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저는 뭘 하면 되는 거죠?』
『기억력이 나쁘구나. 몇 번이나 말 했잖아. 너는 소공자님의 놀이상대야.』
아니, 그건 나도 여러 번 들어 아는데 -
목 아래까지 솟구친 불만을 가까스로 씹어 삼켰다. 이건 질문하는 쪽의 기억력이 문제가 아니라 반복하여 질문하고 있음에도 제대로 설명을 해주지 않는 쪽이 문제다. 상대방은 인정을 하지 않겠지만, 분명 문제다. 이곳에서 일하는 하녀와 하인들은 설명에 인색했다.
신경질적으로 변하기 일보직전이었지만 속으로 양을 헤아리며 언제나처럼 표정 관리를 했다.
바보처럼. 멍청하게. 눈에 힘을 줘서는 안 된다.
시화는 정신보건의 테이어 박사의 조언을 여태껏 잊지 않았다. 분노로 이성이 흔들릴 적마다 어둡고 좁은 방안에 갇힌 양 100마리를 하나씩 헤아리며 푸른 풀밭으로 보내버리는 거다. 누구는 이 방법이 잠이 오지 않을 적에 써먹는 거라며 테이어 박사의 자격증의 진위를 의심했지만 어쨌든 화를 가라앉히는데 효과가 있었다.
『제 머리가 나빠서요. 좀 가르쳐주세요. 소공자님과 제가 뭘 하면서 놀지요?』
『글쎄다. 나야 모르지. 평상시에 하던 대로 하면 되지 않을까?』
이 씨부랄 놈아. 알면서 그러는 거니, 아님 몰라서 나한테 진짜 그러는 거니.
억지웃음을 짓는 뺨이 실룩 경련을 일으키려 했다.
가난한 분락지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은 노는 법을 모른다. 강아지들도 새끼 적에는 자기 꼬리를 물며 신나게 노는 법인데 어린이들은 개보다 사정이 나빴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물을 길고, 잡초를 뽑고, 설거지를 하고, 땔감을 줍고, 닭에게 모이를 줘야 한다. 틈틈이 집안 청소를 하고, 아직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한다.
그나마 어른들이 하지 말라고 만류했던 건 바느질 정도다. 손가락이 너덜너덜하게 변하기 이전에 옷감부터 피투성이가 되어버릴 테니 하지 말라고 한 거다.
바느질 빼고는 안 해본 일이 없다. 시화는 높은 언덕에 올라 자신이 살던 마을을 내려다볼 적마다 노동교화형에 처해진 정치범 죄수들을 위한 집단경영 농장을 떠올리곤 했다.
이런 마당에 평소처럼 하라고 해봤자...
『거기서 뭘 하고 있지.』
『콩을 심고 있습니다.』
『정원 한복판을 파헤치고 거기다 콩을 심는다고?』
『여기는 볕도 잘 들고 흙도 좋아 아주 잘 자랄 것 같아서요.』
『으아아아...!!』
정원사가 기절했다.
모르겠다. 공작가의 두 아들만 따로 나와서 생활하는 저택은 본가와는 다르게 형식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편이었고, 정원은 주인의 관심을 잃어 생기를 잃은 지 오래였다. 지저분한 쓰레기장이 되어선 안 되었기에 일꾼들이 형식적으로 나뭇가지를 치고 풀을 베었다. 그 황량함 가운데 소박하고 자그마한 콩밭이 더해지는 것뿐이다. 그 정도로는 크게 문제될 거 같지 않아서 과감히 소매를 걷어 올렸는데 - 정원사의 나라 잃은 얼굴을 봐서는 애초 크게 문제되지 않을 거라는 판단 자체가 잘못된 거 같기는 하다.
시화는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렸다.
『어르신이 마침 안 계셔서 다행이지. 아님 경을 쳤어, 경을! 도대체 콩은 또 어디서 훔쳤어!』
『훔치지 않았어요. 주방에서 얻은 거예요. 앞치마를 하고 있던 아주머니에게 배가 고프다고 했더니 아직 점심식사 때까진 멀었으니 일단 이거라도 먹고 있으라면서 한줌 덜어 제 호주머니 속에...』
『뭐?! 그럼 여태껏 땅을 헤집고 구운 콩을 심고 있었던 게냐?!』
정원사는 울다가 웃었다. 그리고 엉덩이에 털이 날 걸 각오하곤 다시 가슴을 치며 울었다.
『이런 머저리를 봤나! 구운 콩에서 싹이 날 리가 없잖아!』
결국 주먹으로 머리를 맞았다.
예의 누월초의 약효 탓에 반쯤 감긴 눈을 하고 있던 소공자 일로이는 소란스런 정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창문에서 한 걸음 떨어졌다.
신이여. 드디어 정원사가 바보를 퇴치했다.
『의외로 부지런한 성격이네요. 여기까지 와서 밭을 만들려고 하다니. 조금 있으면 저 멍청한 놈이 병아리를 키우겠다고 소동을 피울지도 모르겠군요.』
『......』
『오, 도망간다. 머리를 감싸고 달리는 모습이 제법인데? 옳지, 옳지. 잘 한다.』
눈밭에서 펄쩍펄쩍 뛰는 새끼 강아지를 구경하는 식이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걸 보고 있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송아지만한 식인 늑대를 쇠꼬챙이로 찔러 죽이기 전에도 기체릿은 지금처럼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디서 반푼이 바보를 데려와서.』
『반박은 못 하겠네요, 듣자하니 아명이 머저리래요.』
『도대체 어디서 저런 걸 찾아낸 거야.』
『보만 지역으로 제대로 죽지 않은 것들이 갑자기 나타났죠. 그때 몰살당할 위기에 처한 마을에서 제 혼자 어슬렁거리는 걸 발견, 리어 대장님이 주워서 옆구리에 끼고 가져왔습니다. 보만이 어딘고 하면... 어디 보자. 아만스 셋목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터날 산맥으로 가로막힌 지역입니다. 맨우드 분지령과 거진 경계지점이에요. 거기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면 펜타후스 강이 나오고...』
『됐어, 거기까지.』
서둘러 말꼬리를 잘랐다. 아니면 지리멸렬한 지리 강의가 이어졌을 거다.
『보만이 어딘지 짐작이 가십니까, 소공자님?』
『보만이 어디에 붙었는지 따위엔 관심 없다. 너는 그닥 중요하지 않은 정보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버릇이 있어, 기체릿.』
바꿔 말하면 정작 꼭 필요한 정보는 아무렇지도 않게 은근슬쩍 흘려버린다는 얘기다.
『제대로 죽지 않은 것들?』
민간에서는 통칭 마수라고 부르는 종류의 것들이다.
먼 옛날부터 내려온 이름은 고곽(故槨). 풀어쓰자면 「오래된 궤」다. 정확하게는 낡은 관에서 튀어나온 정체불명의 것들을 일컫는다. 이렇게 말하면 죽은 자나 짐승이 불결한 힘으로 무덤에서 되살아난 것들만 떠올리는데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관련 지식이 부족한 탓에 사람들은 고생종과 마수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다. 짝짓기를 통해 자손번식이 가능하면 고생종, 그렇지 않으면 마수라고 단순히 구분하는 경우도 있지만 괴물을 면전에 두고 「당신은 새끼를 낳습니까?」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건 드래곤과 같은 고생종이던 마수이던, 아무 때나 나타나는 종류는 아니라는 점이다.
『곰이나 대형 서격호 같은 맹수를 착각한 건 아니고?』
『곰은 일반 사냥꾼들도 제법 잘 잡습니다. 섬멸 기사단이 직접 나설 까닭이 없죠.』
놀라 자빠질 내용이었음에도 기체릿은 강으로 기다리던 연어가 돌아왔다는 투로 한가롭게 얘기했다.
매번 이런 식이다. 말하는 내용과 그 얼굴 표정의 괴리감.
『제기랄, 그게 진짜면 심각한 상황이잖아.』
『심각하죠.』
『심각하다면서 실실 웃나.』
『어쩌겠습니까. 저는 원래 이런 놈입니다, 소공자.』
일로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러니까 섬멸 기사단이 미친놈 기사단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거다.
『새삼 리어 기사단장이 존경스럽군. 저런 미친놈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끌고 다니다니. 아무튼.』
소공자는 두 팔을 활짝 펼쳐 허공에 고운 모래를 뿌리는 식의 동작을 해보였다.
섬멸 기사단에서는 그 동작을 가리켜 「창문을 활짝 연다」 라고 한다. 선대 위니악 공작의 독특한 버릇이었는데 맨날 보고 자란 탓인지 그게 손주에게까지 대물림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소공자의 형인 대공자 젬버른도 똑같은 손동작을 한다. 의미는 「잠깐 닥쳐봐, 내가 생각할 게 좀 있어」 이때 누군가 실수로 숨소리라도 내면 후환이 쬐~끔 두려워진다.
갑작스런 괴수의 등장. 습격으로 전멸당할 위기에 처한 마을. 고아가 된 아이.
분명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기체릿은 이 비극을 입에 담으면서 살인자가 남긴 한 방울의 핏자국처럼 묘한 내용 한 가지를 흘렸다.
『저 혼자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습격을 당한 마을은 분명 아수라장이었을 것이다.
개죽음 당할 것이 분명하기에 마수와 맞서 싸운다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었을 터.
마을 밖으로 멀리 도망가거나, 집안으로 숨거나, 아니면 보다 안전한 대피소를 찾아 피신했을 것이다.
이때 판자로 지은 움막에 숨는 것보다는 돌로 쌓아 만든 신전까지 도망치는 편이 생존율이 더 높다.
노인과 아이, 여자들은 망루의 종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아무런 망설임 없이 신전을 향해 뛰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어린아이가 부모와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가재도구고 뭐고 전부 버리고 도망 나온 부모들은 애들 손 또한 쉽게 놓아버린다. 뭐, 여기까지만 보자면 큰일이지만 어차피 가던 방향은 같다. 목적지인 대피소에 도착하고 난 뒤에 눈물의 이산가족 상봉을 하는 경우는 제법 흔해서 애고 어른이고 일단 한 방향으로 달리고 본다.
그런데.
『어째서 대피소로 가지 않은 거지.』
정원의 흙을 파헤치고 구운 콩을 심을 정도로 멍청하니까.
『부모는 죽었다며.』
피신처를 구해 신전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몰살당했다.
『그 와중에 저 혼자 어슬렁?』
대피소로 들어가지 않은 아이는 고곽에게 잡혀 산채로 뜯어 먹히지 않고 살아 남았다.
『이게 가능한 이야긴가.』
기체릿은 이렇다 할 얘기를 이어가는 대신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Posted by 미야