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드롭 1-22

비탈이라기보다는 벼랑에 가깝다. 물을 머금은 흙은 조그만 충격에도 쉽게 무너져 내린다. 그만큼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 마을 주민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가까이 가지 말라 주의를 단단히 주었다. 버섯을 채취한다고 기웃거렸다가 추락, 토마스 영감이 두 다리를 모조리 부러뜨린 이후로는 주위로 금줄도 둘렀다. 금줄에는 노란색의 형광도료가 칠해져 멀리서도 눈에 잘 보인다. 금줄의 의미를 모르는 산짐승이 아닌 이상 이 선을 일부러 넘어가는 일은 없다.

다리를 높게 들어 그 선을 넘으면서 카터는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다는 식으로 종아리 근육으로 힘을 주었다.
금줄 안에서는 네 명의 작업자들이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여건이 좋지 않아 속도를 내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 보통 때보다 곱절 이상으로 일의 진척이 느렸다.
『어떤 것 같습니까, 헨리.』
『시신 하나는 이제 겨우 수습했고, 나머지 하나는 각도가 좋지 않습니다. 내려가서 밧줄로 묶는 일도 장난이 아니겠어요. 송장 치우다 우리가 죽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헨리는 불만이 많았다. 사자(死者)에 대한 예의는 그렇다치고, 악당이 비명횡사를 했다한들 그건 저지른 죄의 대가다. 새가 와서 사체를 쪼아 먹는다고 측은히 여길 의무는 없다. 그래서 은연중에「이대로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다」뜻을 내비쳤다. 비바람 속에서 속절없이 썩어가는 것과 매장을 해서 땅속에서 썩어가는 것, 그 차이가 뭐란 말인가. 어차피 마을에선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공양해줄 사람도 없다.
『강요는 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치울 수 있다면 치워야 한다.
하늘에도 달린 눈이 있다, 옛날 어른들이 늘 하던 말씀이죠.』
그리고 사람에게도 달린 눈이 있다.
어렵게 끌어올린 시체로 다가가 임시로 덮어놓은 천을 치웠다.

후두부 관통상. 사출구는 안면부. 덕분에 얼굴이 전부 날아가 신원 확인이 사실상 불가능.
꽤나 근거리에서 쏘았다. 처형식으로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을 가능성도 있다.
『아이고 관리사문관님. 너무 가까이 가지 말아요.』
나이 많은 헨리가 다시 잔소리했다. 시신을 확인하는 것은 관리사문관인 그녀가 해야만 할 고유한 업무임은 분명하나 코가 닿을 정도로 근접하여 폭력적 죽음에 집착하듯 관찰하라 누가 시킨 건 절대 아니다. 어떤 각도로 봐도 그다지 유쾌해 보이는 광경이 아니었다. 헨리는 그녀가 혀를 길게 내밀어 굳어버린 피를 핥을지도 모른다는 오싹한 상상을 했다.
『카터어어.』
『되살아나서 절 공격할 것도 아닌데요, 뭐. 게다가 물어뜯을 아래턱도 안 남았고.』
『옆에서 보는 사람이 무섭단 말이오.』
『것보다 시신을 뒤집어봤음 좋겠는데요.』
『카터어어어~!!』
유류품은 나오지 않았다. 주변 수색이 쉽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자면 앞으로도 안 나올 듯하다. 그렇다고 불평할 처지도 아니다. 애시당초 소지품이 없었다기 보단 그를 살해한 무리들이 사전에 치웠을 가능성이 높다. 그 생각은 헨리도 하고 있었다.
『주머니 속엔 아무 것도 없었소. 그러지 않는게 좋... 좋! 으아, 아!』
그녀가 시신에 손을 대자 헨리가 질겁했다. 그러나 카터가 시신을 만진 건 바지주머니 안을 뒤지려는게 아니고 피부를 보기 위해서였다. 셔츠자락을 끝까지 올리고 죽은 사람의 맨가슴을 보았다. 짐작했던게 보이지 않자 이번엔 옷을 거의 찢다시피 해서 어깨에서 팔로 이어지는 곳을 보았다. 목 바로 뒤쪽도 꼼꼼하게 살폈다.
『뭘 찾는 겁니까.』
『문신이오.』
『문신?』
『바늘로 피부를 찔러 상처를 낸 뒤에 그곳으로 먹물이나 색잉크를 침투시켜 지워지지 않는 그림을 그리는 걸 문신이라고 하죠.』
『문신이 뭔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오, 카터.』
카터가 찾아낸 걸 같이 보려고 헨리가 서있던 자리에서 고개만 길게 뺐다.

남자는 문을 정면으로 마주보며 앉아 있었다.
정해진 위치는 아니다. 제자리에 놓인 의자를 일부러 거기까지 끌어다가 그곳에 앉았다.
「좋은 습성은 아닌데.」
카터는 복잡한 기분을 숨긴 채「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입 발린 인사부터 했다.
리스는 제법 짜증이 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는 사방이 꽉 막힌 밀폐된 방에서 카터가 오기를 꽤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시멘스키가 문을 닫고 나가고 난 뒤로 3시간 가량 되었다. 창문이 없어 답답한 곳이었다. 장식은 없고 흰색의 페인트만 칠해져 삭막한 느낌이었다.  
『날 여기에 두고 그만 그 사실을 잊어버린 건가 생각했어요.』
『처리할 일이 많아서요.』
『핀치는 어디에 있나요. 이곳엔 그와 같이 왔습니다.』
『잘 있어요. 본인에게는 재앙이겠지만.』
『재앙?』
『틸만 선생이 그를 도망 못 가게 포위해서 잡았거든요. 당신도 그녀를 한 번 만나봤을 겁니다. 틸만은 우리 마을의 의사입니다. 무지하게 따끔하고 아픈 주사를 놓지요.』
『오.』
그거 참 안타까운 일이라며 리스의 눈썹이 아래로 축 처졌다.
언제는 펄펄 뛰며「죽일 테다, 본때를 보여줄 테다, 어디 한 번 맛 좀 봐라」이랬던 사람치고는 반응이 재밌었다. 손바닥을 뒤집어 지금은「불쌍하니까 우리 강아지 너무 괴롭히지 마세요」라고 하고 있으니.
각설하고 책상 앞에 앉았다. 원래의 자리다. 따라서 맘대로 의자를 옮긴 리스와는 거리가 떨어졌다. 정상적인 건 아니었으나... 카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관없겠지.

『먼저 웃옷을 벗어보겠습니까.』
『방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미스?』
『미스라고 안 부르겠다고 했잖아요.』
『그러고보니 그런 말을 했었죠. 놀라서 순간적으로 잊어버렸습니다. 카터.』
『바지까지는 벗지 않아도 됩니다. 윗옷을 벗고 한 바퀴 제자리에서 도십시오.』

핀치는 사전에 이런 부분을 예상했던 것 같다.「혓바닥을 내밀라고 하면 내밀고, 엎드리라고 하면 엎드려요. 엉덩이로 이름을 쓰라고 하면 쓰십시오. 싫다고 거부하지 말고, 자존심을 내세워 거부하지 마십시오. 폭력을 행사하면 절대 안 됩니다. 거기서 일을 저지르면 당신 죽고 저도 죽는 거에요.」주의를 주었던 것이다. 그녀가 이렇게 해봐라 시키는 건 모두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고, 카터는 공적인 일에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는다 - 그러니 믿어봐라, 그것이 핀치의 주장이었다.
뭐, 믿는다. 믿어주겠다.
그러나 웃통을 훌렁 벗어보라는 요구에 선뜻 응하는 건 쉽지 않았다.
리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게 나중에 문제가 되는 건 아니겠지요? 왜냐하면 당신은 여성이고, 여기는 나와 당신 둘밖에 없고, 행여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그럼 나중에 성희롱으로 고발을 하시던지. 벗어요.』
『그러죠.』

리스의 몸에는 체모가 많았다 - 어라, 이게 아니지.
두 눈을 부릅뜬 카터는 다시 집중하고 매의 시각으로 남자의 살갗을 살폈다.
꽤 거칠게 놀았을 것 같은데 생각 외로 흉터가 적다. 없지는 않다. 그러나 자국이 흐리다. 관리를 잘 했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상처가 그렇게 심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제자리 돌기를 하라는 뜻으로 손가락을 돌렸다. 리스는 순순히 그녀의 요구에 응했다.
『문신은 없군요.』
『오호라, 문신을 찾는 거였습니까? 사실 있습니다. 그런데 굉장히 사적이고 은밀한 곳에 있지요. 그래서 보여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요구하신다면 기꺼이...』
『헤?』
『농담입니다.』
『이봐욧!』
그게 진짠 줄 알았냐 이런 의미로 혓바닥을 베 내민 리스가 고개를 돌려 벽을 쳐다봤다.

Posted by 미야

2012/09/19 15:00 2012/09/19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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