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선인을 상상하여 그렸다던 그림 한 점이 떠올랐다.
족자 속의 젊은 사내는 얼굴이 갸름하고 수염이 없어 흡사 고운 여인처럼 보였는데 뺨과 입술이 붉었고 몸이 비치는 하늘거리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공중에 뜰 수 있는 신통력을 지녔기에 힘 들이지 않고 벼랑 위 나무가지에 올라 앉았는데 몸무게가 없어 허공에 살짝 뜬 채였다. 그렇게 중력을 거스르며 주인공은 피리를 연주했다.
그 소리의 유려함을 표현하고 싶었던 화공은 은가루를 섬세하게 덧발라 길고 가느다란 여러 개의 선을 배경에 삽입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하얗게 빛나던 은은 점차 검게 변색되었고... 처음부터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었을 아름다운 선인은 구불거리는 검은 선의 효과 탓에 어딘지 모르게 불길한 존재처럼 보이게 되었다. 회사하게 칠해진 입술도 검은 바탕 아래선 기분 나쁜 선지피가 묻은 것 같았다.
「예의 그 그림이 아닐진대 저 남자의 배경으로 새카맣게 변색된 은선이 보이는구나.」
편안한 자세로 그루터기에 걸터앉은 사내를 보자 끙 소리만 나왔다.
운치 있는 피리 소리는 상상이 안 되고 뿜겨져 나오는 어두운 기운에 그저 주눅만 들었다.
다리를 꼬고 손으로 턱을 괸 자세로 그가 말했다.
『이사실에 가면 좋은 친구를 많이 사귀라고 부모님이 그런 말씀 안 하시든? 그런데 넌 어찌된게 만들라는 친구는 안 만들고 네놈 뼈를 부러뜨릴 원수만 하나 가득 쌓고 있누.』
『그러게요.』
『그러게요? 지금 그렇게 느긋하게 반응할 때가 아닐텐데.』
정신 좀 차려라, 이 말과 함께 나뭇잎 하나가 날아들었다. 그런데 그게 꼭 단단한 돌멩이 같았다. 그쪽 방면의 재주가 없어 원리를 모르지만 아무래도「기」라는 걸 넣어 날려 보낸 듯하다. 맥을 못 추고 팔랑거려야 옳은 나뭇잎이 정확히 목깃을 맞춘 뒤에야 아래로 뚝 떨어졌다. 안쪽 피부는 벌레에 물리기라도 한 것처럼 따끔거렸다.
『보는 사람이 답답해 미치겠군. 인마, 지금 네가 처한 상황이 어떤 건지는 알고 있니? 모처럼 큰맘 먹고 살려줬으면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보다 재밌게 굴어야 하지 않겠느냐. 이건 뭐 잠시 동안의 여흥거리도 안 되고 말이야... 쯧쯧, 보람이 없어.』
혀를 끌끌 차던 자손이 다시 나뭇잎을 손가락 사이에 끼었다.
또 날리겠구나 싶어 서둘러 몸을 틀었다.
아니, 몸을 틀었는데 비겁하게도 머뭇머뭇 던지는 시늉만 하고 안 던졌다.
『뭐, 면신(免新)의 전통이라 하면서 도토리 키 재기를 하는게 비단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긴 하다만.』
면신이라 함은 고참이 신참을 괴롭히는 악습을 일컫는다.
위아래 위계질서를 바르게 세우고 신참자의 인품과 능력, 그리고 참을성을 시험하는 본래의 의도는 간 곳 없어 오래전부터 그냥 약자를 괴롭히는 은밀한 오락거리로 전락했다.
집단으로 얻어맞고 불구가 된 자가 나온 이후로 법으로 엄격히 금지했는데 유야무야 넘어가고 여전히 활개치고 있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구폐는 황제의 힘으로도 고치기가 어렵다.
『내재원에서의 네 위치가 그렇게나 형편없나... 도토리들 사이에서 짓눌리고 말이다.』
이쪽에서 피할 박자를 놓치자 그제서야 나뭇잎을 잡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번엔 목깃이 아니라 목 한 가운데 급소를 노렸다. 맞은 자리가 그렇게 아팠던 건 아니다. 그래도 부위가 부위이다 보니 칼날이 스치기라도 한 것처럼 펄쩍 뛰고 말았다.
『그 도토리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콩알이라니, 정말 가엾군. 다음엔 얻어맞고 진흙 밭에서 구르겠네. 아니면 옷이 벗겨져 수로에 던져지려나? 그것도 아니라면 장대비가 내리는 날 마당 청소를 해야 하겠군. 지붕에 올라가 기와 틈새로 자라난 잡초를 뽑아야 할지도 몰라. 가엾어라.』
가엾다, 가엾다 말하는데 어쩐지 그 말맛(뉘앙스) 이 메롱메롱으로 들리니 신기할 따름이다.
글쎄다, 소심한 아이라면 울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르겠다. 아닌게 아니라 자손은 이쪽의 눈치를 살살 살피며 내가 보일 반응을 가만히 기다렸다. 특히 붉어질 눈자위를 기대했다. 하지만 서른 번 눈을 깜박거려도 이쪽에서 도통 눈물을 흘릴 기미를 안 보이자 쳇, 소리를 내며 기대를 접었다.
『안 우냐.』
『울어야 하나요.』
『반문하는 걸 보면 안 울겠군. 뭐, 괜찮다. 억지로 울 필요는 없다.』
기가 막혀서. 스무 살 넘은 자가 열 살짜리를 가지고 참 잘 하고 앉았다.
눈물은 안 나왔지만 대신 눈살은 찌푸려졌다.
『저기요. 감히 여쭈어 봅니다. 진흙 밭에서 구를 수는 없으니 제발 도와주세요, 라고 하면 어찌하시렵니까. 절 도와주실 건가요.』
살려만 주십시오 - 라는 선택지를 가정하여 보았더니 돌아오는 답은 이거다.
『그런 따분한 짓을 내가 하겠누?』
자손은 하품하며 귀지를 팠다. 더하여 쓰레기와 마찬가지일 썩은 동아줄도 내어밀었다.
『그리고 말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해두는데 이라벽치의 둘째 아들놈이 글을 배우러 이곳에 와 있다. 이름을 몰라도 찾기는 쉬울 거야. 지 애비를 닮아 외모도 우락부락하고 무예가 출중하거든. 곤란하여 정 못 살겠다 싶음 찾거라. 하지만 널 보고도 절대로 모르는 척해야 한다, 사전에 내 단단히 일러뒀으니 그리 알아.』
『허어.』
『왜 한숨을 쉬누?』
『글쎄요.』
『어린 것이 땅 꺼지게 한숨만 쉬어 무얼 해.』
너 때문이잖아, 이 말종 인간아 -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반쯤 열려져 있던 창문을 거두어 닫았다.
대놓고 무시당한 자손은 당황하여 외쳤다.
《네 이놈! 갑자기 이 무슨 짓이냐!》
『바람이 차서요.』
《이런 발칙한! 당장 도로 열지 못하겠느냐!》
『싫습니다. 더 하실 말씀 있으시면 건물을 돌아 입구로 와주세요.』
《그런 귀찮은 짓을! 그러지 말고 열어. 오늘은 더 놀리지 않으마.》
『어차피 창문이라는 것은 사람이 출입하는 용도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나무라며 무어라 하자 밖에서 인기척이 사라졌다.
글쎄다, 그 성격에 정말로 건물을 한 바퀴 빙 돌아 다시 쳐들어올 것 같진 않았다만.
혹시라도 씩씩대며 나타나면 얼른 탁자 아래로 숨어야지, 각오하며 가슴을 폈다.
『시간을 많이 지체했군... 린청은 어디에 있지.』
원래의 목적을 떠올리고 양손에 마실 것을 쥐었다. 건정과는 보기도 싫어 대신 생강차를 들었다.
그 상태로 린청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갑자기 소동이 커졌다.
『이사실에서는 음식에다 장난을 쳐도 된다고 그러든?! 뭐? 나 먹으라 그런 거 아니니 신경 끄라고? 다른 놈 주려고 그랬다고? 이놈아! 어쨌든 내 눈에 띄었으니 모르는 척 무시할 수가 없잖냐. 우리나라에선 음식에 먹지 못하는 걸 넣으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태장이 10대다! 네 까짓게 뭐라고 먹을 음식에 가래를 뱉어, 뱉긴!』
네놈도 어디 똥 맛 좀 봐라, 이랬던 것도 같다.
자기 일도 아닌데 건방지게 왜 나서서, 그런 소리도 났다.
아무튼 쩌렁 울리는 고함과 같이하여 의자 다리가 부러졌다.
아청아청의 위기일지도. 주요 등장인물의 나이를 보니 소름끼치는...
안즈 10세, 린청 11세(휘사보다 4개월 연상), 휘사 11세, 자손 23세...
아직 등장하지 않은 이마리 131세... 뭐, 이쪽은 요괴니까 그렇다치고. 이 일을 우짜지.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