만 검댕으로 뒤덮였고 머리의 절반은 몽둥이로 맞았는지 송두리째 날아가고 없었다. 덕분에 눈과 코도 제자리를 잃고 뒤틀려 악몽 같은 형상이었다. 아직 사람 시체를 봤을 리 없는 린청은 그 충격적인 외모를 보고 놀라 크게 숨을 들이켰다.
이때 유령의 턱이 약간만 벌어졌다. 그리고 그 비스듬히 벌려진 입으로 농도 짙고, 점성 높은 검은 액체가 꿀렁꿀렁 흘러내렸다.
다행이라면 썩는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는 점이랄까.
그래도 유황의 냄새가 상상되어 코를 막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제기랄, 저것과 눈이 마주쳤어.』
겁을 집어 먹은 자신에게 린청은 수치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허나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칭찬받아 마땅하다. 어쨌든 주박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이가 딱딱 부딪치는 건 자제가 되지 않는 듯했다. 차가운 땀도 콧잔등에 송송 맺혔다.
위험하다, 위험해. 나 또한 이미 엉덩이를 뒤로 잔뜩 내민 자세로 뒷걸음질을 하고 있었다.
그럼 이대로 계단 있는 곳까지 재빨리 튀도록 하자.
말쑥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귀신도 성가신 노릇인데 저쪽은 완전히 코 찢어먹은 악령이다.

달각.
아, 미치겠네. 그런데 도대체 아까부터 반복하여 들리고 있는 이 해괴한 기척의 정체는 뭐란 말이냐.

거슬리는 소음만으로도 충분히 환장할 노릇인데 유령의 얼굴마저 계속해서 그 형태를 바꿔갔다. 피부가 늘어지고... 구멍이 났다. 입술이 줄줄 녹아내려 치아와 턱뼈가 드러났다. 참담하여 똑바로 쳐다보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눈꺼풀도 물미역처럼 흐느적거리며 탈락되어 어느 틈에 귀 아래로 걸렸다. 그런데도 눈구멍에 자리를 잡은 눈동자는 생전 모습 그대로 맑고 투명하여 그 느낌이 상당히 기괴했다. 게다가 그 시선에는 무슨 까닭에선지 악의가 없었다. 슬프다거나, 분하다거나, 억울하다는 식의 감정이 없고 대신 자리를 잡은 것은 끝도 없는 피로감이다.

『똑바로 보지 마, 안즈.』
하지만 이런 식으로 눈싸움이라도 하지 않으면 바로 공격당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걸.
나는 계속해서 앞을 주시하며 신중하게 네 발로 기었다.
그렇게 왼쪽 다리를 뒤로 쭈욱 물리는데 신발을 벗은 발바닥에 단단한 물체가 닿았다.
『아후힌ㄹ~~!!』
기겁하고 얼른 돌아보니 책더미다. 사방팔방 쌓아올린 책들이 그만 퇴로를 가로막은 것이다.
『에.베.부.바.러.부.너.베!』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뱉은 말이니 굳이 해석할 필요는 없다.
바퀴벌레의 움직임을 모방하여 두 팔과 두 다리를 현란하게 버둥거려 측면으로 이동했다. 계단! 계단은 어디에 있나! 혼비백산한 상태에서 어떻게든 뛰려는데 아뿔싸, 최단거리로 가로질러 가기엔 장애물이 지나치게 많았다. 린청은 별 어려움 없이 2단, 3단 높이로 쌓아올린 궤짝들을 뛰어넘을 수 있었지만 나에겐 그와 유사한 발군의 운동 실력 같은 건 손톱만치도 없다. 덮쳐오는 순서대로 손으로 밀고, 몸통 박치기를 해서 찍어 넘기는게 고작, 책들이 쓰러지자 거치적거리는 건 더욱 늘어 육지에서 헤엄치기에 이르렀다.
『서둘러! 그렇게 빙 돌아오지 말고!』
나와 달리 이미 계단 앞까지 이른 린청이 재촉했지만 내가 뭐 일부러 느리게 뛰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성과 지능을 그릇에 담아 물 말아먹은 뒤에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던 나는 여전히 양손에 신발을 쥔 채 숨을 헐떡거렸다. 아니다, 정신을 차리니 오른손에만 신을 들었고 왼손은 텅 비어 있다. 칠칠맞게 그 와중에 어딘가에 흘린 모양이다.
『그냥 와!』
『그럼 나중에 또 찾으러 와야 하잖아!』
『새로 사!』
『그럴 돈이 어디에 있다고!』
걸죽한 욕을 한바탕 퍼부으며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신발을 찾아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도는데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며 머리가 무거워졌다. 동시에 상한 음식을 먹고 체하기라도 한 것처럼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이거 안 좋다... 못 견디고 욱욱 입덧하며 눈동자만 굴려 위를 보자 어느새 자리를 옮긴 유령이 길을 가로막고 서있었다.

그거 참 재빠르십니다. 나는 딱할 정도로 허둥거렸다. 그래서 말투도 많이 괴상해졌다.
『이, 이러시면... 소인은 그저 지나가는 과객으로... 뭐랄까, 벌칙으로 청소를 좀. 결코 화생(化生)의 기분을 상하게 할 생각은 실 터럭만큼도...』
유령이 스륵 양팔을 내밀었다. 불에 탄 손가락은 하얗게 뼈가 일부 드러났다.
닿고 싶지도 않고, 보고 싶지도 않다. 질겁하며 수중에 든 외짝 신발을 마구 휘둘렀다.
『저리로 물러나시오! 내게 무슨 죄가 있다고!』
뼈가 드러난 남자의 손이 무언가를 호소하듯 공중에서 위아래 방향으로 흔들렸다. 그 동작은 무언가를 자기에게 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외로움에 지친 나머지 친구가 되어달라고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도저도 아니고 그저 고통에 처한 자신을 도와달라는 단순한 구조 요청이었을 수도 있다. 그래봤자 모습이 너무 끔찍해서 나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살과 근육이 벗겨져내려 아래턱이 극히 일부만 머리에 붙어 있는 형상이다. 불에 그슬린 붉은 혀는 목구멍을 통해 삐져나왔다.
나는 진심으로 이 유령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싶었다. 그 생각밖엔 나지 않았다.
『이러지 마소! 제게는 원대한 포부가 있소. 그것은 평범한 노인네가 되어 슬퍼하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후회는 없구나」읊조리며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오. 그렇기에 여기서 당신과 더 이상 어울리고 싶지 않구려. 그러니 내 앞에서 퍼뜩 물러서시오!』

아무렇게나 휘둘러대던 신발이 유령의 가슴에 닿았다.
그런데 살을 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방금 나는 허깨비가 아니고 실존하는 묵직한 것을 때렸다.
과연 그럴 수 있는 건가. 상대는 귀신일텐데?
《아파.》
놀라서 위아래 방향으로 훑어봤다. 설마, 그럴 리가?
《제법 매운 손이네.》
안 어울리게 툴툴거리기까지 했다.

『안즈! 이리 와!』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건 얻어맞은 그것이 뒤로 주춤거리고 물러났다는 점이다.
바로 지금이다. 나는 끝까지 차오른 숨을 일시에 토해내며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고, 린청이 그런 내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우리 둘은 미친 사람처럼 계단을 쿵쾅거리며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발판이 빠진다 해도 상관없었다. 무너지는 굉음이 났지만 알게 뭐람.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눈도 질끈 감았다.

『어이~, 그 위에서 뭐하는 거야? 시끄럽잖아.』
아래층에서 한가롭게 저 혼자 놀고 있던 송주가 찡그린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그것도 열 받게 걸레를 높게 들어 좌우로 왔다갔다 흔들기까지 했다.
『왜들 수선이야. 지네라도 나왔어?』
그것과 비교하면 지네는 무척 귀여운 곤충이에요, 송주.
린청이 도깨비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나도 옆에서 한 수 거들었다.
『비켜!』
『나왔어! 나왔다고!』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발판을 헛디뎠다. 주룩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아픔도 몰랐다.

Posted by 미야

2015/06/17 14:49 2015/06/17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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