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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저는 뭘 하면 되는 거죠?』
『기억력이 나쁘구나. 몇 번이나 말 했잖아. 너는 소공자님의 놀이상대야.』
아니, 그건 나도 여러 번 들어 아는데 -
목 아래까지 솟구친 불만을 가까스로 씹어 삼켰다. 이건 질문하는 쪽의 기억력이 문제가 아니라 반복하여 질문하고 있음에도 제대로 설명을 해주지 않는 쪽이 문제다. 상대방은 인정을 하지 않겠지만, 분명 문제다. 이곳에서 일하는 하녀와 하인들은 설명에 인색했다.

신경질적으로 변하기 일보직전이었지만 속으로 양을 헤아리며 언제나처럼 표정 관리를 했다.
바보처럼. 멍청하게. 눈에 힘을 줘서는 안 된다.
시화는 정신보건의 테이어 박사의 조언을 여태껏 잊지 않았다. 분노로 이성이 흔들릴 적마다 어둡고 좁은 방안에 갇힌 양 100마리를 하나씩 헤아리며 푸른 풀밭으로 보내버리는 거다. 누구는 이 방법이 잠이 오지 않을 적에 써먹는 거라며 테이어 박사의 자격증의 진위를 의심했지만 어쨌든 화를 가라앉히는데 효과가 있었다.

『제 머리가 나빠서요. 좀 가르쳐주세요. 소공자님과 제가 뭘 하면서 놀지요?』
『글쎄다. 나야 모르지. 평상시에 하던 대로 하면 되지 않을까?』

이 씨부랄 놈아. 알면서 그러는 거니, 아님 몰라서 나한테 진짜 그러는 거니.
억지웃음을 짓는 뺨이 실룩 경련을 일으키려 했다.

가난한 분락지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은 노는 법을 모른다. 강아지들도 새끼 적에는 자기 꼬리를 물며 신나게 노는 법인데 어린이들은 개보다 사정이 나빴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물을 길고, 잡초를 뽑고, 설거지를 하고, 땔감을 줍고, 닭에게 모이를 줘야 한다. 틈틈이 집안 청소를 하고, 아직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한다.
그나마 어른들이 하지 말라고 만류했던 건 바느질 정도다. 손가락이 너덜너덜하게 변하기 이전에 옷감부터 피투성이가 되어버릴 테니 하지 말라고 한 거다.
바느질 빼고는 안 해본 일이 없다. 시화는 높은 언덕에 올라 자신이 살던 마을을 내려다볼 적마다 노동교화형에 처해진 정치범 죄수들을 위한 집단경영 농장을 떠올리곤 했다.

이런 마당에 평소처럼 하라고 해봤자...

『거기서 뭘 하고 있지.』
『콩을 심고 있습니다.』
『정원 한복판을 파헤치고 거기다 콩을 심는다고?』
『여기는 볕도 잘 들고 흙도 좋아 아주 잘 자랄 것 같아서요.』
『으아아아...!!』
정원사가 기절했다.

모르겠다. 공작가의 두 아들만 따로 나와서 생활하는 저택은 본가와는 다르게 형식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편이었고, 정원은 주인의 관심을 잃어 생기를 잃은 지 오래였다. 지저분한 쓰레기장이 되어선 안 되었기에 일꾼들이 형식적으로 나뭇가지를 치고 풀을 베었다. 그 황량함 가운데 소박하고 자그마한 콩밭이 더해지는 것뿐이다. 그 정도로는 크게 문제될 거 같지 않아서 과감히 소매를 걷어 올렸는데 - 정원사의 나라 잃은 얼굴을 봐서는 애초 크게 문제되지 않을 거라는 판단 자체가 잘못된 거 같기는 하다.
시화는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렸다.

『어르신이 마침 안 계셔서 다행이지. 아님 경을 쳤어, 경을! 도대체 콩은 또 어디서 훔쳤어!』
『훔치지 않았어요. 주방에서 얻은 거예요. 앞치마를 하고 있던 아주머니에게 배가 고프다고 했더니 아직 점심식사 때까진 멀었으니 일단 이거라도 먹고 있으라면서 한줌 덜어 제 호주머니 속에...』
『뭐?! 그럼 여태껏 땅을 헤집고 구운 콩을 심고 있었던 게냐?!』
정원사는 울다가 웃었다. 그리고 엉덩이에 털이 날 걸 각오하곤 다시 가슴을 치며 울었다.
『이런 머저리를 봤나! 구운 콩에서 싹이 날 리가 없잖아!』
결국 주먹으로 머리를 맞았다.

예의 누월초의 약효 탓에 반쯤 감긴 눈을 하고 있던 소공자 일로이는 소란스런 정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창문에서 한 걸음 떨어졌다.
신이여. 드디어 정원사가 바보를 퇴치했다.

『의외로 부지런한 성격이네요. 여기까지 와서 밭을 만들려고 하다니. 조금 있으면 저 멍청한 놈이 병아리를 키우겠다고 소동을 피울지도 모르겠군요.』
『......』
『오, 도망간다. 머리를 감싸고 달리는 모습이 제법인데? 옳지, 옳지. 잘 한다.』
눈밭에서 펄쩍펄쩍 뛰는 새끼 강아지를 구경하는 식이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걸 보고 있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송아지만한 식인 늑대를 쇠꼬챙이로 찔러 죽이기 전에도 기체릿은 지금처럼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디서 반푼이 바보를 데려와서.』
『반박은 못 하겠네요, 듣자하니 아명이 머저리래요.』
『도대체 어디서 저런 걸 찾아낸 거야.』
『보만 지역으로 제대로 죽지 않은 것들이 갑자기 나타났죠. 그때 몰살당할 위기에 처한 마을에서 제 혼자 어슬렁거리는 걸 발견, 리어 대장님이 주워서 옆구리에 끼고 가져왔습니다. 보만이 어딘고 하면... 어디 보자. 아만스 셋목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터날 산맥으로 가로막힌 지역입니다. 맨우드 분지령과 거진 경계지점이에요. 거기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면 펜타후스 강이 나오고...』
『됐어, 거기까지.』
서둘러 말꼬리를 잘랐다. 아니면 지리멸렬한 지리 강의가 이어졌을 거다.

『보만이 어딘지 짐작이 가십니까, 소공자님?』
『보만이 어디에 붙었는지 따위엔 관심 없다. 너는 그닥 중요하지 않은 정보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버릇이 있어, 기체릿.』
바꿔 말하면 정작 꼭 필요한 정보는 아무렇지도 않게 은근슬쩍 흘려버린다는 얘기다.

『제대로 죽지 않은 것들?』
민간에서는 통칭 마수라고 부르는 종류의 것들이다.
먼 옛날부터 내려온 이름은 고곽(故槨). 풀어쓰자면 「오래된 궤」다. 정확하게는 낡은 관에서 튀어나온 정체불명의 것들을 일컫는다. 이렇게 말하면 죽은 자나 짐승이 불결한 힘으로 무덤에서 되살아난 것들만 떠올리는데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관련 지식이 부족한 탓에 사람들은 고생종과 마수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다. 짝짓기를 통해 자손번식이 가능하면 고생종, 그렇지 않으면 마수라고 단순히 구분하는 경우도 있지만 괴물을 면전에 두고 「당신은 새끼를 낳습니까?」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건 드래곤과 같은 고생종이던 마수이던, 아무 때나 나타나는 종류는 아니라는 점이다.

『곰이나 대형 서격호 같은 맹수를 착각한 건 아니고?』
『곰은 일반 사냥꾼들도 제법 잘 잡습니다. 섬멸 기사단이 직접 나설 까닭이 없죠.』
놀라 자빠질 내용이었음에도 기체릿은 강으로 기다리던 연어가 돌아왔다는 투로 한가롭게 얘기했다.
매번 이런 식이다. 말하는 내용과 그 얼굴 표정의 괴리감.
『제기랄, 그게 진짜면 심각한 상황이잖아.』
『심각하죠.』
『심각하다면서 실실 웃나.』
『어쩌겠습니까. 저는 원래 이런 놈입니다, 소공자.』
일로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러니까 섬멸 기사단이 미친놈 기사단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거다.

『새삼 리어 기사단장이 존경스럽군. 저런 미친놈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끌고 다니다니. 아무튼.』
소공자는 두 팔을 활짝 펼쳐 허공에 고운 모래를 뿌리는 식의 동작을 해보였다.
섬멸 기사단에서는 그 동작을 가리켜 「창문을 활짝 연다」 라고 한다. 선대 위니악 공작의 독특한 버릇이었는데 맨날 보고 자란 탓인지 그게 손주에게까지 대물림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소공자의 형인 대공자 젬버른도 똑같은 손동작을 한다. 의미는 「잠깐 닥쳐봐, 내가 생각할 게 좀 있어」 이때 누군가 실수로 숨소리라도 내면 후환이 쬐~끔 두려워진다.

갑작스런 괴수의 등장. 습격으로 전멸당할 위기에 처한 마을. 고아가 된 아이.
분명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기체릿은 이 비극을 입에 담으면서 살인자가 남긴 한 방울의 핏자국처럼 묘한 내용 한 가지를 흘렸다.
『저 혼자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습격을 당한 마을은 분명 아수라장이었을 것이다.
개죽음 당할 것이 분명하기에 마수와 맞서 싸운다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었을 터.
마을 밖으로 멀리 도망가거나, 집안으로 숨거나, 아니면 보다 안전한 대피소를 찾아 피신했을 것이다.
이때 판자로 지은 움막에 숨는 것보다는 돌로 쌓아 만든 신전까지 도망치는 편이 생존율이 더 높다.
노인과 아이, 여자들은 망루의 종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아무런 망설임 없이 신전을 향해 뛰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어린아이가 부모와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가재도구고 뭐고 전부 버리고 도망 나온 부모들은 애들 손 또한 쉽게 놓아버린다. 뭐, 여기까지만 보자면 큰일이지만 어차피 가던 방향은 같다. 목적지인 대피소에 도착하고 난 뒤에 눈물의 이산가족 상봉을 하는 경우는 제법 흔해서 애고 어른이고 일단 한 방향으로 달리고 본다.

그런데.

『어째서 대피소로 가지 않은 거지.』
정원의 흙을 파헤치고 구운 콩을 심을 정도로 멍청하니까.
『부모는 죽었다며.』
피신처를 구해 신전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몰살당했다.
『그 와중에 저 혼자 어슬렁?』
대피소로 들어가지 않은 아이는 고곽에게 잡혀 산채로 뜯어 먹히지 않고 살아 남았다.
『이게 가능한 이야긴가.』
기체릿은 이렇다 할 얘기를 이어가는 대신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Posted by 미야

2017/11/06 15:38 2017/11/06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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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잘못된 기억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이 확실하나 단편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명동에서 전차를 탄 기억이다.

일곱 살 정도 되었을 무렵이고 - 하지만 시기상 그 당시에 종로의 전차는 모두 철거되었다. 서울시내 전차를 모두 뜯어낸 건 1968년으로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다.
마주앉은 형식으로 배치된 나무의자를 기억한다.
그런데 이건 흑백과도 같은 기억이라 전차의 색이 붉었는지, 아님 초록이었는지 구분을 못 한다.
부모님 말씀으로는 어렸을 적에 박물관 같은 곳에 갔다가 전시된 사진 자료를 보고 강렬하게 인상에 남아 착각을 한 것이라고 한다.
주변 풍경은 건물이 신세계백화점만 높고 나머지는 허허벌판이나 다를 바 없었다.

다른 하나는 1초 정도만 재생되는 장면인데
바닥은 아주 푸르고 내 발이 아닌 하얀 발이 풀밭을 배경으로 가지런히 보인다.
그 발의 모양새가 똑바로 서서 내려다보는 각도가 아니라서 그간 매우 의아하게 여겼는데
컨저링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깨달음이 왔다.
공중에 매달려 있는 상태에서 발을 보고 있는 거다. 아마도 목을 매달은 듯.
이 기억은 매우 짧은데다 총천연색이다. 죽기 직전이라면 다리가 흔들렸을 것 같은데 미동이 없다.
역시 이상한 기억.
발만 보이기 때문에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파악이 안 된다. 나와는 달리 가늘고 뼈마디가 도드라진 발이다.

일주일 전 먹은 저녁 반찬도 기억을 못 하면서 왜 이런 건 남는 건지?

Posted by 미야

2017/11/01 13:24 2017/11/01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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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불식 중 도살장으로 끌려간다는 표현을 떠올렸다.
「그쪽」 세계에서는 부족한 원자재와 환경 문제로 도축된 동물의 고기를 더 이상 식용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돼지와 닭의 캐리커처 그림이 붙은 고기가 정기적으로 식탁에 올라왔지만 죄다 공장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들이었고 혀로 느껴지는 맛과는 달리 돼지나 닭의 살코기는 손톱만치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된 연유에서인지 「고기로 만들어지기 위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가축」 의 이미지는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동물의 그림이 그려진 식료품 스티커를 포장지에서 떼어낼 적마다 목덜미로 소름이 돋곤 했다.


발아래서 파삭, 도자기 파편이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빗자루로 깨끗하게 쓸어낸 건 아니니 조심한다고 해도 실수로 작은 조각을 밟은 모양이다.
아이는 들숨처럼 신음했다.
그래도 상처가 생겼을 발바닥을 보겠다며 신고 있던 신발을 뒤집어 까지는 않았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내려 발아래를 흘끔 쳐다보았을 뿐, 「아이고, 내 발!」 이러고 뛰지도 않았다.
머저리라는 아명과는 달리 귀족 앞에서 해야 할 짓과 하지 말아야할 짓을 그만하면 잘 구분하고 있었다.
그만하면 출발이 썩 좋다. 
기체릿이 입구 근처에서 서성이지만 말고 안으로 더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인사해라. 소공자님이시다.』
『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응?』

양팔로 가슴을 감싼 채 한쪽 무릎을 살짝 구부리는 인사법은 신관들의 예법이다.
시골뜨기 촌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보고 주워들은 것이 그리 많을 리 없으니 나름 열심히 궁리하여 높으신 분들이라 생각한 신관들의 동작을 따라한 모양이다.
이때 구부려야 할 무릎이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이어야 한다는 문제는 잠시 옆으로 미뤄두고 –
지금 뭐라고.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기체릿의 얼굴이 부풀어 올랐다.
『푸흐흣!』
서둘러 손바닥을 사용해 칠칠치 못한 당나귀 콧소리가 새어나오는 입을 틀어막았지만 소리를 내어 웃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아이의 귀에도 웃음소리는 잘 들렸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졌다. 웃기는 짓을 했다는 자각은 있었다.
어쨌든 변명하자면 진부한 역사극 따윈 취향이 아니었고, 따라서 아는 표현이라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와 「통촉하여 주시옵소서」가 전부였다. 전자는 감사합니다, 이고 후자는 미안합니다, 의 의미이다 –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 모르겠다. 후회한들 뱉은 말은 도로 주워 담을 수 없다. 애당초 망했다고 봐야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공자는 이 희극 같은 상황 앞에서도 웃지 않았다.
그래도 어처구니없어하는 건 쉽게 감춰지지가 않아서 답지 않게 입이 약간 헤 벌어졌다.

『내게 새로운 놀이친구가 생길 거라고 들었는데 알고 봤더니 재롱을 떨 광대를 얻게 되었군.』
『......』
『아니면 눈이 옹이구멍이던지. 네 눈엔 내가 머리 위로 왕관을 쓰고 있는 걸로 보이니? 보인다면 한 번 말해봐. 내 왕관의 색과 모양이 어떠한지.』
『저어.』
『장난으로라도 왕이 아닌 자에게 성은이 망극하다는 표현을 사용하면 반도의 무리다. 주의해라.』
『반도?』
『역모자, 반역자 말이다.』
야단을 맞은 아이는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더니 제 딴에는 제법 심각해져서 진지한 자세로 사죄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어쩔 수 없었다. 아는 표현은 딱 두 가지밖에 없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리고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죄송하다는 의미로 그리 말했더니 이번에도 기사가 옆에서 푸흐흣, 푸흐흣! 하고 듣기 싫은 숨 참는 소리를 냈다.

진짜지 전부 다 때려죽이고 싶다.
일로이 모젠 위니악은 무익하게 천장을 쳐다봤다가 다시 고개를 숙여 구두 앞코를 응시했다.
발가락에 힘을 주자 엄지발가락 즈음의 부드러운 구두 가죽이 발가락 모양으로 봉긋 솟아올랐다. 발가락을 도로하자 앞코가 도로 주저앉았다.
한탄할 일이다. 소공자 일로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겨우 이런 일 뿐이다. 구두 안에서 발가락이나 꿈질거리는 것, 손톱이 박히도록 주먹을 꽉 쥐는 것, 그 정도다. 멍청한 광대와 당나귀 소리를 내는 기사를 면전에서 치워버리는 건 그의 능력 밖이다. 섬멸 기사단의 일원인 기체릿은 아버지인 위니악 공작의 말만 들었고 저택의 사용인들은 형인 위니악 대공자의 명령을 따랐다.

이를 악물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빈말으로라도 그가 신고 있는 구두보다 더 가치가 없을 아이를 노려봤다.

체구가 작았다. 못 먹어서 그럴 게다. 입술의 색이 붉지 않고 창백한 것이 가벼운 영양실조 상태로 추측되었다. 짧게 자른 갈색 머리카락은 푸석푸석했고 피부는 건조했다. 손톱이나 발톱은 굳이 보지 않아도 어떤 상태일지 짐작이 갔다. 살집이 없으니 근육 또한 붙지 않았고... 발길질하면 동강이 나버릴 것 같은 뼈가 얇게 들러붙은 한 장짜리 피부 위로 도드라졌다. 앙상한 몸은 겨울의 바람에 얼어붙은 나뭇가지를 연상시켰고, 그리고 감히 예언하건데 겨울잠에 빠진 들판엔 영원히 봄이 오지 않을 것이다.
그냥 한 대 치기만 하면 된다. 겨우 그 정도로 - 아이의 등뼈는 박살이 날 테니.

살기를 담아 아이를 쏘아보는 일로이를 앞에 두고 기체릿의 눈 또한 곱게 휘어졌다.
죽음을 친절한 이웃사촌이라 착각하는 저 섬멸의 기사는 소공자가 저 작은 머릿속에서 뭘 생각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아니면 익숙한 냄새를 맡았을지도 모르겠다.
섬멸의 기사는 살기를 갗 구워낸 빵 냄새처럼 여기곤 했으니까.
그래서 기분이 좋다며 싱글벙글거렸다.

우리에게 더 많은 시체를.
그리고 신이여, 그 곱절의 죄책감을 우리에게 더하소서.

『무슨 꽃을 좋아하지.』
『네?』
갑자기 생뚱맞게 웬 꽃?
눈빛이 날카로운 도련님이 그리 멀지 않을 미래에 있을, 누군가의 장례식장에 쓰일 꽃의 종류를 물었다는 걸 알아차릴 리 없다.
갈팡질팡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짐작가는게 하나 있기는 했는데 그게 과연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언젠가 나란히 앉은 분들 앞에서 좋아하는 대중음악에 대한 질문을 듣고 땀을 한 바가지나 흘렸던 기억이 있다. 아니다, 대중음악이 아니고 좋아하는 작가에 대한 거였다. 그래서 대충 이거다 싶은 작가의 이름을 두 서넛 주워 담고, 책의 줄거리랍시고 한참을 횡설수설한 끝에, 주눅이 잔뜩 들어 독서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면접관은 자신이 판단하기에도 그럴 것 같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더듬거리며 입에 올렸던 소설의 줄거리는 영화 줄거리였고, 작가는 예술영화감독이었다.
「덕분에 창피한 꼴을 당했지. 최악의 취업 면접이었어.」
지금에 이르러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잘 생각한 뒤에 무난하게 답변했다.
『분홍색 꽃이요. 종류는 가리지 않아요. 꽃들은 전부 예쁘고... 저어.』
『분홍색 꽃이라. 기억해두지.』
무도회장도 아닌 무덤을 분홍색 꽃으로 장식하는 건 악취미다. 그래도 고인의 희망이라는데 제가 어쩔 건가. 풍성하고 화려하게 장미로 – 분홍색으로 준비해서 미르나무로 짠 관 위로 던져버리면 될 터.
조촐한 장례식을 상상하자 언짢았던 기분이 조금은 풀리려 했다.

여전히 영문을 알 길 없는 아이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저기요?』
『달리 할 말이라도?』
『그게 전부인가요? 왜 분홍색 꽃이 좋은지는 안 물어보세요? 아니면 분홍색 꽃의 종류를 읊어 보라던가...』
『물어야 하나.』
『아뇨.』
답답할 정도로 아까부터 대화가 전혀 되고 있지 않다.

아니, 따지고 보면 첫 단추부터 잘못 꿰었다. 그들은 서로 통성명조차 하지 않았다.
글쎄다. 이 몸이 평민이고 저쪽이 신분 높으신 귀족이라 그런 건지도.
대입하여 상상하면 이해 안 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먼 옛날, 아주 먼 옛날... 관리과장이나 본부장 이런 사람들도 밑바닥을 구르는 시설 근로자의 이름이 뭔지 궁금해 하는 법이 없었다. 호칭은 늘 거기! 였다. 빨리 와! 이기도 했다. 위아래가 붙은 회색의 작업복 한 가운데로 플라스틸로 제작된 명찰이 달려 있었어도 아무도 그 명찰에 적혀진 이름 석 자를 소리 내어 불러주지 않았다.

갑자기 코가 시큰해졌다.
「내 이름.」
류 시화.

그런데 역으로 얘기하자면 류 시화 또한 본부장의 이름을 기억 못했다. 뚱뚱하고, 머리숱 적고, 기름진 피부에 배가 나온 마흔 중반의 아저씨 – 본부장님 – 그 또한 규칙에 따라 출입허가증을 겸한 플라스틸 명찰을 걸고 있었지만... 딱 거기까지다. 류 시화의 명찰이 흰색이었다면 본부장의 출입허가증 색은 파란색이었다. 한 번 죽고 살아난 오늘에 이르러 본부장에 대한 기억은 기껏해야 명찰이 파란색이라는 것 정도다. 멱살이 잡혀 폭행까지 당해 제법 원한이 깊었음에도 떠오르는 거라고는 명찰의 빛깔이 전부... 본부장의 이름은 뭐였을까.

「나라는 인간은 어지간히 변화가 없군. 지금도 저 소년의 이름이 무엇인지조차 궁금하지가 않으니.」
깨닫고 나니 만사가 시큰둥해졌다.

Posted by 미야

2017/10/27 13:45 2017/10/27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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