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밀고 벽을 등지고 앉아 도를 닦는 건 의지만 갖고 있음 누구나 할 수 있죠. 하지만 지식을 배우는 건 의지만으로는 할 수가 없고 금전이 들어갑니다. 그것도 제법 비싸게 들죠. 국가사업으로 농부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농업 기술조차 어디까지나 무료가 아닐진대 인문학이나 사회학 같은 고급 지식을 배우는 자가 농부보다 적은 학습 비용을 기대해선 곤란, 일단 책값 자체가 장난이 아니어서. 강사에게 지출되는 월급도 그렇고.』
『아, 예... 그럼.』
『물론 교양 학습 방침에 따라 무료로 제공되는 기초 수업이 몇 가지는 있어요. 그런데 그게 뭐랄까... 모양새만 그럴 듯할 뿐으로 그저 형식적이랄까, 아님 쭉정이 같다고나 할까.』
벅벅 문질러대는 머리에서 그 정체를 알기 싫은 하얀 가루가 올라오려 하고 있다. 그 사실을 미처 모르는 숙희는 두피 기름이 옮겨 묻은 손가락을 내려 이번에는 입가를 문질러댔다.
아무래도 꺼려졌다. 특히 어깨부근을 눈 여겨 보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숙사감대부의 의복이라는게 짙은 감색이다보니 아무래도 차갑지 않은 하얀 눈이 소복히 내리면 싫든 좋든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기본 서대륙 역사학과 기초 문학론, 기초 산술과 기초 예절 강론, 기본 체력보강 - 체육.

숙희는 의미불명의 음, 하고 한 마디를 내뱉은 뒤 팔짱을 꼈다.
숫자를 세어 겨우 다섯 과목에 불과했다. 그야말로 딱 하루치밖엔 안 된다.
그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잘라 말했다.
『별 재주가 없네. 알차게 놀아야겠군요.』
나는 대놓고 당황했다. 혹자는 신 난다 반색하겠으나 할 일 없이 놀아 제치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시간을 허비하다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몸과 마음에서 시커먼 빛깔의 곰팡이가 자라나게 된다. 그 결과 현실 감각이 떨어지고 빈둥거리는 체질이 되어버린다. 집안의 원조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 경제적으로도 무능하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할 줄 아는 것이 전혀 없는 - 재주라고 할 것도 없어 쓸모는 요만큼도 없는 인간으로의 전락만이 정해진 수순이다.
『그런 표정 하지 말아요.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시간이 남아돌아 그 지루함에 접시에 코를 박고 죽고 싶어지겠지만... 또 압니까.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것도 사람마다 다르니까요.』
남의 사정이라고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답답한 심정에 조르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혹시 장학금 제도를 활용할 수는 없겠습니까.』
『호오, 그러니까... 어디보자. 배움에 써먹을 수 있게 나라에서 돈을 융통해 달라?』
『예.』
『에이, 민망하게. 안즈 님은 외국인이잖소. 기본적으로 장학제도라 함은 머리는 똑똑한데 환경이 어려운 자들에게 양질의 교육 기회를 제공하여 그 출세의 길을 열어주자는 것 아니겠소. 출세라는 건 다시 말해 이사실의 관료가 된다는 얘긴데, 아쉽지만 우리나라는 외국인을 관료로 채용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장학금 이전에 정식으로 귀화부터 하셔야 하는데... 어디보자. 귀화 절차를 알려드릴까? 내가 관련 서류를 어디에 뒀드라.』
고지식한 숙희의 말엔 에누리가 없었다.
『자, 그래서 더 궁금한 건 없으신가요.』

물어보라 하여 마음속에서 제일 궁금하게 여기던 걸 물어보았다.
『황제폐하께선 보위에 오르신지 얼마나 되었는지요. 적손께선 강녕하신가요.』
당시 친구는 나보다 세 살 연상이었다. 노쇠를 이유로 부친이 사양하자「겨자를 먹는다」는 표현을 사용하며 스물아홉 젊은 나이에 제위에 올랐다. 가만 셈을 해보니 올해로 일흔다섯이다. 조만간 희수(77세) 잔치를 할 나이로 내가 불타 죽은 때로부터 38년이나 세월이 흘렀다. 천하를 집어 삼킬 듯했던 위풍도 대장간에서 쇠가 담금질을 당하듯 망치로 두드려 맞고 그 형태가 다르게 바뀌었을 거라 생각한다. 곧았던 허리도 구부정해지고 허벅지는 말랐으리라. 근력도 제법 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예순 나이에 아들을 봤던 부친의 정력을 감안하면 신체의 노화를 부정한 채 지금도 펄펄 날아다니고 있을지도.
나는 앞으로 나올 이야기를 기대하며 상체를 보다 앞으로 내밀었다.
『어떠신가요? 적손께서는 올해로 연세가...』

숙희는 두 눈을 실처럼 가느다랗게 하고 날 쳐다보았다. 노려보기 위함이라기보다는 그런 당돌한 질문을 던지는 내 용모를 더 자세히 보려고 그런 것 같다. 아무래도 이 남자는 시력이 많이 약한가 보다. 안경이 필요할 만큼 눈이 침침해지면 저렇게 이상하게 눈을 뜨는 버릇이 생긴다.
『높으신 분의 이야기는 나 같은 미생자에겐 뜬 구름 위의 누각이죠. 눈에는 보여도 신기루와 같아 감히 알고 있다 여길 수 없소. 안다고 해도 그게 사실일 거라 확신할 수도 없고... 뭐, 우리가 굳이 신경 안 써도 황실은 신룡의 은덕으로 지금부터 영원토록 만세만세 만만세니까 다행이지. 것보다 왜요.』
『왜라니...? 그냥 알고 싶으니까 그러죠.』
『혹시 그쪽도 거서가니를 노리는 거우?』
『거서가니?』
숙희는 손바닥을 흔들어 훠이훠이 동작을 해보였다.
『거시기 말이요, 거시기! 팔자를 펴려면 내명부에 들어 후정의 어처 자리라도 노려봅세다, 그런데 폐하께선 건강이 어떠하신가 - 그런 거냐고요. 예당국에서 왔다는 발랑 까진 계집... 콜록, 아니, 그러니까 예당국 옹주도 그걸 궁금해 하던데 듣던 입장에서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어린 분들이 공부 말고 그런 걸 궁리하면 절대 안 되죠! 황제께서 여전히 첩실을 거느릴 만큼 정력이 있으신가 아니신가 이런 속물적인 거 말고 보다 현실에 입각하여 궁금한 걸 물어보란 말이오. 이를테면 땀에 젖어 변색된 빨래엔 무엇을 넣어야 하얗게 되는가! 빙판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양이는 진짜로 목숨이 아홉 개인가! 내일의 식단은 무엇인가! 누구의 손으로 만들어 오이파무침은 왜 그리도 짠 것인가!』
그저 황제의 안부만 물어봤을 뿐인데 별난 꾸중을 듣고 말았다.

숙희가 다시금 눈을 가늘게 떴다.
『자! 그래서... 궁금한 건 무엇?』
『내일 나올 반찬은 무엇입니까.』
『좋은 질문이오. 진작에 그럴 것이지.』

수확이라 할 것도 없이 빈손으로 밖으로 나오자 - 그래도 내일 반찬이 감자 조림이라는 건 알아냈다 - 이른 더위로 창문을 열어둔 교당으로부터 낭랑하게 책을 읽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서 읽거나 음식을 먹으며 책을 읽어서는 아니된다. 그 대신 찬물로 얼굴을 씻고, 의복 또한 단정히 한 뒤에 올바른 정신적 자세를 표면화하여 책을 읽어야 할 것이다. 문장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책속에 자신을 던져놓고 그 의미를 포착하여 자신의 삶에 적용을 시켜야 마땅하니, 우리는 읽는 행위로 인해 그 내용을 자신에게 연결시키고 개인적인 관점에서 사색하여야 한다. 사색은 우리를 보다 자유롭게 하여 우리의 정신의 표현을 위한 출구를 찾는 일에 큰 도움이 되어주며...》
오랜만에 듣는 윤 가의 독서술이었다.
기웃거리니 인기척을 알아채고 안쪽에서 야리고 노려봤다.
야박하구나, 야박해.

한숨을 푹푹 내쉬며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뭐, 청소부터 하는게 좋겠지.』
숙희는 다락방이라도 정리하여 내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런 종류의 일이라는게 하루아침에 뚝딱 이루어지는 법은 없다. 관료로 일해본 적이 있어 돌아가는 속도는 대충 짐작이 갔다. 신속한 일처리라는 것은 최소 열 번의 직인이 찍히는 과정을 고루 거침을 의미한다. 그러니 창고 신세를 그렇게 빠르게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여 낡은 폐품을 정리하여 버리고 때에 찌든 바닥을 쓸고 닦는 일이 급했다. 마음만 앞섰지 나는 아직 창문을 막은 널빤지조차 해결을 못한 상태다.
『과연, 세월 좋게 빈둥거릴 틈은 없겠군.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게 이렇게 산더미여서는... 공구부터 빌려볼까.』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기운이 빠져 터덜터덜 걸으면서도 어쨌든 마음가짐은 그렇게 하고 보았다.

Posted by 미야

2015/05/25 12:36 2015/05/25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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