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드롭 1-21

서로 묻고 싶은 것도 많고, 듣고 싶은 것도 많다보니 오히려 내용이 실타래가 엉켜 대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생각만 많았다. 그것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종류들이었다. 결국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이건 아니다 싶자 핀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거울을 생전 처음 보는 원숭이가 자신의 모습을 향해 무작정 땅콩을 던져대고 있다 - 핀치는 그렇게 비유했다. 그러니까 서로의 모습을 흘끔거린다고 당장 뾰족한 수가 생기는 건 아니라는 거였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하죠. 저는 다시 침대로 가겠습니다.』
『또 졸립니까?』
『아뇨. 허리가 많이 아픕니다.』
찡그린 표정이나 부자연스러운 걸음으로 유추해 보자면 리스를 피해 도망친 것은 아니다. 그럴 의도가 아주 없다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 허리 통증이 심한 건 어디까지나 사실이었다. 에고고 신음하며 드러눕는데 엉덩이를 뒤로 빼는 자세가 디스크 환자를 닮았다.
『리스 씨도 편하게 계세요. 소파에 누워도 됩니다. 쿠션도 마음대로 쓰세요.』

그래봤자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막막했다. 정보가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다. 이곳 세계는 리스에겐 너무 낯설었다. 전기로 작동되는 조명이 없어 밖이나 안이나 구분 없이 어둡다. 소음도 없어 적막하다.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자료를 검색하려고 해도 예전처럼 사용할 수 있는 도구 자체가 없다. 컴퓨터 단말기는커녕 핀치의 집은 24시간 온수를 공급해주는 일반 형태의 홈-시스템조차 구비가 안 되어 있었다. 기본적으로 난방은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불을 때워 해결 - 원시적이다.
거실에는「아날로그」로 통칭되는, 그러니까 전통 방식으로 종이에 잉크를 사용하여 글자를 인쇄된 책들이 소량 있었다. 몇 권을 꺼내어 펼쳐봤지만 당장 도움이 될 종류들이 아니었다. 시와 문학 방면을 다룬 교양서적이 다수다. 글을 쓴 작가도 태반이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원래 리스는 원래 소설 종류를 싫어했다.

『있잖아요... 미스터 리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건 어떻습니까.』
웅크리고 벽을 향해 돌아누웠지만 잠이 든 것은 아니었나 보다. 쿠션을 껴안고 있지도 않은 고양이의 등가죽을 쓰다듬는 흉내를 내고 있는데 핀치가 고맙게도 다시 말을 걸어왔다.
『그러려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핀치. 우리가 사용했던 탈출용 해치는 안에서는 열리지만 밖에서는 절대로 열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어요. 홧김에 폭약을 터뜨려도 어지간하지 않은 이상 안 망가질 겁니다. 그 뚜껑은 우주선을 만드는 재질과 동일한 것으로 만들어졌어요. 매우 단단하죠.』
『다른 출입구는요.』
『글쎄요. 찾아보면 어딘가에 있겠죠. 일단 한군데 압니다. 어쩌다 강제 공기 배출구가 오작동을 일으키기를 기다리며 그 위에 무작정 서있으면 될 겁니다. 100년 안에는 아마도 불가능할 것 같고, 태양이 수명을 마치고 적색왜성으로 변한 즈음에는 가능할지도.』
옆으로 누운 자세에서 핀치의 머리가 베개에서 살짝 들렸다.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지금 그거, 농담한 거예요?』
『썰렁했나요? 사람들이 가끔, 사실은 자주 그럽디다. 제가 하는 농담은 재미없다고.』
등만 봐서는 알 수 없다. 그래도 리스는 핀치가 지금 입 꼬리를 구부리며 웃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간격이 살짝 어긋났다.

『그렇다면 지금쯤 절 원망하고 있겠군요.』
저런. 웃고 있던게 아니고 그 반대였나.
『글쎄요. 어쨌든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해 안달이 나거나 하진 않았어요.』
『미안해요.』
『안달이 나지 않았다니까요, 핀치.』

동녘이 밝아올 무렵이 되자 침대에서 일어난 핀치는 우물을 길어 몸을 씻기 시작했다. 데운 물은 사치라며 쓰지 않았다. 죽겠다, 죽겠다, 이러다 정말 죽겠다 혼잣말하며 젖은 수건으로 요령껏 몸을 문지르는데「태초부터 게을러빠지고 사치스러운」노아 족속으로 착각한게 바보스러웠다고 후회할 지경이었다. 바가지에 물을 떠놓고 찰싹찰싹 소리를 내며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에 물을 끼얹는다. 팔과 다리는 헝겊으로 닦는다. 다시 바가지로 시리도록 차가운 물을 소량 퍼올려 머리를 숙이고 위에서 살살 붓는다. 손과 발은 상대적으로 정성껏 문질러 때를 벗겼는데 사용하는 비누의 양이 워낙에 적은지라 보는 입장에선 성이 차질 않았다.
엄살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이 겪는 물자부족 사태는 상당히 심각한 수준인 듯했다. 칫솔질을 하면서도 치약 없이 맹물만 사용했다.
요령껏 훔쳐보며 욕실 입구를 지키고 서있던 리스는 한마디 툭 던졌다.
『제가 알던 빈민촌 생활도 이것보단 풍족했겠는데요.』
『과거와 지금을 비교해봤자 소용없죠. 익숙해지면 그럭저럭 견딜 만할 겁니다.』
파란색 말고 보라색 칫솔이 그가 사용할 물건이라 가르쳐주고 핀치가 욕실을 비워주었다.
리스는 간단하게 세수와 양치질만 했다.

『어차피 카터가 사건 조사를 위해 우리를 부를 겁니다.』
핀치는 짧은 빗으로 머리를 다듬으며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여기서 가슴 졸이며 기다리느니 일찍 가서 매를 얻어맞는게 차라리 마음 편할 듯하군요. 그리고 당신이 입을 새 옷도 얻어 보고요. 제 옷은 기장이 짧아서 안 되겠어요.』
『제가 입고 있던 예전 옷은요.』
『그건 잠옷 종류잖아요?』
『아닌데요.』
『지금 기준으론 평상복처럼 생기진 않았어요.』

그들은 얼마 걷지도 못했다. 인기척에 고개를 들자 시멘스키가 굳은 표정으로 잰걸음을 하며 접근해왔다. 피곤에 찌든 마을 경비병은 핀치 일행을 발견하자 번쩍 팔을 들었는데 반가워서 하는 동작은 아니고 그보단 다른 복잡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적이 아님 - 그러니 공격하지 마시오 - 쉬지도 못한 채 열심히 일하는 내가 불쌍하지도 않소? - 나는 어디까지나 공무집행 중 - 핀치를 보호하듯 앞으로 나선 리스는 공손한 태도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해봤자 시멘스키는 아직 이방인에 불과한 리스에겐 시선조차 주려 하지 않았다.

『제가 모시러 올 때까지 집에 계셨어야죠! 핀치.』
『과잉 반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시멘스키.』
『과연 그럴까요.』
사살된 스틸스를 제외한 나머지 움무들은 걸음아 나 살려라 멀리 달아났다.
카터는 일부러 그들을 쫓지 않았다.
그런데 추가로 시체가 더 나왔다.
『어째서요?』
『걷지 못하는 자기 동료를 등뒤에서 총으로 쐈어요. 그리고 그 시체를 무슨 쓰레기처럼 계곡 아래로 던져놨더군요. 끌어올리는게 힘들어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요.』
『동료를 헤쳤다고? 그건 일반적인게 아닌데... 그렇지요?』
『전혀요. 움무들이 죄다 쓰레기라고 해도 자기 동료를 그렇게 버리는 건 처음 봅니다.』
거기까지 말한 시멘스키는 강제 연행을 하는 요령으로 핀치의 팔을 단단히 붙들어 맸다.

『잠깐!』
핀치와 팔짱을 낀 시멘스키를 향해 리스가 항의했다.
『시끄럽소. 공무집행 중이오.』
대꾸하는 경비병의 말투는 퉁명스러웠다.

Posted by 미야

2012/09/18 16:56 2012/09/18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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