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가 끝나자 분위기는 곧 일상으로 돌아갔다.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던 지난밤의 내재원도 어느새 경을 읽는 수도원처럼 조용해져 의자를 던지며 주먹 다툼을 벌였던 일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하수들은 이른 새벽부터 비를 들고 나와 청소에 들어갔고, 졸린 눈을 비벼가며 강의를 들으러 가는 학부생들은 느려터진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오르는 도중 멈춰선 건 호흡이 가빠서가 아니라 두 눈이 들러붙어서다. 밀가루 풀처럼 끈적거리는 졸음을 떼어내기 위해 하품을 하는 모양새가 과음으로 숙취에 시달리는 말단 관리직 관료를 연상시켰다. 차이라면 그저 술고래의 입 냄새가 안 났다는 것 정도랄까, 하지만 일부 고학년은 창고에서 곡주를 훔쳐 먹고 단단히 탈이 나 두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쪽은 그 입 냄새가 썩은 생선을 날로 씹은 것처럼 지독했다.
『실례합니다, 숙사감을 찾고 있습니다만. 이쪽으로 가라고 해서 왔습니다.』
『누굴 찾는다고요.』
『숙사감이오.』
『그래서는 너무 막연한데... 많고 많은 숙사감 중 누구를? 찾는 이의 성명은 모르십니까?』
이 와중에 반대 방향으로 뛰고 있는 건 오로지 나 혼자로, 물과 기름처럼 분리되어 위에서 겉돌았다.
첩첩산중으로 쌓인 문제가 워낙에 많다보니 무엇부터 물어보면 좋을지 막막했고, 더하여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지도 막막했고,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조차 막막했다.
앞뒤 꽉 막힌 가운데 무작정 3층으로 올라갔더니 마음대로 들어와선 안 된다며 입장을 거절당했다. 다시 1층으로 돌아왔다가 표지판을 읽고 5층으로 향했다. 이번엔 왜 자꾸 여기저기 기웃대고 들쑤시느냐 야단만 맞았다.
다리는 아파오고 기운도 빠지고.
결국 건물 현관 앞에 넋을 놓고 주저앉았다.
그 모양새가 제법 불쌍하고 처량했던지 성격 좋게 생긴 하수가 이거라도 먹고 힘을 내라며 주먹밥을 손에 쥐어주었다. 나는 차마 주먹밥을 입에 넣을 생각도 못하고 멍한 얼굴로 지붕 처마를 쳐다봤다.
결국 보다 못한 관리직원 하나가 내 팔을 잡아끌어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어이! 하던 일은 잠시 접고 자네가 좀 도와주게, 숙희.』
『그거 참... 곤란한.』
『어쩌겠는가, 숙희. 이 소년은 총체적 난국이란 말일세.』
『그 무슨 낮도깨비 같은 말씀이오. 총체적 난국이란 표현은 사전에도 안 실려 있습니다. 도대체 누가 지어낸 말인지. 땅이 갈라졌고, 바다에선 해일이 몰려오고, 앞에는 식인 곰이 앞발을 들고 있고, 뒤로는 배 나온 중년남이 이불을 깔고 누워「나와 하지 않겠는가」강요하고 있고, 옆에서 아내가 떡을 썰고 있으면 총체적 난국이 맞기는 하겠지만. 차라리 개판오분전이라는 표현이...』
『숙희! 의상서님은 안녕하시지?』
『거 말꼬리 잘라가며 맏형님 이야기 하지 마소! 여차하면 방패처럼 형님 꺼내고. 얄밉게.』
뚝뚝 끊어지는 별난 말투로 투덜거리며 책상을 가득 채운 서류뭉치에서 가까스로 헤엄쳐 나온 이 젊은 숙사감대부의 이름은 숙희라고 했다. 남자치고는 이상한 이름이어서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 그렇다고 외모가 야리야리한 것도 아니었다. 누구처럼 인간이 곰 가죽을 뒤집어쓴 형상까지는 아니었어도 그 또한 키가 매우 컸고, 수염도 다듬지 않아 더부룩했다. 이런 사내를 숙희라고 부르자니 배꼽 부근이 근질거렸다.
숙희라는 이름의 숙사감대부는 구석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 했다. 나는 눈치껏 행동했다.
『가뜩이나 일이 밀렸구먼... 그래도 일단 앉아 보시오.』
『예.』
『거 이상하고만. 지난 10년간 이런 경우는 구경도 못 했는데.』
산더미 같은 서류들 틈에서 귀신의 동작을 베껴 정확한 위치에서 정확히 한 장을 꺼내들었다.
그걸 빠르게 읽더니 숙희는 짜게 식었다.
『과연. 완전히 떴구만, 떴어. 이건 영락없이 버리는 카드야.』
버리는「카드」라는 표현을 쓰는 걸 봐선 이 남자는 동대륙 문물도 많이 접해봤던 것 같다. 과거에도 특정 뱃사람들 사이에서 카드놀이가 유행한 적은 있지만 수도 루은에선 여전히 마작이 인기다.
『아, 실례. 그러니까 카드라는 것은...』
이쪽에서 이해를 전혀 못 하고 있다고 멋대로 생각한 숙희는 부연 설명에 들어갔다.
『카드는 동대륙에서 쓰는 놀이용 딱지요. 그리고 그 딱지를 버린다는 의미는... 그러니까 쓸모없다는 뜻... 이라기 보다는. 에잇. 민망하군. 내가 왜 이런 것까지 시시콜콜 설명하고 앉았지. 암튼 카드라는게 있소.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건 카드가 아니지. 안즈 님 본가에서 연락이 아직도 오지 않았소이까?』
『없습니다.』
『거 봐. 완전히 떴어. 어쩜 그럴 수 있냐. 망했네. 어쩌면 좋누.』
존댓말과 반말을 뒤섞어가며 제멋대로의 혼잣말을 중얼거린 숙희는 몸을 돌려 아까와 마찬가지로 그 많고 많은 종이뭉치들 속에서 정확히 한 장만 꺼냈다. 마주보고 앉은 내 눈으로「배치현황」이라는 글자가 거꾸로 뒤집어진 상태로 들어왔다. 네모칸에 가위표가 가득 들어찬 모습이 다음으로 이어질 이야기가 어떠할지 짐작이 갔다.
아니나 다를까.
『본가에 다시 연락을 넣도록 하시오. 전서 보내는 걸 세 번은 해보고 그 다음에 포기하던가 하고... 숙소는 당분간 해결이 어려울 것 같소. 여인 쪽은 되려 방이 남아 서로 옷방 용도로 쓰겠다며 제비뽑기를 하던데 이쪽은 사정이 안 좋아요. 여기 루은에 본가가 있는 진족들 중 사정이 생겨 집에서 다니겠다고 쓰던 방을 내놓지 않는 이상은. 다락방은 천장이 낮아 허리를 펼 수 없고. 그래도 창고보다는 사정이 나으려나. 침대를 놓을 수 있나 내 한 번 봐야겠군.』
그 옷방 용도로 쓰겠다며 여자들이 제비를 뽑은 방이 원래의 내 방이었을 것이다.
나는 서둘러 외쳤다.
『나는 여자입니다.』
『물론 그러시겠지.』
숙희는 내가 억지를 부린다고 여기는 듯하다. 아예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제국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천하제일의 가인도 원래 성별은 남자였다고 하더군요. 길게 기른 머리를 곱게 늘어뜨리고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데 그 모습을 본 사내들이 죽고 못 살았지요. 손목 한 번 잡아보는게 소원이었던 자들이 연정에 못 이겨 강에 몸을 던지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국 어느 정신 빠진 놈이 그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고 강제로 비천호에 투신, 한창 나이에 동반 자살을 당했지요. 비극적인 최후 탓에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인물입니다. 장에 나가면 그림도 팔아요. 성별은 남자인데. 루은 제일의 미인도라면서요. 그 이름은 이마리. 저도 집에 몇 점 가지고 있지요.』
『아니, 저는 진짜로 여자...』
『어허! 알아들었다니까 그러네. 마음은 어디까지나 여인이라는 거 아니오. 하지만 몸은 남정네이니 어쩌겠소. 그 동그란 얼굴에 화장을 하고 치마를 입어도 나와는 상관이 없는데 그런다고 한들 숙소는 못 옮겨드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숙희를 노려봤다. 여자라니까! 난 여자야! 여자!
『이 몸은 분명 여인...』
『됐고! 어떻게든 노력해보리다. 그러니 우기지 마소.』
이쯤되면 누군가의 저주라고 의심을 해봐야 할 것 같다. 남자애처럼 짧게 잘린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신음했다.
『다음으로는 안즈 님이 들을 수업에 관한 문제인데 말이오.』
숙희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더하여 머리통을 위아래로 벅벅 문지르며 인상을 쓰는데 그 찡그림으로 보자면 이쪽도 이야기가 영 만만치 않을 듯하여 속상했다.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