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로 돌아와 닥치는대로 버들고리짝 뚜껑을 열고 그 내용물을 확인해 보았다.
대략 이럴 것이다 미리 짐작했던 것처럼 물품구매 청구서니 기안서 따위의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잡다한 서류들이 고리짝 안에서 잔뜩 쏟아져 나왔다.
다만 대략 10년 전 무렵부터 쌓아올린 자료일 거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 무려 30년 전의 야간순찰기록까지 손에 잡혔다. 년도 순차로 정리된 것도 아니어서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표지와 모서리 부근으로 비에 젖은 흔적이 남은 것으로 보아 다른 곳에서 보관하다가 여름철 장마비에 갑작스런 날벼락을 맞고 허겁지겁 옮긴 듯했다. 그래서 어떤 고리짝은 그 날짜가 위에서부터 아래 방향이었고, 일부는 반대로 아래에서 위 방향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정리 순서가 아니고... 이런 서류들이 창고에 처박혔다는 걸 아무도 기억을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규정으로 정한 폐기 순차를 까먹고 무심하게 버들고리짝에 넣어두기만 한 것 같다. 표지 제목을 쓴 필체 역시 각각 달라 언뜻 보기에도 담당자가 8명이 넘어갔고 결국 처치곤란으로 창고까지 흘러와 오랜 낮잠을 자게 되었다고 보면 되었다.

종이뭉치 가장자리를 한손으로 잡고 낱장을 파라락 넘겨보았다.
먼지와 좀벌레들이 기세 좋게 쏟아졌다.
『다들 게을러 빠졌구먼.』
죄다 불쏘시개로 써먹어야 할 것이다.

끈으로 묶어 하나 둘 마당으로 옮기는데 힐끔거리는 눈들이 따가웠다.
《귀족이라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고 원래 천출인가. 허드레 일을 직접 하네.》
《그러게나 말이야. 게다가 쓰레기를 나르는 모습이 어쩐지 익숙해 보이는 걸.》
익숙하긴! 이미 손가락은 잡다한 상처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익숙하다면 피부를 베일 리 없다.
저 밑바닥에서 정제되지 않은 여러 감정이 울컥 올라오는 걸 참으며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무거운 걸 옮기자 몸이 비명을 지르려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리가 아파왔다.

『그러고 보면 안즈도 제법 편한 삶을 살았네.』
전생의 기억 탓에 끈 매듭을 묶는 법을 알아도 손가락은 영 말을 듣지 않았다.
이 어린 몸은 육체노동이라는 걸 모른다.
정서적으로는 학대를 받은 건 맞지만 힘든 일을 한 기억은 없다.
겨우 그 정도의 노동으로 껍질이 벗겨져 쓰라림을 호소하는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쓰게 웃었다.
일반 농민의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일곱 살 무렵부터 물을 길고 밭에 나가 잡초를 뽑는다. 여자아이라면 부엌으로 내려가 요리를 돕거나 마른 땔감을 준비해야 한다. 일은 고되어 그 작은 고사리 손은 이윽고 온통 굳은살로 덮인다. 겨울에는 얼음을 깨가며 빨래를 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피부가 터서 갈라진 틈으로 누런 빛깔의 체액이 흘러내린다. 덤으로 동상에도 걸린다.
『아아, 늦을 가을 날 마을 우물에서 물을 퍼다 실족하여 빠져 죽은 적도 있었지.』
그건 언제였을까.
꽤나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흐릿하다. 단지 아홉 형제 중 막내였었다는 것만 생각난다.
집중하면 더 많은 걸 떠올릴 수 있겠지만 진이 빠진 지금은 그러기가 귀찮다.
아울러 우물에 빠지고도 나는 금방 죽지 않았다. 사흘 정도는 구조를 기대하며 분명 살아 있었다.

통증을 호소하는 허리를 펴보았다. 거짓말처럼 뿌득 소리가 났다.
『삽시간에 나이 든 아저씨가 된 것 같구나... 오늘도 날씨 참 좋다.』

4할 정도 꺼내놓으니 발 디딜 틈도 없던 창고 안으로 그럭저럭 공간이 생겼다.
뿐만 아니라 처박힌 고물들 속에서 탁자와 의자도 나왔다. 바로 세워두고 일부러 흔들어보니 다리가 아주 망가진 건 아니어서 먼지만 닦으면 요긴히 써먹을 듯했다. 칠이 벗겨진 낡은 물건이어도 나 혼자 사용할 가구를 얻었다 생각하니 기뻤다.
반색하며 의자에 앉아보았다. 오른쪽으로 기울어진다는 점만 빼면 만족스러웠다.
『헤에~ 괜찮네.』
흡족해하며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괜찮긴 뭐가 괜찮다는 거냐, 이런 쓰레기장에서.』
『여어, 린청. 수업은 어쩌고 여기까지?』
여어, 린청 - 이런 한가한 말을 할 때가 아니지! 넌 배알도 없냐!』
지금 같아선 느긋하게 인사를 할 처지가 아니지 않느냐며 그는 진심으로 화를 냈다.
하여간 처음 봤을 적에도 벌컥 화를 내더니 지금도 여전히 벌컥 화를 내고 있다. 그러지 말고 저 녀석 별명을 벌컥 대마왕이라고 지어줄까, 나는 웃으면서「너, 화났구나?」의미로 검지를 귀 옆으로 나란히 세워 뿔 모양을 만들어 보았다.

장난 비슷하게 보였을 그 동작이 그를 더욱 기막히게 했나 보다.
『이 바보야! 당연히 화가 났지. 이런 건 아랫것들이 할 일이잖아. 네가 직접 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그리고 이 쓰레기장은 또 뭐냐. 우와, 이 먼지. 지독해. 여기서 진짜로 기거할 생각이야? 미쳤어?!』
『안 미쳤어.』
『그럼 숙사감에게 가서 따져야지!』
허리에 손을 얹은 자세로 고함을 질러대는데 이거 정말 누구와 판박이다. 자세히 보니 코 모양도 오똑하게 솟은 모습이 비슷하게 생겼다. 같은 핏줄도 아니면서 저럴 수도 있나, 은근 신기하다.
『숙사감대부에게 얘기는 해뒀어, 린청.』
『아이고, 안 봐도 뻔하군. 얌전하게 손 모으고 앉아「그럼 좋은 소식 기다릴게요~」이러고 말았겠군. 이 바보야, 그러니까 제국 놈들에게 얕보인 거라고. 거기선 치를 떨며 책상이라도 내리쳤어야지.』
『싫어. 책상을 치면 손이 아파.』
『으이그! 말을 말자! 너와 입씨름을 하자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니니까.』

훌쩍 뒤돌아 서기에 나는 린청이 이대로 돌아가려나 보다 생각했다.
잘 가라 인사를 하려는데 엉뚱하게도 그는 크기가 제법 되는 버들고리짝을 번쩍 들어 밖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상당히 무거울텐데 걷는 보폭이 평상시와 똑같다.
아니, 것보다. 나는 크게 당황했다.
『자, 잠깐 기다려! 린청!』
그래봤자 남의 말을 한쪽 귀로 흘리는 성큼 대마왕이었다. 창고 밖으로 나온 마왕은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이건 어디로 가져가면 되는 거냐. 저쪽이냐.』
『그게 아니라...!! 기다려! 왜 네가 옮기는 거야. 아까는 하수들이 할 일이라고 화를 냈으면서.』
『그냥 보고 있기엔 갑갑해서 그런다. 이래야 빨리 끝날 거 아니야.』
『저어, 일부러 도와주지 않아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쳐다봐.』
하찮은, 쓰레기, 천한, 등등의 단어가 가슴을 콕콕 찔러댔다.
나 때문에 린청까지 비웃음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 나는 버들고리짝을 어서 바닥에 내려놓으라며 그를 다그쳤다.
『흥! 그 잘난 제국놈들이 힐끔거리면 하고 싶다 생각한 일도 도중에 멈추고 관둬야 할까? 그건 내 성격에 맞지 않아. 차라리 나는 그 녀석들 눈깔을 뽑아버릴 거야.』
『그건 곤란해!』
『나도 곤란하다, 안즈. 슬슬 팔이 저리는데 이걸 어디다 버리면 좋을지 가르쳐줬음 좋겠는데.』
소년은 막무가내였다.

Posted by 미야

2015/05/26 15:43 2015/05/26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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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5/05/27 01:24 # M/D Reply Perma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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