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곡주 한 잔이면 설움조차 흥겨운 가락이 되는 법 - 옛날부터 신경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다 못해 두통으로 번지면 포도로 빚은 이국풍의 술을 입에 대던 버릇이 있었다. 주량이 센 편은 아니라서 자주 즐길 수는 없었지만, 그리고 쥐꼬리 비슷했던 수입으론 원하는 만큼 마신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지만, 입안에 맴돌던 그 향취만큼은 기억의 창고 가장 안쪽으로 소중히 갈무리해뒀다. 하여 수백, 수천 번씩 잇달아 부활하여 다른 인물로 살아왔음에도 여전히 나는 피로감을 느낄 때마다 혀로 그 맛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시곤 했다.
동대륙 사람들은 그걸「와인」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 육신은 아직 열 살짜리 어린애다.
더하여 이사실 사람들이 미성년자에게 술을 제공할 정도로 정신 나간 건 아니니까...
「이건 그냥 포도즙을 섞은, 발효가 되지 않은 일반 음료수겠지.」
짙은 분홍이다 못해 보랏빛이 감도는 액체로 뻗던 손을 도로 거두어들이면서 약간 실망했다.
그저 달기만 한 음료는 취향이 아니다. 단 맛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이사실 사람들의 입맛에는 근사하겠지만 나 같은 외국인에겐 충치를 예감한 턱이 좌우로 진동하며 쓰라려오는 그런 맛일 뿐이다.
「에잉, 차라리 냉수가 낫겠다.」
그렇게 판단하고 탁자에서 몸을 돌려 나오는데 곶감을 띄운 건정과에 눈독을 들이던 다른 사람과 어깨가 부딪쳤다.

『아, 미안합...』
반사적으로 사과를 하려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뒷말이 쏙 들어갔다.
등을 떠밀며 나에게 시비를 걸던 무리 중 한 명으로 린청에게 턱을 얻어맞은 아이를 부축하여 달아났던 바로 그 소년이었다. 상대방도 내가 누구인지 알아차리고 짧게 앗 소리를 냈다. 그리고 눈동자를 또륵 굴려 주변을 재빨리 훑었는데 아마도 내 편을 들어주던 린청이 혹시라도 가까운 곳에 있을까봐 주의하는 눈치다.
「이거 느낌이 영 안 좋은데.」
당연한 수순을 밟아 린청의 부재를 확인한 소년은 갑자기 의기양양해져 입가로 하나 가득 미소를 걸었다. 그리고 그 미소는 내 눈에 보기에 썩 보기 좋은 종류는 아니었다.
『여어, 가난뱅이.』
역시나 2차전이냐, 피곤하게. 법으로 텃세 부리기는 하루에 딱 1회만 허용하도록 하라.
허나 그런 법은 세상에 없어 소년은 개기름 줄줄 흐르는 목소리로 신이 나 떠들어댔다.
『네겐 참 다행이겠구나. 이렇게나 공짜 음식이 넘치니 말이다. 이참에 많이 먹어둬야겠지?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상다리 부러지는 모습을 구경 못 할테니 후회하지 않으려면 사양하지 말아야 할 거야.』
그러면서 검붉은 빛깔을 띈 건정과를 주걱으로 옮겨 나에게 건네주었다. 뭐, 거기까진 괜찮았다. 그런데 내 손에 건정과가 담긴 그릇을 쥐어주기 전에 그 안에 침을 탁 뱉었다. 할 말을 잃고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니 목안을 긁어 가래를 억지로 끌어올려 카악, 하고 누런 덩어리를 한 번 더 뱉었다.
『자, 공짜야. 그러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얼른 마시렴.』

이렇게 꼬인 심성을 가진 아이가 나중에 자라 뭐가 될지 진심으로 걱정되기 시작했다. 저런 녀석이 관리가 되면 나라 돌아가는 꼬라지가 제법 볼만할 것이다.
물론 내가 처한 상황도 당장 걱정되긴 했다. 모르는 척 마시려니 비위가 상한다. 그렇다고 거부하자니 후환이 두렵다. 저치도 귀족이고 내 신분 또한 귀족이지만 나는 집안을 내세울 수 없는 상황이니 우리의 관계는 서로 동등하지 않다. 이런 마당에 상대방이 억지를 쓰면 곤란해지는 건 이쪽이다.
『어서 쭈욱~ 들이키렴.』
내 마음 한 가운데로 내리꽂힐 번뇌의 우뢰가 짐작된다며 아이는 심술로 가득 찬 눈을 반짝였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잔을 입술에 가져갔다.
어차피 독이 든 것도 아니니 마신다고 죽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주란새가의 정치범 수용소를 떠올리면 이런 건 차라리 귀여운 장난이다. 거기선 간수가 죄수에게 억지로 오줌을 마시게 하거나 진흙을 먹게 만들었다. 침을 뱉은 음료수? 단 맛을 보고 싶었을 죄수들은 허락해달라며 반대로 애걸복걸했을 거다.
눈을 감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꿀꺽 삼키는 것으로 끝을 낼 수 있으면 그렇게 하도록 하자.

- 진짜로 그걸 삼키려고? 그렇게 화가 났으면서?
입술을 벌려 액체를 입안에 담던 순간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안즈도 아니고, 원래의 나도 아닌, 막연하게 꺼려지는 그런 종류였다.
잔을 도로 입에서 떼어내며 이마를 찌푸렸다.
- 차라리 저 녀석의 목덜미를 으드득 콰드득 씹어 삼키는 건 어때. 보라고, 아주 연약해 보이는 고기잖아?
이건 도대체 무엇의 목소리일까.
- 먹음직하게 생겼구나. 저 어린 살은 분명 맛도 좋겠지.
짐승의 목소리?

실눈을 가만히 뜨고서 입에 머금은 걸 빨리 삼키라 종용하는 소년을 쳐다봤다.
『푸웃---!!』
그리고 나는 사래가 들어 입안에 든 건정과를 만장하신 가운데 뿜었다.
건정과는 빛깔이 제법 짙은 음료로 밝은 옷감에 매우 심각한 얼룩을 남긴다. 급히 빨아도 깨끗하게 지우기 힘들다. 나름 꾀를 내어 뜨거운 물에 삶으면 반대로 얼룩이 고착되어 영원히 지울 수 없게 된다.
아니, 그 이전에... 나는 진심으로 허둥거렸다.
- 방금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사람을 먹는 상상을 하자 입안에 침이 고이려 했다.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이건 고의가 아니었어요.』
『뭐얏?!!』
『진짭니다. 일부러 그런게 아닙니다. 이걸 어쩌죠. 정말 미안합니다. 얼룩이...』
『닥쳐! 네가 한 짓에 대한 댓가는 앞으로 톡톡히 갚아나가야 할 거다.』
얼굴이 벌겋게 변해 부리나케 연회당을 빠져나가는 소년을 붙잡지도 못하고 나는 망연자실했다.

『이야... 못 말리는 녀석이군. 저거, 이제 보니 완전 습관 아니야?』
날  비난하는 목소리는 실내에서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반쯤 열린 창문 밖에서 들려왔다.
『내 머리엔 토를 뿜더니, 이젠 건정과도 먹다 말고 뿜는 거냐. 그거 참 뭐랄까, 적을 물리치는 방법으로는 최악이잖아. 따라하려는 자가 있으면 감히 맹세하는데 주먹으로 때려죽일테다.』
얼어붙었다가 가까스로 몸을 움직여 뒤를 돌아보니 창문 너머로 스물 초반 나이의 청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기 집 안방인양 편안하게 나무를 타고 올라간 그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투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대는 중이었다. 오늘만큼은 장수의 복장이 아닌 자색 비단의 평복 차림새였지만 나는 단번에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사실 그와의 만남이 어떠했다는 걸 고려하자면 옷을 바꿔입은 걸로 못 알아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여어! 꼬맹이.』
묶지 않은 목덜미의 끈 두 가닥이 바람에 하늘하늘 나부꼈다.

Posted by 미야

2015/05/20 10:14 2015/05/20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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